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륜기로 가버렷-185화 (185/401)

< 얼음을 녹이는 땀과 눈물의 이야기. (4) >

"아 이 씨발놈이 진짜..."

"하하하! 왜? 왜 또 뭐가? 뭐가 불만이라고 욕부터 날리는데?"

"개새끼야. 내가 너한테 동정받을 놈이냐?"

"그게 왜 동정이야 응원이지!"

"닥쳐!!"

모든 일정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왔다.

들어오자마자 아까 인터뷰 내용으로 상택이 형이 지랄지랄이다.

하여간 진짜 성격... 형도 피곤하지 않나...?

"이 새끼가 선배를 무슨. 야 너 대가리 박어."

"꺼져!!"

"..."

"뭐야. 나 진짜 해?"

"됐어 새끼야. 지금 너 건드렸다가 무슨 욕 들으라고."

오전까지만도 우울한 걸 벗어난 정도더니, 지금 상택이 형은 완전 부활을 이뤄냈다.

박상택. 개새끼. 미친 승부욕의 화신. 어이고... 제발 무사히 경기만 마쳐라.

"아~ 끝났다. 이제 뭐하고 노나?"

"후우. 진짜 개념 좀... 제발 자식아..."

"형. 우리 코스 연구할까?"

"됐어. 정준이 형이랑 아까 다 했어. 그리고 난 예선전 있어."

상택이 형이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말했다.

"두고 봐라. 이번엔 내가 메달 3개 따간다."

"오오~ 금메달 선언~!"

"..."

"왜?"

"메달을 따겠다는 거지, 그게 금메달이라곤 안 했어."

"아 뭐야. 메달하면 금이지."

"동메달 정도로 가자... 솔직히 금은 현실적으로 무리가 있다..."

"하하하! 끝까지 배짱있게 가라고!"

"야!! 원래 처음은 동메달부터 하나씩 따고. 그 다음에 동메달리스트가 열심히 후진 양성해서 금메달 만들고! 그렇게 가는 거야!"

어제는 상택이 형이 나를 위해 방을 비워준 만큼, 오늘은 내가 형을 위해 편히 쉬라고 방을 나왔다.

"아우 배고파..."

무엇보다 배고파서라도 뭐든 먹어야 했다.

어이고. 은근 스키 내공 안 써서 좋다고 느긋하게 타고 다녔는데. 막상 본 게임 끝나니까 나도 모르는 사이에 뭘 많이 썼었나 배고파 죽겄네.

올림픽 선수촌 식당은 24시간 운영되는 만큼 혼자 식당을 찾아가 밥을 먹었다.

"어! 구마하다!!"

하지만, 이곳은 시간을 불문하고 늘 사람이 북적이는 곳이라, 혼자 있고 싶어도 다른 외국인 선수나 코치들의 축하인사를 받았다.

"고맙습니다. 근데 저 일단 밥 좀."

"우리 옆에서 사진 찍어도 돼죠?"

"그럼요. V 해드릴게요."

영어를 공부하니 좋다.

선수들과 다양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그렇게 다른 나라 선수들도 만나고, 밥도 먹고 다시 그릇을 이것저것 채워서 자리잡고 앉는데.

"어?"

자신을 영국 바이에슬론 선수라 소개하는 여성과 만나 인사를 나눴다.

"아~ 네. 이름이 수잔이세요?"

"네."

수잔이라. 이름 예쁘다. 어딘가 한국적이기도 하고.

뭔가 서양인 얼굴인데 눈동자가 검은 것도 매력있게 느껴진다.

근데 단순 인사만 하고 갈 게 아닌가, 수잔이 자리를 잡고 앉아버렸다.

뭐 어때. 서로 도란도란 이야기도 하고 그러는 게 올림픽이지.

육상도 단거리와 중 장거리의 성질이 다르듯이, 수잔은 크로스 컨트리가 기본이 된 바이에슬론 선수라 또 다른 즐거운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그런데.

"원래는 어제 쿠랑 같이 있고 싶었어."

