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과 의지 (2)
"정수야 일어나자."
"네...? 어... 형 지금 5신데요...?"
"6시부터 운동 시작이니까. 지금 일어나야 몸이 깨."
전주에 내려와 바쁘게 움직여 그런지 시차가 적응됐다.
오랜만에 푹 잔 거 같다. 최상의 컨디션으로 운동을 시작하는 기분이다.
"어으으... 추워라... 마하 형. 4월인데 왜 이렇게 춥죠?"
"자다 나와서 그래. 조금만 있어 봐."
X를 끌고 나가 동민이를 픽업. 시민운동장은 닫혀 있으니 전주천 산책로로 향했다.
"아 공기 좋다."
"마하야 여긴 왜 왔어?"
"왜 오긴. 뛰어야지."
"야 아무리 그래도 구마하가 이런 데서 운동한다는 건..."
"그러니까요. 형 금메달리스튼데."
"괜찮아. 나 서울에서도 아침 조깅 한강에서 했어."
기본 루틴으로 간다.
새벽 운동, 아침. 세 시간 휴식 후 점심 먹고 다시 오후 운동.
마지막으로 저녁을 먹고 마감 운동으로 스트레칭과 목욕으로 하루를 마치는 식이다.
"헬스장은 내일쯤 가고. 나중엔 타이어 가게 들러서 타이어도 하나 사자. 중간중간 끌고 다녀야지."
"...타이어를 어디다 놓고 다니려고?"
"마하 형. 설마 지금 BMW에 타이어를 싣고 다니겠다고요?"
"하하! 내 찬데 뭔 상관이야."
운동을 우선으로 해야지. 차가 뭐가 중요해. 다들 쓸데없는 걸 신경 쓰지 않게 일단 달렸다.
"뛰자. 오늘은 운동 첫날이니까 가볍게."
가볍게 4킬로 정도 몸에 열을 내며 뛰었다.
동민이는 그래도 괜찮게 따라오는데, 역시나 정수가 한참 뒤로 쳐졌다.
"헉. 허억... 형? 가볍게 뛴다면서요...?"
"그럼 가볍게 조깅하고 있잖아. 몸에 열만 내는 거야."
"역시 운동선수는 다르네요..."
이마와 등줄기에 땀이 송골송골 맺혀 오자 맨몸 운동을 들어갔다.
"오늘부터 일주일에 세 번 스쿼트 1,000개씩 간다."
"야 잠깐만. 1,000개?"
"형 장난이시죠...?"
"장난 아냐. 기본으로 월 수 금 할 거야. 대신 아침 점심 저녁으로 나눠서 끝내."
400, 300, 300으로 나눠 줬다.
당장은 일천이란 숫자가 크게 보이겠지만, 하면 다 된다.
무엇보다 이런 것 하나부터 자신감과 의지가 생겨난다.
나도 운동선수가 될 수 있겠다고 나 스스로에게 자부심이 생긴건 스쿼트 천 개부터였다.
"정수야... 너 할 수 있겠냐?"
"글쎄요... 될까요...?"
"좋아. 너네들 400개씩 해내면, 난 거기서 200 더 할게. 됐지?"
"넌 다리가 대체..."
"하하하. 마하 형..."
"시끄러. 시작한다."
정수는 100개 되기 전에 허리가 접혔고, 동민이도 200까지는 구령에 맞춰 따라왔지만 250부터는 다리를 짚고 일어나고 있었다.
"천천히 따라와. 훅! 후욱! 267!"
아침 산책을 나온 어르신들이 눈길을 주고 가신다.
남들이 본다고 쪽팔려 하던 친구들도 몸이 지쳐 가니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게 된다.
"헉 헉... 마하야 몇 개나 했냐...?"
"사백팔십구. 사백구십."
"야. 나 이걸로 오늘 운동은 다 한 거 같은데...?"
"너 끝났어?"
"어. 이제 400. 후욱."
"됐어 그럼 쉬어. 정수는?"
정수는 아직 300에서 멈춰 있었다. 봐주는 건 없다.
"못 하면 그냥 차표 끊어 준다."
"헉... 마하 형..."
"해. 할 수 있어. 천천히라도 따라와. 나도 아직 운동하고 있잖아."
동민이한테 뒤에서 좀 잡아 주라고 했다. 어렵사리 정수도 400개 훈련을 마치고 바닥에 쓰러졌다.
