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륜기로 가버렷-209화 (209/401)

< 우물가의 토끼처럼 (2) >

새벽 2시. 정석과 동민이 마주 보고 앉아있었다.

식탁엔 술병과 고기가 자글자글 거리고 있다.

적적함을 때우기 위해 켜두었던 TV에선 동계올림픽 폐막식이 시작된다.

"폐막식 하네."

"너네는 아테네 때 봤지?"

"폐막은 못 보고. 개막식이랑 구마 경기 보고왔지."

"마하도 저기 있을까? 유명한 선수들은 카메라 따라다니잖아."

"하하! 그 새끼 좆밥이잖아."

동민은 정석의 농담에 히죽 웃으며 소주잔을 들었다.

"근데 우리 이러고 있어도 돼?"

"그럼. 내가 매니전데."

"먼저 있던 매니저 형은?"

"독립한다고 요즘 가게 자리 알아보러 다니고 있어. 괜찮아. 사장님한테 아까 너 왔다고 전화로 허락받았어."

"마하네 형이 너 많이 신임하나 보다."

"하하하! 나보다 너 왔다고 그러시는 거 아니겠냐?"

처음부터 사정 있어 보이는 얼굴이었다.

마감 직전에 찾아왔다는 것도 마음이 쓰였다.

이정석은 편안하게 속 얘기를 꺼낼 수 있도록 기다려주고 있었다.

물론, 그런 정석의 배려심을 동민도 느끼는 중이다.

"아 맞다. 정석아."

"어."

"...넌 어디 이 씨냐?"

뭔지는 몰라도 단단히 어려운 이야긴가 보구나. 대화거리가 떨어지니 족보까지 따지고 있네.

"우리 경주 이씨."

"아 그래? 난 전주 이 씬데."

"전주 이씨면 그거 아니냐? 조선 왕조?"

"응. 근데 아무리 봐도 조상님 중에 족보 샀어. 아무렴 내가 왕족이라고..."

"왜? 맞을 수도 있지."

"나야말로 개좆밥이잖아..."

동민이 쪼르륵 술잔을 채운다.

벌써 몇 병을 비웠건만 얼굴에 술기운이 드러나질 않는다.

정석이 조용히 물었다.

"뭐 문제 있어?"

"..."

"마하랑 싸웠냐?"

"싸우긴. 야 내가 걔랑 어떻게 싸워."

"하긴. 그 새끼 싸움 못 해. 성질만 더럽지."

"너네는 마하랑 싸워봤어?"

"그냥 서로 삐져서 존나 으르렁 거리기나 했지. 싸운 적은 없어. 몸 봐라 싸움이 되나. 아 씨발 생각하면 할수록 새끼 좆만할 때 밟아놨어야 했는데."

두 사람은 잔을 비우며 고기 한 점씩 집어 먹는다.

정석이 먼저 퉁명스레 말했다.

"얘기해 봐. 뭔데?"

"됐어 별거 아니야..."

"동민아. 내가 좀 편하게 해줄까?"

"뭐 어떻게?"

"편하게 들어."

"응."

"야 이 병신아. 빨리 말하라고. 나 존나 피곤해 가서 자야 될 시간이야."

"우하하하!!!"

툭 던진 거친 말투에 불편한 긴장감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동민도 크게 웃으며 답한다.

"아 씨발 천천히 마셔도 괜찮다며?"

"크하하! 괜찮아도 이지랄하고 언제까지 있을 건데. 적당히 들어가서 쉬어야 될 거 아냐."

"하하! 미안하다."

"그리고. 우리도 서로 욕할 때 되지 않았냐? 솔직히 가게 젤 많이 찾아와 준 건 내 친구들 아니라 넌데."

"그래? 마하도 안 와?"

"안 와! 이 씨발놈은 맨날 운동만 하고. 아니면 여자만 존나 따먹고 다니고."

"후우..."

일단 마하와 관련된 이야기라는 건 알겠다. 이정석은 조심히 말을 건네본다.

"야. 나도 니 친구야. 진짜 편하게 얘기 해 봐."

"아니. 그냥..."

"뭣보다 내가 구마 죽빵 한 대 갈길 자격은 있으니까. 마하 얘기라도 툭 꺼내. 괜찮아."

