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챔피언의 무게 (5) >
"조금 진정돼?"
-어? 뭐라고?
"진정됐냐고."
-응. 아까부터 조금씩 가라앉고 있었어.
오후 5시. 쇼트트랙 예선전은 시작했을 것이고, 한국도 자정이 넘었다.
혜정이도 나른한가 젖은 이불과 시트를 한쪽에 밀어놓고 눈을 껌벅거리고 있었다.
"우리 내일도 볼까?"
-내일은 약속 있어서 나가봐야 돼.
"너 남자친구 없다면서?"
-남자 없으면 약속도 없냐. 선아 대학 가서 입을 옷 산다고 같이 명동 가기로 했어.
부스럭 부스럭 엎드려 모니터를 뚫어지게 보는 혜정이였다.
너무 귀여워서 사진으로 찍어 지갑에 넣고 다니고 싶었다.
-마하야...
"야. 졸리면 자."
-넌 왜 이렇게 나한테 잘 해줘?
"하하하. 내가 뭘 그렇게 잘해줬다고."
-그렇잖아. 집도 빌려주고. 짜증내고 있다고 이런 것도 해주고...
"좋긴 좋았나보네."
-좋았어. 나 너랑 하는 거 좋아. 늘 기분 좋았어.
그래서 나랑 있는게 무섭다고. 본인이 쾌락에 잠기는 게 싫다고.
안다. 예전부터 그랬었지.
대화의 흐름이 나쁘지 않았다.
뭔가 오랜만에 둘이 사랑을 나누고 침대에 누워 별 소리 다 하는 그런 기분이었다.
혜정이 마음은 잘 알고 있으니, 나도 서두르지 않았다.
"잘 해주는 데 이유가 어딨어. 그냥 그게 나도 좋으니까 그러지."
-너 다른 여자들한테도 이래?
"하하하. 야. 아 진짜... 너니까 그러지."
-그럼. 그 언니 있을 때도 나 좋아했어?
씁쓸한 미소가 지어진다. 그녀의 질문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야. 수빈이랑 있을 땐 니 생각 전혀 안 했어."
-나 때문에 둘이 헤어진 거지?
"딱히 그런 것도 아냐..."
-그 언니 한번 왔었다고 했잖아.
"어."
-나한테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갔어.
"..."
나도 정석이한테 이야기는 들었다.
수빈이가 형한테 찾아와서 울고 빌고 난리가 났었단다.
그때만 하더라도 잘못은 생각지도 않고, 어떻게 인간이 뻔뻔하게 굴 수 있을까 싶었는데.
그녀는 그녀대로 노력하고 반성하고 있었구나.
사과를 하다니... 한수빈 성격에 정말 쉽지 않은 일인데...
-미워하지 마. 감정 가지는 사람만 힘들어.
"알았어. 또 잔소리다."
그래. 이제 한수빈을 미워하지 않으련다.
좋은 것만 보자. 그냥 어떤 안타까운 오해가 쌓여 그렇게 됐을 뿐. 좋았던 것도 정말 많았다.
누군가를 미워하는 것보단 좋게좋게 추억하고 싶다.
"고마워 혜정아."
-뭐가?
"그냥 다."
그 순간, 이 친구와 연애를 해도 지금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잊지 마라. 얘는 나 때문에 큰일을 당할 뻔했어...
한수빈의 오해든 뭐든, 나를 몰랐다면 벌어지지 않았을 일이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사과와 감사를 듣는 애 입장은 어떻겠냐.
혜정이는 혜정이대로 부시럭 부시럭 뒹굴 거리며 자세를 바꾼다.
"자려고?"
-졸리긴 해. 무엇보다 엎드려 있으니까 목이랑 어깨가 너무 아퍼.
"야. 잘 거면 씻고 자. 넌 꼭 하고 나면 기절하듯 쓰러지더라."
-몰라. 이런 거 너무 오랜만이라 기운이 없어.
"혜정아. 그냥 내 침대 써. 이불 깔고 자면 너 허리 아프잖아."
-니가 그걸 어떻게 알어?
"너 옛날에 내 방에 침대 없을 때도 꼭 하고 나서 자고 일어나면 허리 아프다고 낑낑거렸어."
-내가 언제?
"뭐냐. 고작 2년 전인데."
