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륜기로 가버렷-171화 (171/401)

< 승자와 패자 (10) >

같은 날 오후 5시. 한수빈은 주인 없는 거대한 아파트에 들어와 있었다.

"..."

여러 문제가 있어 급하게 떠났다더니 과연 집이 엉망진창이었다.

그래도 가기 전까지 여자랑 있었는가 여기저기 속옷이며 스타킹이며 정신없이 널부러진 김원석의 아파트.

[오빠. 여기 별로야. 차라리 세준이 오빠네 집으로 가자.]

집은 사람을 닮는다.

김원석의 집은 그의 성격답게 많은 것들이 거칠어 보였다.

차라리 조금 샤프한 성격의 강세준의 집으로 가는 게 나을 거 같은데.

[거기 지금 출입금지야.]

[왜?]

[세준이 약 하잖아. 그 녀석 떠나고 증거 찾는다고 경찰들 들이닥쳤어.]

"후우..."

한수빈도 강세준의 약물중독을 알고 있었다.

오늘 내일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가까이 지낼 땐 별 상관 없다고 여겼는데. 지금은 그런 작은 스캔들조차 구마하에게 있어 치명적인 소문이 될 수 있었다.

"그래. 그냥 빨리 치우자."

그녀는 자기 집도 치우지 않는 사람이다.

아니 태어나서 청소라는 것을 해본 적이 없다.

그래서도 구마하와 있을 때 간혹 살림 할 줄 모르냐는 잔소리를 들으며 연인간의 귀여운 다툼을 해야만 했다.

(봐 봐. 이불은 이렇게 딱 각 잡아서!)

(군대야...? 어차피 누울 거 왜 정리를 해.)

(자기야. 이렇게 해야 형이 뭐라고 안 해...)

(하하하! 그럼 해야지.)

"후우. 뭐하는 짓이야..."

청소도 땀이 난다. 한수빈은 뻘뻘 거리며 집안 곳곳을 정리했다.

쓰레기를 비우고, 지저분한 냉이 묻은 여자 팬티를 쓰레기통에 담고.

창고를 뒤적여 청소기를 끌고 와 거실을 밀고 다녔다.

"괜찮아. 치우면 돼. 뭐 어때. 남들 다 하는 건데."

다 할 수 있다. 이혜정만 눈앞에서 치울 수 있다면 이까짓 것. 얼마든지...

그러나 안방 침실로 들어가자 한수빈도 조금 겁이 난다.

"..."

침대를 보자 갑자기 죄책감이 밀려들었다.

그녀는 섹스를 쾌락을 위한 오락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구마하를 만나면서 섹스는 더 이상 도파민 분비를 위한 육체행위가 아니게 됐다.

그것은 아름다운 것이었다.

사랑하는 연인들의 교감을 더해주고 단순 쾌락이 아닌 애정과 기쁨을 나누는 일이었다.

"정신 차리자..."

마치 호텔 하우스키퍼가 된 듯 한수빈은 주인 없는 침대의 이불을 펼치고 누군건지 모를 긴 머리카락과 머리핀들을 한쪽으로 담아 정리했다.

그리고 침대 옆 쓰레기통을 보는데.

"..."

정액이 담기다 말라비틀어진 콘돔과 지저분한 휴지들을 보는데 말 못 할 서러움이 밀려온다.

이런 짓까지 하고 있어야 하는 건가...

다 할 수 있다고는 했지만 정말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걸까...

사랑이 이렇게 어려운 걸까...

그래도 그를 지켜야 한다는 마음에 구역질을 참으며 김원석의 흔적이 담은 것들을 쓰레기통에 밀어 넣었다.

"후우..."

일을 다 끝내자 온 몸에 피로함이 엄습해 왔다.

체력이 너무 없구나... 한참 마하랑 같이 지낼 때는 그래도 둘이 한강 산책이라도 다녀 기운이 있었는데. 최근엔 스캔들에 행사에 뭐에. 둘이 따로 떨어져 있다보니 간단한 운동도 멀리 한 만큼 몸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한수빈은 소파에 쓰러져 잠이 들고 말았다.