"..."

"솔직히 너 이런 반응이 더 걱정된다고."

"아니. 그런 건 아닌데..."

이동민이 넌지시 속 사정을 꺼내놓았다.

너희들 만큼은 아니지만, 육상계에서도 자기들끼리 친하게 지내는 친구들이 있단다.

"어. 뭐 진수 이런 애들. 얘기 들었어."

"맞어. 진수 진운이. 지성이도 있고."

"지성인가 걔는 너희보다 동생이라고 하지 않았나?"

"동생인데. 대회 때마다 보고. 서로들 친해. 형들도 잘 따르고."

"한번 다 데리고 와. 밥 한번 사지 뭐."

"...얘네들. 대표팀 전지훈련 갔어."

간단하면서도 명쾌한 느낌으로 그들과 동민의 관계도가 그려지는 정석이었다.

"너는?"

"난 못 갔지."

"왜? 뭐 있었나?"

"으음. 부르질 않았거든."

"...너도 대표팀 아냐? 너 작년에 구마랑 북유럽인가 거기 뭐"

"그땐 나갔는데..."

"야 잠깐만. 육상 대표팀은 선발로 뽑는 거 아니었어?"

"...작년부터 조금 바뀌었어"

그 순간 폐막식을 중계하던 해설자가 말한다.

[멋진 행사입니다. 역시 문화와 패션의 나라답군요.]

[방금 구마하 선수 아닌가요?]

반가운 이름에 정석과 동민이 고개를 돌렸다.

관중석에 앉아있는 구마하의 얼굴이 짧게 스쳐가고 바로 다시 행사장의 모습이 비춰진다.

[정말 우리 대표팀. 이번 올림픽에서 멋진 활약 보여주었습니다.]

[그렇죠. 설상 빙상 가리지 않고 고른 활약상을 펼쳤습니다.]

"새끼. 갔네."

"정석아. 마하랑 연락해 봤냐?"

"시합 하기 전에는 가끔 했는데. 저 새끼 메달 따고 난 다음부턴 통화 안 돼."

"...뭐하고 있었데?"

"몰라. 미친놈. 덴마크 여자애랑 같이 지낸다고 그러던데?"

"하하하! 마하 여자친구랑 헤어졌다고 하지 않았냐?"

"모르냐? 저 새끼 여자 존나 좋아하잖아."

친구의 흉을 봐서까지, 자극적인 이야기로 분위기를 돌리려 해봐도 동민의 표정은 살아나지 않는다.

"왜 한숨이야."

"솔직히 나 오늘 여기 온 거. 마윤이 형한테 한 감독님 연락 좀 부탁하려고 온 거야."

"동민아. 너 사이다 마실래? 아니면 콜라 줄까?"

이정석이 글라스 잔에 쥬스를 따라주며 물었다.

"그런 게 부탁한다고 돼?"

"난 아무래도 작년에 나 대표팀 뽑힌거. 한 감독님이나 마하가 꽂아준 거 같아서."

"새끼야 그런 게 어딨어. 니가 실력이 되니까 뽑혔겠지."

"아냐... 우리나라에 나보다 잘 하는 허들 선수 많어."

"너 달리기 아냐?"

"실업팀 오면서 허들로 바꿨어."

"그럼 가능성을 봤겠지. 구마도 가능성 하나보고 올림픽 나갔던 거니까."

"마하는 연맹 전무님이랑 이두희 감독님까지 다들 비공식으로 테스트를 거쳤어."

"아. 그래?"

"어. 이 새끼야말로 누구보다 엄격하게 대표팀 심사를 받았지."

"씨발년 말을 안 하니 알 수가 있나."

오고가는 대화속에 이정석은 실업팀 생활에 대해서도 보다 더 자세하게 알게 되었다.

"그럼 비정규직 같은 거네."

"그렇지."

"그래도 구마는 너 잘한다고 하던데."

"후후후. 마하 이 새끼..."

구마하는 인터뷰 때마다 한주고를 언급해 왔고 자연히 한주고 3학년 에이스였던 이동민도 업계 관계자들 사이에 이름이 퍼져나갔다.

육상계에서 이동민은 구마하와 둘도 없는 절친이었다.

