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과 의지 (9)
"현석아. 어디 있니?"
"선생님 여기요. 돌아보세요."
"어. 그래. 봤다. 끊어라."
서울 동부 터미널.
육상 연맹 천병욱 전무와 연세대 이현석 교수가 안동으로 가는 고속버스에 몸을 실었다.
"아이고 버스도 탔겠다. 한숨 자자."
"무슨 일 있으세요?"
"요즘 일이 한두 가진가. 정치는 시끄럽고 가족은 말 안 듣고."
"그래도 경기 보러 가시는데, 선생님 분위기가 별로 달가워 보이지 않으세요."
"아침부터 마누라가 잔소리를 하니까."
"하하! 왜요?"
"몸도 안 좋은 사람이 거길 왜 가냐고. 아. 내가 시합 뛰러 가나? 시합 보러 가지."
"사모님도 걱정되셔서 그러셨겠죠."
"하루 이틀인가. 유별나게 난리야."
"좀 어떠신데요?"
"괜찮아 약 먹고 있어. 너까지 그러지 마라."
"그래도 선생님 수술을 빨리 잡으시는게."
"허허. 이미 버스 출발했다. 그냥 좀 가자."
"알겠습니다."
오늘은 전국 실업 선수권 대경기가 있는 날이었다.
천병욱은 일을 떠나 시합을 즐기고 싶지만, 버스가 고속 도로에 오르자 마음 한 켠이 허전해진다.
"마하도 나왔으면 좋았을 건데."
"참. 마하 좋아하세요."
"아 그럼. 아들인데 좋아해야지."
"네?"
"아버지라고 부르라고 했다. 좋다고 하더구나."
"진짜요? 하하! 선생님 정말로 구병욱 하시는 거예요?"
"구병욱이 뭐야. 마하가 천마하가 되는 거지."
"으하하 선생님. 마하 형은 어쩌고요."
"마윤 군 말인가? 둘 다 입적시키면 더 좋지."
강렬한 퍼포먼스로 트랙을 달리는 구마하를 상상하자 천병욱의 가슴이 뜨겁게 달아오른다.
"시합을 뛰어야 할 건데. 그래야 감각이 유지가 될 건데."
"점심쯤 도착하겠네요. 휴게소에서 점심 드실래요?"
"이 녀석아. 말 돌리지 마라."
"선생님만 아쉬우신 거 아니잖아요. 저도 똑같은 입장입니다."
"너희는 좀 어떠냐?"
"괜찮아요. 양민구라고. 선출이 하나 있는데, 이 친구가 트레이너 맡아서 선후배 관계도 정리되고 팀 잘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거기도 마하가 있었다면..."
"하하! 지금은 없는 게 나아요. 존재감 큰 놈 옆에 있으면 애들 집중 안 되잖아요."
두 사람은 선수들에 관한 다채로운 이야기를 나눴다.
"이번에 지성이가 10초 벽을 뚫었다."
"들었습니다. 근데 권지성이야 뭐 원래부터 잘 뛰던 애였잖아요. 대한 체대도 장학금 주고 데려왔다던데."
"그것도 마하가 있어 가능했던 일이다."
"선생님. 애들 다 열심히 했어요. 그렇게 말씀하시지 마세요."
"그래도 누군가 할 수 있다는 믿음을 주니까 도전할 수 있었겠지."
"아우... 진짜 누가 구병욱 아니랄까 봐..."
"보물 같은 녀석을 지켜 주지 못한 게 미안해서 그런다."
"지켜 주고 자시고 있나요. 녀석도 생각이 있어 움직이고 있는데."
이현석이 말한다.
남자라면 한 번쯤 세상에 나를 던져 깨지고 부딪힐 때도 있는 법이다.
구마하는 스스로 도전의 길을 걷고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한 사람이 전체를 흔들 순 없는 법이다."
"회장님은 그러고 있잖아요."
"...그쪽은 혼자 같아도 기업이란 힘을 가지고 있으니까."
"선생님. 마하도 못지않게 강한 녀석입니다."
"실력이야 말할 것도 없지. 난 그런 게 아니라."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시라고요. 이 녀석도 지금 박 회장한테 뒤지지 않을 자기 힘을 키우고 있어요."
"무슨 소리냐?"
이현석의 눈빛이 진지하게 바뀐다.
"마하가 동민이란 친구랑 같이 훈련했던 거 아시죠?"
"당연히 알지."
"아까 애들한테 들었습니다. 예선전에서 이동민이 김진수를 꺾었답니다."
천병욱이 깜짝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뭐? 진수가?"
"네. 우리 학교 애들이 봤는데 아주 난리 났었답니다."
김진수는 한국 육상의 대들보였다.
실력도 그렇고, 대우도 최정상급에 달한다.
그런 선수를 무명에 가까운 지방 실업 팀 선수가 실력으로 넘었다.
"동민이가 그렇게 빨랐다고?"
"시니어 와서는 기록이 없는데, 당시에도 나쁘지 않았다는 거 같아요. 워낙 한주고가 구마하에만 집중하다 보니."
