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을 앞의 그림자. (7) >
"김선아. 너 학교는 어디 가려고?"
"야. 넌 힘들게 공부하는 애한테 그게 뭐야."
"아니. 목표가 있나해서..."
"됐어. 마한데 뭐. 이왕 재수까지 하는거 서울은 들어 가야지."
"괜찮다네. 괜히 뭐라고 해."
"후우..."
한수빈은 조용히 대화에 참여하지 않고 배만 채운다.
구마하도 편안하게 대화를 이어갔다.
"그럼 서울대 가야겠네."
"하하하. 야. 장난하냐! 칠수해도 거긴 못 가."
"근데, 선아야. 그냥 인서울이 목표라는 건 나도 좀 그런 거 같은데..."
"왜?"
"음..."
"야. 정석인 너 점수 잘 나오고 있다고 그러던데?"
"하하하... 쟤 볼 때나 그렇지. 지금 간당간당해..."
다들 재수생 친구의 의지가 꺾이지 않도록 최대한 조심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하지만, 성적과 목표라는 주제엔 이혜정도 친구 김선아를 보며 말한다.
"막상 서울가도 별로 할 것도 없어."
"야. 등록금 날리면서 반수하는 애한테 무슨 소리야. 꿈과 희망을 줘야지."
"그게 뭐라고 꿈과 희망까지 나와..."
"몰라. 난 전문대라도 서울로 갈 거야."
"차라리 수원이나 용인도 괜찮고. 일단 집이랑 가깝잖아."
"대학을 누가 집이랑 따져."
"생활면에선 그게 좋으니까. 나 버리는 시간 장난 아냐."
"너 니네 학교까지 얼마나 걸리는데?"
"주말에 강남 잠깐 가는 거랑 완전 다르다니까. 집에서 나와. 버스 타. 지하철 타. 갈아 타. 중간중간 기다려. 화장하고 준비하는 시간까지 하면 하루 네 시간 그냥 날아가."
"진짜? 그정도야?"
"그래. 진짜 가끔 놀러가는 거랑 매일 나가는 거 다르다니까. 생활이 애매해져. 기숙사도 안 되고, 자취하면 돈은 막 깨지고."
"마하야 너는...? 넌 기숙사 지내?"
"난 그냥 학교 근처에서 자취하지. 집 구했어."
"좋겠다... 후우..."
"쟤랑 비교하지 말고. 쟨 쟤고 우린 우리니까."
멀리 계산대 앞에서 구마윤과 이정석이 그들을 보고 있었다.
"사장님. 분위기는 나쁜 거 같지 않죠?"
"음. 수빈이만 조용한 거 빼고는 뭐..."
"사장님. 선아 지금 또 눈치 보는 거 같죠?"
"정석아. 저기도 어쨌든 손님들이다. 신경 끄고 테이블이나 치워."
김선아가 구마하에게 묻는다.
"넌 요즘도 운동 해?"
"하하하! 먹는 거 봐. 그리고 내가 운동 안 하면 뭐해."
"아 답답하다. 니네들 봐서 좋은데, 내가 이래서 친구들 안 보려고 했던 거야... 뭔가 나만 막 무너져 있는 거 같은..."
"선아야. 스트레스 받지 마. 잘 될 거야."
"두루뭉술한 이야긴 그만하시지."
"하하하. 뭐든 열심히 하면 답 오겠지. 나도 그렇게 믿어."
"흠."
친구들의 위로에 힘을 얻는 게 아닌 어딘가 더 막막한 기분만 더해지는 것 같다.
김선아는 삼 자의 의견이 궁금해 한수빈을 보며 물었다.
"언니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뭘?"
"무리해서 서울로 가느냐. 현실적으로 집 근처 대학을 가느냐. 뭐가 좋을 거 같으세요?"
"솔직하게? 아니면 그냥 듣기좋게?"
"솔직. 완전 솔직히요."
"나는 이 친구 말도 틀린 말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한수빈이 이혜정을 가리키고 이혜정도 그녀를 보며 묻는다.
"언니는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일단, 무작정 서울로 간다는 전제가 잘못됐으니까."
"그래요... 음..."
"아까 두 사람 하는 이야기 들었는데. 나도 혜정이 이야기에 동의해. 환경이 있어도 누리지 못하면 그건 그거대로 고통스런 일이야."
