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곳에 열정이 살아 숨쉬네 (2) >
"상택아! 여기 여기!!"
"어 형. 하하하!"
"운동만 했다더만 진짜 새까매졌네. 아니 추운 운동 하는 놈이 왜 이렇게 타?"
"원래 눈 위에 있으면 많이 타. 햇빛이 반사돼서."
"고생했다. 작은어머니가 너 빨리 데리고 오랬어. 점심 같이 드실 거라고."
"그래. 나와줘서 고마워 형."
반년 만에 귀국한 박상택.
기분 좋게 친척 형과 만나 게이트를 통과하는데, 저 멀리 구마하의 얼굴이 보인다.
"훗."
다른 유명 한류스타들과 웰컴 코리아라는 팻말을 들고 있는 그의 사진을 보면서 박상택은 작게 코웃음을 지었다.
"다들 잘 지내시지?"
"그럼 할아버지도 정정하고."
"아이고 할아버지는 좀 아파도 되는데."
"야 그것보다. 어른들이 그러더만. 너 이번에 아주 작정을 하고 갔었다며?"
"진짜. 형. 와 내가 진짜... 하하하~!"
"왜? 말도 안 나오게 고생했냐?"
"하하... 아... 이번에 제대로 빡시게 운동했지."
"왜? 뭔 일 있었어?"
"없어. 그냥. 짜증나서 그랬지 뭐."
차가 영종대교에 올라섰다. 박상택이 창문을 열며 말했다.
"씨발! 한국도 이렇게 보니까 반갑구만!"
"미친놈 갑자기 욕하고 지랄이야."
"그냥. 답답하길래."
"누가 운동선수 아니랄까 봐."
정말이지, 스스로가 대견하다 느낄 정도로 노력한 시간이었다.
지난여름엔 나름대로 성과도 거두었는데. 그조차 구마하의 세계선수권 우승에 가려져 가족 외 아는 사람들이 없다.
박상택은 공항에서 보았던 사진을 떠올리며 말했다.
"형. 왜 이렇게 세상이 불합리할까..."
"뭔 소리야? 너 거기서 무슨 일 있었어?"
"누구는 우승을 해줘도 모르고. 누구는 스키에 도전한다는 자체로 언론의 관심을 끌어모으고..."
"음. 구마하 이야기야?"
"후후. 재수없는 새끼."
"맞다. 걔가 니네 학교 후배라고 하던데. 맞냐?"
"후배는 무슨... 형. 그 새끼가 나한테 뭐라고 했는지 알어?"
"하하! 억울한 거 있으면 기자들한테 제보해. 나한테 말해서 뭐한다고."
"진짜 그럴까..."
"작은 아버지 아는 기자들도 많잖아."
"아 됐어. 내 손으로 무너뜨리면 돼. 좀만한 새끼."
"오오~ 우리 상택이. 남잔데? 사나이였어."
"아 하지마."
"뭔데? 둘이 무슨 사이야? 가는 길에 그 이야기나 좀 해봐라."
박상택은 구마하의 스키 도전. 학교에서의 마찰 등. 그와 겪은 일을 언급했다.
"운동하는 애들한테 하극상은 좀 그렇지 않나?"
"그러니까. 아무튼, 뭐 그래. 그 새끼 잘 나가니까 거기까진 내가 봐준다. 근데 형. 이 새끼가 진짜 용서가 안 되는 게 뭔지 알어?"
"뭐?"
"방금 말했던 코치 형이랑 둘이 뉴질랜드를 왔었어. 왔는데 딱 보름타고 돌아가서. 하..."
"음. 상택아."
"진짜 개새끼. 스키가 무슨 장난인 줄 아나..."
"야 상택아. 너 거기서 한국 소식 안 봤어?"
"안 보지. 말했잖아. 나 진짜 운동만 했다고."
"으음. 이건 형이 딱히 그 친구 편 드는 건 아닌데."
박상택도 구마하의 약물스캔들이나 기타등등에 관한 이야기를 알게 되었다.
"난 걔 그래서 돌아온 거 아닐까 싶은데... 그때 좀 시끌시끌 했거든."
"뭔 소리야?"
"아니. 그러니까. 딱히 스키를 무시한다거나 그런 건 아닌 거 같고. 그래도 구마하 인터뷰 하는 거 보면 오히려 스키에 대한 애정도 깊은 거 같고."
"형. 아니... 지금 뭐야? 형 뭐 걔 팬이야?"
"하하! 야. 이게 지금 그런 뜻이 아니잖아."
"근데 왜 편을 들어?"
