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륜기로 가버렷-241화 (241/401)

< 내일은 좋은 일이 생기면 좋겠어 (2) >

"그래서 혜정이는 뭐래?"

"그냥 가겠다는 거 겨우 붙잡았지..."

"하하! 고생했겠네."

"웃고 지랄이야 죽여버릴라... 웃지 말고 새끼야. 그래서 너 지금 어딘데?"

"대전 지나고 있어. 잘하면 니네랑 비슷하게 도착할 수도 있겠다."

"뭐야 근데 너 목소리 왜 이래?"

"피곤해... 아 죽겠다."

"미친년아 졸음운전 하지 마."

"괜찮아. 방금 금강 지나면서 커피 샀어."

"천천히 와. 이제와서 뭐 쟤도 돌아간다고 하겠냐?"

"알았어. 가고 있어."

날씨는 완연한 여름인데 마음은 착잡하다.

우리는 5월 말 체코 오스트라바. 6월 노르웨이 비슬렛. 그리고 영국 브리티쉬 그랑프리 세 개 대회를 마치고 돌아왔다.

나는 귀국과 동시에 가방을 던져놓고 친구들을 보러가는 길이다.

명목상 어떤 팀 감독같은 입장으로 세 번의 국제대회를 치르고 왔는데, 뭔가 내가 알던 가치관과 세계가 완전히 사라진 기분이었다.

어디든 마음 풀 곳이 필요할 때 생각난 것이 혜정이 얼굴이었다.

빨리 애들 보고싶은 마음에 정처 없이 운전대를 잡고 있는데 또다시 전화가 들어온다.

"어... 동민아. 왜?"

"너 어디냐?"

"나 오늘부터 쉰다고 했잖아."

"야. 이러고 그냥 가버리면 어떡하라고?"

"이 씨발! 그럼 내가 뭐 어떡하라고!! 어!?"

"새끼 왜 흥분해서..."

"왜 다 나한테만 지랄인데!! 뭐 씨발 코치 이러니까 진짜 내가 대표팀 감독이라도 된 줄 아는 거야!!"

"알았다고 인마."

지긋지긋하다... 이래서 어른들이 감투를 꺼리고 있었구나. 정말 하루하루 온 몸으로 체감중이다...

"제발 이틀만 머리 좀 식히자... 아 진짜."

"알았어. 푹 쉬고 와."

"애들도... 야. 몰라. 일단 집으로 가든가. 다 꺼지라고 하든가..."

"뭘 또 그렇게까지 말하냐. 진수는 병원가서 진단 받아본다고 했으니까."

"꾀병이야. 새끼 내가 보면 모르나..."

"너도 너무 그러지 말고."

흥분상태로 운전대를 잡으니 속도에 한계를 모르겠다.

단숨에 고속도로를 주파해 친구들 있는 숙박 팬션에 도착하니, 정석이와 선아가 한가로이 나무그네를 타고 있다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와. 좋다. 평화롭네... 비꼬는 게 아니라, 그냥 운동과 거리가 있는 두 사람을 보는데 감정적으로 힐링이 된다.

"야 이 씨! 너 뭐야? 벌써 온 거야?"

"어. 비슷하게 도착 할 거 같다고 했잖아."

"그래도 미친놈아. 아까 대전이라면서??"

"그보다 혜정이는? 왜 둘만 있어?"

정석이가 건물 안쪽으로 슬쩍 시선을 돌렸다.

선아도 할 말 많다는 듯 인사도 전에 목소리부터 높였다.

"구마하! 너 이렇게 올 거면 우리랑 같이 움직이든가!!"

"미안. 일이 좀 남아서..."

"에이 선아야... 왜 이래."

"좀 놔 봐."

"혜정이 많이 화났어?"

"몰라! 니가 가서 얘기 해!!"

정석이까지 지 여자친구 찍어 누르며 빨리 피해가라고 눈짓을 주고있다.

"아 좀 놔 보라니까? 너 진짜 뭐야? 설명을 좀 해 봐. 둘이 싸운 것도 아니라며?"

"너. 우리 싸웠다고 했냐?"

"몰라 미친년아. 빨리 꺼져."

"아 넌 좀. 구마하 너 제대로 설명하고 가라. 진짜 정수 운동시켜준 거 고마워서 나섰지. 아니면 내가 내 친구 굳이 미움받으면서까지!"

"아이고. 둘이 결혼했냐? 시동생도 아니고 뭔 정수까지 나와..."

"야!!"

"어이. 구마! 선아한테 관심 끄고 빨리 가."

"알았어."

정석이 커플을 지나쳐 혜정이를 찾아갔다.

이혜정은 밖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든, 긴 머리를 휘날리며 널따란 창가에 앉아 경치를 보고 있었다.

"나 왔어."

"..."

무시한다. 고개도 돌리지 않는다.

