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곳에 열정이 살아 숨쉬네 (7) >
이별의 아픔을 땀으로 승화시키고 있는 구마하에게 동료들이 찾아왔다.
무엇보다 그들 중 한 사람은 반드시 꺾고 넘어서야 하는 박상택이었다.
"야 이 새끼야!! 넌 사람이 말을 하는데 어딜 가!!"
박상택이 우리랑? 여기서?? 왜???
구마하가 외국말을 전해들은 듯 다시한번 김정준을 돌아보며 묻는다.
"무슨 소리에요? 저 인간이 우리랑 왜...?"
"하하하!! 그렇게 됐어."
"감독님도 알고 계세요...?"
"물론이지. 나머지는 본인한테 물어봐."
어느새 다가온 박상택이 구마하에 소리친다.
"왜? 좆같냐!!"
"후우..."
"감독님이 너 보면 전해주라더라."
"뭐라고요...?"
"연애는 연애고 운동은 운동이다. 부상 없이 안전하게 타라."
"..."
"근데, 이 새끼야. 넌 지금 뭐하는 거야? 이따구로 스키를 타고있어? 주변은 신경도 안 써?"
감독님에 김정준까지 허락이 내려왔다라...
구마하도 일단 박상택이 그들과 함께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
"주변 누구요. 선배 제 주변 아는 사람 없잖아요."
"너 수빈이랑 사겼었다며."
"...그걸 어떻게 아세요?"
"이 새끼가 날 좆도 모르는 놈 취급을 해?"
다소 설명이 필요한 내용에 구마하가 김정준을 돌아본다.
"일단 좀 들어가서 이야기하자."
세 사람은 슬로프 인근 통나무 쉼터에 앉아 따뜻한 핫초코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눴다.
"수빈이가..."
"그래서 그 친구 부탁도 있고. 내가 봐도 너한테 가장 필요한 사람은 나보다 상택이가 아닐까 싶기도 하고."
"형. 나는 부탁이 아니라. 그냥 이 새끼 살았나 죽었나 그거만 확인하러 왔다니까."
"너도 쓸데없는 소리 좀 그만하고."
박상택이 구마하에게 말했다.
"수빈이 걱정되냐."
"제가 왜요."
"야 인마. 넌 인정도 없어?"
박상택을 통해 한수빈의 이야기를 전해듣자, 아직도 화가 풀리지 않았다는 듯 구마하는 주제를 돌려버렸다.
"선배. 스키는 갖고 오신 거 맞죠?"
"하하하! 와... 이 새끼 진짜... 형. 봤지? 내가 왜 화를 내는지 알겠지?"
"너도 마하 보자마자 욕부터 던졌잖아. 내가 볼 땐 니네 둘 다 똑같애 지금."
"아니! 스키를 그따구로 타는데!"
"내가 뭘요? 내가 뭘 잘못 했는데요?"
제대로 지지고 볶고 싸워보라는 듯 김정준이 빠져준다.
구마하와 박상택이 서로를 보며 성질을 높인다.
"야. 여기가 무슨 니 안방이냐? 다른 스키어들은 신경도 안 써?"
"선배. 여기 알프스에요. 강원도 아니에요."
"하하... 그래서? 여기선 그렇게 타도 된다?"
"뭐가 문제라고 보자마자 지랄이냐고요."
"그래. 그러다 사고 나고, 상대방 대가리 깨지고 너 허리 분질러지고. 그렇게 돼봐라."
"아니 나도 다 보고 피하고 있다니까..."
이 녀석들 감정이 장난 아니구나.
여기까지 하는 게 좋겠다 싶어 김정준이 두 사람을 보며 말했다.
"둘 다 그만 닥치고. 장비 챙겨서 올라가."
"정준이 형?"
"내가? 이 새끼랑 가서 뭐하라고?"
"상택이가 그리는 라인대로 마하가 따라 탄다. 실시."
"..."
"어...?"
"뭘 멍 때리고 있어. 빨리 움직여."