"다 했냐?"
"헉. 헉. 동민이 형. 저 다리 떨리는 거 보세요... 어우 씨."
"하하하. 나도 그래."
"마하 형은 몇 개 하셨어요?"
"50개 남았어."
두 친구가 운동을 마쳤으니 빠르게 앉았다 일어서며 스쿼트 600개를 끝냈다.
허벅지가 저릿저릿하다.
역시 스쿼트는 최고의 운동이야.
"됐다. 이제 밥 먹으러 가자."
시민운동장으로 걸어가며 콩나물국밥집을 찾았다.
역시 전주는 맛의 고장이구나.
아침을 든든하게 먹고 운동장에서 휴식을 가진다.
"한숨들 자."
"저... 형들. 이건 노숙이잖아요?"
"차 키 줄까?"
"아니... 안 추워요?"
"오늘은 포근한데 뭐. 그치?"
"덥다 젠장. 몸이 뜨거워서..."
정수는 아무리 그래도 밖에서 널브러져 있는 건 좀 그렇다면서 차로 갔고. 동민이와 둘이 운동장 한 켠에 돗자리를 깔고 누워 있었다.
"너. 연세대에서 훈련할 때도 이러고 있냐?"
"보통 그렇지."
"애들이 관심 안 가져?"
"운동하는 애들 많아서 서로서로 조심해 주는 건 있어."
"야. 대학 재밌어?"
동민이가 슥 돌아보며 물었다.
"학교 다니고 싶으면 내년에 들어가 봐."
"됐어 새끼야. 돈이 어딨어..."
"장학금 받으면 되지."
"하하! 그럴 머리 있으면 진작 운동 안 하고 공부했지."
"운동도 장학금 있어."
"결국 실력이 되어야 하는 거잖아."
"실업 팀도 간 놈이 대학 선수들 못 이기냐."
"아 됐어... 잘래."
어젯밤 정석이와 통화 했을 때 동민이 이야길 조금 더 자세히 들을 수 있었다.
내가 유럽에서 이것저것 새로운 환경을 접하고 있을 때, 이놈은 실업 팀 예산이 깎이고 변화하며 삶에 불안함을 안게 됐다.
그래서 어른들도 찾아다니고 인사도 다니고 했다던데.
"너. 뭐 해 보고 싶은 거 있어?"
"해 보고 싶은 거?"
"훈련에서."
"없어... 그냥 니가 하라는 거 하는 게 좋아 지금은."
운동은 열정이 있어야 하는데. 트랙만 떠올려도 가슴이 뜨겁고 시합을 생각하면 심장이 두근거려 잠이 안 오고 그래야 하는데...
"실업 팀에선 뭐라고 하디?"
"너랑 훈련한다니까 그러라고 하더라."
"크게 관심이 없구나."
"없지."
"너 작년에 대회 우승하지 않았나?"
"그걸 우승이라고 할 수나 있나. 참가 선수가 몇 없었는데."
"올해는 언제냐?"
"실업 팀 대회?"
"응. 언제 시합해?"
당장 5월에 시합이 있단다.
우승하면 뭐 갖고 싶냐고 물었다.
동민이도 껄껄 웃으며 말했다.
"왜? 니가 사 주게?"
"봐서. 뭔지나 한번 들어보고."
"미친놈. 무슨 씨발 애들 선물이냐..."
"그래도. 이왕지사 훈련하는 거 말이라도 해 봐."
"차 하나 있으면 좋겠다."
"야 이 새끼야. 그건 너무 크잖아..."
"하하하! 아니, 먼저 어디서 양궁 선수분들 만났는데."
한국 양궁 협회는 H자동차 기업이 후원을 해 주는데, 올림픽금메달을 따면 포상금 차원에서 차 한 대를 받는다.
우리도 아테네에서 들었던 이야기였다. 그래서 육상은 그런 거 없냐고 감독님이랑 웃으면서 이야기하고 그랬었는데.
"차라..."
"됐어. 자존심 건들지 마."
"마트 가면 장난감 코너에 있는 모형이라도 사 줄까?"
"크하하!! 미친놈. 어. 사 줘. 안 사 주기만 해. 죽여 버릴 줄 알아."
오후 운동을 시작했다.
정수는 외제 차에서 한숨 자니 몸이 개운해진 거 같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마하 형. 오후엔 뭐 할 거예요?"
"스쿼트 300개. 시작."