그러나 창가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샴푸향기나 슬며시 전해지는 것만으로도 난 긴장되어 있던 스트레스가 사그라드는 걸 느낀다.

"컨셉이야? 그러고 있으니까 분위기는 좋네."

"말장난이 나오지..."

"뭐 좀 먹었어? 보니까 먹을 거 하나도 안 사온 거 같던데. 장보러 갈래?"

"진짜 지금 뭐 하자는 거야?"

싸늘한 목소리와 차가운 표정. 그제야 슥 고개를 돌려 얼굴을 보여주는데.

"뭔데? 니가 부르면 오고. 간다면 가고. 우리가 뭐 너 대기하고 있어야 되는 애들이야?"

애가 뭐라고 하는데 내 생각에 빠져 말이 귀에 들어오질 않는다.

역시 얘는 다른 어떤 누구도 대체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어.

존재만으로 날 버티게 해주는 뭔가 말 못 할 힘이 있다고.

혜정이를 마주하자 슬며시 미소가 지어졌다.

그런 나를 보자마자 저쪽은 미간을 찌푸리며 인상을 쓴다.

"왜 웃는데?"

"그냥. 좋아서."

"장난하냐...?"

아이고 서늘해라. 뭐 당연하다면 당연하겠지만.

"그냥 니가 전화를 안 받으니까. 애들한테 부탁을 한 거지."

"착각하지 마. 안 받아도 상관 없어. 우리 그럴 사이 아니잖아?"

"뭘 또 그럴 사이가 아냐. 우리면 충분히 가깝지."

"야. 구마하."

"보고 싶어서 그랬다. 너도 선아가 그러는데 맨날 서울만 있었다면서?"

"얘 진짜 웃기는 애네. 니가 뭔데 내 일정을 따지는데?"

두다다다다 서운했던 감정을 논리정연하게 쏘아대는 혜정이를 보고 있었다.

역시 있어. 얘한테는 다른 사람한테서는 느낄 수 없는 그 시작이라는 느낌이 있어.

초심이라고 해야되는 건지. 운동을 시작한 원동력이라고 할지...

"난 진짜로 니가 뭔가 좀 착각하고 있는 거 같은데..."

"바빴어."

"알어."

"뭘?"

"너 바쁜 거. 무슨 대회 나가셨더만?"

"어? 어떻게 아냐?"

"보기 싫어도 뉴스에 나오잖아. 메달도 따고 바쁘게 잘살고 있데."

"먼저 바람 맞힌 건 미안."

"뭐?"

"지난 달에 간다고 하고 안 간 거. 너 그거 때문에 더 화내는 거잖아."

"허..."

"여자랑 있었어. 어떻게 자리를 취소할 수가 없어가지고."

"허. 허허. 허허허..."

"아무튼, 왔으니까 재밌게 놀다 가."

"야...? 너 지금 그걸 말이라고...?"

"뭐? 니가 먼저 화상채팅 할 때 나한테 그랬잖아. 나 하고 싶은 거 하고 살라며?"

속이 터지려는지 혜정이가 가슴을 막 퍽퍽 두드리고 있다.

"그건 그런 뜻이."

"정석이랑 나갔다 올 게. 먹고 싶은 거 있으면 얘기 해. 사올테니까."

"넌 사람을 여기까지 불러놓고 니 할 말만 하면 그만이냐?"

"지금만 보고 갈 거 아니잖아. 그리고 나도 더 퍼지기 전에 빨리 운전하고 오려고 그래. 쟤 면허 없잖아."

"니가 뭐가 힘든데...?"

"난 힘든 것도 없는 놈인 줄 아나."

"그러니까 뭐가?"

"다. 사람, 운동. 여자. 그냥 다. 다 때려치고 싶어."

그러자 이혜정의 목소리가 살짝 누그러져서 돌아온다.

"...그게 무슨 소리야?"

"장 보고 올게. 나와 있어. 밖에 그늘져서 시원하더라"

그렇게 말하고 정석이와 둘이 나왔다.

마트에 들려 이것저것 담는데 이놈도 계속 옆에서 눈치를 본다.

"씨발년 인상 좆같은 거 봐라. 눈깔에 힘 안 빼지?"

"시비걸지 마라. 싸울 기운도 없다."

"뭐? 왜? 잘 나가는 새끼가? 이번에도 메달 따고 룰루랄라 했으면서."

"후우... 아 몰라. 그냥 다 지겨워."

"음? 정수는 니네 사람 늘어나고 존나 잘 지내고 있다고 하던데?"

"야. 정수 오디션 어떻게 됐냐?"

"떨어졌지. 걔가 붙겠냐?"

"다음엔 잘 되겠지."

"목소리에 진심을 담고 말을 하든가."

"아 몰라 피곤해... 다 담았냐? 빨리 가서 먹자."

고기에 야채 과자 아이스크림 쥬스 술. 과일 등등 기타등등 또 등등등. 눈에 보이는 건 다 집어서 장을 봐 왔다.