"아니. 그래도 어떻게 훈련을 했길래..."
"저도 잘 모르겠어요. 만나서 이야기해 봐야죠."
"마하는 어딨고?"
"당연히 경기장에 있죠. 관중석에 있다는 거 같아요. 민구나 다른 애들도 아직 못 만났다는 거 보니까."
"허허허~ 녀석."
"이제 좀 웃으시네. 선생님. 마하도 독하게 마음먹은 거 같은데, 너무 그렇게 걱정하지 마세요. 다 큰 녀석이 어련히 알아서 잘하겠습니까."
"하하~ 이동민이 김진수를 꺾었다고?"
천병욱의 얼굴에 화색이 돈다. 침울하던 여행길도 흥미진진해지는 기분이었다.
"상률이가 같이 있었나?"
"상률이는 없고, 둘이 한 거 같아요."
"설마 코칭에도 재능이 있을 줄이야."
"그래서 말인데요 선생님. 만약에 박 회장이 절대 선발전을 열수 없다고 버티면 이런 방법은 어떻겠습니까?"
"어떤 방법?"
"마하를 국가 대표 감독직으로 뽑으세요."
"..."
"감독 선발은 전무님 권한이잖아요."
"역시. 니가 공으로 교수직을 하는 건 아니구나..."
"하하! 선생님. 저 공부 많이 했어요."
천병욱이 고개를 돌려 창가를 보았다.
빠르게 지나치는 풍경이 화살 같은 시간을 보여 주는 것 같다.
마침 유리창에도 주름진 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아련하구나. 언제 이렇게 나이를 먹었을까. 인생 별로 한 것도 없는 것 같은데.
그래도 50줄 삶 속에 구마하를 초청 선수로 뽑은 건 다시 없을 잘한 선택이다.
"마하가 감독을 맡기엔 너무 이르지 않을까?"
"실력으론 누가 뭐라고 합니까. 그리고 마하가 감독직을 맡으면 상률이도 따라올 테고요."
"하하! 두 녀석이 같이 있으면 서로 힘도 되겠지."
"일단은 그런 방법도 생각해 보시라는 거고요. 하지만 역시 마하는 선수로 뛰어야죠."
"그래야지. 걱정 마라. 선발전도 반드시 열도록 해 보마."
* * *
안동 시민 운동장.
이동민은 예기치 못한 다크호스로 떠올라 주변의 관심을 받고 있었다.
"아니. 동민 씨. 왜 이렇게 몸이 좋아졌어요? 대체 뭘 먹은 거야."
"어 그냥. 밥 먹고..."
"너. 마하랑 운동했다며?"
"진짜? 구마하랑 운동했어?"
"네. 그랬어요..."
건너 건너 얼굴만 알던 형들이나 나이 많은 선배들까지 두루두루 다가와 인사를 건네고 훈련법 등 많은 것을 묻는다.
비결은 따로 없다.
그냥 죽을 만큼 운동하고 지긋지긋한 스쿼트 꾸준히 해 준 게 전부다.
"허허. 대체 무슨 훈련을 하길래."
"진짜 대단한 건 없었어요."
다른 것이 있다면, 이동민의 지난 한 달은 절박한 심정을 담고 오직 운동만을 바라보며 달려왔을 뿐.
변화란 크게 오는 게 아니구나.
"동민아."
"어. 진수."
"하하. 야. 진짜 깜짝 놀랐다. 너 언제 이렇게 빨라졌어?"
"뭐 놀랄 것까지야..."
"2차전 잘해 보자. 같이 결승 가면 좋겠다."
"음... 그래."
"아 참. 결승은 내가 이긴다."
"후후. 새끼."
1, 2위로 통과한 두 선수가 2차 예선에 오른다.
멀리 소속 팀으로 돌아가는 김진수를 보며 이동민은 색다른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지성이 못지않게 어릴 때부터 관심을 받았던 엘리트 선수 김진 수.
동갑이라 맞서는 때가 많았고, 한편으론 지는 게 당연하다고까지 여겼는데.
내가 진수를 이길 수도 있구나. 처음으로 나란히 서 보는구나.
"..."
아니다. 아직 섣부르게 생각하지 말자. 은퇴가 한 게임 더 늦어졌을 뿐이야.
이동민은 일부러 구마하에게 돌아가지 않았다.
운동장 한쪽에서 혼자 음악을 들으며 마음을 정리하고 시합을 보았다.
운동장에선 여러 경기가 동시에 진행되고 있었다.
신기하다. 예전엔 그냥 저렇게 하는구나 했던 모습들이 오늘따라 색다르게 보인다.
넓이뛰기 선수들의 보폭과 점프 능력은 발바닥부터 종아리 허벅지 전신을 써서 날아오른다.
투포환과 창대 선수들의 어깨는 등에서부터 파워가 솟구친다.
이렇게 선수들의 움직임이 세세하게 보였던 적이 있었을까?
이것도 내가 전신을 갈고닦아 운동을 했기 때문에 눈이 트인 걸까?