-그랬나? 몰라. 기억 안 나.
혜정이가 말하길, 이렇게 보면 우리도 꽤 오랜 시간 알고 지내는 거 같단다.
"오래 됐지. 정말 오래 '알고'는 지냈지."
-후후후. 마하야. 구마하~
무슨 말이 하고 싶어 저렇게 코맹맹이 소리로 부르나 가만히 웃으며 보고 있었다.
-너 그거 알어? 너랑 있으면 나도 성장하는 기분이다?
"가슴이 좀 컸나?"
-야. 이게 진짜...
"보다 더 성숙은 시켜줄 수 있지. 숙성이라고 할 수도 있고. 숙성된 여인."
-제발 유치한 말장난 좀 하지 말고... 짜증 나...
* * *
이혜정도 감정을 달래며 모니터 속 구마하에게 묻는다.
"넌 나 왜 좋아해?"
-그냥. 나도 몰라.
"예뻐서?"
-예쁜 것도 있는데. 이제와서 내가 널 좋아하는 이유가 단지 외모 하나는 아니지.
"그럼. 내가 너한테 가벼운 사람이라서?"
-뭐래. 너 적당히 무게 나가거든. 내가 힘이 좋으니까 가볍게 드는 거지."
"아. 야!! 뭐라는 거야. 얘가!"
-너 한 60정도 나가냐?
"미쳤나 봐! 나 50도 안 나가거든!!!!"
-오~ 그거 밖에 안 나가? 가볍긴 하네.
"아니!! 내 말은 그런 뜻이 아니라..."
씩씩 거리면 뭐하냐. 얘가 늘 그렇지 뭐.
이혜정은 혼자 피식 웃음을 흘리며 감정을 눌렀다.
그리고 다시 턱을 괴고 누워 화면 속 작은 구마하에게 말한다.
"나도 너 좋아."
구마하는 좋아한다는 표현이 왜 이렇게 슬프게 들리냐며 웃어보인다.
이혜정도 피식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야."
-알어 나도.
"너 진짜로 나랑 사귀고 싶어?"
-하하하! 야! 그냥 졸리면 자라니까!
"그럼 내가 부르면 언제든지 올 거야?"
구마하는 답하지 않는다. 이혜정도 미소를 유지한 채 하던 말을 이어갔다.
"너 훈련중인데. 큰 시합 앞두고 있는데. 전 국민이 널 기다리고 있고 올림픽 정말 중요한 시합 앞두고 있을 때. 내가 부르면 다 버리고 나랑 있어 줄 수 있어?"
-그런 순간에 사람을 부르는 게 문제 아닐까?
"정말 그 사람이 너무 보고 싶은 순간이 있잖아. 위기에 빠졌다든가. 악의 함정에 빠져있다든가."
구마하가 장난 하나 섞이지 않은 진지한 눈빛으로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
무게감 있는 그의 모습에 이혜정의 가슴이 두근 거린다.
늘 어릴 때 모습에 몸만 커졌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보니까 얘도 다르긴 하구나.
-노력할 거야.
"됐어. 니 말대로 내가 그렇게 개념 없는 애도 아니고. 그런 때 널 왜 불러. 경찰 불러야지."
-내가 갈게. 내 여자친구 내가 구해야지."
"암튼, 난 그런 애야. 그런 순간이 아주 없다고도 할 수 없고. 결국 그러다보면 감정이 쌓여 언젠가 너도 날 싫어하게 될 거야."
이혜정이 자신을 말해준다.
남들이 보는 것만치 나는 그렇게 좋은 사람이 아니다.
생각보다 더 많이 징징거리고 애정을 갈구한다.
평범한 집안에서 조금만 설명해도 집안 구조나 가구 배치를 떠올릴 수 있는 그런 환경에서 자랐으며. 자식에게 들키지 않으려 몰래 매일같이 싸우는 부모님의 다툼을 들으며 불안해했고. 형제자매가 없어 외로움도 많이 타고, 그러다 보니 나이들어서도 작은 분쟁에 민감하고 짜증이 밀려오며 바라는 것은 많다.
사람들은 얼굴 예뻐 부럽다는 시선으로 봐주지만. 물론 그건 부모님한테나 주변에 너무나 감사한 일이지만.
"하지만 결국 외모밖에 안 보인다는 건, 내가 어떻게 노력으로 얻어낸 것이 없다는 소리도 되니까."
