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륜기로 가버렷-208화 (208/401)

< 우물가의 토끼처럼 (1) >

"정석아. 아퍼..."

"어? 어... 그럼 젤 쓸까?"

"그거 뻑뻑해서 싫은데."

"으음."

남녀가 연애를 시작하고 평균 60일이 지나면 잠자리를 함께한다는 영국인지 호주인지 모를 무언가를 연구하는 기관의 발표가 있다.

동기동창 친구에서 연인으로 발전한 이정석과 김선아도 그럭저럭 8개월째 알콩달콩한 사랑을 이어가고 있었다.

김선아가 수능을 보기 전에도 두 사람은 간간이 둘만의 시간을 보내왔지만 재수에 성공하고 대입이 확정되자 이제는 거침이 없어졌다.

두 사람은 데이트가 끝나면 거리낌 없이 편의점에 들러 콘돔을 사들고 모텔을 찾아갔다.

그러나 서로가 익숙해졌다고 스킬이 발달하는 건 아니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처음인 연애 초심자에게 섹스란 늘 기대와 달리 어렵고 무서운 이야기로 다가오고 있었다.

"기분 별로야?"

"아니. 그런 건 아닌데."

여자의 질부를 핥고 문지른다고 흥분되는 것이 아니다.

일본산 야동이 실질적인 성교육 자료를 대신하는 대한민국의 현실에서 이정석은 김선아를 만족시키기 어려웠다.

"내가 올라가볼까?"

"니... 니가?"

"싫어...? 조금... 그런가?"

"아니. 너무 좋은데."

그 와중에 김선아가 지난번 서울로 쇼핑을 다녀오며 이혜정을 만나 약간의 팁을 얻어왔다.

(남자친구에게 모든 걸 맡기지 말고 어느 정도 흐름을 주도해 봐.)

(어... 어떻게??)

(니가 올라가면 돼.)

용기를 갖고 새로운 체위에 도전하는 스물한 살 김선아 양.

막상 이정석을 눕히고 올라타 엉덩이 아래로 자세를 갖추는데, 스스로의 낯선 자세에 괜한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싫으면 싫다고 해."

"아냐. 좋아."

"근데 얼굴이 왜 그래..."

"내 얼굴이 왜?"

"...뭔가 이상하게 보고있어."

"어. 그건 그냥 우리 선아가 드디어 방아찎기를 한다는 사실이 기특하기도 하고..."

"야!!"

뒤치기. 사까시 등등. 이정석은 보기와 달리 다정하고 여자친구를 위해주는 남자친구지만, 그럼에도 늘 저속하고 거친 말투는 불만을 야기한다.

어찌됐든 두 사람은 멈추지 않았다.

김선아는 여성상위 자세로 말 타듯 천천히 골반을 움직여본다.

"으음~"

과연 경험자가 뭐가 달라도 다르구나.

누워서 다리만 벌리고 있는 것과 다르게 몸 여기저기 찌르는 느낌이 가랑이를 타고 전해져 갔다.

"아아. 흐응~"

두 눈을 감은채 교태스런 몸짓과 야릇한 소리를 내는 여자친구의 반응에 이정석은 새삼 섹스라는 신비로운 매력에 눈을 뜨는데.

"아~ 하아~~"

"어... 선아야 잠깐만 빼 봐."

"어? 왜...?"

"아니. 그냥 잠깐만..."

"왜? 벌써 끝날 거 같애?"

"아니 그게 아니라... 그냥 잠깐. 어. 빼! 빨리!! 아 움직이지 말고!!"

아직은 갈 길이 먼 두 사람이었다.

이정석은 고개를 들지 못하고 김선아는 그런 남자친구를 위로해주었다.

"오늘 사람 많았어?"

"아. 구마 이 새끼 메달 딴 다음부터 맨날 밀려와서..."

"피곤했겠네. 피곤해서 그러겠지."

"...먼저는 오래 했는데."

"괜찮아. 쓸데없이 오래 하면 아프기만 하지."

"오 그래? 진짜?"

아니다. 삽입 후 절정에 오르기까진 시간과 자극이 필요한 법이다.

김선아는 남자친구를 위해 선의의 거짓말을 해주고 있었다.

어찌됐든 서로를 배려해주며 잘 지내는 두 사람이다.

이정석도 눈치 껏 둘러대는 여자친구의 호의를 생각해 딴청을 피웠다.

"배고프지 않어?"

"응."

"뭐 먹을래."

섹스는 너무 일찍 끝났고 대실 시간은 길게 남았다.

샤워를 마치고 다시 침대에 누워도 기분은 살아나질 않고 두 사람은 아침까지 자고가자는 생각으로 야식을 배달 시키고 TV를 켰다.

