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륜기로 가버렷-165화 (165/401)

< 승자와 패자 (4) >

"오빠 서울대생이었어요?!"

"어. 내가 말 안 해줬었나."

"우와... 와... 그냥 여자 좋아하는 날라리 오빤 줄 알았는데..."

이혜정을 만난 이도형.

의도를 떠나 그는 지금 혜정이와 있는 시간을 즐기고 있었다.

"하하. 이번엔 조금 점수를 딴 거 같은데?"

"음. 으음."

"혜정이 남자 조건으로 보는구나."

"어. 그런 건 아닌데... 뭔가 서울대 생은 처음 봐서."

"관악산 가 봐. 거기서 저 아래 보이는 애들은 다 서울대 생이야."

"아.하.하. 그렇구나."

"하하하! 너 진짜 재밌다."

절대 서두르지 않았다.

오히려 이도형은 혜정이라는 스무살 아가씨와의 짧은 만남이나 대화가 즐거웠다.

"남자친구는 왜 헤어졌어?"

"쪽팔려서 어디가서 말도 못 해요..."

"하하하! 듣고 싶네."

"싫어요. 진짜 아무한테도 말 안 할 거에요."

"그럼 얼마나 사겼는데?"

"...한 세달?"

"푸하하! 그게 무슨 연애야."

"저. 저도! 거의 2년 가까이 사귄 남자친구 있었거든요!"

"하하하하! 대단하네. 그럼 학생때라는 거잖아?"

"..."

"이야~ 혜정이 날라리구나."

"오빠가 날라리죠. 전 그냥 조용한 애였거든요."

"날라리가 서울대를 어떻게 와."

"어머 학벌부심... 아 짜증나..."

"하하하!"

이도형과 점차 가까워진 이혜정.

지난 한 달 간 조심히 접근해 온 그의 노력에 힘입어, 두 사람은 이제 가볍게 와인 바를 찾아갈 정도의 사이로 진전되어 있었다.

"말도 안 된다. 나 같으면 너 같은 애 사귄다면 진짜 집문서를 뽑아다 잘해줄 건데."

"내가 전생에 죄를 많이 졌나... 만나는 애들마다 그렇게 안 하던데..."

"그건 나를 안 만나서 그런 거고."

"...집문서 이야기 함부로 하지 마세요. 우리 엄마 공인중개사 하세요."

"하하! 그럼 가치를 알아주시겠네."

"오빠네 집. 으음. 아니다. 이런 얘기는 안 하련다."

"왜? 해도 돼. 우리 집 얼만지 알려줘?"

"계산하는 애 될까 봐 싫어요."

"너 어차피 상대방 학벌 따지잖아."

"그건. 그거는..."

"후후. 혜정아. 내가 볼 때. 너는 너무 빨리 마음을 주는 게 있어."

"...제가요?"

"너 남자애들한테 빨리 허락해주지."

"..."

"그러면 안돼. 줄 듯 말 듯 오래오래 끌고 가야지..."

스물 일곱 살이라 그런가.

아니면 와인바라 그런가.

묘한 분위기에 이런 섹슈얼한 토크를 하고 오다니.

이혜정도 조금 부끄럽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오... 오빠는 그런 걸 어떻게 아세요?"

"많이 차이다 보니까 알게 됐어."

"진짜 입만 열면 거짓말이..."

"하하. 진짜야."

"누가봐도 여자애들 좋아할 거 같은 사람이 차이고 다닌다고요?"

"후후 내가 좋아하는 것과 나를 좋아하는 건 다르니까."

"..."

"너는 좋다."

"......"

침묵 속에 은은한 뉴에이지 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이도형이 그윽한 눈으로 이혜정과 눈빛을 마주치다 스르륵 고개를 내밀었다.

그러나.

"..."

"왜 이러세요."

"어... 그냥 좋아서."

"전 오빠 그렇게 안 좋은데."

"정말?"

"네."

이혜정이 먼저 키스를 거부하며 몸을 뒤로 빼냈다.

