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륜기로 가버렷-236화 (236/401)

< 꽃이 피니 나비가 모이는구나. (9) >

"자 재민아 잘 들어. 너는 꿈을 꾼 거야."

"아니 야 방에서..."

"방에서 뭐? 방 뭐? 무슨 일이 있었는데."

"...아니 뒤에서 그러고."

"자. 우리끼리 있는 거 아니지? 선영이 있지? 쟤 니가 좋아하는 진유정이랑 동기다. 여자들끼리 불리하면 똘똘 뭉치는 거 너도 알지?"

"허허. 아니 황당해서."

"가. 어서. 너 오늘 술 많이 마셨다. 이거 택시비 쓰고. 어 마침 택시 들어오네. 어서 타고. 기사님 불광동이요."

"우리 집 불광 아니야?"

"어디든. 출발. 내일 전화하자. 정 뭐하면 집에가서 딸치고 자든가."

"야! 마하야!! 미친 새끼!"

대충 재민이를 입막음 시키고 택시를 태워 보냈다.

아이고야... 느낌이 싸하더라니 그 새를 못참고.

"후우. 술이 웬수지 술이 웬수야."

재민이를 보내고, 호텔방은 BBC가 한참중이다.

에이 씨. 오늘 밤새서 놀려고 했는데, 이래서야 나도 마포로 돌아가든가 해야겠구만.

"선영아."

"..."

후배 정선영은 한쪽에 쭈구리고 앉아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왜 그래. 별 일 아니야."

"아 진짜... 쪽팔려서..."

"괜찮아. 뭐 어때. 그럴 수도 있지."

"아니 짐승도 아니고..."

당혹 부끄러움 수치심 등등이 몰아쳤는가, 선영이가 엉엉 울고 있었다.

오늘은 대망의 아카라카 축제날.

신촌 거리에 여대생 하나 울든말든 누가 신경이나 쓰겠는가.

옆에 앉아 천천히 다독여줬다.

"사람이 다 짐승이지 뭐."

"그래서 제가 안 간다고 했었잖아요! 저 언니 아까부터 계속 이상한 분위기나 풍기고."

"서로 좋았지 뭘."

"선배?"

"왜 화를 내고 그러냐. 니가 열받을 거 없잖아. 쪽팔려도 저쪽이 쪽팔리는 거지. 왜 너가 이렇게 분해하고 그래."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시는 거에요?"

"진정해. 아무일도 아니야. 누가 누굴 죽인 것도 아니고. 누가 누굴 때린 것도 아냐. 그냥 젊고 매력적인 두 사람이 분위기가 통했을 뿐이야. 왜 니가 화를 내고 그래."

"그래도 사람이 생각이 있으면..."

"외로웠겠지. 그걸 어떻게 뭐라고 하냐고."

우리는 오늘 처음 서로를 알게 되었다.

꽤나 존경어리고 선망하는 눈빛으로 쳐다보던 후배가 이제는 나를 좀 이상한 생물 보듯 보고 있다.

"어떻게 그렇게 말을 하세요?"

"으하하하! 아니 내가 욕을 했냐 뭐를 했냐. 그냥 마음을 이해한다는 거지."

"그럼 선배도 그렇게 막 아무 사람이랑 자고 그래요?"

"뭐... 서로 합의가 된다면..."

"허..."

"아 왜? 왜 한숨을 쉬는데. 내가 그랬어? 물어보니까 답을 해준 거잖아."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세요?"

선영이는 혼자 흥분해서 마을 더듬 거렸다.

"채... 책임은요...? 그러다 애... 애라도 생기면... 어. 어떻게 하려고..."

"그럼. 혼혈이 되려나? 흑인 동양인 혼혈이면"

"아 선배!!"

"괜찮아. 그런 일은 없을 거야. 임신이 그렇게 쉽게 되는 것도 아니고."

"그걸 선배가 어떻게 확신하시는데요?"

"피임이 있으니까."

"...네?"