"아... 네."
"자기야 말이 좀 쎈 거 같다."
"현실적인 이야기를 듣고 싶다고 하니까."
"야. 나 괜찮아. 언니 말씀하세요. 괜찮아요."
한수빈이 김선아를 보면서 묻는다.
"정말로 하고 싶은 걸 모르겠어?"
"모르겠어요... 그래서 일단 서울로 가서 지내면 알지 않을까 싶어서..."
"서울 생활이 목적이라면 꼭 대학을 갈 필요가 있을까?"
"그럼요..."
"놀고 싶은 거야 아니면 뭔가를 얻고 싶은 거야. 거기서부터 생각을 해보면 답이 나올 거 같은데."
"음. 놀고싶어서 대학을 간다면요?"
"아니지. 실패할 확률이 높아."
"그럼 뭔가를 얻으려고 대학을 가는 건 괜찮고요?"
"무엇을 얻을 것인지 방향은 정해야지."
"뭔가 문화와 생활이 다채로운 공간에 있어야 안정감을 느끼는 거 같아서요."
구마하는 한수빈의 또 다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늘 장난많고 애교 넘치던 그녀에게 이런 모습도 있구나.
"우리 학교도 그런 애들 진짜 많어. 일단 대학부터 가고보자 하는 애들."
"그래도. 거기는 공부 잘하잖아요."
"맞어. 여대 원탑인데."
"잘하면 뭐해. 서울대가 아닌데. 그리고 우리 학교 오는 애들은 대부분 좋은 집안에 시집가고 싶어하는 애들이 많어."
"자기야. 이대는 독립심 강하고 그런 애들 모이는 학교 아녔어?"
"있겠지. 하지만 내가 본 애들은 거의 안 그래."
마치 큰 언니의 이야기라도 듣는 듯 이혜정과 김선아는 한수빈의 이야기에 집중하고 있었다.
"대학이 어렵고 서울은 가고싶다. 그럼 취직을 해도 되고. 뭘 배우는 학원을 가도 좋지 않을까? 직업학교라는 것들도 있으니까. 의미없이 대학에 목을 매는 것보다는 그게 나을 거 같애."
"어... 왜요?"
"그래도 취직하려면 대학은 나와야."
"우리 아빠가 그랬어. 단기적인 계획과 성취는 빨라도 크게 실패하고, 장기적인 계획은 힘들어도 기반을 강하게 해준다."
그녀가 부모님 이야기를 꺼내자 구마하가 깜짝놀라 고개를 돌려보았다. 그럼에도 한수빈은 의식하지 않고 말했다.
"하지만 상황에 따라 단기적인 계획을 수행할 사람들은 필요하다. 그게 누굴 거 같애?"
"모르겠어요."
"누군데요?"
"일하는 직원들이지."
"..."
"..."
"그러니 본인의 판단이 중요해. 내가 뭘 하고 싶은지 빨리 파악을 해야하는 것이고. 그에 맞는 길을 가야 하는 것이고."
"음."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으니까 선아는 지금 힘들다는 걸 느끼는 게 아닐까?"
구마하는 어딘가 그녀가 낯설면서 또 익숙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다.
"자기야. 그럼 성공은 뭐야?"
"이 세상에 성공이 어딨어. 인생은 드라마가 아니야. 계속 가는 거지."
"..."
"솔직하게 말해달라고 했으니까."
"네. 괜찮아요."
보기와 달리 상당히 직설적인 분이시구나. 냉철한 부분도 있고...
이혜정이 한수빈의 첫인상을 정리하고 있는데, 그녀가 묻는다.
"혜정이는 전공이 뭐야?"
"저요? 어... 저도 그냥 점수 맞춰 영문과 들어갔어요."
"그렇구나. 혜정 씨는 연영과 갔어도 잘 어울렸을 거 같은데."
"제가 그런 데 끼가 없어서..."
"얘 은근 허당이거든요."
"후후후. 둘이 언제부터 친구야?"
"오래됐죠 우리도."
"한 5년? 그치? 중3때부터라고 봐야 하니까."
"베프구나."
"민혜라고. 하나 더 있어. 셋이 젤 친해."
"자기는 밥 먹어."
"난... 말도 못 꺼내냐."
이혜정이 구마하와 한수빈을 보면서 말했다.