-예쁜 거 좋지. 뭐 그걸 그렇게까지 말해.
"세상은 얼굴만 갖고 살 수 있는 게 아니니까. 그렇게 내가 소중하고 아름다운 사람이면 왜 전 남자친구들이 날 버리고 갔겠어."
-누가 누굴 버려. 또 오버해서 생각한다.
"난 너가 부러워. 마하야."
-나 뭐? 나한테 부러워 할 게 뭐가 있는데?
"넌 노력으로 많은 걸 이뤄내고 있잖아. 사람들에게 인정도 받고. 좋아해주는 이성도 많고."
-하하하. 그걸 또 왜 그렇게 이어붙여. 그리고 난 지민이 형이 아니야. 바람 안 펴."
"알어. 안지민은 너같이 날 기쁘게 해준 적은 없어."
이혜정이 손을 내려 가볍게 몸을 쓰다듬는다.
가슴부터 골반 그리고 가랑이 사이까지. 오늘만큼 내가 나라서 사랑스럽다는 느낌은 처음이다. 자위 끝에 허무함이 아닌 애정을 느끼다니. 물론 이것도 그가 있어 가능했던 이야기겠지.
"너한테 난 특별한 의미가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해."
구마하는 부드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다는 걸 보여준다.
"나한테도 너는 그런 사람이야. 널 보면 뭔가 애정 그 이상의 특별함이 있어."
이혜정은 다시 진지하게 화면을 보며 말했다.
"지금 우리가 서로 연애하면 분명 행복하고 좋은 순간이 많을 거야."
-그렇겠지.
"아픔을 이겨가며 둘만의 이야길 단단하게 만들 수도 있을거라 생각해 나도."
-그럼 됐지 뭐.
"근데, 만에 하나 무슨 일이 들이닥쳤을 때. 나는 그 아픔을 도저히 이겨나갈 자신이 없어."
이혜정도 그가 좋은 애라는 걸 알고 있다.
마하는 정말이지 남편감으로 삼아도 부족하지 않을 사람이다.
즐겁고 다정다감하며 멋있고 능력 있다.
유명하고 사회적으로도 큰 주목을 받는다.
무엇보다 사랑을 나눌 때 여자의 감정을 더 없이 황홀하게 만들 줄 안다.
그렇기에 만에 하나라는 상황이 닥치게 된다면.
"난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게 무너질 거야."
-만에 하나의 상황이 뭔데?
"어떤 상황. 정말 그 어떤 상황..."
-여자?
이혜정도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언니 봤을 때 솔직히 깜짝 놀랬어. 세상에 이런 사람이 있구나 하고... 얘가 이런 사람을 만나는구나. 자신감이 훅 떨어졌었어."
-수빈이도 너 보면서 그런 기분 느꼈다고 했어.
"몰라. 난 그렇게 잘난 사람아닌데. 만약 그런 여자가 또 니 주변에 맴돌고 있다면, 도저히 내 힘으로 버틸 수가 없어."
-내가 안 넘어가면 되는 거 아냐?
"넌 아니라고 하지만, 물론 그 말을 믿지만."
* * *
-사람 일은 모르는 거니까. 세상엔 정말 매력있고 능력있는 사람들이 너무 많은데, 넌 그런 레벨이 어울리는 애가 됐는데. 바쁘고, 외국도 자주 나가는데.
혜정이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난 할 수 있는 거 아무것도 없고. 너한테 짜증만 부리고 매달리기만 해야 될 거고. 그러면서도 할 때는 좋아서 어쩔 줄 모르고. 그럼 진짜 내 못난 모습만 보여주게 될 거 같아. 난 그게 너무 싫어. 그렇게 되는 게 너랑 행복해지는 것보다 더 무서워.
"두렵다는 게 그런 뜻이었구나."
-응... 내 마음이 그래. 너가 싫은 건 진짜 아니야.
어떤 마음인지 이해할 수 있다.
나도 이번에 사랑을 해봐서 안다.
행복해지기 위한 사랑을 하는 데 불안함을 안고 가는 건 지옥 길이니까.
"알았어. 사귀자고 보채지 않을게."
-그러니까 나한테 누구 만나라 같은 소리 하지 마. 지금은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으니까.
