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륜기로 가버렷-206화 (206/401)

< 성공의 사다리를 올라라. (6) >

"미스터 한. 여기오니까 진짜 동계올림픽 같네요."

"스키장과 리조트. 익숙한 풍경이지?"

"그래도 역시 잘츠부르크가 더 아름다운 거 같아요."

"거기는 여기에 비하면 큰 도시니까."

세스트리에네에 도착한 한상률과 스테판 발트베르거.

한상률의 AD카드를 가지고, 두 사람은 24시간 운영중인 선수촌 식당을 찾아갔다.

대회도 막바지에 다다르고 있어 각 나라에서 몰려든 선두들이 파티를 즐기고 있었다.

"나랑 있기 번거로우면 사촌 동생한테 연락해도 돼."

"미스터 한이 저랑 있기 귀찮으신 거 같은데요?"

"무슨 소리야. 주변에 다들 동계 스포츠 선수만 있는데, 육상선수 만나니 반갑지."

구마하가 없는 상황에서도 두 사람은 서로를 편하게 대하며 맥주로 건배를 나눴다.

"이번에 마하 스키 코치가 스테판이랑 동갑인 친구야."

"인터넷에서 봤어요. 원래 스키 선수 였다고."

"마하 때문에 금메달 코치가 됐지. 김 코치도 앞으로 인생 많이 피곤해질 거야."

"왜요? 좋은 거 아닌가요?"

"오늘 마하가 무슨 얘기 안 해?"

"조금... 연맹과 갈등이 있다고."

"내가 볼 때 이 녀석이 슬슬 운동이 버거워지고 있어."

"..."

"육상을 그렇게 좋아하던 녀석이 운동이 버거운데, 스키는 당연히 은퇴하겠지."

김정준은 코치 데뷔전에서 금메달을 만들었다.

설상연맹은 앞으로 그를 전폭적으로 신임할 것이다.

그리고 매번 김정준에겐 이번 올림픽에서와 같은 성과를 기대할 것이다.

"한국에 있는 스포츠 연맹은 그렇게 깔끔한 집단이 아니라서..."

"우리는 그런 연맹도 없어요."

"뭐? 오스트리아가?"

"축구나 잘 되있죠. 육상은 뭐. 하하하!"

두 사람은 다시 맥주잔을 나눈다.

"전 오히려 한국 같은 나라가 목표가 뚜렷해서 좋을 거 같아요."

"흠. 각자 느끼는 바가 있겠지. 환경이 다르니까."

"아까 잠깐 들었지만. 미스터 한은 은퇴하고 어땠어요?"

"글쎄. 난 국제대회 결승은 커녕 올림픽이란 무대도 못 가본 사람이라."

한상률이 자신의 이야기를 건네준다.

대학 때 선수를 은퇴하고 군인이 된 이야기.

선생님이 되어 무료하게 살아가던 이야기.

그리고 마침내 어느날 한 조그만 아이가 찾아온 이야기까지.

"역시, 마하가 미스터 한의 인생을 바꿨군요."

"많이 바꿨지. 솔직히 나도 그냥 사는대로 살아가고 있었다는 걸 부정할 순 없어."

"...어떻게 견디셨어요?"

"그냥. 다 이렇게 사는구나 하고."

"..."

"스테판. 나 자신을 특별하게 생각하는 건 좋아. 하지만, 내가 특별한 만큼, 다른 사람도 특별하지 않을까?"

스포츠 선수였기에 그런 인생을 살았을 뿐. 걸어온 시간에 따른 보상을 있으면 좋지만, 그것을 얻지 못했다 하여 실패한 것이 아니다.

모두가 그렇게 살아간다.

그렇다고 그들 모두가 실패자는 아니다.

"공부만 하던 평범한 아이가 있어. 이 아이는 과학자가 되고 싶었지."

"사이언티스트랑 우리는 다르잖아요."

"하루하루 시간을 보내야 한다는 건 같잖아."

뚜렷한 결과가 없다고 얻은 것이 없다고 여기지 마라.

우리는 스포츠 선수로 살아왔기에 남들이 가지지 못한 것들을 알고 있다.

"...그게 뭔가요?"

"노력은 배신하지 않았다는 것."

"미스터 한. 이해되질 않아요. 메달을 얻지 못했는데, 노력이 배신하지 않았다니."

