소설리스트

오륜기로 가버렷-256화 (256/401)

미녀와 로미오. 야수와 줄리엣 (5)

구마하가 남자 400m에서 새로이 기록을 갈아 치우는 시각.

최다빈과 최일묵 코치가 관중석 한쪽에서 시합을 지켜보고 있었다.

"45.99... 정말이지 재능 하나는 무시무시한 친구구나."

"저것도 베스트 아닐걸요? 아마 44초까지는 줄일 거예요."

"그러면 아시안 게임이 아니라, 올림픽도 볼 수 있을 건데?"

"그렇겠죠. 절대 이동민 같은 애한테 질 애가 아니라고요."

몇 안 되는 관중들이 수군수군거리고 있을 때, 최다빈은 콧김을 내쉬며 당연한 결과라는 듯 운동장을 바라보며 말했다.

"한심하게...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시합을 진지하게 해야지."

"글쎄다. 이렇게 보면 어제 그제는 오늘을 위해 힘을 아꼈다고밖에 안 보이는데."

"쟤 원래 400은 힘들어서 못 뛰겠다고 했었는데."

"그랬었어?"

"네. 쟤 400 뛰면 단거리도 중거리도 못 하겠다고 다 포기했었어요."

"난 애초에 단거리랑 중거리를 다 뛴다는 자체가 더 말이 안 되는 거 같은데..."

그렇게 2006 국가 대표 선발전, 남자부 단거리 우승자들이 결정되었다.

100m 전주 시청 이동민. 200m S생명 김진수. 400m 연세대 구마하. 마지막으로 팀 계주에서 1학년 권지성이 포함된 대한 체대가 금메달을 목에 건다.

최다빈도 결과를 보며 느긋이 말했다.

"결국. 회장님 말씀대로 됐네요."

"이동민은 의외였지만, 저 친구들이 지금 한국에서 젤 빠른 애들인 건 기정사실이었으니까. 의외의 결과라고 하긴 어렵지."

"이동민... 하. 뭐 하고 있는 거야..."

"넌 그 친구랑은 별로 사이가 안 좋니?"

"딱히... 별로 두드러지는 애가 아니었거든요."

"개천에서 나온 용이라는 건가."

"용은 무슨. 미꾸라지 정도 되겠죠."

"하하하! 다빈아. 말이 너무 심한 거 아니니?"

최다빈이 무표정하게 경기장 한쪽에 시상식을 준비하는 사람들을 지켜본다.

"어디 보니?"

"그냥. 어제 오랜만에 상 받은 거 생각나서요."

"잘했어. 우리도 기자들 더 부를 걸 그랬나?"

"뭐. 굳이..."

"그래. 뭐 굳이. 선발전 가지고."

"..."

"슬슬 일어나야겠다. 삼촌도 오늘 중요한 회의가 있어서."

"삼촌. 전 그럼 대표 팀 된 거 맞아요?"

"당연하지. 넌 7종 우승자야."

"특별한 거 아니잖아요. 어차피 나 아니어도, 그동안 누구든 우승하고 있었을 건데."

"지금은 상황이 달라. 그 선수들은 메이저 대회를 못 나갔고, 넌 나갈 수 있으니까."

"...쟤 진짜로 감독 맡는 것도 맞고요?"

"음. 대체 무슨 마술을 쓰는지 다들 궁금해서라도 지도자로 세워야겠다고."

"알았어요. 들어가세요."

"그래. 연락하마."

"저. 삼촌."

"응?"

"...어제 마하가 전화해서 뭐라고 해요?"

"하하! 별말 안 했어. 니가 한번 걸어 봐."

"됐어요. 별로 신경 안 써요."

"고집부리지 말고 이 녀석아."

"진짜 괜찮다니깐요."

최일묵이 씩 웃으며 조카 딸의 머리를 벅벅 쓰다듬었다.

일전에 둘이 만났다는 사실을 알았을 땐 놀랐었지만, 그 감정이 진심이라는 걸 알았을 땐 꽤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젊은 애들이니 그럴 수도 있겠지만, 아직 마음이 남아 있는 건가?

"어이그 이 녀석."

"아. 삼촌. 머리 만지지 말라니까..."

"다빈아. 넌 마하보다 더 위대한 선수가 될 거야."

"진짜요?"

"그럼 인마. 아무튼 가서 쉬어. 그동안 고생했다. 엄마한테 데 리러 오라고 할 거니?"

"혼자 가도 돼요. 집 바로 앞인데 뭐."

밤 7시. 모든 일정을 마치고 사람들이 빠진 잠실 운동장.