"재능있는 사람들끼리 만났네요."
"어떻게 하다 보니까."
"잘 어울리세요."
"혜정인 남자친구 있어?"
"네."
"없었으면 소개해주고 싶었는데."
"지금 애랑 잘 지내고 있어요."
"다행이네."
"누구 소개해주려고? 누구 아는 사람 있어?"
"찾아보면 나오겠지. 이 세상에 예쁜 여자 싫어할 남자가 어딨어."
"고맙습니다. 근데 진짜 잘 지내고 있어요."
서울. 대학. 네 사람은 어렵지 않은 대화를 나누며 저녁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한수빈은 이혜정에 관한 정보들을 얻었다.
* * *
"그럼 우린 슬슬 올라가 봐야 해서."
"그래. 가. 잘 먹었어."
"재밌었어요. 두 사람 만나서 반가웠고."
"언니 들어가세요."
"혜정이도 안녕."
"네. 가세요."
구마윤이 차까지 걸어가는 구마하와 한수빈을 바래다주었다.
"수빈아. 차 어디다 세웠어?"
"아. 저쪽 골목요."
"형. 갑자기 우리 와서 놀란 거 아니지."
"괜찮아. 자주 보니까 좋다. 수빈이도 맛있게 먹었지?"
"네. 오빠."
태연한 미소를 지어보이지만, 구마윤의 눈에는 그녀의 가슴이 요동치는 게 보이고 있었다.
하지만, 안다하여 일일이 동생에게 일러바치거나 할 수도 없다.
이 또한 동생이 이겨내야 할 과제라고 생각하고 있으니까.
"그래. 너 아까 하고 싶다는 이야기가 뭐야."
"아 그게."
"자기야. 오빠랑 이야기 하고 와."
"응."
구마하가 진지하게 물어본다.
"형. 나한테 엄청 큰 호감을 가진 사람이 있는데, 근데 그 인간이 꽤 파워있는 존재야."
"수빈이?"
"아니. 우리 육상연맹회장인데."
전국체전이나 기타등등. 박문기 개인의 사욕에 끌려다니긴 싫지만, 그렇다고 거절하자니 혹여나 불이익을 받을 친구들이 걱정된다는 구마하.
"선수 선발전을 치르지 않고 대표팀에 온 애들이라. 그런 게 조금 걸려."
"그렇지만, 그 친구들이 널 위해서 뽑혔다고 할 순 없잖아."
"그건 아닌데. 얘네가 나랑 친하니까. 괜히 내 개인행동이 애들한테 불똥이나 튀지 않을까 싶은 거지..."
"근데 너도 따져보면 선발전 안 했잖아."
"난 그때 육상연맹도 연맹이지만, IOC에서 올림픽 초청선수로 간 거니까. 그리고 나도 나름 선발전을 했었어. 비밀리에 했던 거지만."
"그랬었구나."
"실력 없으면 나도 초청선수 못 됐지. 근데 얘네는 그게 아니라고. 은근 연맹 눈치를 많이 봐."
"음. 마하야. 형이 지식도 내공이라고 했었지."
"어."
"사람이 머리를 많이 쓰면 힘이 머리에 몰리게 되어있고, 몸을 많이 쓰면 전신에 힘이 고루 퍼지게 되어있어."
구마윤이 주변을 둘러보다 저 멀리 지나가는 아저씨 한 분을 가리킨다.
"저 분 어때. 니 눈엔 뭔가 보여?"
"음. 아니. 난 아직 형 정도는."
"계산하는 사람은 계산이 드러날 수 밖에 없어."
"..."
"나머지는 선택에 따르는 판단과 책임이 있을 뿐이야."
"후우. 결국 니가 알아서 해라네."
"그게 어른이니까."
"알았어. 갈게."
"그래. 잘 해결하고."
저 멀리 차에서 기다리고있는 한수빈에게 다가가는 구마하.
갑자기 궁금한 게 생겨 돌아보았다.
"형. 그럼 형은 감정도 보여?"
"후후. 그런 거 따질라말고 빨리 가."
"보이는구나... 우와."
"가라. 조심해서 운전하고."
"얘기해 줘. 사랑하는 사람은 뭐가 보이는데?"
"똑같애. 머리를 쓰면 머리에. 몸을 쓰면 몸에. 마음을 많이 쓰면 어디에 힘이 몰리겠어."