"아까 샀어. 유진한테도 혹시 모르니까 하나 챙겨두라고 했고."

그러자 선배님을 존경하던 후배님은 어디가고 그냥 분노한 여성이 내 앞에 벌떡 서서 노려본다.

"그럼 처음부터 그럴 목적으로 우릴 데리고 가신 거에요!!?"

"야. 야... 너 진짜 왜 이래."

"이봐요. 구마하 씨."

"어이고야... 아니. 상황을 봐."

"무슨 상황요? 어떻게 봐야 그런 말을..."

"니 말대로 저 친구가 아까부터 계속 추파를 보내고 있었고. 그리고 진짜 그런 상황이 왔을 때, 여자를 지켜줄 수 있는 건 결국 피임밖에 없는데. 그걸 그렇게 나몰라라 할 수 있냐?"

아카라카 만만세다.

거리에서 떠들기 민감한 주제가 다들 취하고 소리치고 난리난 상황이다 보니 흐지부지 허공으로 흩어져간다.

다만, 주변이 아무리 시끄럽다 하더라도 눈앞에 있는 상대까지 외면하기는 어려운 상황이긴 했지.

"선배. 이런 사람이었어요?"

"하하. 또 뭐가? 아니 날 대체 어떻게 봤는데?"

"...멋진 분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래서. 사람은 겉으로 보는 것과 직접 대하는 게 다르다고.

선영이한테 내가 나라를 빛낸 영웅에서 어떻게든 여자들 한번 껄떡 대보려는 난봉꾼으로 떨어지는 것 같다.

뭐 틀린 말도 아니긴 하지. 난 다들 헤어지고 나면 내일 아침 할 생각하고 있었어. 혹시나 유진 볼트가 떨어지지 않는다면 쓰리섬도 가능하다고 봤고.

"진짜 실망이에요."

"하하하! 야 선영아."

"놔요! 만지지 마세요!!"

가겠다는 애를 붙잡자 매몰차게 팔을 뿌리치고 있다.

액션이 커지자 주변의 한 두 사람 정도가 쳐다보고 있었다.

이거 이러면 꼭 내가 얘를 쫓아가는 것 같은 모양샌데. 오해를 받겠구만.

"집까지 데려다 줄게."

"아 따라오지 마시라고요!"

"야. 너도 술 많이 마셨어."

"..."

"흥분하면 혈액이 빨리 돌아서 술도 빨리 취하고. 지금이니까 멀쩡하지 조금만 더 가 봐. 집이 어딘진 몰라도 가다가 취해서 쓰러지면. 아무리 대학가래도 그렇지. 술취한 여자애 혼자 비틀 거리고 있는 게 얼마나 위험한지 몰라?"

"......"

"가. 어차피 이렇게 나온 것도 결국 내 친구 때문이니까, 내가 데려다 줄게. 택시 타야되면 택시 부르고."

다행히 집은 그리 멀지 않았다.

연희동 쪽이라는데, 나도 고3때 잠깐 머물던 원룸촌이라 잘 아는 곳이었다.

"집 학교랑 가까운데 잘 구했네. 운동장도 멀지 않아서 좋고."

"...아세요?"

"그럼. 나 올림픽 가기전에 거기서 살았잖아."

"아. 맞다. 들었어요."

"화 좀 풀렸냐?"

"...모르겠어요. 근데 선배한테 실망한 건 사실이에요."

"억울하네. 아무짓도 안 했는데 실망이라니..."

"할 마음은 있으셨던 거 맞잖아요."

"나만 있었나. 지연 씨도 있었지."

"그 언니도 이제 정리 할 거에요..."

"그러지 마라. 외로운 사람 버리는 거 아니다."

"선배가 그 언니 외로운지 아닌지 어떻게 아세요?"

"뭐 뻔하지. 몸으로 그렇게 다가오는데."

"성격이 문란한 걸 잘 포장하시네요..."

"이 세상 문란하든 뭐든 남한테 비난받을 이유는 없어."

"..."