"어?"
"동민이 형 뭐 해요? 시합 뛰어야지."
"어... 벌써 그런 시간이 됐나?"
"정신 차려요. 아님 뭐야. 아까 힘 다 쓴 거야?"
그럴 리가. 악마 같은 구마하의 훈련법에 의하면 이 정도는 오전 운동에도 속하지 않는다.
"가자."
"형. 아까 진수 형 어땠어요?"
"왜? 너랑 같은 조 됐냐?"
"아니. 형한테 졌다길래 오늘 컨디션 별론가 하고."
"이 새끼가. 야 내가 좆으로 보이냐?"
"하하! 마하 형이랑 훈련은 어땠어요?"
"그거야말로 좆같았지. 궁금하면 너도 한번 와서 해 볼래?"
이동민과 권지성이 관중석에 앉아 있는 구마하를 돌아본다.
마하는 진운이와 함께 있었는데, 몰려드는 팬들과 여러 기관 사람들에게 인사를 받느라 정신이 없어 보였다.
"진짜 그럴까?"
"어?"
"형네 어디서 운동해요?"
"뭐야. 너 지금 태릉에 있잖아."
"감독도 없는데 뭔 상관이에요. 실력 좋은 쪽으로 가는 게 맞지."
예선전에서도 이동민은 뛰어난 실력을 보였다. 다만, 10.67로 1차전보단 0.02초 늦은 기록이 나왔는데, 대신 그의 평균을 10.
6으로 생각할 수 있는 긍정적인 메시지를 안고 간다.
2차 예선을 마치자 전체 순위가 집계되었다.
이동민은 자기 기록보다 권지성과 김진수의 숫자를 먼저 체크했다.
각각 10.27, 10.59로 전체 성적 1, 2위에 두 녀석이 올라 있었다.
"3위라..."
고등학교 때도 여기까진 올라왔었지. 마하가 있고, 두 녀석이 있고, 그다음 자리까진 왔었어.
그때는 그것을 만족스럽게 여기고 그 정도도 잘했다고 여기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오늘은 다르다. 이기고 싶다.
저 제일 상단에 내 이름을 걸고 싶어.
"이동민 씨!"
"동민 씨! 준준결승 축하드려요."
"아. 어... 정말 오셨네요?"
"하하! 내가 사람들 데리고 응원 온다고 했었잖아."
전주 시청 직원들이 그를 찾아왔다.
이동민은 준준결승을 앞두고 혼자 워밍업을 하며 몸을 풀고 있었는데. 사람들이 뻘뻘 땀을 빼고 있는 그를 보며 묻는다.
"아니. 왜 이렇게 땀을 흘리고 있어? 어디 안 좋아?"
"아니요. 몸 좀 풀어 놓으려고"
"시합 앞두고 힘 빼는 거 아니야?"
"아닙니다. 1차 예선 마치고 너무 풀어졌더니 몸이 다시 굳어졌어요. 지금 운동해야 이따가 제 실력 나와요."
"그래. 대단하네."
"엄청 노력하는구나 동민 씨. 그럼 점심은?"
"과일이랑 샐러드 챙겨 왔어요."
"그래? 그럼 수고하고. 우리도 비켜 주자고."
"네. 팀장님. 힘내요 동민 씨."
"고맙습니다."
전주 시청 직원들이 웃으며 돌아서는 그때. 이동민이 사람들을 향해 말했다.
"차 갖고 오셨어요?"
"어. 한 대 나눠 타고 왔어."
"하하! 일은요?"
"오늘은 동민 씨 응원이 우리 일이야."
"우리 농땡이 아니야. 정식으로 시장님한테 허락받고 온 거야."
"아. 그럼 오늘 바로 내려가셔야 되겠구나."
"가야지. 내일 출근도 있고."
"왜? 한턱 쏘려고?"
"우승하고 쏘겠습니다. 우리 꼭 회식해요."
"하하하~ 좋지."
"동민 씨 파이팅."
"네!"
사람들을 보내고 그는 다시 운동에 전념했다.
워밍업이라 보기 어렵게 몸을 쓰고 있었다. 마치 몸속 깊이 각인 된 기억을 찾으려는 듯한 몸짓이었다.
"후욱! 후욱!"
기억해라. 마하 새끼가 일부러 빡치게 만들었던 그때의 그 힘은 이런 느낌이 아니야.
지면 은퇴다. 사람들한테 회식 약속까지 했어.
이기자. 이기는 거다.
"후우! 훅!! 훅!!"
한적한 운동장 구석에서 혼자 열기를 뿜어내고 있는 이동민.
구마하가 김진운과 함께 멀리서 그를 보고 있었다.
"..."
"와. 동민이 엄청 열심히 하는구나."
"새끼... 그냥 불을 질러라."
"응?"
"아니야. 가자."
"안 가 봐도 되겠어?"
"집중하고 있잖아. 끝나고 보지 뭐. 그리고 교수님이랑 전무님 오셔서 터미널로 마중 가야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