올림픽 중계가 나오고 있었다.

"올림픽이 아직도 하고있어?"

"내일 폐막인가 그럴 걸."

"으음~ 그럼 마하도 바로 오는 거야?"

"아니. 구마는 휴가."

"왜? 메달 땄는데 바로 들어오지."

"몰라. 육상연맹이랑 뭐가 있데. 나도 사장님한테 대충 들었어."

"흐음. 보기와 다르게 피곤한 상황인가 보구나."

"그렇지. 걔도 스트레스 많이 받는 거 같더라고."

두 사람은 야식을 먹으며 TV를 보았다.

올림픽 마지막 날 일정에 맞춰 갈라쇼가 중계되고 있었는데, 사쿠라 아야의 인터뷰가 나오고 있다.

[미스 아야는 피겨의 여왕이 되셨는데요. 당신에게 이번 올림픽은 어떤 시간이었나요?]

[이번 올림픽요? 이탈리아에 있어 그런가, 꼭 로마의 휴일같은 시간이었어요.]

"와 저 사람 예쁘다."

"쟤 완전 갑자기 확 떴잖아. 일본에서 난리 났다던데?"

"마하는 저 사람 봤을까?"

"구마. 경기장 다른 데 있었잖아."

"아니야. 기사 보니까 피겨 봤다는 거 같던데?"

"이 새끼가?"

"응. 쇼트트랙 할 때 응원한다고 갔다가 피겨까지 봤다고. 기사 떴었어."

"진짜? 개새끼 그럼 저 사람이랑 했겠네."

"야!"

이정석이 매서운 손길에 등짝을 후드려 맞는 가운데, TV속 사쿠라 아야도 리포터에게 질문을 받고 있었다.

[로마의 휴일요? 낭만적이네요. 누구와 사랑을 하셨나요?]

[그런 건 아니고, 부담감이 컸었어요. 그런데 다행히 하루 마음을 놓을 수 있는 기회가 있어서.]

[그래도 미스 아야의 조 브래들 리가 있었을 거 같은데요?]

[아하하. 사생활은 노 코멘트 하겠습니다.]

"설마. 진짜 구마는 아니겠지...?"

"야. 아무렴 마하가 그렇게까지 만날 정돈 아니지."

"왜? 구마 이 새끼도 금메달 리스튼데. 급은 맞지. 내 친구 무시하지 마."

"지가 무시 다 해놓고서..."

김선아가 야식 그릇을 정리하며 묻는다.

"근데 마하가 그렇게 섹스를 잘 해?"

"몰라."

"니네들끼리 그런 얘기 안 해?"

"안 해! 우리가 그런 얘기를 왜 해!!"

"남자애들끼리 그런 얘기 하잖아."

"안 해! 누가 그래. 너네는 하냐?"

"뭐... 어느 정도는. 하는 애들도 있고."

"진짜로!? 그럼 나 막 1분만에 싸고 이런 것도 가서 다 떠들고 그래?"

"아니야. 그런 얘길 왜 해!"

"...너 막 혜정이랑 민혜한테 내 흉보고 이러는 거 진짜 아니지?"

"걔들 만나지도 못했어."

"얼마전에 이혜정 보고 왔잖아. 걔 나 보면 슬쩍 눈 깔면서 속으로 비웃고 그러는 거 아냐...?"

"야. 너 적당히 해."

김선아도 자존심이 있다. 내 남자친구 조루라고 어디가서 이야기를 하겠는가 단지 고민을 상담했을 뿐. 여자들의 이야기는 그들만의 세계에 묻어둔다.

"남자애들은 그런 얘기 안 하는구나. 처음 알았어."

"대가리 빈 새끼들이나 어디가서 지 여자친구 이미지 씹창내면서 따먹었네 뭐네 떠들지. 우린 그런 얘기 안 해."

"마하도?"

"특히 구마 이 새끼는 절대 여자 얘기 안 해. 우리도 누구 만났는지 잘 몰라."

"와... 진짜 의외다..."

"왜? 뭐가?"

"아니. 그럼 혜정이 얘기도 안 했어?"

"난 진짜 구라 안 치고, 아직까지 구마랑 이혜정이랑 무슨 사인지 모르겠어. 김태윤도 모를 걸?"

김선아가 대충 설명해준다.

둘이 사귄 건 아니지만, 짧게 만난 시간은 있다.

그런데 호감이 생기기 전 마하가 여자친구를 사귀는 바람에 혜정이도 마음을 접었다.

"그리곤 뭐. 너네들 아테네 갔다오고 그리고 끝이지."

"아닐 걸. 뭔가 있는 거 같던데. 구마 혜정이 얘기하면 존나 버럭버럭 거리는 게 뭔가 있어."