"어?"

"상택이가 내 얘기 안 해?"

"..."

잠깐만. 상택이 형과 영국 바이에슬론 선수라면...

"어... 그럼 어제 그...?"

그 순간, 수잔의 곁으로 또 다른 여 선수 한 사람이 다가왔다.

이번엔 나도 아는 얼굴이었다.

"데보라?"

"Guten Abend!"

2년 전 2004년 12월.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나는 1500m 선수 스테판의 초대를 받아 친구의 집에 머물며 크리스마스를 보내고. 그들 가족과 허물없이 지내며 영어도 익히고 독어도 배우고 또한 유럽의 문화(?)를 온 몸으로 체감하는 시간을 가졌다.

스테판네 삼촌이 유명한 스키선수였었는데, 나의 스키 스승은 정준이 형도 있지만 스테판네 삼촌이 더 먼저였었다.

데보라는 스테판네 삼촌의 작은 딸이었다.

즉, 스테판과는 사촌지간인데.

"쿠. 나 기억해?"

"하하. 물론이지! 아니 어떻게 여기서?"

그녀와 나와 크리스마스 클럽 파티에서 좋은 추억을 많이 만들었던 파트너였다.

(하아 하아 쿠~ 키스 미.)

(어디에 키스를 하라고 눈앞에 엉덩이 밖에 없는데. 여기?)

(아하하하하!)

머릿속에서 둘만의 추억을 떠올리며 수잔과 데보라를 번갈아 보았다.

"아니 어떻게 둘이? 설마 둘이 친구야?"

"JA~"

"Hi. again."

구불구불 자연곱슬 머리에 흰 피부를 가진 데보라.

그녀의 영국 친구 수잔 블레이크.

정말 세계는 좁구나. 이래서 올림픽이 지구 화합의 장이라고 하는 거야.

"어?"

그러나 둘이 전부가 아니다.

또 한 사람이 다가온다.

이번엔 어딘가 빅토리아를 연상케 하는 사람이었다.

금발에 파란 눈.

인형같은 외모를 가졌으나, 무표정한 표정이 어딘가 우울해 보이는 여성이었다.

"자스민이라고 해요."

"네. 안녕하세요."

"덴마크 사람이야."

"아 덴마크. 레고..."

"네 맞아요. 레고의 나라죠..."

"..."

"재밌으시네요. 후후."

세 사람 다 스키선수였다.

데보라는 원래 프리스타일 선수로 활약하던 걸 알고 있었다. 다만, 오스트리아는 워낙 선수층이 두꺼운지라 웬만큼 잘하지 않고서는 올림픽에 나오긴 어려웠는데 이번에 좋은 결과가 있었는가 보다.

"바이에슬론은 총쏘고 그러지 않나?"

"맞어 맞어."

"그럼 사격도 하겠다."

"코리아도 사격 잘하는 나라."

"하하하! 맞어. 우리나라가 사격 양궁 잘하지."

마지막으로 우울한 인형같은 쟈스민은 여자 알파인 스키 선수였다.

쟈스민은 데보라나 수잔보단 조금 더 존경어린 눈빛으로 나를 보고 있는데, 오늘 다운힐에서 메달을 딴 게 인상깊었었나 보다.

"쟈스민은 대회전 선수라고요?"

"네. 맞아요."

"오~ 잘 타시겠다. 난 아직 기술이 부족해서. 거기까지는."

"오늘 경기 너무 잘 봤어요."

"하하! 고마워요."

"정말 다시는 볼 수 없는 미친 레이스였어요."

"쿠. 너 진짜 왜 그렇게 달린 거야? 아빠도 전화해서 엄청 뭐라고 하셨어."

"아저씨 지금 전화 돼?"

"안 그래도 얼굴 보면 꼭 연락하라고. 다들 엄청 서운해 하고 있는 거 알어! 그것도 우리 도시에 와서!"

"미안... 그때 내가 좀 정신이 없어서."