눈을 떴을 땐 밤 8시. 하늘은 어두워지고 주변은 조용했다.

"맙소사! 언제 이렇게 잠이 들었어!"

서둘러 이도형에게 문자를 보내본다.

[오빠 어디야? 언제 와?]

사람이 언제 올지 모르니 불을 키고 있을 수도 없었다.

[올 때 전화하기 어려우면 문자라도 보내줘. 나 옆 방에 들어가 있을게.]

부랴부랴 식탁에 와인과 과자들을 던져놓고 한쪽방에 들어가 웅크리고 있는 한수빈.

심장이 조여오고 가슴이 답답하다...

다른 인간이라면 몰라도, 그래도 도형이 오빠니까... 거칠게 다루진 않을 거야...

걔한테도 좋은 거야. 도형이 오빠네 아버지가 어떤 분인데. 이 오빠도 머리 좋고 외무고시 통과하면 바로 해외로 나가는데. 나중엔 걔도 외교관 부인 된다고 나한테 고맙다고 할 걸?

한수빈은 그런 말도 안 되는 변명을 되내이며 자기합리화를 하지만.

"..."

정말 이렇게까지 해야하는 걸까...

그냥 찾아가서 다시는 마하 앞에 나타나지 말라고 하면 되는 거 아닐까...

지금이라도 이도형에게 연락해서 오지 말라고 할까...

전에는 아무렇지 않게 성질대로 굴었던 일들이 이제는 너무 무섭다.

다른 게 무서운 게 아니라, 그가 알게 될까 봐 무섭다.

구마하는 물론이고, 구마윤이나 원수정까지...

한상률 감독이나 친구들. 그의 주변엔 좋은 사람들 밖에 없었다.

백로들 가운데, 나 홀로 까마귀가 된 것 같은 기분에 정체를 들킬까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아니야. 나도 바뀔 수 있어!"

이건 내가 맞어. 그런 애는 옆에 있으면 결국 마음을 가져가게 돼.

엄마를 봐. 아빠를 보라고.

아무리 예쁜 아내가 있어도 남자는 결국 눈이 밖으로 향하기 마련이야...

한수빈은 부스럭 부스럭 가방을 뒤적여 손거울을 꺼내들었다.

"마지막이야. 진짜 마지막. 이제 더는 이런 짓 안 해도 돼. 하지말자. 오빠들 연락처도 다 지우고. 아빠한테도 더는 그 사람들 볼 필요 없다고 말하고!"

거울 속 자신을 보며 말을 걸고 있는 한수빈.

그 순간 문 밖 철커덕 거리며 누군가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

왔다. 왔어...

두근두근 죄의식과 긴장감에 한수빈의 온 몸이 조여드는 가운데.

"자기야."

절대 들려서는 안 되는 사람의 목소리에 그녀의 동공이 사정없이 떨린다...

* * *

이도형이 알려준 김원석네 거실에 들어와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자기야..."

제발... 제발 없어라... 이도형이 혼자 미친 소리 지껄였기를...

그렇게 빌고 또 빌었다.

"자기야. 있으면 나와 봐..."

나오지 마라. 나오지 마. 없어라. 보여주지 마.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정말 딱 열 까지만 세고 나가자.

마음 속으로 숫자를 세고 있었다.

다섯 여섯. 일곱...

한쪽 방에서 부스럭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허우우... 후우우우...."

차라리 귀신이어라... 제발 사람이 아니어라...

눈물을 주륵주륵 흘리며 그렇게 빌고 또 빌었다.

하지만, 나비같은 발소리만 들어도 나는 그녀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자... 자기야..."

방문을 열면서 수빈이가 밖으로 나왔다.

"..."

"자기야... 왜 여깄어...?"

"......"