박상택과 구마하가 서로 어이가 없다는 듯 미소를 지어보인다.
"형. 나 지금 도착했어."
"저도요. 오늘 형 오셨는데 그만 쉴게요."
"우리가 놀러왔냐? 상택이도. 너 비즈니스 타고 왔잖아. 그거 다 회사가 낸 거야."
김정준이 박상택에게 전한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부상있어? 피곤해? 애한테 뭐라 할 거면 안전한 스킹이 뭔지 니가 보여주면 될 거 아냐."
"그건 형이 해야지..."
"난 선수를 키우고 있다. 내 기준에선 뭐라 할 말 없어."
김정준은 구마하에게도 말한다.
"그렇다고 니 녀석이 잘하고 있다는 건 아니야. 너는 기본이 부족해."
"형. 저 그냥"
"마하야. 상택이 말대로 그동안 운이 좋았다곤 생각 안 해봤어?"
"..."
"그래. 여긴 알프스지 용평이 아니다. 넓어. 넓어도 사람이 없다곤 할 수 없다. 하지만 시합도 정해진 코스가 있잖아. 기물이 있고 라인이 있어. 피하는 기술은 여기나 거기나 같애. 내가봐도 넌 지금 너무 건방진 소리를 했어."
김정준이 두 사람을 보며 단호하게 말한다.
"배워라. 상택이는 교본이라고 할 만큼 자세가 깔끔한 놈이야."
"네..."
"상택이도. 아까 마하 타는 거 봤지? 서두르지 않으면 이놈이 너 치고 나간다. 서둘러야 될 거다."
"아 그거야 어쩔 수 없는"
"그래. 어쩔수 없는 한국 스키의 현실을 벗어나라고. 속도를 높여 봐. 마하 말대로 여긴 알프스잖아."
이곳은 정해진 코스도 없고 있다 하더라도 그물같은 보호막이 없다.
그저 설산이 수 킬로미터나 펼쳐지는 스키어들의 성지였다.
스키는 신체 능력과 더불어 무엇보다 담력이 필요한 종목이었다.
한국에서 성장한 박상택은 기술은 좋으나 속도의 한계가 있고.
우월한 체력을 바탕으로 알프스에서 스키를 시작한 구마하는 원하는 만큼 속도를 내지만, 기본기가 부족해 언제 어느 때 죽더라도 이상할 게 없는 상황이었다.
구마하와 박상택. 두 사람은 서로에게 부족한 것을 가지고 있었다.
박상택이 장비를 착용하며 저 멀리 리프트 앞에서 기다리는 구마하를 쳐다본다.
"결국 나를 저놈의 거름으로 쓰시겠다? 나만 희생해라?"
"너네는 좋겠다. 이런 좋은 선후배도 있고."
"진짜 자꾸 놀려..."
"상택아. 너 어릴 때 스키장 처음 갔을 때 기억나냐?"
"...그건 왜?"
"작은 언덕이라도 보면 점프하려고 덤벼들고. 코치님들이 하지 말라지만 속도감 내려고 일단 허리부터 접던 그러던 거 기억 안나?"
"..."
"가. 둘이 타 봐. 내가 볼 때 너네는 둘이 있어야 실력이 늘어."
"아 뭔가 제대로 말리는 기분인데..."
김정준의 배웅을 받으며 두 사람이 리프트를 타고 올라간다.
구마하와 박상택은 누가 먼저 입을 때지 못해 한참을 어색하게 주변만 보고 있었다.
오직 주변을 압도하는 알프스의 풍경만이 그들을 지켜볼 뿐이다.
"하루에 얼마나 운동하냐?"
"그냥 뭐. 지칠 때까지..."
"말 짧은 거 봐라. 야 이 무식한 놈아 넌 육상선수라는 놈이 무릎은 신경도 안 써?"
"..."
"씨발 갑자기 뭔 알프스냐... 젠장. 경치는 좋네."
"선배는 여기 와보셨어요?"
"처음 왔어. 난 주로 해외 나올 때 휘슬러로 가는 편이라."