최일묵 코치를 비롯하여, 새롭게 물갈이된 육상 연맹 핵심 관계 자들이 운동장 대회의실에 모였다.

"재밌는 경기였어요. 기록도 많이 바뀌고."

"선수들도 잠실에서 뛴다니까 의욕적으로 나선 거 같아요."

"언론도 관심 많았고. 아주 대성황입니다. 앞으로 매년 선발전은 잠실에서 하는 것도 좋을 거 같아요."

앞서 통보받은 대로 구마하도 회의실 한쪽에 앉아 있었다.

그는 어른들을 보며 속으로 쓴웃음을 삼켰다.

몇 사람의 고집스러운 희생 끝에 열린 선수 선발전인데... 다들 과정보단 결과에 치중하는 시선을 보여 주는구나.

이게 우리 체육계의 민낯이겠지 뭐.

"회장님 들어오십니다."

다들 우르르 일어나 박문기 회장을 향해 박수를 쳐 준다.

구마하도 한쪽에서 무리를 따라 행동했다.

"아이고. 다들 고생하셨습니다."

"회장님. 아주 성공적인 대회였습니다."

"하하하~ 내가 한 거 있나요. 여러분들이 고생하셨지."

흘려. 신경 쓸 거 없어. 이분들도 다들 사회생활하고 계시는 거니까.

어쨌든 결정권자는 이 사람이니까. 신경 쓸 거 없어.

대수롭지 않고. 느긋하게 분위기를 어울려 주고 있는 구마하에게 박문기가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우승 축하한다."

"네. 고맙습니다."

"이 녀석아. 난 너가 일부러 친구들이라고 져 주는 줄 알았어.

하하!"

하하하... 설마 했지만, 이렇게까지 무신경한 사람일 줄이야...

시합을 뛰었던 선수들의 심리를 조금이라도 이해한다면, 인터넷에서나 떠드는 개소리를 모두가 있는 자리에서 떠들 순 없겠지.

"자자. 그만들 하고 빨리 앉아서 다음을 이야기합시다."

이제 드디어 선수 선발에 관한 중요한 회의가 시작된다.

모두의 앞에 연맹에서 준비한 선수 리스트가 준비되었다.

"일단 쭉 훑어보고. 이야기해 보죠."

"예! 회장님."

"마하도. 어서 봐 봐라."

"네."

육상이란 카테고리 안에서만 종목이 스무 개가 넘는다.

그것을 다시 남녀로 구분하고 세부 종목을 더하면 메달만 자그마치 40여 개에 달한다.

대체 누구를 뽑아 놨을까?

그 많은 종목에서 모든 선수들의 역량을 구분하여 메달권을 가린다는 기준을 어떻게 정했을까.

구마하는 그 어느 순간보다 집중된 시각으로 선수 리스트를 훑어보는데.

"어..."

구마하는 할 말을 잃는다.

동민이나 진수는 있다.

진운이는...? 진운이도 있다.

전체적으론 전년도 세계 선수권 참가 선수들이 기본을 이루고 있지만, 그 가운데서도 몇몇은 빠져 있었다.

대충 선발전 우승자들에 명성 있는 선수들이 기용된 느낌을 강하게 받는다.

회의실에 자리한 다른 사람들도 이와 같은 상황에 질문을 던져 본다.

"회장님. 지난 아시안 게임에 비교하면 선수단 규모가 작아진 거 같습니다."

"아는 사람들은 알고 있겠지만, 그동안 연맹이 너무 방만한 운영을 거듭해 왔어요. 그래서 이제는 선택과 집중의 시간이란 의미로."

"저... 회장님."

"어. 그래. 마하. 얘기해라."

"...저 여기에 보면 여자 원반이나 세단뛰기 같은 경기는, 아예 그 종목이 안 들어가 있는데요?"

"음. 그래. 빠진 경기가 몇몇 있어."

"저... 회장님. 저도 남자 창던지기가 안 보이는 거 같은데요."

"아쉬워도 없는 건 없는 겁니다. 그렇게 받아들이세요."

씨발 것. 이게 무슨 회의라고...

"저. 회장님. 그래도 종목 자체를 삭제하는 건... 조금 너무하신 거 같은데요."

"말했잖아. 선택과 집중이라고."

조용히 지나가면 그만인 상황이지만, 구마하는 마음속에 반항심이 꿈틀거린다.

대체 어떤 기준이 작용했길래, IOC와 IAAF에서 지정하고, 고대 그리스부터 이어져 온 원반과 창던지기가 사라진 것이냐.