신이여... 제가 얻은 메달을 다 가져가셔도 좋으니... 제발 시간을 하루만 돌려주시길...

"그러는 자기는 왜 여깄는데..."

"..."

"여기서 뭐했어?"

"아. 아... 그..."

"뭐했냐고."

어두워서 수빈이가 무슨 표정을 하고 있는지 잘 보이질 않았다.

웃는 거 같기도 하고 당황하고 있는 거 같기도 하고. 저쪽도 우는 거 같기도 하고...

모르겠다. 저 사람이 내가 늘 예쁘다 예쁘다 해줬던 그 사람이 맞나 싶기도 하고...

"말 해."

"처... 청소 하고 있었어..."

"자기가 청소를 해...?"

"어... 워... 원석이 오빠가 좀 해달라고..."

"내가 있는데 다른 남자 집 청소를 왜 해."

"..."

"말 해. 여기서 뭐하고 있었어."

"자기야. 어떻게 알고 온 거야...?"

"이도형이 알려줬다."

수빈이가 덜덜 떨며 고개를 숙였다.

"오늘 너네 두 미친 인간들이... 여기서 혜정이를..."

말이 끝까지 나오질 않아 한 템포 쉬면서 다시 입을 열었다.

"애를 망가뜨린다는 말에 직접 찾아왔다..."

"아. 아니야. 누가 그래?"

"야. 한수빈..."

"그 인간이 거짓말 한 거야."

마치 다른 사람이 된 듯. 수빈이의 얼굴이 태연하게 변하고 목소리가 바뀌었다.

"어. 맞어. 우리 오늘 그냥 여기서 같이 놀기로 했어. 그런 거 아냐."

이거구나. 그때 형네 가게에서 혜정이 선아랑 있을 때도 이걸 느꼈어.

가끔 느끼는 그녀의 이상한 기계적인 반응은 연기였다...

"어. 그런 거야. 그래서 내가 먼저 와서 청소하고 있었고."

"수빈아."

"자기야. 자기도 왔으니까 같이 놀자. 응?"

저벅저벅 다가가 그녀의 양 팔을 붙잡았다.

수빈이도 태연한 얼굴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오. 오해하지 마..."

"너... 니가 진짜..."

"..."

"사람이냐... 어떻게 이런 짓을..."

"자기야!"

수빈이가 안기려는 듯 달려들지만. 두 팔로 꽉 붙잡고 거리를 좁히지 않았다.

"아... 아퍼..."

"남들도 다 아퍼."

"..."

"한수빈. 너 예전에 나한테 니랑 감독님 중에 누가 더 소중하냐고 물어봤었지..."

그녀의 얼굴에서 연기의 가면이 보이질 않는다.

수빈이가 울고 있었다.

내 여자친구 한수빈이 후회와 미안함에 예쁘고 고상한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울고 있었다.

"아퍼... 놔 줘..."

"감독님이랑 너랑 물에 빠지면 난 널 구할 거야."

"자기야. 그게 아니라..."

"우리 병신들이랑 너랑 빠져도 난 널 구했을 거야."

"..."

"형? 너? 너야. 난 너부터 구해..."

그러자 수빈이도 버럭 소리를 질렀다.

"니가 먼저 그런 애가 있다고 나한테 말을 해줬으면!!"

"했으면 뭐! 작은 농담조차 못 하게 성질 있는대로 부리는데 어떻게 말을 해!!"

"..."

"혜정이랑 너? 혜정이가 죽을 위기에 처해있어도. 난 너부터 구했어."

"거짓말 하지마... 꿀리는 게 있으니까 숨기고 있었겠지..."

"아니. 꿀릴 거 하나도 없어. 걔랑은 이미 다 끝난 상황이니까."

"자기야... 이 팔 좀 놔 줘... 나 진짜 너무 아퍼... 정말이야..."

양 팔을 놓자 수빈이가 털썩 주저앉아 몸을 감싸쥔다.

엎드려 엉엉 울고있는 그녀를 보며 절박한 심정으로 말해줬다.