"와 이 새끼 진심이었네..."
"하하하... 할 수 있을까요?"
"해 봐. 오히려 아까보다 조금 더 수월할 거야."
원래는 체력 단련으로 근육 운동을 해야 하는데, 오늘은 운동장에 왔으니까 계속 맨몸으로 간다.
기구가 없다고 근육을 못 키우는 게 아니다.
팔 굽혀 펴기와 피티 체조도 있고 사람도 셋이니까 하나 빠지고 둘 둘 서로 들고 뛰어도 된다.
"뭔가 영화에서 봤던 군대식 훈련 같네요."
"맞아. 근데 이게 군대 훈련이 아니라 원래 레슬링 유도 훈련이야."
"오... 레슬링."
"아 찝찝해. 새끼 땀 존나 났어."
"미친놈아. 니가 이거 하자며!!"
"남자 만지기 싫어. 에잇 젠장..."
그렇게 또 저녁까지 땀을 흠뻑 흘렸다.
나도 맨몸으로 이렇게까지 하는 건 오랜만인데, 느낌이 나쁘지 않다.
기구가 없으니까 보다 더 내 몸에 집중할 수 있는 기분이다.
딴에는 단순하게 운동을 했는데, 정수는 밤이 되자 완전 퍼져 버렸다.
"정수 힘드냐? 맨땅에 노숙은 아니라던 놈이 잘만 엎어져 있네."
"허억 허억... 형... 죽겠어요."
"후우 후욱. 그래도 정수 대단하지 않냐? 우리는 운동선수지만 얘는 일반인이 우리를 여기까지 따라온 거 아냐."
"그러니까. 것도 아직 고3이. 운동 신경이 있네."
정수는 남은 스쿼트 300개만 하는 걸로 저녁 운동을 빼 줬다.
그러자 동민이 놈이 지랄지랄하는데.
"넌 아직 내가 운동이 안 끝났잖아."
"나도 빼 줘. 나도 더 하면 다쳐."
"꺼져. 도망치기만 해 봐. 자. 우리도 스쿼트 300개 마무리하자."
밤 7시. 저녁 운동을 나온 주민들이 운동장에 모여들었다.
우리도 100미터 트랙을 점거하며 자리를 비켜 주지 않는다.
"이상하게 다들 관심이 없네요."
"한 번씩 쳐다나 보지. 사람들 원래 남한테 관심 잘 없어."
"허억 허억... 야. 마하야. 나도 이제 무리다. 진짜 죽을 거 같아."
"그래. 근데, 오늘은 첫날이니까 기록 한번 재 보자 동민아."
"여기서...? 지금 이 체력으로...?"
"응."
"아... 나 100미터 기록 안 잰 지 1년 넘었는데..."
선수에게 기록은 성적표와도 같은 것. 동민이는 최상의 컨디션일 때 해 보고 싶다는데, 막무가내로 밀어붙였다.
"기준점으로 잡고 가자고."
"새끼. 진짜 얄짤이 없네."
"너 고3 때 마지막 기록이 몇이지?"
동민이의 고등학교 3학년 육상 단거리 최고 기록은 10.85였다.
우리는 트랙에 섰다.
"으음..."
"정수 왜?"
"마하 형. 100미터가 원래 이렇게 길었어요...?"
"하하! 너도 한번 해 볼래?"
"정수는 몇 초 나오냐?"
"체력장에서 쟀을 때 14초 나왔었어요."
동민이와 눈빛을 마주 보며 웃었다.
체력장 14초면 16에서 17초 정도 나오겠구나.
"왜요? 느려요?"
"아니야. 누가 느리대."
"그래. 운동 신경 있는 거야. 그러니까 지금 춤추고 있겠지."
우리 반응에 살짝 빈정 상했는지 정수가 도전장을 들고나왔다.
"내가 잴까?"
"내가 할게. 어차피 너도 뛸 거니까."
초시계를 챙겨 들고 결승점에 도착했다.
"정수야~! 어둡다고 못 뛰는 거 아니지?"
"네!! 준비됐어요!"
정수는 신발을 훅훅 벗어 던지며 출발 자세를 갖춘다.
"동민아. 쟤 신발 신으라고 해."
"벗고 뛰는 게 빨라요~!!"
"발 다쳐. 너 이 씨 아프다고 내일 운동 못 한다 이런 거 안 통한다."