"몰라. 혜정이는 마하랑 연애는 좀 그렇다고 했었어."

"설마 부모님 안 계셔서 그런 건 아니지."

"아니야. 이혜가 그런 걸로 뭐라고 하는 애냐."

"구마가 병신이긴 한데, 그렇다고 문제 될 것도 없는데."

친구라 하는 말이 아니었다.

구마하가 조건이 떨어지는 것도 아니고, 이혜정도 당장 어디 내놔도 빠지는 미모가 아니다.

그냥 둘이 겸사겸사 편하게 가면 좋지 않겠다는 이정석이지만.

"관심 꺼. 걔들 이야기지."

"그러게. 뭐 남들 이야기 하고있냐. 혜정이는 요즘 뭐해?"

"서울에 있어. 나도 그날 옷 사러 잠깐 하루 본 게 다였고."

"걔 자취해?"

"그렇다고 하던데."

"오~ 자취하는 여대생. 자취하는 이혜정..."

"너 진짜... 죽을라고."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어디서 자취하는데? 한번 놀러 가자."

"마포라고 하던데? 나도 놀러가도 되냐니까. 룸메이트 있어서 좀 그렇다나?"

"마포. 구마도 마..."

이정석의 머리에 여러 가지 키워드가 맞아 들어간다.

"..."

에이 설마... 그런데 구마같은 폐쇄적인 놈이라, 또 그 설마가 설마가 아닐 거 같고.

"왜? 마하도 마포 살아?"

"아니. 언제 한번 마포 살면 좋겠다고 그러더라고. 신촌에서 가깝다면서."

그래 니들이 알아서 해라. 잘난 년놈들이 그러겠다는데 누가 뭐라고 하냐. 우린 그냥 우리만의 평범한 연애를 할란다.

이정석은 빠르게 주제를 바꿔 들었다.

"넌 OT 언제 가?"

"다음 주. 근데 가야 할까? 재수생이라고 밀어내고 이러는 거 아니겠지?"

"남수랑 태윤이한테 물어봤는데, 그런 거 없데. 오히려 애들 말이 대학생들 친구 OT 때 다 사귄다고."

"흠. 혜정이도 그러던데."

당장 재수에 성공한 김선아의 학창시절이나 사회인 이정석의 계획 등.

두 사람은 다양한 주제로 대화를 나누다 형제들에 관한 내용이 나왔다.

"정수는 요즘 뭐해?"

"아. 이정수 이 새끼..."

"왜? 아직도 계속 그 상태야?"

"똑같지 뭐."

이정석은 동생 이야기에 목소리가 달라졌다.

"그냥 전문대라도 가라니까 새끼가 자꾸 지도 취직하겠다고..."

"형이 돈 버니까 동생도 돈 벌고 싶은가보지."

"공장이거나 직장이면 나도 상관 없는데..."

"근데?"

"아! 아무튼, 따라할 사람이 없어서 나를 따라하냐!!"

"왜 나한테 화를 내."

"미안..."

"그리고. 니가 어때서? 너 생각보다 좋은 애야."

"음?"

침대에 누워 이야기를 나누던 두 사람이었다.

김선아가 다정한 표정을 지으며 이정석의 몸 위에 엎드려 말했다.

"너 그렇게 이상한 애 아니야."

"...내가 어떤데?"

"어떻긴. 돈 잘 벌지. 자기 일 열심히 하지."

"난 대학도 안 갔잖아."

"그거야말로 무슨 상관인데. 나도 너 만나면서 대학 관두고 취직이나 할까? 그 생각 했었어."

"...왜? 내가 뭐라고? 난 그냥 고깃집에서 불판이나 갈고 다니는 놈인데."

"정석아. 다 그러고 살어. 그리고 너 계속 손님들 고기만 구워줄 거 아니잖아. 언젠가 니 가게 차릴 거 아냐."

"그렇지. 그건 꼭 할 거야."

"자기 꿈과 목표를 위해 걸어가는데. 내가 볼 땐 너나 마하나 다를 거 없어."

"하하하! 에이. 아무렴 구마랑 나를 비교하냐."

"니가 어때서? 내 남자친구라서 하는 말이 아니라. 내가 볼 땐 너도 잘하고 있어."

"..."

"자신감을 가져. 너 그렇게 빠지는 애 아니야. 적어도 내가 볼 땐 마하보다 니가 더 나은 부분들이 많아."

이정석이 벌떡 일어나 김선아를 눕혔다.

깜짝 놀란 선아가 멀뚱멀뚱 그를 보는데, 뜨겁고 딱딱한 것이 아랫 배를 찌르고 있다.

"야...?"

"선아야 우리 한 번만 더 해보자."

"갑자기... 왜?"

"그냥. 하고 싶어졌어."

