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얼음을 녹이는 땀과 눈물의 이야기. (3) >
김정준은 마하의 천재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해낼 거라는 걸 믿고 있었다.
잘하면 메달도 따지 않을까 섣부른 기대를 걸어 봤었다.
하지만 그것이 금색일거라곤 절대 상상할 수 없었다.
금메달은 뭔가 우리가 가져서는 안 되는 것이라 여겨왔었다.
"우와아아!! 형!!"
"..."
"형!! 저 금메달이래요!!"
최종 결과를 확인한 구마하가 김정준의 품에 안겨 소리친다.
진짜인가...? 누가 지금 나한테 장난치는 거 아니야...?
김정준은 눈을 뜨고 있음에도 눈앞의 사물이 인식되지 않았다.
마하가 방방 뛰면서 소리치는 거 같은데... 사람들이 함성을 지르는 거 같은데...
김정준이 멍하니 고개를 들어 전광판을 바라보았다.
"..."
"형? 왜 그러세요?"
"마하야... 저기 니 이름이 있어."
"네? 하하! 아 정준이 형!!"
아무리 보고 또 봐도 최상단에 걸린 마하의 이름과 태극기가 사라지질 않는다.
눈을 비비고 껌벅여 본다.
그래도 그것은 여전히 뚜렷하게 1이란 숫자와 함께 제일 위에 걸려있었다.
"으윽. 우으윽!"
가슴 속 저 깊은 곳에서 무언가 울컥하는 감정이 밀려와 어금니를 꽉 다물었다.
그럼에도 두 눈이 흐려지고 왈칵왈칵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울먹이는 시선에서도 태극기와 KOO MA HA 라는 이름은 여전히 빛을 잃지 않고 있었다.
"흑. 흐윽... 마하야... 진짜로 너가 이긴 거냐...? 저거 진짜야...?"
"너라뇨! 아니죠 형!"
"그럼? 뭐야 대체...? 왜 니 이름이 저기 위에 있어...?"
"우리가 이긴 거에요!! 우리 설상팀이!!"
기뻐 날뛰고 싶은데. 정말 막 소리치고 싶은데.
근데, 왜 이렇게 가슴이 답답하고 이러는지...
김정준은 고개를 푹 숙이고 제자의 품에 안겨 엉엉 울었다.
"흑. 으윽! 으으으..."
"정준이 형...? 아 왜 이래요..."
"야 이 미친놈아..."
금메달이라니...
우리가 금메달이라니...
고맙다 마하야...
"흐어엉. 어엉!!"
"하하하. 카메라 다 찍고 있는데..."
"야 이 미친놈아! 그래도 아까 그건 너무 위험했어!!"
"..."
"진짜 돌은 거 아니냐!! 누가 그렇게 스키 타래! 까딱하단 죽었다고!!!"
"하하하. 아 이거... 한국까지 방송 나가는 걸로 아는데..."
구마하가 손을 들어 어떻게든 카메라를 가려보지만 IOC에서 준비한 방송팀은 더 신나서 그들의 격정적인 모습을 따라다녔다.
"형. 들어가요."
"시끄러... 아 씨 쪽팔려."
"하하! 그러니까 왜 욕을 하세요."
"좋아서 그러지 인마."
* * *
관중들이 우승자를 향해 큰 박수를 쳐주고 있었다.
박상택도 그들과 함께 앉아 남들과 다르지 않게 손뼉을 치고 있다.
신기하게 질투나 절망이 아닌 기쁨이 넘쳐 흐르는 기분이다.
그래서 눈물이 나는 걸까? 박상택은 깊은 한숨과 함께 눈을 질끈 감아 그렁거리던 눈물을 떨궈버렸다.
한상률이 박상택을 보며 물었다.
"상택이는 왜 우냐?"
"...모르겠어요."
"설마 분해서 우는 건 아니지...?"
"아니요. 그건 진짜 아닌데..."
늘 자신을 최고라도 부르짖던 박상택도 김정준과 같았다.
마음 속 한 쪽에선 어느정도 한계선을 걸어두고 있었다.
우리는 한국사람이니까. 그러니까 이정도만 해도 잘하는 거야...
"하하하 저 새끼. 태극기를 왜 외국인한테 받어..."
"마하 팬인가보다. 다행이네. 우리도 준비 안 했는데."
올 여름 박상택의 한계의 벽을 넘어 외국 선수들과 당당히 겨뤄 하나의 트로피를 손에 쥐었다.
하지만, 벽을 넘어도 또 벽이 나타났다.
지난 12월 스위스 대회에서 거둔 8위라는 성적.
사람들은 기대를 걸었고 부담감은 숨을 조여왔다.
안돼. 못 해. 우리는 한국인이야.
스키의 변방에서 무슨 메달이야 메달은...
이 이상의 성적은 절대 무리라고 여겼다.
고생 끝에 찾아온 것은 낙이 아닌 더 큰 고생이었다.
그래도 어젯 밤. 시합을 벗어나 올림픽이 주는 감동과 기쁨(?)을 알았기에 한결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그거면 됐다. 멋진 추억을 만든 것만으로도 올림픽은 충분히 가치가 있으니까.
