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륜기로 가버렷-253화 (253/401)

미녀와 로미오. 야수와 줄리엣 (2)

"저기. 마하 씨?"

"..."

"형. 마하 형?"

"......"

"형!!"

"어...? 어. 왜?"

"뭐 해요? 시합 안 뛸 거야?"

코너를 돌아야 하는 200m 경기는 각자 위치를 찾아가야 하는 데, 멍 때리느라 내 위치를 못 찾아가고 있었다.

지성이랑 한 조에 있다 보니 그냥 애만 졸졸 따라가고 있었는가 보다.

"어. 준비해야 되는구나."

"왜 이래? 형 설마 오늘도...?"

"아니. 그런 건 아닌데."

운영 측에서도 다가와 물어보았다.

"구마하 선수 왜 그래요?"

"네? 아 죄송해요. 잠시 멍때리고 있었어요."

"기권하는 거 아니죠? 아니면 어디 문제라도?"

"괜찮습니다. 정말 괜찮아요. 죄송합니다. 요즘 생각이 많아서."

지성이도 어깨를 두드려 주며 걱정하지 말라는 뜻을 전해 주었다.

"하필 내가 8번이냐... 젤 멀게."

"뛰면 다 똑같지 뭐."

"..."

"형 진짜 괜찮은 거 맞죠?"

"어. 괜찮아."

지성아. 나 방금 시합하러 오다가 다빈이 봤다.

그 말을 전해 주고 싶었는데, 얘도 시합을 앞두고 있어서 일단 말은 삼킨다.

"아 왜 이렇게 집중이 안 되냐..."

"뭔데요? 또 연맹에서 뭐라고 해?"

"아니. 그런 건 아니고..."

시합을 마치고, 지성이랑 둘이 관중석으로 올라왔다.

다다음 조 선수들까지 경기 보고 들어가자고 둘이 있는데, 애가 조심히 보면서 묻는다.

"뭔데. 말을 해 보든가. 혼자 그러고 있지 말고."

"너도 이제 말 놓는구나. 좋다. 계속 그렇게 편하게 하자."

"아 형."

"다빈이 봤어."

"네?"

"다빈이. 최다빈. 너랑 친하잖아."

"...다빈이 누나가 여길 왔어요?"

"온 게 아냐. 심지어 경기를 뛰고 있어."

"어? 나 그 누나 어제도 그렇고 못 봤는데?"

"7종..."

"예? 뭐요?"

"7종 경기. 헤파트론. 복합 경기를 뛰고 있었어."

지성이도 운동장 이곳저곳을 쭉 둘러본 뒤 고개를 돌린다.

"다빈이 누나가요? 그 체격에?"

"..."

"아. 아무튼, 정신 좀 잡고 있어요. 나 오늘 형들 다 이기려고 제대로 각 잡고 왔는데. 이런 식이면 진짜 이겨도 이기는 거 같지도 않고."

진짜로 이러면 안 되는데.

어제는 박문기 회장에 오늘은 다빈이에...

어떻게 국내 경기가 외국 애들이랑 뛸 때보다 더 어렵냐...

* * *

"헉! 헉!"

"후우 후우."

"하아- 하- 기록은...?"

19초 68. 내가 2년 전 아테네 때 세운 올림픽 기록이 한국 대표 팀 최고 기록이었다.

그걸 오늘 진수가 19초 65로 0.03초 줄였다.

"으아악! 마하야!!!"

어제는 동민이에 오늘은 진수.

새끼들 이겼으면 이긴 대로 그냥 갈 것이지... 왜 진 사람한테 와서 안고 뛰고 지랄들인지...

"아 놔! 더워 땀 나."

"후우. 와 씨... 나 진짜 욕 안 하는데."

그 와중에도 지성이는 차분하게 전광판을 보면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후우."

"잘했어. 원래 너 주종은 100미터잖아."

"아 나도 몸을 더 키워야 하나...?"

"우리 학교 1년 후배가 너보고 그러더라. 남자 친구 했을 때 가장 부담 없고 딱 좋은 몸이라고."

"몰라. 누군지도 모르고. 관심도 없어요."

"선영이라고 하는데, 애 귀여워 세단 뛰기 선수야."

"관심 없다고."

나는 2위. 지성이는 5위.

다들 만족할 만한 결과를 안고 이튿날 시합을 마친 뒤 동민이 곁으로 모였다.

"우와. 라이트 켜 준다."

"켜야지. 오늘 진운이는 1,500까지 다 끝낸다더라."

"하루에 800 뛰고, 1,500까지 하려면 진짜 피곤하겠다..."

"어쩔 수 없어. 이 큰 운동장을 며칠씩 빌리는 것도 아니고."

내일이면 선수 선발전도 끝난다.

나는 400 경기가 남았고, 진수와 지성이는 팀 계주가 있다.

"근데 너 왜 연세대 계주 안 나가?"

"따로 호흡 맞춘 것도 아니고. 중간에 끼어들어 가는 것도 이상 하잖아. 선수들은 다 있는데."

"이 새끼 은근 배려심 있어."

"이건 배려가 아니라 병신아. 개념이라고 하는 거야."