"거기가 어딘데요?"
"캐나다. 새끼야 스키 탄다는 놈이 휘슬러도 몰라?"
"아 네..."
대화를 섞을수록 감정만 상하는 것 같다.
그래도 어느 정도 물꼬가 트이자 둘 다 서로가 궁금해지는 지경에 이르렀다.
"근데 진짜 왜 오셨어요?"
"야. 구마하."
"네..."
"수빈이랑은 왜 헤어졌냐?"
"..."
구마하가 속타는 마음을 흰 입김으로 뿜어낸다.
"왜가 어딨어요. 서로 안 맞으니까 끝냈죠..."
"근데 걔는 왜 그렇게 죽을 거 같이 그러고 있어? 니가 찬 거 아냐?"
"...선배는 수빈이 어떻게 아세요?"
"너 걔보다 동생 아니냐? 왜 이름으로 불러."
"뭔 상관인데요."
"하긴 니 싸가지에."
"아 진짜..."
"클럽에서 알았지. 알고 지낸지 몇 년 됐어."
"역시 클럽. 쓰레기였네."
"뭐 이 개새끼야? 확! 씨발 밀어버릴까보다!"
"..."
"그리고 나도 니 새끼 클럽 있는 거 보고 다 끊었어! 제대로 알지도 못 하면서"
"아 맞다. 선배 여름내내 운동하러 나갔었죠... 선배는 좀 다르겠네."
강세준 김원석을 비롯하여 클럽에서 벌어진 불미스러운 일들.
만약 뉴질랜드로 떠나지 않았다면 자신도 무슨 일을 당했을까 박상택이 안도하는 마음에 묻는다.
"뭐냐? 둘이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그냥 인간쓰레기들을 봤고. 수빈이도 결국 그런 사람 중 하나였다는 거죠."
"야. 걘 그 정도는 아니야."
"뭐든. 용서는 안 돼요."
"...얘기해 봐. 뭔데?"
혼자 훌쩍 떠나 눌러 담아온 만큼 구마하는 한번 열린 입을 멈추지 않는다.
무엇보다 박상택도 다들 아는 사람들이라 오히려 대화가 잘 통했다.
"원석이 형이 좀 인간이 그렇긴 했었지..."
"강세준도 그렇고. 특히 이도형 이 씹쌔끼. 그런 놈들보단 차라리 선배가 백배 나아요."
"나는 왜?"
"선배는 성격은 지랄같아도"
"하하하. 아 진짜 이 씨발놈이"
"적어도 정정당당하게 승부를 걸었잖아요."
"..."
"힘 있는 사람 뒤에 숨어 지랄하는 새끼들보단. 차라리 이렇게 욕하고 시비거는 상택 선배가 백배 천배 낫다고 봐요 저는."
"......"
건방진 새끼. 진짜 확 죽여버릴까보다...
머리속은 그렇게 분노하나 어딘가 구마하의 심정이 이해되는 박상택이었다.
운동만 알고 자라온 이들에게 그들이 어디 상대하기 쉬운 종족이던가.
이 녀석도 사람에 상처를 받았구나.
"운동이나 해."
"네. 다 왔네요. 후우..."
"군말하지 말고 따라와."
"..."
박상택이 먼저 슥슥 폴대를 찍으며 출발지점 앞에 섰다.
구마하도 투덜거리며 따라와 멈춘다.
새하얗고 넓은 알프스가 그들의 앞에 펼쳐져 있었다.
"마하야."
"네."
"..."
"왜요?"
"진짜로 궁금해서 물어보는데. 넌 육상 챔피언이잖아. 스키 왜 타는 거야?"
첫 만남에 물었다면 참 좋은 질문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제라도 늦지 않았다는 식으로 구마하가 답한다.
"재밌으니까요."
"새끼."
"..."
박상택이 고글과 마스크를 챙겨쓰며 미소를 감췄다.
보이지 않음에도 구마하는 그의 마음을 알 것 같았다.