한 사람은 세계신기록과 전무후무한 단거리 중거리를 석권하는 선수가 되었으니, 그에게도 자연히 기대가 몰린다.

이동민은 성적에 비해 나쁘지 않은 실업팀에 입단할 수 있었다. 조금은 친구의 후광이 작용한 덕도 부정할 순 없다.

팀에선 그가 전국체전 우승 정도는 가볍게 해내고 세계선수권에 나가서도 동메달 정도는 따올 수 있을리라 믿으며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성적이란 단지 주변의 기대감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올해 2006년 2월.

구마하가 스키선수로 토리노에서 또 하나의 금메달을 목에 걸자, 박문기가 주관하는 한국육상연맹은 2006 도하 아시안게임을 목표로 1차 대표팀을 소집했는데, 이동민은 나라의 부름을 받지 못한 것이다.

아직 봄이 아니니 육상시즌이 시작된 건 아니다.

그러나 이동민은 불안해졌다.

팀에서 자신을 거품이라 취급하고 방출하더라도 할 말이 없다.

이제와서 다른 걸 시작 할 용기는 없다.

다시 모든 것을 제 자리로 돌리기 위해선 대표팀에 선발되는 것 말곤 답을 모르겠다.

"동민아."

"어. 나 존나 못나 보이지?"

"..."

"응?"

"아냐 새끼야. 니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아는 건 넌데 누가 그런 소리를 해."

이정석은 그가 처한 상황을 넌지시 이해하고 공감해준다.

열심히 안 해서 안 되는 것이겠는가. 어떤 상황에선 아무리 노력해도 닿지 않는 것들이 있는 법이지.

이정석은 이른 나이에 사회생활을 하고 있었다.

사회란 꿈과 낭만이 전부가 아님을 누구보다 잘 안다.

눈치를 봐야하고 아부도 해야하고 억울해도 참아야 하는 일들이 부지기수다.

오죽하면 이 친구가 여길 찾아왔겠는가.

"학생들은 몰라. 이건 진짜... 아 씨발 진짜..."

"하하. 너도 힘든 일 많구나."

"당연하지. 진짜 사장님 좋고 이모님들 형들 이렇게들 잘 해주니까 버티지..."

"마시자."

"야. 동민아. 오늘 내가 계산할게. 먹고 편하게 들어가."

"아냐. 나도 돈 벌어."

"됐어. 이거 그냥 가게 식비로 대충 처리하면 돼. 얼마 먹지도 않았는데 뭐."

"크하하! 야. 그러다 걸리면 혼나는 거 아니냐?"

"뭐 어때. 안 걸리면 되는 거지."

대학이 아닌 사회초년생의 길을 택한 청년들.

각자 자기 생계를 꾸려나간다는 점에서 높은 공감대를 얻는 두 사람은 서로를 이해하고 공감하며 급속도로 친해지기 시작했다.

"니네는 마하 옆에 있다고 의식되거나 한 거 없어?"

"없어. 오히려 이제라도 사람 구실 하니까 다행이다."

"대단한 놈들. 아니 고3이 어떻게 거기까지 갈 생각을 했냐?"

"사장님. 아니, 마윤이 형이 돈 대준다니까 공짜여행 갔었지."

"하하하! 그래도 그렇지."

"너도 알았으면 같이 갔을 거야. 별 거 없어."

"아니. 난 알아도 안 갔을 걸."

"왜?"

"마하 잘 되는 모습 눈앞에서 보면 무슨 생각이 들었을까..."

이정석이 핵심을 파고드는 질문을 던진다.

"동민아. 마하 싫냐?"

"...싫긴. 좋지."

"솔직히 말해도 된다니까. 야 씨발 이 마당에 너랑 나랑 꾸며댈 게 뭐 있어."

"아냐. 진짜로 좋아. 마하 이 새끼는 내 자랑이고. 내가 이런 놈 운동 시작할 때 같이 했다는 건 나중에 자식 손주들한테까지 들려줄 자부심은 줘."

이동민이 쭉 소주잔을 비우며 크~! 뜨거운 입맛을 다신다.

"단지, 내가 그만큼 잘난 놈이 아니라는 게. 좆같은 거지."

"야. 내가 오늘 여기 옆에 부동산 갔었는데."

"어."