그랬기에 오늘 마하의 경기도 편안하게 지켜볼 수 있었다.
"새끼..."
하지만 녀석은 그 이상의 것을 보여줬구나.
자신이 절대 넘어선 안된다고 정해놓은 한계선을 훌쩍 뛰어넘어 당당히 챔피언의 자격을 거머쥐었다.
멋있다. 저 새끼가 내 후배라는 게 너무 기뻐...
학교 애들을 보고싶다.
민구나 다른 동기들도 지금 이 시합을 보고 있었을까...
우리의 이야기를 봤을까?
"대표님."
"음?"
"제가 저 자식 선배라고 부를 자격이 있을까요...?"
한상률이 툭하니 상택이의 머리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그럼 당연하지. 이놈아."
"젠장. 저 새낀 왜 이렇게 제 못난 모습만 비추는 거죠..."
"후후후. 그런 게 어딨어."
"재수없는 새끼... 아 진짜 그냥 죽여버릴까..."
거칠게 뱉어내는 말과 다르게 한상률은 상택이가 고마워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다음은 니 차례구나."
"후우. 그러게요. 제 차례네요."
"선배답게 뭔가 보여줘야지?"
부릅 뜬 박상택의 눈에서 열정과 승부욕이 불타오른다.
"물론이죠. 저도 할 수 있어요."
* * *
메달 수여식을 마치고 한 자리에 모인 설상 팀.
김정준과 이영호 지도자도 주변에서 걸려오는 축하 인사와 전화를 받느라 정신 없어 보인다.
"그래 그래. 내가 그 기분 잘 알지."
한상률은 다른 설상팀 코치들보단 한결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그가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며 구마하와 젊은 선수들을 지켜보았다.
"야. 이거 진짜 금이냐?"
"아니지. 누가 진짜 금을 이렇게 줘."
"미친 새끼. 뒤질라고 환장했냐? 왜? 그냥 썰매를 타지!"
"아 이 형. 또 왜 이래..."
"미친 놈."
"꺼져 왜 지랄이야."
두 사람이 투덜투덜 욕설을 내뱉고 있는데, 구마하가 메달을 빼 박상택에게 건네주었다.
"뭐하는 거야?"
"한번 걸어 봐. 부적이다 생각하고."
"꺼져! 부정 타."
"뭐가 또 부정을 타!! 좋은 뜻에서 하는 행동인데!"
박상택을 대신해서 짧게 알고 지낸 여자 대표 선수들이 대신 목에 걸어보았다.
그녀들의 눈에서도 감동이 어린다.
우리도 할 수 있다. 아니 해내고 싶다는 야망과 승부욕이 살아난다.
설상팀의 맏이가 동생들의 모습을 훈훈하게 지켜보는 장면을 뒤로하고 한상률도 씩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네. 현석이 형님. 하하! 아 내가 왜 나와요. 내가 한 게 뭐가 있다고."
연세대 이현석 교수의 축하전화였다.
육상연맹을 대표해서 연락을 걸었단다.
"그래요. 상택이까지 해내면, 내년 연대는 폭발하겠네요."
"야. 그건 됐고. 위에서 확실하게 기자들한테 전하란다. 마하는 잠깐 스키에 도전해 본 거지. 어디까지나 우리 육상연맹 소속이라고."
"됐어. 그런 얘길 뭐하러 해요."
"거 왜 또 거기가서 메달을 따고 그래..."
"하하하하~!"
"아무튼, 축하한다. 진짜 니 생각대로 됐구나. 하여간 대단한 한상률이야."
"돌아가서 연락드릴게요. 선생님이랑 선배님들한테도 감사하다고 전해주세요."
"그래. 수고했다. 야 근데, 나 아까 그 선수 다치는 거 보고 졸도할 뻔 했어 자식아!!"
"하하하~"
모두들 기쁨의 인사를 나누고 있을 때. 김정준의 핸드폰도 조용히 떨려온다.
"..."
가족에게서 온 전화였다.
이영호 지도자가 넌지시 손을 들어 용기를 건네주었다.
"뭐해. 어서 받지 않고."
"...선생님."
"정준아. 당당하게 받아라. 그래도 된다. 넌 금메달 코치가 됐어."
"..."
김정준이 침을 꿀꺽 삼키며 전화를 받았다.
"여... 여보세요...?"
어머니였다. 오랜만의 통화에 모자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목소리가 떨렸다.
"네... 네. 그래요 엄마."
가족의 축하인사를 듣는데, 김정준의 머릿속에 여러 장면들이 스쳐지나갔다.
늘 최선을 다했다. 그럼에도 넘을 수 없는 벽이 있었다.
가끔은 목숨 걸고 미친 듯 쏴볼까 싶기도 했지만. 그것은 너무나도 큰 리스크를 감수해야 하기에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오늘 마하의 레이스를 보면서 한편으론 통쾌한 부분이 있었다.
마하는 죽음의 질주를 펼쳤다.
아마도 동계올림픽에서 활강 종목이 사라지지 않는 한 오늘 시합은 영원히 스키의 전설로 기록될 것이다.