"운동은 내 안에 성실함을 남겨줬더라고."

하루하루 고된 훈련을 해온 나날들은 지금도 무료한 일상을 걷는데 있어, 하루하루를 걸을 수 있는 근력을 키워주었다.

"말했지? 선생님 하는데 정말 지루했다고."

"하하..."

"근데 난 한번도 결근을 해본 적이 없어. 아이들을 좋아하진 않지만, 누구보다 성실한 선생님이었다고 자신 해."

나는 노력을 했었다. 단지, 내 실력이 거기에 미치지 못했을 뿐.

스포츠는 내 안에. 정확히는 내 몸에 수많은 자산을 남겨 주었다.

나이들어도 지치지 않는 체력과 튼튼한 바디.

성실함.

노력할 수 있는 자세.

"군대에 있을 때도 난 그럭저럭 할만했어. 오히려 재밌었지."

"마인드가 대단하시네요."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다고 여기면 안돼. 스테판은 메달을 얻지 못한 게 아니야. 넌 올림픽 결승무대를 밟은 선수야."

"..."

한상률의 이야기에 스테판 발트베르거가 눈을 질끈 감으며 마음을 추스린다.

"마하가 왜 미스터 한과 같이 가는지 알 거 같아요."

"하하! 그것도 말은 바로 해야지. 이놈이 나와 가는 게 아니라, 내가 이놈을 붙잡았지."

"머니 때문에?"

"하하하하! 너무 그렇게 속물적으로 보지는 말고."

잘 할 것이다.

넌 전 세계 스포츠 맨 가운데 결승의 무대를 밟은 선수였다.

"마하랑 너를 비교하지는 마. 그놈은 달라."

"그렇죠."

"그놈은 그놈 나름의 인생이 있어."

"여자도 많고요."

"하하하... 그것도 참..."

"미스터 한. 솔직히 너무 풀어주는 거 아닙니까?"

"스테판도 마하 가족 관계는 알 거 아냐?"

"애정결핍인가요?"

"엄청난 결핍이지. 만약 마하한테 모든 걸 버리고 여자냐 메달이냐 선택하라면 그놈은 거두절미하고 여자를 선택할 거야."

"그건 그거대로 안타깝네요."

* * *

왜 이렇게 귀가 간지럽냐. 감독님이 날 씹나.

두 사람은 잘 도착했으려나? 어색하지 않게 둘이 잘 지내고 있으면 좋겠다.

아무튼, 저쪽과 달리, 난 사쿠라와 깊은 사랑을 나누고 있었다.

어느새 자세가 바뀌고 내가 아래로 가고 그녀가 위에 올라타고 있었다.

"흐음 으응."

사쿠라가 골반을 부드럽게 움직이며 쾌감을 끌어 올리고 있다.

예쁜 몸매다. 허리가 진짜 가늘어.

와... 이런 몸으로 어떻게 그런 점프와 회전을 하는 거지?

양손으로 사쿠라의 골반을 꽉 움켜쥐자 그녀가 고개를 위로 들며 가쁜 호흡을 흘린다.

"피곤해요?"

"으으음... 괜찮아요."

그래. 아까 오후부터 벌써 3회전이다.

그녀는 내일도 시합이 있어. 너무 무리하게 시키지 말자.

"사쿠라. 누워봐요."

쾌락을 즐기길 지켜보다 움직임이 둔해질 즈음 자세를 바꿔 눕혔다.

그녀도 눈을 감고 몸에 집중하고 있다.

허리를 움직여 다시한번 사쿠라의 반응을 뜨겁게 만들며 빠르게 섹스를 마쳤다.

"하아 하아... 쿠 상은 어떻게 매번..."

나도 이제 한계다. 아까 데보라에 오늘 사쿠라랑 세 번이나 했는데, 매번 사정량이 어마어마했다.

오르가즘의 여운을 느낀느 사쿠라를 끌어 안으며 말해줬다.

"하아 하아~ 쿠 상."

"사쿠라."

"응...?"

"...내일도 나랑 만나고 싶어요?"

그녀가 애절한 눈빛으로 나를 보았다.

"응."

"나도 마음 같아선 올림픽 끝나도 이대로 계속 둘이 오래오래 같이 지내면 좋겠다 싶은데."

기다리던 소식인가 그녀의 얼굴에 화색이 돈다.

"근데 어려울 거에요."