"마하야. 할 말 있으면 분명하게 해라. 그렇게 불만스럽게 보지 말고."

"아니요. 근데, 이런 건..."

"저기. 마하야."

"네."

아테네 때부터 인사하고 지내 왔던 한 연맹 고위 관계자가 대신 말해 준다.

"너도 기억하다시피, 국제 대회라고 모두가 참가하고 그랬던건 아니었어. 너무 그렇게 나쁘게 볼 거 없다."

"그래요. 우리만 이러는 거 아니고, 세계 각 나라를 가도 전 종목에 선수단을 파견하지는 않습니다. 미국 같은 나라 아니고서야."

"아니 그치만. 이건 올림픽이 아니라 아시안 게임이잖아요...

그런 대회에서도 선수단을 운영하지 않는다면, 나라에서 그 종목자체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뜻인데."

"사회라는 게, 어쩔 수 없는 부분도 있는 거니까."

그런 게 있는 건 알고 있지만. 그래도 누군가는 자기가 하는 종목으로 우승도 하고 메달도 따고 싶다는 생각으로 열심히 하고 있을 건데...

이래서 선수들이 연맹이란 파워에 거스를 수가 없는 거구나.

경기 자체를 지워 버려도 뭐라 할 말이 없으니까.

"자. 그럼 그렇게 알고. 이렇게 진행하겠습니다. 회장님."

"음."

"잠시만요."

"..."

박문기를 제외하곤 거진 다 운동하던 사람들이었다.

어른이 말하는데, 젊은 애가 나서서 말을 끊는다는 건 그들의 인내심에 작은 균열을 일으킨다.

"또 뭐. 아직 더 할 말 있나?"

"...여자 7종은 왜 들어가 있죠?"

그러자 몇몇 사람이 박문기 회장과 가까이 앉아 있는 최일묵 코치를 슥 돌아본다.

구마하도 주변을 살피는 척, 최일묵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거야 당연히 성적이 좋으니까."

"저. 제가 팀 감독 맡는 거 맞죠?"

"...왜 그러는데?"

"밖에 사무실 지금 아직 사람 있나요? 누가 부산 아시안 게임여자 7종 결과 프린트 좀 가져다주세요."

박문기의 표정이 변하는 순간, 최일묵이 앞으로 나섰다.

"마하야. 비교해서 뭐 어쩌려고?"

"그리고 부탁드립니다. 앞으론 이름으로 호명하지 말아 주세요. 팀 감독인데, 자꾸 그렇게 학생 대하듯 대하시면, 저도 다른 선수들한테 지도가 어렵습니다."

"...구 감독이면 될까?"

"네. 고맙습니다."

언급을 안 할 뿐이지, 다들 구마하가 있었기에 이번 선발전이 열릴 수 있었다는 걸 알고 있다.

그리고 그 감정은 박 회장과 대립을 이뤘고. 천병욱 코치의 건강상 은퇴라는 결과를 불러일으켰다.

즉, 지금 이 자리서 구마하는 혼자다.

천병욱은 물러났고, 이두희 전 감독도 일선에서 빠졌으며. 이현석 교수는 애초에 파워가 없어 회의 석상에 들어오지도 못했다.

한상률 감독은 원래 개인으로 노니까 신경 쓸 이유가 없다.

그의 행동은 독단적으로 보인다.

순응하지 않는 개인의 일탈로 비춰질 뿐이다.

마치, 자기가 제일 잘났고 잘하니까 그래도 된다는 식으로.

"좋아. 구 감독. 그 말도 맞지. 나도 앞으로 널 그렇게 부르마."

"네. 회장님. 고맙습니다."

"이봐 구 감독. 지금 뭐 하는 건가?"

"...뭘 말씀이시죠?"

"아직 회의 시작도 안 했어. 근데 왜 선수 선발에 이렇게 딴지를 거는 거야."

"회장님. 이건 딴지가 아니라요. 기준이 뭐냐는 거죠."

"니 녀석이 실력으로 사람들 뽑으라며?"

"그래서 선발전이 열렸고. 거기서 우승을 했습니다. 그럼 적어도 태릉까지는 들어와야죠."

"태릉에 자리가 어딨냐고. 기껏 다른 종목한테서 자리 뺏어서 방 잡고 있던 거, 사람들 빼 간 건 구 감독이잖아."

"..."

"이봐 최 코치. 당신이 얘기해."

"네. 회장님. 흠. 구 감독 잘 들어. 구 감독도 잠깐 머물러서 알겠지만, 태릉이 우리나라 선수단 전부를 수용할 여력이 안 돼."