"아니 뭐... 마하만 끝났지 난 아직 애들 남아있어. 상택이도 있고, 여자애들도 있고."
그렇게 달려야지만 이길 수 있다는 걸 김정준도 알고 있었다.
알면서도 할 수 없음이 늘 속상했었는데...
그래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훈련을 거듭하고 기술을 단련해 왔었거늘.
노력하면 할수록 운동은 몸을 망가뜨려 점점 더 메달과는 멀어지는 인생이 되어가는 것 같았다.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에서도 그는 앞을 보며 걸었다.
가족과 인연을 끊어가며 고생을 감수하고 돈을 벌어 다시 산을 찾았다.
스키의 변방에서 이영호 지도자와 꿈과 낭만을 쫒아다니던 나날들이었다.
"네. 전화주셔서 고마워요."
"아버지 바꿔줄게. 정준아. 아버지도 기뻐하신다."
"..."
부자의 통화는 긴 말이 필요 없었다.
"고생했다."
"네. 아버지."
"들어와서 보자. 아직 남은 선수들 있는데 잘 챙겨주고."
"네. 끝나면 집으로 갈게요."
통화를 마친 김정준이 눈을 질끈 감았다.
이영호 지도자도 큰 제자의 등을 두드려 준다.
"잘했다. 잘했어."
"제가 뭘요. 마하가 잘 했죠..."
여기저기 바쁘게 이야기를 나누던 구마하도 이영호 지도자를 만났다.
이영호는 마하를 으스러져라 안아주며 연신, 장하다. 훌륭했다 칭찬을 아끼지 않는데.
"근데 이놈아. 너 그렇게 타다가 진짜 잘못하면 죽어. 알어!"
"하하... 죄송해요..."
"무식한 자식. 야 아무리 이기고 싶어도 그렇지..."
"형들을 믿었거든요."
"형들? 누구? 상택이?"
"상택이 형도 있고, 정준이 형도 있고."
구마하가 두 사람을 생각하며 말했다.
그들이 있기에 스키에 진지할 수 있었고. 사랑에 실패해 무너질 때도 버텨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그들이 있었기에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오늘 과감한 레이스를 펼칠 수 있었다.
"저 그냥 형들이 하라는 대로 했어요. 그게 전부였어요."
구마하는 같은 이야기를 그날 저녁 열린 기자회견에서도 가감없이 밝혔다.
* * *
한국. 서울시 강남구 청담동.
한수빈이 크리스탈 곰인형과 장미꽃을 옆에 두고 TV를 보고 있었다.
구마하의 인터뷰가 나온다.
[하계와 동계 양쪽 모두에서 금메달을 딴 선수가 되셨는데요. 기분이 어떠신가요?]
[좋죠. 기쁩니다. 응원해주신 많은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김정준 코치의 뜨거운 눈물이 화제가 되고 있는데요. 두 분 무슨 말씀 나누셨나요?]
[어... 그거 방송 안 나갔어요?]
[네. 함성소리에 뭍혀서 정확히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는 잘.]
[하하하! 저도 기억이 잘... 그냥 축하한다 잘했다. 뭐 그런 이야기였던 거 같은데?]
기자들은 스키를 시작하고 1년만에 메달을 석권한 그의 천재성에 관하여 물었다.
[절대 아닙니다. 천재라뇨... 진짜 아니에요. 저 욕 먹어요.]
[작년 한 해. 세계 선수권도 있었고, 또 많은 우여곡절이 있으셨잖아요. 도핑 파문이라든지 훈련이 쉽지 않으셨을 거 같은데.]
[지난 일이고요. 물론 제가 육상 때부터 단련한 체력과 근력이 스키운동에 도움이 된 건 맞지만, 저보단 팀. 동료들의 힘이 컸던 것 같습니다.]
육상 때도 많은 분들의 도움을 받았지만 이번엔 정말 설상 팀으로 움직이며 큰 경험을 할 수 있었다.
모든 건 팀이 있기에 가능했던 이야기였다.
[스키 연맹도 그렇고. 김정준 코치님은 말 할 것도 없고. 이영호 지도자 선생님이나, 우리 한구 스포츠 대표 한상률 감독님. 연세대 이현석 교수님의 양보와 배려도 큰 도움이 됐고요. 그리고 무엇보다]
박상택. 상택이 형.
우리 학교 선배님의 공을 절대 간과할 수 없다는 말을 구마하가 직접 언급했다.
[상택이 형한테 많은 기술을 배울 수 있었어요. 진짜 큰 도움이 됐습니다.]
[멋진 이야기네요. 다시한번 우승을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저는 이제 시합 끝났는데. 진짜 우리 상택이 형. 큰 응원 부탁드립니다. 저보다 훨씬 잘 타는 사람이에요. 우리 형 진짜 잘 할 수 있거든요! 국민 여러분. 박상택. 박상택입니다. 뜨거운 응원 부탁드립니다.]
한수빈의 얼굴에 미소가 흐른다.
그가 직접 도움이 됐다는 한 마디가 지나간 아픈 감정을 포근히 달래주었다.
"축하해 자기야. 진짜 축하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