"괜찮아요... 이해해요."

실망하는 얼굴이다. 그녀의 내면에 타오르던 뜨거운 반응이 빙상장에 던져지는 것 같았다.

아니다. 내 말 뜻은 그런 게 아니니 끝까지 들어봐라.

"사쿠라는 올림픽의 영광이 나라고 생각해요?"

"..."

"방금 그랬잖아요. 올림픽에 와서 큰 선물을 가져가고 싶었다고."

"맞아요..."

"아니야. 당신은 내일 메달을 딸 거야."

그녀의 눈빛이 바뀐다.

들으면서도 그 말을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의심하는 시선이었다.

"오늘 진짜 잘했어요. 내일도 오늘같이만 하면."

"쿠 상... 나도 우승 경험 있고. 세계선수권도 한번 우승했었고. 쇼트에서 이정도 순위는 자주 올라왔었어요."

"그러니까."

"하지만 지금은 올림픽이잖아요. 홀트도 있고, 카트린이나... 카에데... 다들 쟁쟁한 선수들이에요."

"그 사람들 다 이기고 사쿠라가 우승할거에요."

지금 일본은 메달이 없다.

우리는 나도 그렇고 금메달이 역대 최고로 많았다.

일본 사람들도 자존심 상당히 구겨지고 있을 것이다.

그런 가운데, 사쿠라 아야가 피겨에서 금메달을 얻어 일본인의 자존심을 회복시키면.

보고 싶어도 만날 수 없는 건 사쿠라가 아니라 내가 될 것이다.

"난 사쿠라가 이번 올림픽에서 일본인의 자존심을 지켜주는 사람이 될 거라고 봐요."

"쿠 상... 난 그런 희망없는 이야기는 싫어해요."

"왜 희망이 없다고 생각해요?"

우승. 메달에 대한 기대. 금메달을 따지 못한 사람들은 모르겠지만, 경험해 본 사람으로선 한 가지 비법이 있다고 알려줬다.

"그게 뭔데요?"

"난 시합에 나가기 전에 절대 내가 지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나의 우승은 당연한 거야. 다만, 그걸 어디까지 실현할 수 있느냐에 문제가 있지."

"..."

"오늘 사쿠라의 경기를 보면서 그걸 느꼈어요."

미국의 알레시아 홀트도 뛰어난 실력이었지만, 내 시각에선, 기량면에 있어 사쿠라 아야는 오늘 피겨 선수들 가운데 월등한 능력을 보여주었다.

그녀는 자연체의 경지에 올라 시합을 펼쳤다.

"아마, 내일 메달을 결정지을 경기를 앞두고 많이들 떨고 부담을 이겨내지 못 할 텐데, 당신은 오늘같이만 하면 이길 수 있을 거야."

"그런 얘기를 왜 하는 거에요...?"

"상처받고 싶지 않아서."

누가 들으면 우습다고 할지 몰라도 난 이 사람이 좋아졌다.

안다. 만난지 열 두시간도 되지 않았고, 그 사이에 세 번이나 섹스를 한 탓에 올바른 판단을 못하고 있을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이 사람이 좋아진 건 확실하다.

아마 앞으로 서로를 알아가면 더 좋아질 것이다.

그녀에겐 어딘가 상대방을 위해주는 헌신적인 모습이 느껴지니까.

그것이 내가 가진 명예인지, 아니면 이런 호텔에서 느끼는 호화롭고 안락한 생활인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나에게 있어선 그 헌신이라는 것이 놓치기 싫은 애정의 둘레 안에 들어가 있었다.

바라만 보는 사랑은 혜정이 하나로 족하다.

두 사람을 마음에 품고싶지는 않어.

그래서도 지금 정리를 하고 있었다.

"피겨 메달리스트. 동양인 최초. 일본도 최초죠?"

"아니요. 이토 미도리라고 은메달을 따신 분이 계세요."

"금메달은 아니었잖아."

"..."

사쿠라의 위로 올라가 깊은 키스를 해줬다.

"그러다 안 되면... 난 정말 크게 상처를 입을 거에요."

"만약 아니라면 내가 평생 책임질게."

"...쿠 상."

"진짜로. 그땐 나를 보러 와요. 나랑 같이 있자."

"..."

그녀의 초롱초롱한 눈동자가 나를 본다.

메달을 따도 좋고, 실패해도 나라는 사람을 얻을 수 있다.