가벼운 욕설과 짧은 웃음에 더는 긴 설명이 필요하진 않았다.
"잘 따라와라. 숏턴으로 간다."
"선배님."
"음?"
"그랑프리 우승 축하드립니다."
"...닥치고 따라와."
"가세요."
선배가 먼저 라인을 그리고 후배가 따라 나섰다.
두 사람의 호흡이 제법 그럴싸한 곡선을 그려낸다.
무엇보다 혼자 운동하던 두 사람에게 누군가 옆에 있다는 사실이 의지가 된다.
촤아악~! 박상택과 구마하가 눈발을 휘날리며 산을 내달렸다.
저 아래 추위와 싸우고 있는 김정준이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새끼들. 멋있네."
꼬불꼬불한 S라인을 그리며 스킹을 하는 두 사람은 마치 새끼줄을 꼬아 동아줄을 만드는 것 같다.
우여곡절을 거쳐 이뤄낸 관계인 만큼 둘 사이는 더없이 튼튼하겠지.
나도 운동할 때 저런 동생이나 선배 하나 있었다면...
같이 싸우고 같이 발전하며 서로를 응원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 있었다면...
"..."
작고 작은 이야기들이 겹쳐 오늘에 이르렀듯. 앞으로가 중요할 뿐이다.
시간은 돌아가지 않으니까.
생각보다 빠르게 도착한 두 사람에게 김정준이 소감을 물었다.
"어땠냐?"
"오케이. 이 새끼 빠른 건 인정."
"후후후. 그리고?"
"근데, 잘 타서 빠른 게 아니야. 그냥 목숨 내놓고 타니까 빠른 거지."
"마하는? 상택이 어땠어?"
"형. 나 아직 말 안 끝났어!"
"마하 얘기해. 상택이 어땠냐?"
"어... 역시 짬은 무시할 순 없다. 네. 딱 그랬어요."
"허허~ 고맙다. 짬 대우 해줘서."
"직접보니 나보다 상택이 자세가 더 안정적이지?"
"네. 근데 상택 선배는 원래 대회전 선수였고."
지지고 볶는 시간 속에 구마하와 박상택은 서로를 받아들인다.
나에게 없는 부분을 존중하고 배워나간다.
국가대표 선발전까지 남은 시간 50일. 올림픽까지는 80여일.
아직 도전은 끝난 게 아니다.
이제 시작이었다.
"앞으로 훈련 스케쥴은 이렇게 간다."
"형... 잠깐만. 매일 스쿼트 1000개라니..."
"마하는 하고있어."
"뭐...? 야. 너 진짜냐?"
구마하는 구마하대로 빡빡하게 들어차는 스케쥴에 당황한 눈빛을 감추지 못한다.
"저... 정준이 형. 근데 저도 이렇게 되면 제 개인운동시간이 부족한데요..."
"넌 기술이 너무 부족해. 낙하지점에서 몸을 던진다고 활강이 아니야. 점프를 활용해야지. 그러기 위해선 지금 기술론 택도 없다."
"아... 네."
"얘들아. 12월 중순에 스위스에서 대회가 있어. 우리 거기서 사고 한번 쳐보자."
"스위스라. 다음 달이네."
"...저도 나갈 수 있을까요?"
"나가야지. 그래야 우리가 올림픽을 가니까."
11월 한달이 훌쩍 지났다.
12월. 연말을 맞이해 거리엔 캐롤이 울리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새해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알프스에 머물고 있는 구마하와 박상택에게 연말 연휴란 먼 이야기였다.
독일 자동차 기업이 후원하는 대회가 스위스 인터라켄에서 열리고, 박상택은 알파인스키 슈퍼대회전에 출전. 구마하는 알파인스키 활강에 참가했다.
박상택은 결승 8위에 랭크되고, 구마하는 최종 순위 20위에 들어섰다.
스키를 시작하고 1년만에 거둔 성과였다.
육상챔피언의 동계스포츠 도전에 세계의 관심이 뜨거워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