"...마음이 어딨는데?"
쿵쿵 구마윤이 가슴을 두 번 두드리며 돌아섰다.
"심장이구나. 오오~ 그래서 사랑하면 가슴이 두근거리는 건가."
형의 이야기를 곰곰이 새겨들으며 한수빈의 차 포르쉐로 다가온 구마하.
그녀가 보조석에 앉아 있었다.
"자기야. 운전 안 해?"
"자기가 해. 좀 피곤해."
"...포르쉐는 살짝 겁나는데."
"괜찮아. 천천히 가..."
구마하가 운전대를 잡으며 도로로 올라선다.
"오~ 역시. 부드러워."
"..."
"이런 차를 타면 운전이 거칠어 질 수 밖에 없겠다."
"자기야."
"응?"
"아까 내가 한 말 어떻게 생각해."
"뭘?"
"환경이 있어도 누리지 못하면 고통스럽다는 말."
"흠..."
"별로였어?"
"몰라. 자기의 생각이니까."
"..."
"난 별로 할 말 없어."
"그래."
부르릉 차는 금새 고속도로로 향하고.
한수빈은 태연하게 창밖을 보며 말한다.
"만약 내가 경영자라면 난 의미없이 대학 나온 사람들보단 차라리 정석이같이 일찌감치 자기 전문성을 가진 사람을 뽑겠어."
"정석이를 뽑아서 뭐한다고?"
"일하는 거지."
"걔가 기업으로 갈 것도 아니고. 차라리 일하겠다고 오는 사람을 뽑아야지."
"완전 달라. 정석이는 자기 판단과 결정을 내리고 상황에 맞는 실천력을 갖추고 있어."
"..."
"목표도 없이 대학부터 가자. 서울로 가자. 가서 보자. 난 그런 애들 딱 싫어."
"자기야. 선아 싫었어?"
"..."
"왜 이래 밥 잘 먹고 나와서."
"걔지?"
"뭐가."
"이혜정. 솔직히 말해 봐."
"혜정이 뭐?"
한수빈이 처음으로 구마하를 무표정하게 돌아본다.
구마하는 운전중이라 그녀와 눈을 마주칠 수 없었다.
"말해. 쳐다보지 말고."
"걔도 알어. 자기가 자기 분수에 맞지 않는 걸 원해선 안된다는 거."
"..."
"그 친구를 힘들게 한 건 내가 볼 땐 자기야."
"뭐야 지금 뭔 소리를 하는 건데."
"말해 봐. 걔 맞지?"
"아 씨. 진짜..."
직선 구간.
구마하도 앞에 차가 없는 것을 보며 살짝 고개를 돌려 한수빈과 눈을 마주쳤다.
"왜 이래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데."
"자기야. 모든 사람이 다 무대에 오를 수 있는 건 아니야."
"그래서...?"
"그 친구를 흔든 건 자기였어."
"..."
"걔 좋아하지?"
"하하. 참 나."
"괜찮아. 솔직히 말해 봐."
"아 그러니까 뭘!!"
"걔지? 맞지? 아직도 좋아하지?"
"후우. 자기야. 아까 못 들었어? 우리 그런 사이 아니었다니까!"
"..."
"혜정이 남자친구 있었어. 나도 운동하면서 알던 형이고. 그리고 지금도 걔 남자친구 있다고 그러잖아."
"그래."
"아니 왜 사람을 의심하는데."
"알았어. 그럼. 미안해."
씩씩거리고 답답해하는 구마하에게 한수빈이 스르륵 다가와 안겼다.
"운전중에 뭐하는 거야."
"자기는 내꺼야..."
"아 진짜 비싼 차 끄느라 정신없는데."
"그럼 같이 죽자. 사고 내. 난 괜찮아."
"..."
"자기는 나만 좋아해야 돼. 약속이야."
"안돼."
"...왜?"
"나 훈련 가야 되니까."
"후후후. 다녀 와. 일하는 건 뭐라고 안 해."
그로부터 며칠 뒤 구마하는 김정준과 뉴질랜드 전지훈련을 떠났다.
[비행기 뜬다. 핸드폰 다 끄랬어. 다녀올게]
[그래. 도착해서 전화 해.]
구마하가 한국을 떴다.
한수빈은 독자행동을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