그날 밤 이정석은 사랑의 힘으로 5분의 벽을 넘겼다.

평상시도 예쁘다고 생각했던 여자친구는 거짓이 아닌 진짜 느끼는 표정과 커져가는 신음 소리를 들려주었다.

맹렬하게 파고드는 마음이 몸을 뜨겁게 만드는. 두 사람에게 새로운 자신감을 키워주는 시간이었다.

화려하지 않아도, 유명하지 않아도. 그들만의 이야기를 키워가는 사람들이 있었다.

* * *

다음 날. 이혜정의 모친이 운영하는 중개사무소.

장사 중 쉬는 시간을 맞아 이정석이 찾아왔다.

"사장님."

"어. 정석아."

"저번에 말씀드렸던 집 나왔어요?"

"쉬는 시간이야? 잠깐 앉아 볼래?"

고깃집 취직 1년 차. 연애 8개월 차.

모텔비도 만만치 않고 여기저기 남들 쓰는 곳 가는 것도 찝찝하던 찰나 이정석은 독립을 꿈꾸고 있었다.

그동안 모아둔 돈으로 전셋집이라도 구해볼 마음이었는데.

"마하도 그렇고 너도 그렇고, 참 빠르다. 구 사장이 있어서 그런가?"

"사장님. 제가 두 사람이랑 비교가 되나요."

"왜 안 되니. 정석이 너도 아파트 살 수 있어."

"네? 저 그냥 빌라 전세나 하나 얻으려고 했었는데요."

"정석아. 들어 봐."

이혜정의 모친은 다양한 부동산 전략을 알려주며 뼈있는 조언을 건네주었다.

"그런 제도가 있어요?"

"있지. 특히 정석이 너는 1년동안 꾸준히 일을 했으니까. 직장인으로 대출이 나와."

"오... 대출..."

"대출이 나쁜 게 아니야. 정석이 너 계속 일 할 거지?"

"그럼요. 근데, 저 결국 군대도 가야 되고."

"들어 봐. 아줌마가 볼 때는 말이야."

사회초년생에겐 국가에서 제공하는 다양한 혜택이 있었다.

쉬운 길은 아니지만, 그래도 어떻게 저렇게 집을 구매하는 방법을 들었다.

"그렇게 대출로 집을 살 수 있다고요? 저는 몇천만 가져가고?"

"그럼."

"결국 다 빚지는 거잖아요."

"이자는 감당해야지만, 그래도 아줌마 말 믿어 봐. 이자 부담보다 집값 상승이 더 클 거니까. 나중가면 돈 들고와도 집 사기 어려워진다?"

"음. 그럼 제가 군대가면 그 집은 어떻게 하고요?"

"그땐 전세를 줘야지."

"전세금은 제가 쓰고요?"

"써도 되고, 가지고 다른 데 투자해도 되고."

"전세금은 빼줘야 하는 거잖아요?"

"다른 세입자를 받으면 돼."

사회인 1년 차.

동갑내기 친구들이 대학에서 학점에 몰입하고 있을 때 이정석은 자산에 관하여 알게 되었다.

부동산을 들리고 다시 가게로 돌아온 이정석은 관련된 내용을 들고 구마윤에게 상담을 가졌다.

"사장님. 저... 아까 혜정이네 아줌마 보고 왔는데요."

"응."

구마윤도 좋은 내용이라며 하고 싶으면 그렇게 하라고 해준다.

"정말 그래도 돼요? 제가 집을 가진다고요?"

"그럼. 형도 그렇게 자산 좀 가지고 있어. 많은 건 아니지만. 그때그때 전세금으로 가게에도 투자하고, 확장도 하고. 사업하는 사람들은 어디든 돈 나올 구석이 있는 게 나쁠 건 없어."

"우와."

"왜?"

"아니요. 전 아파트 같은 건 대학 나오고 대기업 들어가야 살 수 있는 줄 알았거든요."

"야. 그런 게 어딨냐. 집이 직업 따라가는 것도 아니고."

평범한 사람도 구색을 갖추고 살아갈 수 있다.

이정석은 주변을 통해 그런 걸 배워나갈 수 있었다.

어딘가 미래가 열리는 기분이었다.

더 열심히 일하고 손님들을 맞아야겠다는 뿌듯함이 하루종일 그의 가슴을 채우고 있었다.

그리고 그날 밤. 한주 고 출신. 실업팀에서 선수 생활을 하고있는 이동민이 가게로 찾아왔다.

"어서오세요! 어? 동민아!!"

"정석아."

"여. 후배들 밥 사주려고 왔어?"

"아니..."

"혼자야?"

"응. 마윤이 형님은...?"

어딘가 고민이 깊어 보이는 얼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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