넷이 진운이 경기 구경하면서 기다리고 있는데, 필드에 여자 창대 선수들이 자리를 잡는다.

그 모습을 보며, 오전에 나랑 동민이가 했던 말을 진수와 지성이도 똑같이 꺼내고 있다.

"여자 창 던지기 어제 하지 않았어?"

"복합. 복합 경기."

"아아~ 7종인가 그거?"

"진짜 마하 형. 다빈이 누나 얘기 좀 해 봐요."

"어? 너 다빈이 만났어?"

"진짜. 최다빈? 걔 여기 왔어??"

"...온 게 아니라. 선수로 뛰고 있어."

"그래? 나 못 봤는데."

"그러니까. 우리 회사 누나들 다빈이 모르던데?"

"단거리가 아니니까 그러지."

손을 들어 운동장을 가리켰다.

동민이나 진수는 잘 못 알아보고 그나마, 어릴 때부터 친했던지성이가 가장 빨리 눈치챈다.

"아. 머리 잘랐구나."

"어어~ 그러네. 진짜 최다빈이네."

"와~ 7종을 한다고? 쟤가?"

"저기 하네... 던질 준비 하고 있고."

보기 전에는 못 믿었는데, 진짜로 다빈이가 자기 순서가 오자

"합!"

짧은 기합을 지르며 달려가 창을 던졌다.

"우와아!!"

"오~ 자세 깔끔하다."

"와 누나. 대체 저런 건 언제?"

"저거 때문에 유학 간 건가...?"

힘은 몸무게와 비례한다. 그리고 다빈이는 결코 큰 체형이 아니다.

심지어 164cm인 혜정이보다도 작다. 160 정도 되려나?

저 작은 몸에서 무슨 힘이 있다고 저 길고 무거운 걸 던진다고.

"그럼 포환도 한 거야?"

"다빈이 누나 지구력 안 좋은데... 7종이면 800m도 있지 않나?"

"우와~ 최다빈. 대단하네."

"...동민아. 너 허들 했잖아."

"했지."

"그거 많이 다치지 않냐?"

"존나 다치지. 그리고 뭣보다 다리가 길고 키가 커야 돼."

7종이 나쁘다는 게 아니야.

하지만 다빈이 몸으로 하기엔 너무 어려운 종목이라고.

가뜩이나 근육도 없어서 맨날 뭐만 하면 부상에 시달리던 애가 이 어려운 걸...

"야!! 니네 뭐 해?"

그 사이 시합을 마친 진운이가 운동장에서 관중석에 있는 우리를 향해 목소리를 높인다.

"너 끝났어?"

"언제 끝났는데!!"

"어. 이겼냐?"

"아 이 씨! 진짜. 니네들!!"

남자 800미터 경기를 마치고 여자 800미터 경기가 이어졌다.

그리고 뒤이어 7종경기 여자 선수들의 경기도 진행됐다.

"마하야 중거리는 무슨 느낌이야?"

"두 바퀴. 그냥 존나 빠르게 뛰는 느낌."

"새끼야 그렇게 말하면 우리가 아냐!!"

"하하하. 진짜 이 형... 운동 잘하는 거 보면 신기해."

친구들은 800미터 선수를 했던 나에게 단거리 선수가 중거리 뛰면 무슨 기분이냐고 하는데.

그냥 어렵다.

원래 한 종목에 다른 걸 더한다는 건 쉬운 이야기가 아니다.

나야 운동 초보였고. 그래도 400m보다는 덜 힘드니까, 그냥 새로 배우자 하는 마음으로 시작해서 됐지.

"지성아."

"네. 형."

"왜 존대 쓰냐? 우리 말 놓기로 한 거 아녔어?"

"그냥 하려던 말이나 해요."

다빈이는 언제부터 운동했느냐 그걸 물었다.

초등학교 4학년부터란다.

11살이라. 10년이구나.

우리 몸은 쓰임에 맞게 단련이 된다.

그리고 시간에 맞춰 근력이 굳는다.

10년을 단거리 선수로. 그것도 나중엔 부상으로 몸이 안 좋아 계주 선수만 하던 애가 대체 무슨 깡으로 악으로 저 어려운 복합 경기 선수가 됐는지...

헤파트론 선수들의 800미터 시합이 시작됐다.

선수들이 줄지어 달려오는 모습에 친구들이 호들갑스레 물어본다.

"야. 온다. 응원해도 되냐?"

"마하야. 해도 돼?"

"왜 나한테 묻고 지랄들이야. 니네가 하고 싶으면 해."

"형 여자 친구였으니까 그러죠."

"깨진 게 언젠데..."

한 바퀴는 그냥 흘러갔다.

그 와중에 동민이가 멀어지는 선수들을 향해 큰 소리를 쳐 주는데.

"최다빈 파이팅!!!"

다빈이가 아까 했던 말이 생각난다.

이동민한테 져? 뭐 하는 거냐고?

뭐 하긴 뭐 해. 내가 뭐 뻘짓했어. 실력으로 졌지.

"되게 힘든가 보다."

"힘들겠지. 7경기를 뛰었다는 거 아냐."