"나랑 평생 이렇게 같이 살고, 손녀도 보고. 할머니가 먼저 꼬셨네. 할아버지가 먼저 내 몸에 손을 댔네. 그런 걸로 싸우고 웃고 그렇게 나이들자고요."

"하하. 너무 좋아요."

침대에서 건네는 달콤한 거짓말이 아니었다.

그녀는 이로써 시합에 대한 완전한 부담을 덜어냈다.

"쿠 상..."

"아. 우리 욕조 들어가야 하는데."

"후후후. 같이 가요."

오늘 피겨 경기를 보기로 한 건 정말 좋은 선택이었다.

아니. 이번 동계올림픽에 참가한 것이 진짜 좋은 결정이었어.

어쩌면 내가 안일하게 생각하고 있었을지도 몰라.

살면서 나 자신이 대단하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별로 없고, 심지어 주변에서 이제는 멋지다 잘 생겼다 해줘도 난 아직도 내가 왜 멋있는지 모르니까.

예전에 수빈이가 그런 일을 꾸미면서까지 나에게 경각심을 줬지만. 한국에서나 통하는 줄 알았지, 내가 세계적으로 그만한 인지도가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

아테네와 토리노 포함 4개의 금메달도 그냥 있으니까 좋고, 열심히 했구나. 잘했다. 그정도의 느낌만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도 주변에 메달은 메달일 뿐이라는 말을 할 수 있었다.

부담 느끼지 말고 시합에 집중하면 좋은 결과가 올 거라는 말을 쉽게 건네줘 왔다.

하지만, 그 '좋은 결과'라는 단순한 결론을 얻고자 상택이 형이나 지금 나와 욕조에 누워 피로를 풀고있는 사쿠라 아야. 오늘 빙상 경기장에서 본 그 많은 여린 선수들이 몸을 부숴가며 뛸 리가 없지 않은가.

"사쿠라."

"응?"

"솔직히 어때요? 메달과 나. 둘 중 하나를 택하라면?"

"..."

"후후. 너무 짓궂은 질문인가?"

평생을 매달려 온 시간이다.

어떻게 감히 나 따위가 비교가 될 수 있는가.

사쿠라는 눈물을 흘리며 키스를 해준다.

"꼭 이길게요."

"잘 할 거예요."

자연체에 도달한 사람도 성공의 사다리를 버릴 수 없다.

그것이 기본인 것이다.

우리는 선수니까.

내가 사랑을 꿈꾸듯 누군가는 성공을 꿈꾼다.

이제, 내가 이룬 성과라고 다른 이가 그리는 꿈을 간단히 말하지 않겠다.

나는 그냥 시작부터 운이 좋았을 뿐. 그래서 그런 결핍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던 거야.

누가 나의 사랑을 찾아가는 마음을 간단히 말하면, 나부터도 불같이 화를 낼 거니까.

"여기는 선수촌이 이렇게 생겼구나."

"예쁘죠? 장난감 마을 같애."

"세스트리에네는 그냥 스키장 호텔같이 생겼는데..."

"후후후."

자정이 가까운 시간, 호텔을 나와 토리노 도심에 위치한 선수촌으로 사쿠라를 데려다주고 있었다.

"자고 가면 좋은데."

"안돼요. 시합에 집중해야 하니까."

"하긴 둘이 있으면 아침에 또 매달릴 거야."

"쿠 상."

"응?"

사쿠라가 이별의 키스를 해준다.

나도 아련한 느낌을 남기며 하루 짧지만 강한 만남을 마쳤다.

"메달 못 따면 진짜 찾아갈 거에요."

"하하! 이럼 내가 뭘 응원해야 하는 거지?"

"갈게요. 안녕."

"푹 자요. 좋은 꿈 꾸고."

메달은 메달일 뿐이라 여기는 건 변함 없다.

그를 위해 많은 것이 희생되는 체육계의 현실도 바뀌어야 한다고 믿는다.

하지만, 이제는 단순히 내 생각을 주장하는 게 아닌, 다른 이의 꿈을 먼저 응원해주고 싶어진다.

단순히 '힘내.' 한 마디를 건네는 게 아닌, 진심으로 나도 그들이 우승하길 바란다.

다음 날 나는 새벽 일찍 세스트리에네로 향했다.

상택이 형의 경기를 보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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