"하하하하! 상택아. 이건 편을 드는 게 아니라... 상황을 객관적으로 보라는 거지."
친척 형은 연륜있는 시각으로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원래 그런 사람 옆에 있으면 힘들긴 해."
"그래서? 내가 지금 그 새끼 때문에 버거워한다?"
"야 인마. 어쨌든. 너가 이렇게 운동에 집중할 수 있는 것도. 다 그런 라이벌이 있기 때문이고."
"누가 내 라이벌이야. 형. 내가 스키 몇 년 탄 줄은 알어?"
"아무튼, 흠집 내지 말고. 너도 열심히 하는 만큼 반드시 좋은 성과 올 거니까."
"...내가 지금 없는 말 지어내는 게 아니라니까. 형. 이건 내가 직접 겪은 것만 이야기하는 거야."
"알지. 알어."
"뭐야. 마치 사람 쫌팽이마냥..."
"후후후. 우리 상택이도 어른이 되어가는 구나."
"그만해. 진짜 뭐야 오랜만에 만나서..."
"알았다. 알았어. 미안. 형이 말이 심했다."
"그 새끼가 나한테 덤빈 건 진짜라니까!!"
"그래. 반드시 이겨. 할 수 있을 거야."
"..."
놈이 아무리 천재여도 나야말로 이번에 제대로 노력을 했다.
깔짝대는 노력이 아닌, 진짜 스키어가 할 수 있는 최고의 노력을.
반드시 실력으로 눌러 주겠다.
세상이 아무리 니놈을 좋게봐도 나한텐 아니다.
박상택은 타인이 아닌 자신의 경험에 의한 믿음을 확고히 다진다.
"앞으로 어떻게 할 거냐?"
"좀 쉬고. 눈 차는 거 봐서 강원도로 가야지."
"유럽 안 가고?"
"뭐하러 그래. 대표팀 선발은 강원도에서 하는데."
"그런가? 흠. 그래도 어차피 유럽에서 올림픽을 하는데."
"아무튼 쉴 거야. 형 나 진짜 존나 빡시게 운동했어..."
"하하. 알았어."
친척 형이 잠시 숨을 고르며 말했다.
"그렇게 너만 챙겨. 그 이상은 신경 쓰지 말고 그놈은 그놈이고 넌 너니까"
"신경 안 쓴다고!!"
어찌 됐든 절치부심 훈련에 집중해 온 만큼 사람이 그리운 단계였다.
무엇보다 여자가 너무 보고 싶다.
정말 클럽가고 싶은데. 다른 클럽은 물이 별론데...
집에 도착해 가족과 해후를 만끽한 박상택은 침대에 누워 전화번호 목록을 뒤적 거렸다.
"얜 아니고. 얘는 음. 보나마나 안 만나줄 거고."
그러다 마지막까지 친하게 지냈던, 스무살 미희라는 아이한테 연락을 걸어보았다.
"어? 상택이 오빠?"
"하하! 미희야. 잘 지냈어."
"오빠 뭐야? 죽은 거 아녔어?"
"야. 이게 진짜 싸가지 없게..."
"농담이지. 아니 근데 진짜 연락도 없던 사람이 어쩐 일로?"
"나 외국 갔다 왔어."
"유학?"
"뭔 유학. 학교 잘 다니고 있는데."
반응이 그닥 달갑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근황을 나눈다는 의미로 박상택은 통화를 이어갔다.
"그랬구나. 열심히 했네."
"노력했지. 아 진짜 고생했다 이번에."
"음. 우리는 오빠가 다시는 우리한테 연락 안 할 줄 알고 있었어."
"왜? 나 그냥 외국에 훈련 갔다 왔는데."
"음... 뭐."
"왜? 왜 그렇게 생각했는데?"
"오빠 그때 클럽에서 수빈이 언니랑 싸우고 그냥 갔잖아..."
"야. 내가 걔랑 또 뭘 싸우냐..."
"아니. 으음. 그럼 오빠는 한국 소식 잘 모르겠네?"
"모르지. 애들 어떻게 지내? 우리 한번 모일까?"
"아니. 나도 요즘엔 남자친구 있어서. 그 오빠들 연락 안 해."
"아 그래?"
그럼 끊어 이년아 쓸데없이 시간만 잡아먹고 있어 통신비 아깝게.
박상택도 흥이 깨져 전화를 끊으려는 순간.
"오빠. 웬만하면 다른 사람들한테도 연락 하지 마."
"왜? 내가 알아서 해."
"준이 오빠 잡혀갔어..."
"어?"
"영식이 오빠도 우리랑 인연 다 끊었고."
"..."
"그냥 클럽 멤버들 다 끝났어."