우리가 서로를 좋아하고, 하지만 이어지질 않고. 지금은 그것만으로 좋단다.
억지로 밀어붙이지 말자고 하는데.
"하하하! 야!! 니나 하지 마! 지가 먼저 나한테 딴 사람 만나라고 그랬으면서..."
-난 평범한 애니까...
"나도 평범한 놈이야!"
-니가 뭐가 평범해.
혜정이가 갑자기 눈을 취조하듯 부릅 뜨며 물어본다.
-너 솔직히 말해 봐. 이번에도 여자들 만났지?
"음."
-거짓말 하면 싫다고 했다.
"만났지. 만났다고 했잖아. 아까도."
-것 봐. 그럼 그렇지.
하지만, 미워하진 않겠단다.
본인이 받아주지 못하는 마음에 대한 불만이라고 생각하자면, 그 또한 나라는 인간을 이해할 수 있다고 해준다.
"열린 마인드네."
-상대가 상대니까. 그 언니도 봐 봐. 그런 사람도 너한테 매달리는데.
"..."
-근데 나는 딱히 연애하고 싶다는 생각은 없어. 누굴 가볍게 만나고 싶지도 않고. 그런 거 싫어하니까.
"하하하... 어쩌라는 건지."
한국 가면 혜정이랑도 시간을 보내봐야겠다.
연애는 아니더라도 서로를 생각하는 마음으로.
그녀는 그녀대로 시간을 보내지만, 나는 자유롭게 지켜보는 마음으로.
폴리아모리 같은 사랑도 있는데, 이런 사랑도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혜정아. 너 근데 그러다 내가 너 아닌 또 다른 누군가를 진짜로 사랑하게 되면 어떻게 할 거야?"
자나? 애가 말이 없지?
"혜정아?"
-응...?
자네. 엎드려서 쿨쿨거리고 있다.
잠든 김에 그냥 계속 자라고 하고, 나도 슬슬 나갈 준비를
-아! 나 식당에서 일한다!!
그러다가도 눈을 팍 뜨면서 일어나 말했다.
"야 그냥 자라니까."
-레스토랑이야. 합정에 있어. 우리 유니폼 입어. 스커트도 있고 나비넥타이도 하고.
"하하하."
-놀러 와. 오면 내가 서비스 많이 해줄게.
"오~ 서비스 좋지. 그럼 이왕지사 서비스 하는김에. 가슴 한번만 더 보여주면 안돼?"
-야!! 너 진짜 죽을래!!
"아하하하!! 잠이 확 깨지?"
혜정이도 일어난 김에 씻겠다며 머리를 부스럭거린다.
"그래. 씻고 자."
-시트도 걷은 김에 세탁기에 넣어놓고 자야지... 내일 아침에 바로 빨게.
"주부네 주부."
-자취생이 다 그렇지 뭐.
"이혜정. 집에 남자만 들이지 말고 친구들 불러서 같이 놀고 그래. 혼자 외로움 타지 말고."
-니네 집이잖아. 그러다 너랑 연관되면 이상한 소문 나는데?
"좋아한다는 말 한지 얼마나 지났다고... 또 딴소리야..."
우리 집에 내 흔적 들킬 거 없으니 그냥 사촌 오빠네 집인데 출장 중이라고 하라 그랬다.
-진짜 메달이 안 보이더라.
"형한테 있어. 올림픽 관련 기념품은 다 형이 가져가.
-으음. 그렇구나.
하고 싶은 거 하란다.
여자들 만나고 싶으면 만나란다.
그 마음 한구석에 자기가 있고, 또 자신이 날 감당할 수 있는 그 단계가 오면.
-그때는 거절하지 않을게. 약속해.
"좋아. 기다리지 뭐."
내가 믿고 따르는 두 명의 지도자가 있다.
우리 형이랑 감독님인데 두 분 다 그런 이야길 했었다.
사람의 인연이란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른다.
아니라고 단정하고 접어두지 말고, 열어두고 지켜봐라.
됐다. 이 정도면 최고의 고백이라고 생각한다.
그녀를 나만의 여자로 만들진 않았지만 우리는 서로에게 이어져 있으니까.
무엇보다 지금 나는 해야 하는 일이 있다.
챔피언으로서 무게감을 가지고 동료 선수단을 응원해줘야 하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