"음. 그래도 꽤 노력해서 다가간 거 같은데."

"오빠가 방금 그랬잖아요. 오래오래 끌고 가라고."

"하하하. 아 맞다. 방금 내가 그랬구나."

"뭐야. 서울대 머리 안 좋네."

"하하하하! 하하!"

이도형은 머쓱하게 큰 소리로 웃었다.

"그게 웃겨요?"

"그냥 쪽팔리니까."

"도형이 오빠. 제가 오빠 만나면서 느낀 게 뭔지 아세요?"

"나한테 뭔가 느낌이 있었어?"

"있었죠. 아 이 오빠는 여자애들 진짜 많이 울렸겠다. 정신 똑바로 차리자."

"하하... 아니야. 그렇게 많지는 않어."

이혜정도 방긋 웃으며 말한다.

"오빠 저는요. 세상에서 여자 가볍게 보는 사람이 젤 싫어요."

"왜...?"

"나도 여자니까. 나도 결국 가볍게 볼 거 잖아요."

이혜정이 가방을 챙겨 일어나며 꾸벅 인사를 건넸다.

"잘 마셨어요. 이 정도면 커피 흘리신 값은 했으니까. 이제 연락하지 말아주세요."

"혜정아..."

"갈게요. 안녕."

당당하게 돌아서서 가버리는 혜정이를 보면서 이도형은 혼자 한숨을 내쉰다.

"안되겠네. 애가 태생적으로 레벨이 높아."

스무살이 단호한 거 봐라. 저런 앨 나더러 어떻게 하라고...

역시 예쁜 애들이 속이 단단하다.

이도형은 그저 즐거운 만남이었다 생각하며 가볍게 마음을 털어 낸다.

"훗..."

애초에 한수빈의 말을 들어줄 생각은 없었다.

그냥 어떤 애길래 저러나 궁금했을 뿐.

하지만 생각보다 괜찮은 성격과 말투. 그리고 매력에 빠져 다가가 보았다.

여기까지다. 이 이상 넘어가면 진짜 원석이나 세준이 같은 놈들이 되는 거야.

선은 지켜야지.

똑같은 놈들이 될 수는 없으니까.

묵묵히 채념하며 술 한잔을 달래는 순간.

갑자기 한수빈의 목소리가 그의 가슴을 찌르고 다가온다.

오빠. 오빠는 싸움 해봤어?

"..."

그럼 누군가를 이길 순 있어?

"훗. 닥쳐."

싸워야만 하는 순간이 온다면 오빠의 힘으로 무언가를 해야만 한다면.

"제기랄."

* * *

"혜정아!"

"어?"

그녀는 늘 막차 시간를 놓치지 않기 위해 버스나 지하철을 타고 다닌다.

이도형은 현재 위치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이혜정을 볼 수 있었다.

"...왜요?"

"..."

"오빠. 왜요?"

"택시 타고 가."

"괜찮아요 아직 차 있어요."

"집 멀다며. 오빠가 돈 줄게."

"..."

"미안해서 그래. 데려다 준다면 싫다고 할 거 아냐."

이혜정은 여기서 성남까지 무슨 돈으로 택시를 타냐고 되물으려 하는데, 이도형이 콜택시로 모범택시를 불렀다.

"계산 했어. 이러면 안전하게 갈 수 있지?"

"..."

서울 종로였다.

밤 10시가 지나고 있었다.

집에 도착하면 12시. 자칫하단 새벽 1시.

하지만 택시를 타고 간다면? 11시가 되기도 전에 집에 갈 수 있었다.

"오빠..."

"가. 그냥 호의라 생각하고. 어차피 이 분 요금은 계산 된 거야."

"그럼 오빠가 타고 가세요... 집이 어딘지는 모르지만."

"세탁비 이걸로 끝낸다 생각해."

이도형이 차분히 심호흡을 하며 말했다.

"후우 후우... 그냥 좋아하는 애한테 이정도는 해주고 싶어서 그래."

"..."

