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꽃이 피니 나비가 모이는구나. (12) >
"저는 잠만 자고 가라고 한 거라니까요?"
"야. 남자한테 자고 가라고 하는 게 그 뜻이지."
"아니죠. 잠은 그냥 잠이죠."
"나 누구누구랑 잤어. 자. 이럼 무슨 뜻이 돼?"
"선배 어디가서 그런 얘기 하시려고요...?"
"너는? 넌 내 얘기 할 거야?"
다음 날 아침.
10시쯤 둘이 꿈벅꿈벅 눈을 뜬 채로 침대에 누워 이야기를 나눴다.
"난 어제 너 씻는 것도 몰랐네."
"바로 기절하시던데요. 코 엄청 고셨어요."
"술 마셔서 그런가."
"네 번 했으면 큰일 날 뻔 했어요."
섹스를 하면 거리감이 사라진다.
선영이도 그랬다.
아직은 선배라고 부르지만 그녀의 이야기 속에서 나는 친한 오빠의 벽을 넘어 있었다.
"아침 어떻게 하실래요?"
"나가서 먹든가 해야지. 유진도 챙겨야 하고."
"아. 지연이 언니..."
"하하! 까먹고 있던거야?"
"...얼굴 보기 민망한데."
"기다려 보자. 그쪽이 먼저 전화하겠지. 어차피 유진은 나한테 전화해야되는 상황이고."
지연 씨도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필름 끊겼을거라고 둘러댈 건데, 그렇다고 해주라고 했다.
"그리고 뭐. 어차피 유진이랑 단 둘이 호텔방 있었는데."
"하긴 그렇죠."
"너는 어떻게 할 거야? 나랑 있었다고 할 거야?"
"..."
"으하하하! 밥이나 먹을까?"
생각보다 선영이는 현실을 빠르게 파악하는 성격이었다.
"선배 좋아하는 여자 있는 것도 알고. 애초에 선배 같은 분이랑 연애할 거란 생각도 안 하고 있었어요."
"나도. 지금은 연애할 상황이 아니야."
"아침 드실래요?"
"나가서 안 먹고?"
"라면 있어요."
해장엔 라면 국물만 한 게 없지.
둘이 앉아 봉투 라면 다섯 개를 끓여먹고 있었다.
"여자애 자취방에서 이러는 건 처음이다."
"선배 그 영화 보셨어요? 봄날은 간다."
"아니. 그런 영화가 있어?"
"거기서 이영애가 유지태한테 그래요. 집에 데려다주니까 라면 먹고 갈래요? 라고."
"오오~ 라면으로 남자를 꼬셔?"
"그리고 들어와서 자고 갈래요? 라고 물어보죠."
"넌 반대로 했네."
"그러게요."
선배 저 책임지세요 같은 건 없다.
생각보다 더 쿨한 그녀의 행동에 호기심이 생겨 물었다.
"내가 처음이지?"
"네? 뭐가요?"
"그냥. 남자 방에 부르고."
"..."
"아니. 오해하는 게 아니라."
"저 호박씨까고 그러는 성격 아니에요."
원래 나라는 사람에 대해 선망하는 마음이 있었고, 그 마음을 호감으로 가지고 있었단다.
예상대로였다.
우연찮게 흘러간 어제의 시간 끝에 그녀는 용기를 가졌고, 나는 그 용기에 화답을 해줬다.
"저도 외로웠죠... 대학 왔는데, 맨날 운동하고 공부하다보니까 다른 친구들 사귀기도 어렵고..."
"집은 어디야?"
"강릉이요."
"감자. 음."
"아. 감자 아니라고요. 강원도 먹을 거 많아요..."
"마라톤의 고장에서 세단 뛰기를 했네."
"선배님은 황영조 선생님 보셨어요?"
"연맹에서 인사는 드렸지. 이봉주 선배님은 올림픽 때 옆 방 쓰셨고. 진짜 노력하시는 분이야. 존경스러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가운데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들어왔다.
받아보니 지연 씨 번호였다.
"오케이. 씨 유 대얼."
"일어났데요?"
"응. 체크아웃 준비하고 있다고. 이따가 학교로 온다고 그러네."
"...언니는요?"
"몰라. 얼굴 보면 그냥 뻔뻔하게 있어. 죄 진 거 아니잖아."
"선배랑 같이 나가면 언니도 제가 선배랑 있었던 거 알겠죠...?"