"지구상 모든 사람들 가운데서도 난 너였어..."

"자기야. 내가 잘못 했어. 한번만."

한참을 숨을 고른 뒤 말해줬다.

"그런데, 니가 혜정이를 물에 빠트리는 건 안돼. 그건 아니야."

"그러니까... 한번만... 한번만 봐줘... 제발..."

엎드린 상태로 손과 발을 비는 그녀를 보며 돌아선다.

"갈게. 다시는 이런 짓 하지마."

"자기야? 마하야!"

죽겠다...

차라리 땀을 빼라면 빼겠어...

탈진 할 때까지 뛰라면 뛰겠다...

운동장 100바퀴가 뭐냐. 1000바퀴 100000바퀴라도 뛰겠어...

다 벗고 맨 몸으로 스키를 타래도 타겠다.

눈물이 너무 힘들다. 우는 게 너무 지친다.

걷기가 어렵다. 그래도 나가야 된다.

그녀를 보고 있기가 너무 괴로우니까...

"자기야. 자기야!!"

수빈이가 절박하게 울어대는데 무시하고 걸어 나왔다.

쫓아와서 붙들고 제발 용서해달라고 빌면 용서해줄까 생각도 했지만.

평생 혼자의 힘으로 무언가를 해보지 못한 그녀는 엎드려 울고만 있었다.

그렇게 우리의 사랑이 끝났다...

* * *

"..."

이도형에게 전화가 걸려온다. 당연히 발신자는 한수빈이었다.

"훗..."

이도형은 가벼운 코웃음을 치며 전화를 받았다.

"어. 마하 만났냐?"

"너... 넌 내가... 반드시 죽일 거야..."

"원한이 서린 목소리라. 무섭네."

아직도 수빈이는 여러 모습이 있구나. 이것도 그 녀석이니까 할 수 있는 일이겠지.

이도형은 그리 생각하며 목소리를 태연하게 내고 있었다.

"내 말이 장난 같지... 너 내가 죽여. 니 부모. 니 동생. 이도형과 관계된 모든 인간들... 다 죽여. 반드시... 니가 다 망쳤어."

"수빈아. 마하 약물 소문이 어디서 퍼졌을 거 같애?"

"...뭐?"

"처음 인터넷에 올라왔다는 글. 그거 세준이가 쓴 거야. 어떻게 알았냐고? 내가 걔 아이디를 알 거든."

"..."

"마하 비행기 스캔들? 그거 우리 아는 애들은 다 알어. 주변 애들은 다 니네 얘기해."

"......"

"그 녀석을 망치는 건 너야. 내가 아니라. 너라는 존재가. 너의 주변이 그 놈을 망가뜨리고 있다고."

원한이 서린 한수빈의 목소리가 힘 없이 바뀌었다.

"오빠... 설마. 그때 내가 경기장에서 그랬다고 지금 우리 이렇게 만든 거야...?"

"야. 누가 이렇게 만들어. 이런 짓을 부탁한 건 너야."

"그럼 끝까지 일을 해내든가!!!"

"내가 왜? 거절할 자유는 나한테 있지."

"오빠네 아버지가 어떻게 될 지는 걱정도 안 해?!!"

"우리 아버지? 괜찮아. 정치 못 하면 어때. 어차피 대법관으로 은퇴하시는데. 그정도면 성공한 인생이지. 공무원 연금 잘 나온다."

무슨 말이 나올지 기다려 보지만 한수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까불지 마. 너나 나나 우리 다 똑같은 인간이야."

"니가 사람이냐... 어떻게 나한테... 우리한테..."

"그 질문은 자신한테 해보는 게 어떨까."

더는 할 말 없다는 듯 통화를 마친 이도형.

"후우..."

길게 뿜어지는 담배 연기에 씁쓸한 감정을 실어 보낸다.

"역시 나한테 싸움은 안 맞어... 이겨도 뒷맛이 개운하지 않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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