정석인 넷이서 이걸 어떻게 다 먹냐는데, 못 먹으면 버리고 가면 된다고 해주자.

"미친놈. 이거 진짜로 뭔가 삔또가 나갔는데?"

"후우..."

"야. 너 뭐야? 왜 이래? 차 좀 세워 봐."

"가자... 먹으면서 얘기해 줄 게. 밤은 길어..."

다시 숙소로 돌아와 저녁을 준비했다.

혜정이와 선아가 그네에 앉아 시큰둥거리며 정석이랑 떠드는데 장 봐 온 거 냉장고에 쑤셔넣고 멍때리는 중이다.

"아. 배고파. 요리해야지..."

스물 한 살. 자취경력 10년 고깃집 사장 동생에, 현직 고깃집 매니저가 있어 여자애들은 손에 물 묻힐 기회가 없다.

반찬을 마련해주니 하나 둘 접시에 담아가고, 정석이는 그릴에 불 피우고 고기를 굽기 시작했다.

혜정이와 선아가 왔다갔다 하는데, 난 주방에 붙어 밥솥 숫자만 넘어가길 기다린다.

그러다 갑자기 선아가 툭 치면서 물었다.

"뭐 더 가져갈 거 없어?"

"없어. 가 있어. 다 했어."

"너 아까 혜정이한테 뭐라고 한 거야?"

"별 말 안 했는데. 그냥 먼저 약속 어긴 거 미안하다고 사과했고."

"근데, 쟤 왜 이렇게 너 오고나서 계속 기 죽어있어?"

"기가 죽어? 이혜정이? 아닌 거 같은데?"

"...니네는 진짜 무슨 사이냐?"

"친구지 뭐."

"그럼 우리는 왜 오라고 한 거고?"

"너네도 친구고."

"니가 말하는 친구의 범위가 어디까진지를 모르겠다."

"선아야."

"왜?"

"진짜 남수네 헤어졌어?"

"몰라. 나와서 얘기해."

누가봐도 텐션이 떨어진 상태로 밥을 먹었다.

오죽하면 헛소리의 제왕 이정석이 여자애들 눈치를 살펴 나한테 쓴소리를 건넨다.

"아 이 새끼 진짜 밥맛 떨어지게... 야. 니가 오자고 했으면 분위기를 재미나게 해보든가. 왜 무게잡고 있는데?"

"어. 정석아 맛있다. 너 이제 진짜 가게 차려도 되겠다."

"와... 선아야 들었어? 얘 진짜 뭐 있네. 구마가 내가 구운 고기를 순순히 받아들인다고?"

혜정이도 걱정스레 물어본다.

"뭔데? 말을 해 봐."

"아니 그냥..."

"답답하게 굴지 말고 말을 하라고. 왜 그러는데? 니가 운동을 그만두고 싶다고 할 애가 아니잖아."

"음? 그게 무슨 소리야? 마하 운동 그만둔데?"

"이건 또 뭔 개소리냐...?"

"아까 나한테 와서 그러잖아."

"왜? 뭐야? 마하야. 누가 너한테 뭐라고 했어?"

"하하하! 혜정아. 앞 뒤 다 자르고 그렇게 말을 하면 어떡해."

"그러니까 니가 말을 하라고. 다들 너 걱정해주고 있는 거 아냐."

"그냥. 하루하루가 뭔지 모르겠어... 빨리 대회나 마치면 좋겠다 싶어."

"구마. 너 지금 아시안게임 준비 하는 거 아냐?"

"아시안게임이 올림픽보다 편한 거 아녔어?"

"체감으론 올림픽보다 이게 더 지랄같애..."

조리있게 말을 꺼내기 어려워 두서없이 떠들었다.

다행히 가까운 친구들이라 대충 말해도 철석같이 알아들어 준다.

"정수가 그 얘긴 하더라. 니 주변에 하나같이 다 잘하는 형들만 모였다고."

"...다들 처음엔 열심히였지."

"그런데?"

"사람이 모이는데, 문제가 안 생길 수 있냐..."

대표팀과 쌓인 감정은 여전히 풀릴 기미가 보이질 않는 가운데, 뭐라도 의미있는 행동을 한 게 부메랑이 되어 돌아왔다.

공석에 놓인 대표팀 임시감독을 맡은 김에 국대 에이스라는 선수들과 훈련을 했더만.

"했더만?"

"뭐 잘 못 됐어?"

"누구 다쳤어?"

"...다 망했어."

한국 육상의 르네상스라고 불리는 에이스 다섯 선수가 세 개 대회에서 따온 메달이. 내가 딴 100m 금 1개, 200m 은 1개가 전부다.

단거리 김진수 권지성 이동민은 결승에 가지도 못했고, 중거리 김진운은 컨디션 저하로 브리티쉬 그랑프리를 불참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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