"하하하! 이제보면 니가 더 날 숨기고 싶어하는 거 같은데."
라면을 먹고 앉아서 이야기를 하다보니 어느덧 다시 또 둘이 끌어안고 있었다.
"선배."
"응?"
"가끔 연락 드려도 되죠...?"
"그럼. 나도 그래도 되지?"
"네. 서울 오시면 전화 주세요."
"그래."
환한 대낮. 대학교 원룸촌. 이 시간에 우리만 서로를 탐닉하고 있는 건 아닐 것이다.
학교에서 연애를 하면 이런 기분이겠구나 싶었다.
"하아 하아~ 선배. 왜 이러세요."
"어제 너무 바로 했잖아."
"아~ 선배... 빨리..."
선영이를 엎드리게 한 채로 열심히 손과 혀를 써서 간지럽혀 주었다.
"아... 진짜... 제발..."
"알았어."
손으로 몇 번의 오르가즘을 느낀 그녀를 다시 눕혀 얼굴을 보았다.
"하아 하아~"
"음."
"왜요?"
"선영아. 너 머리 길러라."
"...이상해요?"
"아니. 그럼 진짜 예뻐질 거 같애."
운동선수는 수수해야 한다. 자신을 꾸며서도 안되고 어디가서 호들갑스레 굴어서도 안된다.
예의과 규율을 지켜야 하고 늘 절제하며 행동거지를 반듯이 해야만 한다.
선수들한텐 그런 규범이 있다.
나야 운동경력이 짧고, 위계있는 환경에서도 나를 방어하고 지킬 수 있는 성적과 메달이 있으니 자유로운 편이지만, 그러지 못한 선수들은 아마도 자기 자신을 꾸미거나 하는 일 없이 살아왔을 것이다.
"아아~ 아~"
"선영아. 너 예뻐. 예쁜 얼굴이야."
"하아~ 선배."
"두려워하지 말고 꾸며 봐. 그럼 진짜로 더 아름다워 질 거야."
목덜미를 끌어안은 그녀를 꼭 안은 채 마지막 섹스를 이어갔다.
* * *
"후우. 원룸은 진짜 어디를 가나 뜨거운 물이 잘 나와."
"다 씻으셨어요?"
"응. 가봐야겠다. 애들 기다리겠네."
"선배."
"응?"
"...다빈이 언니가 왜 선배를 만났는지 알 거 같아요."
어라? 뭐야? 그 이름이 왜 여기서 나와?
"니가 다빈이를 알어??"
"알죠. 한 살 윈데."
"허. 뭐야? 둘이 친구야?"
"아니요. 그 언니는 원체 유명했으니까."
육상계의 아이돌이었던 최다빈.
그녀는 실력만큼이나 외모로도 선수들 가운데서 유명했었다.
"그 언니는 옛날부터 까딸스럽고 실력있다고 애들 업신여기고 그랬었거든요."
"하하하하~ 다빈이가 그랬었지."
"선배같은 사람이니까 그런 사람도 다정하게 감싸줬구나. 그걸 알 거 같아요."
"우와. 나 진짜 어제 유진이랑 지연 씨 둘이 엉켜있는 것 보다, 지금 너한테서 다빈이 이야기 들은 게 더 신기해."
"두 분 사귈 때 유명했어요."
"그랬구나. 난 몰랐지."
고3 잠깐 국내에서 선수 생활을 한 그때. 각종 대회에서 메달을 휩쓰는 나도 나였지만, 여자 선수들 사이에선 나와 다빈이가 같이 있는 모습이 더 화두에 오르내렸었단다.
"다빈이 어떻게 지내는 지 알어?"
"유학갔다고 들었어요."
"그러니까. 나도 그렇게 듣긴 했는데... 애가 그냥 사라졌어."
"서울에서 선수했던 친구 말론. 미국으로 갔다고 그랬는데."
"미국이라... 흠."
"선배가 좋아한다는 사람이 다빈이 언니는 아니죠?"
"음. 그건 아니야."
"역시. 선배는 여자들이 가까이 하기 어려운 사람이에요..."
"하하하~ 좋게 생각하자고. 나 갈게."
"네."
"연락해라."
"네."
학교 운동장에서 유진이와 지연 씨를 만났다.
"잘 잤어요?"
"네. 근데 우리 어제 말 놓기로 하지 않았나?"
"하하하! 유진. 딛 유 해브 어 굳 나잇?"