늦가을부터 이곳 토리노로 오기까지 잘츠부르크에 머물면서 스테판이나 그 가족들과 인사도 못 나누고 운동에만 전념하는 시간을 가졌다.

한 번쯤 찾아가 볼 법 했는데. 그들이 내게 보여준 호의는 거짓이 아니었는데. 생각해보면 미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Ja. da ich bin"

데보라가 가족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안 그래도 마침 다들 모여있었는가, 아저씨한테 축하 인사도 받고, 스테판과도 오랜만에 인사를 나눴다.

"쿠. 죽일 놈의 자식."

"하하. 미안해..."

"너 여기 있는 거 마을 사람들 다 알고 있었어."

"진짜 미안. 혼자 있던 게 아니었어서..."

"됐어. 운동하는 건 알았어. 우승했으니까 용서해줄게. 덕분에 마을 사람들도 지금 좋아하고 있어."

"당케. 나 이제 대회 끝났으니까 가도 돼. 아니 그냥 내일 갈까?"

"쿠. 너 지금 여기오면 다신 못 돌아가. 이 동네 여자들이 절대 안 돌려보낼거야."

"하하하!! 그럼 나야 좋지."

오스트리아 사람들과도 축하인사를 나눴다.

꼭 한번 찾아가서 내가 대접하겠다는 약속을 남기며 데보라에게 핸드폰을 돌려주었다.

"진짜 반갑다. 여기서 데보라를 만나게 될 줄은."

그나저나... 여러 가지 정보를 종합해 보자면. 어제 이 세명과 그리고 어떤 남자 둘. 거기에 상택이 형이 포함 된 만남이 있었다는 거 같은데.

"..."

히죽히죽 수줍게 웃는 세 사람을 보고있는데, 내 입술도 덩달아 미소가 그려진다.

갱뱅이라... 허허. 이거 참.

그룹으로 한다고?

쓰리섬을 안 해본 건 아니지만 그건 또 뭔가 조금.

뭐 물론 데보라랑은 이미 몇 번 해봤고.

수잔도 지금 하고자 마음 먹고 있고.

쟈스민... 와 저 우울해 보이는 사람까지 그게 된다고??

세 사람을 가만히 보는데 오랜만에 똘똘이 녀석이 불끈거리며 기지개를 켜고 미쳐 발작을 시작하고 있었다.

형님. 그동안 너무 운동만 한 거 아니오!!

그러게. 우리가 너무 운동만 했지. 이제 운동 말고 다른 것도 해보자.

"늦었는데, 다들 자러 갈 시간 아니야?"

"음. 난 쿠랑 있어도 돼."

"나도!"

역시나 수잔 블레이크와 데보라는 오케이 사인을 보내주고.

"..."

어우야. 혼자 말도 없이 부끄럽게 시선을 피하는 자스민도 슬쩍 고개를 끄덕인다...

안되겠다. 아무래도 더 든든하게 먹어야 할 거 같애.

어차피 오늘 밤 나가서 잔다고 했으니까 나도 잘 곳이 필요했는데. 잘 됐구만.

근데 혼자서 셋이라. 그것도 스포츠 선수 셋...

이거 운동 선수들은 성욕이 남다른데...

하하! 좋아해야 돼? 말아야 돼?

우걱우걱 파스타와 피자를 먹으며 여자 세 사람과 웃고 떠들고 있었다.

그런데, 어디서 신체 건장한 남자 두 사람이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챠오~ 쿠!"

"깜짝이야. 누구세요?"

"하하! 설마 싶었는데, 진짜 쿠를 만나게 될 줄이야."

이탈리아 선수 모레노와 미국 선수 마이클이었다.

각각 루지와 스켈레톤으로 썰매를 타고 다니는 산타할아버지였다.

"HI. Nice to meet you."

"굿 투 씨유 마이클."

"Piacere."

"피아체레가 뭐야 데보라?"

"이태리어로 반갑다는 뜻이야."

"어어~ 피아체레. 나도."

오호라 이렇게가 어젯밤의 독수리 오형제구나.