"......"
어떻게 된 일인지 자초지종을 물었다.
해준이란 친구가 지난 여름부터 강세준과 가까이 지냈었단다.
"세준이 형이 마약을 했다고!!?"
"응. 그래서. 오빠들도 거기 물 들다가... 어떻게 하다보니까."
"그럼 세준이 형은?"
"몰라. 듣자하니 먼저 날랐다는 거 같던데. 남은 사람들만 재수 없지. 국회의원 아들이라고 뒤로 빼준 건지 뭔지..."
"..."
강세준. 그래도 로열패밀리 가운데 가장 스타일리쉬했던 형... 그런 사람이 약쟁이였다니...
"그... 그럼 원석이 형은...?"
"몰라. 나 원래 그 인간 별로라고 가까이 안 하던 거 알잖아."
"아니 그래도. 도형이 형도 있고... 수빈이도 있고. 그 인간들이 옆에 그런 사람을 그냥 놔뒀다고?"
"진짜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수빈이 언니도 오빠 사라질 때쯤 클럽 다 끊었어."
"한수빈이 클럽을 끊어???"
"응. 언니 안 나오니까 도형이 오빠도 나오겠어? 알다시피 그 오빠 수빈 언니 비서 같은 느낌으로 돌아다녔잖아. 그러다보니 남은 사람들끼리 폭주하고 뭐하고."
"허허... 그럼 한수빈도 약 하고 다녔나?"
"이 오빠 진짜 운동만 했다는 게 거짓말 아니구나..."
"왜? 수빈이는 뭔데?"
"오빠. 수빈 언니 구마하랑 사귀잖아. 아는 사람들은 다 알어."
뭔가 너무 큰 이야기가 생뚱맞고 빠르게 지나가고 말았다.
"미... 미희야!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아 미안. 나 지금 남자친구 온다. 끊어. 다른 사람들한테 물어 봐. 안녕."
박상택은 핸드폰을 쥔 채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
"이게 다 뭔 소리야...?"
충고를 무시하고 클럽에서 사귀었던 다른 친구들에게 연락을 걸어보았다.
대부분 피하거나 그나마 통화가 연결된 친구는 자기는 더는 그쪽과 관여되고 싶지 않다는 말로 인연의 종말을 고했다.
아무튼, 키워드는 한수빈과 구마하였다.
"그래. 그날도 수빈이가 그 새끼 데리고 오라고 해서 개빡쳤다가..."
만날 수 있지. 사귈 수 있다. 단, 한수빈은 몰라도. 구마하가 그 정도 레벨이 된다는 것이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질 않았다.
"..."
아닐 거야. 가지고 노는 거겠지... 걔 남자관계 복잡한 거 다들 알고 있었으니까...
와... 그래도 구마하. 이 쓰레기 같은 놈... 재수없는 새끼... 수빈이랑...
이틀간 휴식을 취한 박상택은 학교를 찾아갔다.
오랜만에 찾아온 연세대학교.
아는 얼굴들도 보이고 친했던 이들과도 인사를 나누지만, 다들 저마다 수업과 아르바이트 등 바쁜 일상에 쫓겨 그를 반겨주는 이들이 많지 않았다.
그나마 한 사람이 남아 박상택과 시간을 보내주고 있었다.
"니가 이해해. 다들 바쁠 시기잖아."
"씨발 하루도 못 빼냐..."
"너도 니 스케쥴로 나갔다 왔으면서 애들한테 뭐라고 할 순 없지."
"아. 누가 그런 걸 따지재...?"
"후후후. 상택아. 학교 분위기가 많이 달라졌지."
"그러게. 왜 이렇게 다들 개인행동을 하고 있냐. 체대는 모이자 하면 딱 모여야지."
"왜겠냐. 위대하신 우리 후배님 덕분이지."
"구마하 이 새끼 하여간..."
"대신, 팀별로는 오히려 전보다 더 끈끈해졌다."
"..."
"갈 곳 없는 우리만 이렇게 버려진 신세가 된 거야."
"그러니까! 내가 그 새끼 진작에 눌러놨어야 됐다는 거야!!"
버럭 성질내는 그를 보며 친구가 말했다.
"누르면 뭐 어쩔 건데."
"뭐?"
"그래서 애들 모으면 뭐 어떻게 할 거냐고. 어차피 넌 니 운동으로 나가있고. 우리도 우리 임용이랑 취업 준비하느라 정신 없는데."
"..."
"마하가 맞았어. 지나고 보니까 그래. 단지 우리가 그런 경험이 없어서 몰랐던 거 뿐이지."