다치더라도 최고 기록을 보여 주고 싶겠지.
공부는 관심 없고 학교도 빼먹으면서 운동 중인 친구의 동생.
그래. 남자는 그렇게 자존심에 살아야 된다.
"출발!"
죽어라 달려온다.
열정은 진짜 인정해 준다.
"오케이. 끝!"
"헉! 헉! 몇 초예요?"
"17.58"
"네??? 말도 안 돼요."
"진짜야. 괜찮아. 빠른 거야."
빠르다고 인정해 줘도 본인은 만족스럽지 않은가 보다.
오늘 운동을 너무 해서 그렇다고. 밤이라서 그럴 거라고. 맨발로 뛰니까 역시 발이 너무 아팠다고.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테니.
그렇다고 해 줬다.
"정식 트랙 100미터는 학교 운동장이랑 달라."
"와.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잘했어. 정수야. 다른 사람들은 20초 21초 나올 거야."
"허허... 선수와 일반인의 차이가 이렇게 난다고요?"
"그러니까 우리가 선수지. 정 뭐하면 너도 훈련 말미 14초 목표로 만들어 보든가. 형네 학교 육상 팀 하는 사람들도 기록 단축 하려고 많이들 훈련하고 있어."
"오오..."
"왜?"
"형 기록 몇이였죠?"
"100미터 아테네 공식 9.73."
"세계 신기록이죠?"
"그렇지."
"와 하하하... 진짜 쩐다..."
"잠깐만 이따가 얘기하자. 지금 동민이 뛰려고 하니까."
저 멀리 출발 지점에서 동민이 녀석이 슬금슬금 몸을 풀고 있었다.
다시 단거리로 끌어들인 입장에서 나도 조금 긴장되는 건 있다.
잘 나와야 될 건데... 지금 저 자식 성격에 기록 나쁘면 운동에 흥미가 떨어질 거 같은데.
스타팅 블록을 사 오든가 아니면 내일 전북대 가서 제대로 갖추고 할 걸 그랬나...
10.85.
과연 어떤 결과가 나올까...
그래도 1년간 실업 팀 선수 생활을 했는데 변화는 있겠지.
"마하 형. 언제 시작해요?"
"글쎄다. 야~!! 언제 시작할 거야? 왜 이렇데 돌아다녀?"
동민이도 손을 번쩍 들면서 출발 자세를 갖춘다.
큰소리로 외쳤다.
"READY!"
어. 이럴 수가... 멀어서 내가 지금 잘 못 보나?
엉덩이를 치켜 뜬 동민이의 몸에서 흐리지만 붉은 기운이 피어 오르는 것 같다.
"어... 음..."
"마하 형. GO! 해 주셔야죠?"
"GO!!"
형한테 간혹 푸른빛과 붉은빛을 내는 사람들이 있다고 물었다.
푸른빛은 냉정 침착한 상황에서 능력을 발휘하고, 붉은빛을 내는 사람들은 공격적이고 막막한 상황에서 실력을 발휘한다.
"헉! 아우 씨! 몇 초야!!"
"10.93."
"아 씨발..."
이놈 그런 성격이었구나.
그럼 어쩌면 지금이 이놈에게 딱 맞는 상황이 될 수도 있어.
"잘했어."
"뭐?"
"잘했다고."
하지만, 이 이상 내가 과연 동민이를 절박한 심정으로 몰아세울 수 있을까...
더 독한 소리를 해야 하고, 더 매몰차게 굴려야 하는데...
그러기엔 너무 미안한데.
"무슨 생각 하고 있었냐?"
"후욱 후욱. 뭐?"
"정수 끝나고 바로 뛰지. 잠깐 왔다리 갔다리 하고 있었잖아."
"그냥. 잘 될까 싶어서..."
"잘하고 싶었어?"
"당연한 거 아니냐. 야 나도 일단은 선수야."
승부욕만 가지면 된다.
이기겠다는 마음가짐이 부족해.
상택이 형도 올림픽 막바지에 그랬었으니까.
불안함이 나의 실력을 누르고 있다.
"동민아. 전력 질주 열 번으로 오늘 훈련 마치자."
"뭔 소리야 이 시간에 이 체력으로 무슨 전력 질주를 열 번이나 뛰라고...?"
"나도 같이 뛸 거야. 정수야 이리 와 봐. 이거 버튼 두 번 누르면 기록 연속으로 뜨니까. 계속 체크해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