잠깐만 그럼 설마 오늘도?

정면에 데보라와 수잔 자스민. 맞은편에 모레노와 나 마이클.

3:3이라...

설마 진짜? 진짜로?? 그룹???

"헤이 쿠! 근데 왜 혼자 있는 거야? 넌 챔피언이잖아!"

"아~ 다들 내일 시합이라 일찍 자."

"한국 선수들은 빨리 자는구나. 상택도 어제 너 잔다고 그랬는데."

"푹 자야 최상의 컨디션이 오니까."

모레노가 물었다.

"쿠. 영어 잘 한다."

"모레노도 잘하는데."

미국 출신 마이클이 답한다.

"다들 소통에는 문제 없겠어."

"하하하! 왜? 뭐 긴밀히 소통할 일이라도 있어?"

"후후후. 나이스 가이."

데보라도 내 언어실력을 보면서, 먼저 오스트리아 있을 때는 이정도는 아니었다면서 감탄한다.

"공부 많이 했어. 사람들이랑 이야기 많이 하고 싶어서."

"하하하! 귀여워 쿠."

쿠쿠. 쿠쿠쿠. 큭큭크크.

이것들이 지금 누굴 물로 보나.

아 시덥잖은 대화가 너무 많다. 배도 부르고 슬슬 가볼까.

"오케이. 알았어. 파티는 어디서 열리는 거야?"

그러자 다섯 사람이 크게 웃음을 터트린다.

심지어 자스민도 입을 가리고 수줍게 웃고 있었다.

와. 유럽 여성이 저렇게 조신조신한 모습 보여주니까 또 뭔가 다르게 느껴진다.

"하하하! 상택이 이야기 했어?"

"당연히 했지. 고마워 모두들. 덕분에 마이 브라더가 오늘 큰 위로를 얻었어."

"상택은 어제도 피곤해 보였지."

"맞어 맞어. 수잔도 더 많은 이야기 나누고 싶어 했는데."

"아쉬웠지."

아주 안 껴준 건 아니구나.

형도 몸 사려서 그냥 한번 해보고 빠진 거야.

좋아. 우리 상택이 형 기운내게 해준 것 포함해서.

오늘 밤은 내가 너희들을 피곤하게 만들어 주마.

"아 배부르다."

"다 먹었어?"

"잠깐만. 이걸 쿠 혼자 다 먹은 거야? 너희들이랑 같이 먹은 게 아니고?"

"쿠는 늘 엄청 먹어. 우리 할머니가 그래서 쿠를 좋아해."

"...챔피언은 식사량도 챔피언이네요."

"후후후. 에너지를 보충해야지."

데보라가 씩 웃으며 물었다.

"왜? 쿠는 이제 시합도 다 끝났다면서."

"갈 데가 있거든."

"어디 가는데?"

"하하하하!"

"아하하!"

마이클과 모레노는 서로 어깨를 두드리며 웃었고 데보라와 수잔도 괜히 큰 소리로 웃는다.

심지어 자스민도 수줍게 입을 가리며 웃고 있었다.

나를 비롯하여 모두들 '그 단어'를 언급하지 않지만 서로 얼굴만 봐도 속내가 빤히 보여 웃고 장난치고, 괜히 밀치고 또 웃고 그러고들 있었다.

"하하하~ 쿠. 근데 정말 괜찮은 거야?"

"그래. 무리하지 마. 쿠는 세계적인 스탄데."

"괜찮아. 모레노. 같이 가자를 이탈리아 말로 뭐라고 그래?"

ANDIAMO.

"그럼 침대는?"

"하하하! 크하하하하!"

"쿠. 그건 내가 알려줄게. 침대는 LETTO 라고 해. 문법적으로 말할 땐 AL을 불여줘야 돼."

"오케이. 가이즈. 안디아모 알 레또."

알았어. 알았다고. 아 알지. 잘 안다니까. 그러니까 웃지마.

나를 파티에 초대한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한번 느껴보거라 게르만과 앵글로 섹슨족의 후예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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