"알고 있습니다."

"이건 역량의 문제가 아니야. 시설적 문제라고. 근데 지금 구감독이 말한 대로 모든 육상 경기, 모든 선수 다 긁어모으면, 다른 종목은 뭐? 손 빨고 있으라고? 우리가 육상 연맹이지, 대한 체육회가 아니잖아."

어른들의 주장도 일리는 있었다.

태릉 선수촌은 과거의 유산인 만큼, 보기와 다르게 빡빡하고 좁고 부대끼느라 운동이 잘 안 되는 부분도 있긴 하다.

"안 그래도, 구 감독이 지금 언급한 대로 정부에서도 태릉 운영에 애로 사항이 많다는 걸 인지하고 진천 쪽에 새로이 선수촌을 건설하려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여기 몇 분은 나중에 대한 체육회랑 만나서 우리 육상 선수들을 위한 시설도 더 확충하고 준비해 달란 의견 준비하시고."

다시 회의가 시작되었다.

구마하도 선수 리스트에 적힌 7종 선수의 이름을 쳐다본다.

후보도 없다. 단일 선수로 최다빈의 이름만 적혀 있었다.

소속된 팀도 없고, 대학도 아닌 개인 자격.

물론, 개인이 선발전 나온다고 문제 될 건 없지만...

사람들은 구마하와 다른 선수들의 관계를 알고 인터넷에 글을 올리고 있다.

다빈이와의 관계가 밝혀지는 것도 시간문제라고 보이는데.

선수 선발이 명확하고 투명한 기준이 있었다면, 혹시나 모를 불상사를 막을 수 있을 건데. 이건 누가 보더라도 박문기 개인 자격으로 7종이란 경기를 욱여넣었다고밖에 보이질 않으니...

"구 감독."

"네?"

"어때. 계주는 이렇게 가면 되겠어?"

"계주요?"

"힘들지? 삼 일 연속으로 뛰고 회의까지 나오려면 힘들긴 할 거야."

"죄송합니다. 집중하겠습니다."

그래서 다시 계주 팀을 살펴보는데. 와... 이거. 돗자리 깔아야 하나...

"...권지성이 빠졌네요?"

당연히 있으리라 생각한 멤버가 리스트에 없으니, 그건 그거대로 당황스러운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그에 대해서도 연맹은 나름의 이야기를 준비하고 있었다.

"시니어 첫 출전인 만큼 아직은 준비가 덜 됐다는 판단이 들어서."

"권지성은... 9초를 뛰는데요?"

"..."

"대체 무슨 준비가 더 필요한 겁니까? 아니. 기준이 뭐냐고요.

우승 자격이에요? 그럼 우승한 사람들은 다 데리고 가야죠. 거기서 빠지는 건 또 뭔데요?"

어젯밤 진수와 잠들기 전까지, 그러지 않겠냐? 에이 설마 그럴까? 했던 일들이 순차적으로 벌어지고 있었다.

그 순간, 한상률의 목소리가 그의 가슴 안에서 울려 퍼졌다.

"죄송합니다. 전 이런 대표 팀은 도저히..."

드르륵 의자를 박차고 일어난 구마하.

그가 모두를 보며 선포한다.

"감독직 맡기로 한 거 없던 일로 해 주세요."

"이봐. 구 감독?"

"마하햐? 뭐 하는 거야 이 녀석아. 어서 앉아."

"아 선생님. 이건 아니죠."

친분 있고 가까웠던 어른들이 달래 보지만, 그는 단호했다.

"가겠습니다. 선발전이 적용된 것도 아니고. 기준이 뭔지도 모를 이런 대회. 이런 팀. 저는 도저히 못 하겠습니다."

"권지성과 가까워서 그런가?"

"네?"

"그럼 자네 권한으로 넣어. 그 선수를."

"...저기 최 코치님."

"하. 하하... 그래. 왜?"

"제가 친분으로 지성이를 넣으려는 게 아니잖아요. 여기 지성이 말고 대신 들어간, 한영진이란 이분. 이 형님. 맨날 부상으로 큰 국제 대회 때마다 빠지고 뭐 하고 하는 분 아니신가요?"

"영진이는 구 감독 이전에 한국 육상 팀 에이스로 활약해 온 선수야. 기록도 자네들한테 그렇게 뒤처지지 않고."

"시합도 못 뛰는 선수는 왜 그렇게 기용하시는 겁니까? 대한 체대라서요?"

"이봐. 말조심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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