"A~ HA~ HA~ bro. shut up."
두 사람 사이에 있던 일은 두 사람이 알아서 풀라고 말하고 걱정말라고 해줬다.
지연 씨도 프리섹스니 자유연애니 하더라도, 일단은 여자인지라 조금은 민망해 하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얘는 그럼 내일 가는 거야?"
"응. 그런다고"
"Eugene. honey."
허니는 무슨...
따지지 말자. 나도 여기저기 허니라고 부르는 사람들 있으니까.
두 사람은 헤어짐이 아쉽게 손을 붙잡고 있었다.
특히나 유진이의 검은 피부 아래 흰 눈동자가 아련함이 막 뚝뚝 떨어진다.
"어떡해... 얘 나 보는 거 봐 봐. 키스하고 싶은가 보다."
"그러게. 근데 학교에서 그러긴 조금."
"문화가 다르니까..."
한국말로 하자 유진이 나와 지연 씨를 번갈아 보았다.
내가 눈짓으로 가자는 신호를 주자 녀석도 고개를 끄덕이며 지연 씨를 한번 안아주곤 자리에서 일어섰다.
"갈게 지연 씨. 얘한테 전화하라고 할게."
"응."
말 그대로 하룻밤의 인연이다.
하지만, 나와 선영이와 다르게, 이 둘은 한국과 자메이카로 지구 반대편에 놓이게 된다.
누군가는 원나잇을 불결한 행위라고 치부하겠지만, 그래도 난 사랑이 있으니까 원나잇도 있다고 믿는다.
사람이 쾌락을 쫓는게 뭐가 문제냐.
다들 외로우니까 누구라도 채우려고 하는 거지.
"후우."
"왜? 아쉽냐?"
"...가자."
전날 세워둔 X를 타고 교문을 빠져나갔다.
오늘도 어제에 이어 축제가 이어지기에 교정은 점심부터 빼곡이 많은 학우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내일 가지?"
"..."
"왜? 그렇게 아쉬워?"
"그녀가 처음이었어."
"뭐가?"
"섹스."
끼이익-!
잠깐 씨발 이건 또 뭔 소리야...?
"뭐???"
"...그녀가 내 처음이었다고."
195cm가 넘어 보조석 의자를 뒤로 바짝 땡겨 놓아도 무릎을 접을 정도로 커다란 놈이 순정만화 주인공 같은 표정으로 신촌 거리를 보고 있었다.
"진짜? 너 아테네에선...?"
"속였던 거야. 나 그날 혼자 있었어."
"..."
"지연. 그녀가 처음이었어."
"......"
어우 씨... 생각보다 큰 일이 벌어졌었구만. 한국에서 아다를 때다니...
"유진아. 지연 씨는"
"알어. 지연이 말해줬었어."
"뭘?"
"처음부터 날 보는데 느낌이 왔었데."
잊어라. 머릿속에서 그녀의 프리섹스니 자유연애니 하는 정보를 그냥 지우는 거다.
유진이가 말하는 그녀가 맞다.
"그래?"
"난 널 좋아하고 있는 줄 알았는데, 아니라고 했어. 날 사랑한다고 했었어."
"..."
"신촌... 연세 유니버시티..."
"적어도 이제 한국이 어떤 나란지는 잘 알았네."
성남으로 돌아왔다.
유진이의 호텔방에 도착해 앉아 있었다.
내일 가는 놈인지라 어디 멀리 관광은 좀 그렇고 수원에 들려 치킨이나 먹고 수원화성에서 기념사진이나 좀 찍을까 그런 구상을 가지고 있는데.
"헤이. 마하."
"응?"
"넌 지금 어디서 훈련한다고 그랬지?"
"...학교는 아니야."
"아. 맞다."
"왜? 다시 지연 씨 만나고 싶어?"
"아니. 신경쓰지 마."
예정대로 수원으로 건너가 치킨도 먹고 화성에 들려 저녁 관광이나 다니자고 했다.
"알았어. 빨리와라. 야. 태윤이랑 남수 온단다."
"태윤? 남수? 그게 누구지?"
"크레이지 보이들. 정석인 봤잖아. 얘네 우리 수원에 있다니까 이쪽으로 온다고 그러네."
유진은 반가운 얼굴들이 온다는 소식에도 침울한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음... 그렇구나."
새끼 지연 씨한테 단단히 빠졌구만.
하지만, 내가 그마음 알지. 누구보다 잘 알지.