"밝은 척하는 사람일수록 속이 공허하고 사람이 고픈 법이야. 큰소리치는 사람일수록 약한 내면을 들키기 싫어 강한 척하는 거고."

"사람을 반대로 보시네요."

"내가 그랬으니까."

실망한 김에 더 실망하라는 식으로 말해줬다.

너무 외로워서. 누구한테든 관심받고 싶어 운동을 시작했다.

"...선배가요?"

"크하하! 그래! 남들은 내가 무슨 처음부터 금메달을 목표로 국위선양을 위해 운동한 줄 아는데, 절대 아니야. 나 진짜로 애들이 올림픽 가면 인기 얻는단 한 마디에 시작했어."

"왜 그런 이유로..."

"외로웠으니까. 절박했거든."

지름길로 슬금슬금 걷다보니 학교 운동장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축제 날이라 그런가 자정이 넘었는데도 교정은 불이 꺼질 생각이 없다.

"주점들 아직도 하네. 뭐 먹을래?"

"아니요..."

"난 먹고 싶은데. 아까 햄버거 그냥 거기다 다 두고 나왔잖아."

"..."

"술은 안 먹더래도 뭐 좀 먹자. 요리들 많잖아. 내가 살게."

"그럼. 학교 말고 다른 곳으로 가요. 선배 원래 사람들 피해서 장소 옮기셨던 거잖아요."

자유분방한 친구를 쉽게 떨쳐내지 않은 것도 그렇고. 선영이는 사려심이 깊은 애였구나.

그녀가 데리고 간 곳은 원룸촌 근처에 위치한 일본식 선술집.

"아~ 여기. 기억난다."

"선배 아세요?"

"나 그때 잠깐 머물던 집이 저쪽 골목으로 가면 나오거든. 여기 앞에 맨날 지나다녔었어."

"...저도 한번쯤 가보고 싶었는데."

"뭔가 비쌀 거 같은 분위기라 망설였겠지. 나도 그랬어. 들어가자. 오늘 먹고 싶은 거 다 먹어!"

선술집인데, 다양하고 신기한 안주들이 많았다.

나는 배가 고팠고 선영이도 어쨌든 운동선수라 소화가 빨랐다.

우리는 종류별로 먹고 싶었던 것들을 식탁 가득 깔아놓고 마주 보았다.

"소화용으로 청주 한 병 할까?"

"선배. 누가 소화용으로 술을 마셔요."

"웃는 거 보니, 이제 좀 화가 풀린 거 같네."

"...아무래도 저도 배 고파서 더 민감하게 반응했던 거 같아요."

"그래. 그렇게 넘겨. 먹자."

오늘 돈 너무 많이 쓰는 거 아니냐고 걱정해주는데, 뭐 이정도 가지고.

"햄버거는 조금 아깝다."

"근데 진짜 선배가 고르신 거 아니죠?"

"응? 뭐? 햄버거?"

"아니요... 아까 그..."

"아 콘돔."

"친구분이 고르신 거 그냥 선배가 계산하신거죠...? 그쵸?"

"후후후. 왜? 내가 그런 사람인 게 싫어?"

"...뭔가 환상이 무너지는 기분이에요."

"난 상대방이 싫어하지만 않으면 원나잇도 하고. 짧게 동거도 하고 그러는 스타일이야."

"어. 어..."

"어떻게 보면 그래서 더 지연 씨랑 눈치가 맞았을 수도 있어. 유진 이 새끼가 변수였지."

"그... 그럼 만약 친구분 없었으면..."

"글쎄. 이제 배가 좀 부른가 보네. 이런 걸 묻는 거 보니까."

그녀가 갑자기 볼이 빨개져서 시선을 피했다.

편하게 웃으며 말해줬다.

"걱정마. 난 절대 강압적인 행동은 하지 않으니까."

"...그게 무슨 뜻이에요?"

"너 지금 나 괜히 경계하고 있잖아. 근데, 난 원나잇도 일종의 사랑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상대방이 동의하지 않는 짓은 절대 안 해."