"야. 왜 너까지 그러냐?"
"저기 봐 봐. 쟤들도 육상팀 애들이거든."
"어디?"
박상택이 저 멀리 예전에 친하게 지내던 후배들을 본다.
선수 아닌 일반 학부생으로 자유로운 대학 생활에 적응 못하던 친구들이었다.
"지금은 그냥 갈 곳 없는 애들 다 운동장 가서 자기 운동들 해."
"..."
"마하 없는 시간에 민구가 많이 바빠졌지."
"양민구 병신 새끼. 선배라는 게 후배한테 살랑거리기나 하고..."
"좀 하면 어떠냐."
"뭐?"
"어차피 선배들이 우리한테 요구한 것도 그거잖아. 기어라. 안 그러면 나중에 니들 밥줄 다 끊어버리겠다."
"넌 씨발 뭔 말을..."
"그랬던 형들. 선배들. 지금 제대로 자리잡고 후배 끌어주는 사람 있나?"
"..."
"민구는 여기서 경험 바탕으로 임용가면 육상팀 감독이라도 하겠지. 우린 뭐냐?"
"야 이 새끼야."
친구가 저 멀리 대운동장이 있는 방향을 지켜보며 말했다.
"상택아. 마하는 메달리스트에 세계선수권 우승자야."
"뭔 상관인데?"
"그냥. 다들 맞서고 싶지 않아. 찍혀서 좋을 거 없는 세상이니까. 그리고 내버려 둬 봐야 어차피 게네가 하는 건 자기들 운동이고. 누굴 괴롭히는 것도 아니야."
박상택은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다.
"신경 쓰지 마. 나쁜 게 아니야. 달리 보면 마하 덕에 우리가 이제 좀 체대생다운 학교 분위기를 가져가고 있는 거야."
"씨발. 뭐라고 해야 되는지... 알았다. 그래. 나 혼자 지랄했네."
"야 이 새끼야. 물론 난 널 응원하지. 그런 놈한테도 기죽지 않고 버럭버럭 성질 내는 우리 박상택의 승부욕. 존나 멋있어. 인정해."
"비꼬지마 새끼야."
"언제 민구랑 둘이 그런 이야기를 했었어."
"뭐라고?"
"지는 마하의 형은 할 수 있어도, 선배는 될 수 없데."
"당연히 될 수 없지. 지도 체대 문화를 박살 내는 데 일조했는데."
"민구 말은, 지가 마하보다 실력이 더 좋을 수 없으니까. 선배다운 말을 건네줄 수가 없다는 거야."
"우리 학교에 그럴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냐..."
"너."
"...내가 뭐?"
"넌 아직 선배가 될 수 있어. 어쩌면 우리 학교에서 유일하게 너만이 구마하의 선배가 될 자격이 있을 거야. 난 그렇게 봐."
"좆까. 그딴 새끼 열 트럭을 갖다 바쳐도 안 받어. 꺼지라고 그래."
"상택아. 너 그러다. 진짜 마하가 스키에서 뭔가 성과라도 내면."
"야."
"그땐 너 지금보다 더 힘들어져. 제발 고집 좀 버려."
친구의 말이다.
"모두가 좋아하고 있어. 우리도 쓸데없이 선배라고 가오 안 잡고 다녀도 되고. 후배들도 오히려 전보다 더 친하게 다가오고."
"..."
"그렇다고 마하가 세계선수권 우승하고 돌아와서 거들먹거리기라도 해? 아냐. 지 운동만 해. 학교에서도 뭐 한다고 하는 거 다 거절하고, 여자친구도 뭐 외제차 타고 다니는 애 있다는데, 그냥 조용해. 걔는 지 운동만 하는 놈이야."
"야. 나도 내 운동만 하는 놈이야!"
"그러니까. 그냥 좀 신경 끄라고. 애들이 너 피하는 이유가 다른 게 아니야."
"씨발 그것도 내가 이기면..."
"이기면? 그러면? 그땐 우리가 너 빨아줘야 되냐?"
"그러려고 니가 운동한다면. 내가 널 응원 할 이유가 뭐야? 씨발 결국 내 자존감만 깎이는데."
"......"
박상택이 한 대 맞은 듯 힘 없이 친구를 보고 있었다.
"난 그냥 니가 열심히 하는 만큼, 승부욕만 가져가면 좋겠어."
"..."
"알았다고."
"우리 명문대 생이잖아. 제발 좀 다르게 생각하자. 그런 게 무슨 의미가 있는데. 너 잘해. 충분히 잘하고 있어. 너도 국가대표야. 우리가 볼 땐 이미 뭔가를 이룬 놈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