"가. 어서. 걱정하지 말고."

이혜정이 택시에 올라 집으로 향한다.

"저... 단대 오거리로 가주시면 돼요."

"네. 안전하게 모셔다드리겠습니다.

"부탁드립니다 기사님."

"네."

이도형이 마지막이다 생각하며 말했다.

"감정은 진짜였어."

"..."

"가. 마음 풀리면 전화하고."

"네."

부르릉 도로를 떠나는 모범택시.

이런 걸 처음 타보는 이혜정이 혼자 어색하게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말끔한 장갑을 낀 기사님이 진정시키듯 말을 건넸다.

"남자친구분이 제 연락처를 가지고 있습니다.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 저 그게 아니라..."

"안전하게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편안히 쉬고 계시면 됩니다."

"...네."

"댁이 어디신가요? 댁까지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굳이 비싼 택시 불러놓고 뭐하러 다리 아프게 걷습니까."

"..."

역시 돈이 좋구나...

그냥 택시도 타려면 몇 만원 훅훅 깨지는데 모범 택시라니...

넓고 쾌적해. 아. 이래서 사람이 공부하고 성공해야 하는 법이라고...

어쩌면 도형이 오빠도 그렇게 나쁜 사람이 아닐지 모르겠다.

이혜정은 속으로 그런 생각을 가지며 조용히 문자를 찍었다.

[오빠 고마워요. 지금 한강 지나고 있어요.]

* * *

혜정이에게서 문자를 받은 이도형의 가슴이 뛰기 시작한다.

"..."

그래. 수빈아. 보여줄게.

너희들한테 휘둘릴 내가 아니다.

* * *

"그렇습니까. 알겠습니다."

"..."

"먼저 광고 건 취소."

"하하하! 그래요?"

"음. 에이 씨. 조건 나쁘지 않았는데."

"후우~ 광고라."

"무서운 인간들이네. 참. 의혹만 제기됐는데도 계약을 취소하다니."

"뭐. 돈이라는 게 그렇다는 거겠죠."

"후후후. 그러게 말이다. 돈이 참."

"감독님."

"응?"

"이제는 돈이 뭔지 좀 알 거 같아요."

"뭔데?"

"저... 감독님 앞에서 이런 말 써도 돼요?"

"뭐? 해. 뭐든."

"씨발 좆도 아니었구나."

"하하하! 크하하하하!"

"아하하하하!!!"

가을 후반기로 예정되어 있던 광고는 취소되고.

그러면서도 행사는 여기저기 불려가 또 광고비 정도는 아니지만 나름대로 수익은 얻고.

무엇보다 가을 전국체전에 나가 우승을 하는 바람에 또 상금을 거둬들였다.

"따지고 보면 놀면서 일하는 거. 일해서 일하는 게 낫네요."

"하하. 그렇지."

"아~ 개소리도 임 기자님 기사 덕에 조금씩 가라앉고 있고."

"참. 글 잘 써. 보면 진짜... 스포츠 세상에 놔두기 아까운 인물이야."

『구마하에게 약물 의혹을 제기한다는 건, 우리가 믿고 따르는 노력의 가치를 의심한다는 뜻이다.

그는 세 번의 올림픽 메달과 두 개의 세계 선수권 우승메달을 가지고 있는 선수다.

현존하는 100m 세계 신기록 보유자이면서, 지난 아테네와 헬싱키에서 각각 대회 기록을 세웠다.

이미 무수히 많은 도핑테스트를 거쳤으며, 그의 혈액은 지금도 도핑센터에 보관되어 혹여나 우리가 모르는 약물이 나오지 않을까 틈틈이 검사를 받고 있다.

이같은 사실에 입증해 볼 때. 우리는 그를 비난할 게 아니라 응원하고 지켜주어야 한다.

대한민국 대표팀 선수가 이뤄낸 성과를 저들이 흠결내려 하여도, 선수의 노력이 없었다면 지켜질 수 없다.