"너도 집 하나 사라."

"뜬금 뭔 소리야...?"

"들어 봐. 새끼야. 남수는 할아버지부터 집안에 돈이 존나 많고. 김태윤도 뭐 그럭저럭 잘 살어. 구마는 뭐. 이 개새끼는 말 할 것도 없고."

"그치. 마하는 말 할 것도 없지."

"이번에도 포상금 존나 나올 걸?"

"나오겠지. 설상연맹이나 그쪽에서도 꽤 나오지."

"암튼, 우리 집은 그렇게 사는 편은 아니야."

이정석이 자기 이야기를 건네준다.

친구들과 다르게, 그는 그렇게 유복한 환경이 아니었다.

어렸을 때도 성남공항 인근 허름한 빌라에서 자라왔고, 그나마 중학교 고등학교 올라오며 사람사는 그런 거주지에 정착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이정석은 친구들에게 말 못 할 소망이 있었다.

멋지고 좋은 집에 살고싶다.

쓰레기 분리수거도 할 수 있고, 친구들 불러도 괜히 기죽지 않을 그런 환경에서 생활하고 싶다.

소망은 소망이고, 일단은 현실을 걸어가야 했다.

이정석은 진학을 포기하고 취업을 선택했다.

"나 고깃집 일하기 시작한 게 우리 할아버지 아프면서 집안 가세가 더 확 기울어서도 있거든."

"으음."

"그래도 진짜 잘 왔지. 우리 사장님 돈도 잘 주고. 일도 재밌고."

"정석아. 너 얼마 정도 받어?"

"나? 200."

"오... 진짜?"

"물론 그만큼 일이 빡세긴 한데. 그래도 사장님이 1년에 10만원씩 올려준다고 했고. 손님 많거나 매출 잘 나오면 보너스도 있거든."

그렇게 1년 친구들을 보며 느끼는 부러움과 시기심을 애써 외면하며 열심히 살아왔더니 오늘 내집을 장만할 수 있다는 이야길 들었다.

"나도. 나도 애들 보면서 그런 거 진짜 컸어. 특히 난 구마 이 새끼가 아니라, 태윤이나 남수 이런 놈들한테도 좀 그런 감정이 있었는데."

이제 내 집을 장만할 수 있는 확신이 생기며 더는 그런 감정을 가지지 않게 됐단다.

"집 하나 있으면 마음이 존나 든든해. 결국 그게 인생에서 젤 큰 돈 나갈 일이니까."

"그렇지."

"너도 선수 생활 계속했잖아. 1년 돈 벌었을 거 아냐. 대출 빼서 집 한 채 장만해버려."

"..."

"기분 나쁘게 듣지말고. 내가 오늘 너 보면서 느낀 게 뭐냐면. 남들이랑 비교하지 않고, 확실한 나만의 무언가가 없다는 기분이야."

"맞어. 나 좀 그런 거 있어."

"그래서 흔들리는 거야 새끼야. 내가 볼 땐 한상률이나 구마가 딱히 널 생각해서 대표팀에 뽑았다거나 한 건 아냐. 그건 절대 아냐."

"그럴까...?"

"당연하지! 야 씨발 그 인간들. 내 친구고 우리 학교 선생님인데. 그렇게까지 주변을 알뜰살뜰하게 챙기는 인간들이 아니야."

"하하하! 아니야. 한 감독님이나 마하나 여기저기 좋은 일 많이 해."

"꺼지라고!! 난 안 챙기잖아!!"

"하하하하~"

이정석은 연인 김선아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그에게 들려준다.

"야. 내가 볼 땐 니가 마하보다 나은 부분들이 있어."

"...내가 마하보다 나은 게 뭐가 있냐?"

"왜 없어. 넌 그러니까."

내심 기대하는 눈빛을 보내는 동민이에게 뭐라도 좋은 이야기를 해주고 싶은데.

마하가 예전같이 작고 쭈그러진 놈도 아니고, 이제는 번듯한 국가대표에 금메달도 하계동계 다 따내고, 차도 외제차 타고 여자도 여기저기 막 만나고 다니고.

"아 씨발!! 넌 순수하잖아!!"

"크하하! 미친놈아."

"그 새낀 존나 섹스에 미친놈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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