"유진아."
"응?"
"내일 가지 마라."
"...무슨 소리야. 나 유럽에서 대회 있어."
"취소해."
"...취소하고 어떻게 하라고?"
"우리 코칭 좀 해주라."
"코칭?"
한국 계주팀이 있다. 나도 포함되어 있는데 여러 상황이 겹쳐서 지금 코치가 없다.
그러니 너가 딱 한달만 여기 머물면서 계주 코칭을 해달라고 했다.
"넌 자메이카에서 계주 선수로 뛰어봤지?"
"주니어대회에선..."
"자메이카 주니어면 유럽선수권 레벨은 넘잖아."
"무슨 소리야. 유럽이라니. 우리가 월드 클래스지."
계주는 그냥 각자 알아서 잘 뛰면 되는 경기가 아니다.
바통 터치는 나름의 기술이 있고 작년도 세계선수권때도 느꼈지만 아무리 친한 진수나 지성이라 하더라도 팀 호흡이라는 건 따로 존재한다.
"어떻게 생각해? 너도 틈틈이 성남와서 우리 형한테 치료 받고."
"..."
"전주라고. 지방에 있는 도시에서 훈련할 건데. 유진아 딱 한달만 우리랑 같이 지내자."
"무슨 소리야. 됐어."
"돈 번다고 생각해. 실제로 코칭비를 지급할 거야."
"마하. 우리는 형제야."
"내가 주는 게 아니야. 한구스포츠에서 주는 거지."
* * *
"야. 쟤는 어디다 저렇게 전화하는 거냐?"
"여자친구."
"여자친구?"
"응."
한 시간 뒤 태윤이와 남수가 통닭집으로 찾아왔다.
유진이는 친구들이 있어도 나가서 지연 씨와 통화하느라 정신이 없다.
"어이고 되게 좋아하나 보네."
"그러게. 웃고 난리 났는데?"
"좋지 그럼. 사랑은 좋은 거니까."
통닭집을 나와 소화도 시킬 겸 친구들과 수원화성을 걸었다.
"마하야. 뭐해?"
"감독님한테 연락할 게 있어서. 남수야 니네 먼저 가."
"아. 야 나. 영어 못 한다고."
"태윤이 있잖아. 이미 둘이 떠들고 있네. 금방 따라갈게."
친구들을 저만치 두고 감독님께 전화를 걸어 주변 상황을 설명드렸다.
유진이의 사랑도 이루고. 우리는 우리대로 자메이카의 선진 기술을 익히는 경험이 된다.
서로가 윈윈하는 결정이라 생각하고 그렇게 하자고 했더니.
"유진은 뭐래?"
"좋다고 하죠. 아주 그냥 하루종일 우울하던 놈이 웃고 박수 치고 난리 났어요."
"하하! 그럼 우리랑도 계약하는 건가?"
"그건 모르겠어요. 일단, 유진이 한국 한 달 있는 것만 확인받았어요."
"잘했다."
"그래서 이제 돈 얘기를 해야 하는데. 집이랑 월급이랑 일시불로 주려고요."
"얼마나 주려고?"
"집은 제가 구해주는데, 급여는 모르겠어요. 한구 스포츠에서 줘야죠."
"연맹에다 청구해라."
"에이 감독님... 어떻게 연맹에 그런 걸 물어요..."
"해도 돼. 대표팀 일이잖아."
"...그냥 제가 줄게요."
"마하야. 돈 아까워서 그러는 게 아니라. 선생님이랑 통화한 끝에 몇 가지 결정된 상황이 있어서 그래."
"뭔데요?"
"니가 대표팀을 맡기로 했다."
"...그게 결정이 됐다고요?"
"음. 그리고 선생님 은퇴하셨다."
카타르 아시안게임까지 반년.
생각지도 못한 무거운 짐을 짊어지게 됐다.
"선발전은요...?"
"열어야지."
"그럼 저는요?"
"너도 선수로 참가하고."
"...저한테 선수 감독을 다 하라고요?"
"플레잉 코치가 되는 거야. 어쩔 수 없다. 상황이 그렇게 됐어."
형은 실력으로 날 넘어서는 사람을 만나기 전에는 누구도 따를 수 없게 될 거라고 말했다.
그 결과 스물 한 살의 나이에 대표팀을 맡게 되는구나.
어이고야. 뒤졌네.
며칠 아주 짧고 달콤한 휴식을 보냈다 생각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