안타까운 사실이었다. 그들이 이렇게까지 선수의 부정을 찾으려 하는 데에는 스포츠의 공정성을 지키고 싶어서 라기보단, 동양인의 성과를 인정할 수 없다는 서구 특유의 우월한 인식이 깔려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만큼 역설적으로 구마하의 성과는 놀라운 것이란 뜻이다.

물론, 너무 큰 성과를 누군가는 의심 가득한 눈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개인의 감상일 뿐. 오히려 그런 감상을 널리 퍼트려 선수의 노력을 깎아내리고 헐뜯는다는 건 당사자의 패배감을 표출한다는 뜻 밖에 되질 않는다.

기자는 구마하 선수가 매일같이 흘리는 땀과 노력을 보았다.

실제로 지금도 함께 훈련하는 연세대 동문 가운데서도 그의 노력을 지켜보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그는 휴학 중에도 누구보다 운동장을 나와 자신을 단련하고 있었다.

그와 함께 뛰었던 선수들. 지도 감독들. 그리고 대표팀의 동료들.

누구 한 사람 그가 운동을 게을리하는 걸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오히려 그는 자신을 한계점 그 이상까지 내몰아 그동안 세상에 없던 초유의 하계 동계 올림픽 두 종목이라는 특수한 도전에 자신을 던지고 있었다.

구마하가 약물을 했다면 기다리면 된다. 그때가서 비난을 퍼부으면 된다.

올림픽 도핑센터는 세계 최고의 약물 검출 기관이고, 지금 구마하는 다가오는 토리노에 도전하려 하니까.

끝으로 나는 기자가 아닌, 한 사람의 사회구성원으로서 질문을 던지고 싶다.

노력하고 고생하여 얻어낸 성과를 불특정 다수가 인정하지 않고 의심만 한다면.

의혹을 해명하고 또 해명해도 다른 의혹을 제시하여 괴롭힌다면.

과연 이 사회는 그 누가 인내하여 무언가를 이루어 내려 하겠는가.

그런 세상에 무엇이 발전 될 수 있겠는가.』

"네. 기자님. 기사 잘 봤습니다."

"보셨어요."

"어우. 너무 좀 편파적으로 편을 들어주신 거 아닙니까?"

"제 뜻도 있고. 또 이현석 교수님의 이야기도 있었고요. 많은 분들이 취재를 하는데 있어 분노하고 목소리를 높여 주셨습니다."

"하하하. 그러시구나."

"물론 객관적인 시각을 담아야 하니, 반대측 의견도 취재를 했지만."

"네. 뭐라고 하던가요?"

"안 만나 주던데요. 하하하!"

"하하하하!"

묵묵히 걸어가라.

믿고 기다려주는 세상이 있다.

무엇보다 흔들리지 마라.

그런 많은 것을 경험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감독님."

"어. 야 그만 좀 먹어! 탕수육은 니가 다 먹냐!"

"에이 왜 이러세요. 유치하게."

"하하하. 기분 좋아서 그러지."

"정준이 형이 스키는 평정심을 가져야 한다고 했었어요."

"음. 그런 이야기 많이 하더라."

"저. 지금 너무 좋아요."

"훗. 조금 풍파를 맞아보니까 단단해지는 거 같애?"

"진짜로요. 엄청 단단해지는 기분이에요. 이제 무엇에도 흔들리지 않을..."

"어 그렇구나..."

"..."

"...뭐?"

"아 감독님..."

"단단하다며. 흔들리지 않는다며. 야 인마. 이깟 탕수육 하나에 흔들려서야 그 말을 어떻게 믿으라고!"

"그러니까 나가서 먹자고요! 저도 지금 기분 좋아서 간만에 식욕 돋아나는데!!"

고맙다. 정말 힘들었는데, 세상이 어찌 됐든 나는 강해질 수 있었다.

그리고 이번 일로 나를 보는 사람들의 진심이 무엇인지 조금이나마 알 수 있었다.

"결론은 언제나 하나야."

"네. 운동해야죠."

"그렇지. 운동이나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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