"누나 대단하네. 전화번호 그대론가?"

"...지성아 나도 다빈이 번호 좀."

"형 누나 번호 지웠어요?"

"핸드폰이 바뀌었을 뿐이야. 번호 좀 알려 줘 봐."

* * *

"나 뛸 때 다빈이가 옆에서 창 던지고 있었다고??"

"그래! 그래서 우리가 니 경기를 못 봤지. 괜히 쌩까고 있던 게 아니라니까."

"...그래도 야 씨 그건 구분을 해야지."

이튿날 시합을 마치고 다들 잠실 인근, 신천에 모였다.

"얘들아. 잠깐만. 나 통화 좀 하고 올게."

"아냐. 우리도 갈 거야."

"그래. 슬슬 일어나자. 애들 내일도 시합 있는데."

"잠깐만 있어 봐. 할 얘기가 있으니까."

대표 팀에 대해서 무슨 일이 닥치더라도 흔들리지 말자는 이야기를 전해 주고 싶었다.

근데, 그 일에 앞서 다빈이가 신경이 쓰여, 작은 일 먼저 끝내기로 하고 밖으로 나왔다.

"그래. 이 번호다. 기억나."

뚜르르르~ 핸드폰 신호음을 들으며 다빈이를 만나던 시절을 떠올려 본다.

"...엄청났었지."

외국 가서 갱뱅까지 해 본 나지만, 아직도 그 시절 최다빈 성욕을 넘어서는 상대는 보지 못했다.

그 작은 몸에 어찌나 강한 욕망이 있던지...

형이 말리지 않았으면 진짜 정기를 다 빨렸을 거야.

우리는 그렇게 헤어졌다.

사람이 싫은 건 아니었다.

다만, 서로가 이어질 상황이 아니었던 거지.

지금이라면 또 몰라.

지금은 예전보다 운기조식도 잘 운용되고 내공 외공이 안정되어 있으니까.

짧지만 좋아했던 친구였다.

무엇보다 첫 여자 친구다.

혜정이랑은 다르지만, 추억이 있고 감정이 남아 있다.

다른 걸 떠나서 걱정이 들었다.

"안 받네. 모르는 번호라 그런가?"

지성이한테 받은 번호로 전화를 걸었는데 받질 않길래 문자를 남겨 놓았다.

[다빈아. 나 마한데, 이거 내 번호야. 시간 될 때 전화해 줘.]

메시지는 남겼고, 이제 돌아가서 애들이랑 대표 팀이라는 묵직한 주제를 나눠 볼까 하는데.

"어. 전화가."

문자를 봤는가, 애한테서 바로 연락이 들어왔다.

아까 스쳐 가며 마주쳤던 다빈이의 날 선 반응이 가슴에 걸리지만.

지금은 다 잊고 무조건 반가운 목소리로 전화기를 귀에 가져다 댔는데.

"..."

"마하야?"

"어... 누구..."

"나 최 코치다."

"최. 최일묵 코치님이요?"

"응 그래. 지금 다빈이한테 전화한 거지?"

"네. 맞습니다."

잠깐만. 왜 최 코치님이 다빈이 전화를...? 그것도 시합 다 끝난 이런 늦은 시간에??

당황해서 말문이 막히고 있으니 최 코치님이 먼저 말씀하셨다.

"내 조카야. 이상한 생각하지 말고."

"아 하하하~ 아아~ 아 그러셨어요. 처음 들었어요."

그래그래 기억난다. 둘이 막 섹스하고 가족 이야기하다가 그런 얘기를 했던 게 얼핏 기억나. 집안 어른 중에 운동하시는 분이 계셔서 육상 시작했다고 그랬지. 그게 최 코치님이셨구나.

"아. 저 코치님. 다른 게 아니라, 오늘 다빈이 봐서 반가워 가지고."

"둘이 친구라곤 들었다."

"네. 저 잠깐 인사 좀 할 수 있을까요?"

"다빈이 지금 회장님이랑 식사 중인데."

"...네???"

"박문기 회장님. 식사 중이라 내가 핸드폰 가지고 있다. 나중에 따로 연락 주라고 할게."

"아... 저. 어... 네. 알겠습니다."

통화를 마치고 잠시 고민하다 다시 핸드폰을 들었다.

"네. 교수님."

"어. 집에 도착했냐?"

"아니요. 저 오늘 그냥 애들이랑 잠실에서 호텔 잡고 쉬려고 했는데요."

"돈 아껴 이놈아. 잘나간다고."

"하하... 저 교수님. 뭐 하나 여쭤봐도 될까요?"

"응. 얘기해."

최일묵 코치님 아시냐고 물으니 당연히 알고 있다고 하신다.

"저. 근데, 코치님이..."

"어. 최 코치 왜?"

"그... 이런 거 맞는지 모르겠는데... 그. 그러니까."

"뭐? 얘기해 봐 뭔데?"

에이 씨 모르겠다. 그냥 말하자. 친한 사람도 아니고 뭐 어때.

"최 코치님이 혹시. 회장님 사람인가요?"

"그래. 맞다. 선생님 나가시고 지금 실질적인 연맹 수뇌부라고 할 수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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