"선배는..."

"응?"

"좋아하는 사람은 있으세요...?"

아마 나도 적당히 술기운이 돌았기에 그런 말을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당연히 있지."

"있는데 그렇게 막 아무나랑 만나신다고요?"

"좋아하는 애가 날 안 봐주니까."

"..."

"선영아. 나도 여자한테 한번 물어보자. 서로 좋아하고 자기도 나 좋다고 하고. 그런데 사귀기 싫다는 건 대체 뭐냐?"

"...어떤 상황인데요?"

"아까 지연 씨가 믿음 이야기 했었지?"

"네."

"똑같애. 그런 거야."

"아직 이해가 잘..."

"내가 자길 바람맞힐까 두렵데. 사귀고 있을 때 내가 바람을 필까 걱정이 돼서 연애는 못 하겠다고 그랬어."

주절주절 떠들고 있었다.

혜정이 마음을 한번은 다른 여자들한테 물어보고 싶었다.

"그럼. 그분 말대로 하시면 되잖아요?"

"나도 어쨌든 고집이 있지. 지가 내 마음 받아주지 않는데. 내가 왜 굳이 그걸 지켜줘야 돼?"

"...그럼 좋아하는 게 아니지 않을까요?"

"좋아는 해. 그건 확실해."

"으음."

"아무튼, 그래. 그 친구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인간은 외로운 존재고. 그리고 알고보면 다 짐승들이고."

"왜 인간이 짐승이에요. 이성적인 존재죠."

"선영아. 너 멀리 뛴다고 다들 칭찬해주고. 나 빨리 뛴다고 칭찬해주고. 마음만 먹으면 내일 점심을 외국가서 먹을 수 있는 세상에서, 아직도 그런 걸 따지고 있는 게 그게 짐승 아니면 뭐냐?"

"아 선배 그게 뭐에요. 하하하~"

초여름의 싸늘한 밤기운이 거리로 내려앉는 시각. 우리도 선술집을 나왔다.

"저기 봐 봐."

"네? 어디요?"

"저기 올라가는 커플들. 쟤네도 가면 섹스 할 걸."

"하. 아 선배..."

"아까 우리 옆 테이블에 있던 커플도. 걔네는 뭐"

"그쪽은 엄청 뽀뽀 하더라고요."

"아무튼, 지연 씨 너무 뭐라고 하지 마. 본능이야. 인간이 어떻게 본능을 누르고 사냐."

"알았어요. 알았다고요."

둘 다 딱 기분좋게 취기가 오른 상황에서 우리는 선영이의 자취방에 도착했다.

작은 언덕을 올라 작은 원룸들이 옹기종기 모인 곳이었다.

"후우. 아 숨차라."

"금메달도 따신 분이 겨우 이거 올라온다고 숨이 차세요?"

"금메달은 뭐 오르막길도 날아가는 줄 아냐. 내가 도사도 아니고..."

"선배도 평범한 면이 있으셨네요."

"환상 같지 마. 나도 똑같은 인간일 뿐이야."

"후후후."

웃긴. 자식.

그나저나 술이 무섭긴 하네.

선영이는 절대 내 기준 예쁘거나 매력적인 외모가 아닌데도, 지금 이 순간은 또 나름 애가 괜찮은 것 같다.

"이제 어디로 가세요?"

"글쎄다. 차가 학교에 있으니까"

"음주운전 하시려고요!?"

"아니. 다른 호텔방을 잡든가. 아니면 뭐..."

마포 집으로 가서 혜정이한테 문 좀 열어달라고 하든가. 둘 중 하나 해야겠지.

아니면 다시 아까 레지던스로 돌아가서 유진과 지연 씨 셋이서???

"선배... 오늘 돈 너무 많이 쓰는 거 아니세요?"

"응? 하하. 니가 뭐 그런 걸 걱정해."

"..."

음? 왜 속상한 얼굴을??

"호... 혹시."

"어?"

"자... 자고 가실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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