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을 앞의 그림자. (6) >
예상치 못한 만남에 한수빈과 이혜정이 서로를 보고 있었다.
누구야? 마하 옆에 이런 애가 왜 있어?
우와 피부 봐... 사람이 어쩜 이렇게 하얘. 자기 피분가?
예쁘게 생겼다... 안 꾸민 거 같은데 스타일이 좋아.
오빠는 어디가 내가 낫다는 거야? 연영과도 이런 사람 보기 어려운데...
원래 선약이 잡혀있던 이혜정이 친구 김선아를 돌아보며 물었다.
"뭐야? 너가 부른 거야?"
"아! 아니야. 나도 마하네 오는 줄 몰랐어."
"..."
구마하가 침착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맞어. 우리 그냥 형네 왔다가 자리 없어서 여기 앉았어."
"어. 음."
"너 오는 줄 우리도 몰랐어."
"그래. 뭐. 무슨 상관이라고."
우연이 겹친 피할 수 없는 순간.
구마하가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연인 한수빈에게 말한다.
"자기야 사람을 뭘 그렇게 빤하게 보고 있어."
"그냥. 예쁜 친구라."
"아. 고맙습니다..."
"진짜예요."
"네..."
"어. 보자. 저쪽 자리 났다. 가자. 선아야 반가웠다. 혜정이도."
"어? 어."
"음. 그래."
자리를 피하려는 구마하. 하지만 한수빈이 그를 붙잡으며 말한다.
"우리 그냥 여기 있자."
"가자."
"뭐하러 귀찮게 옮겨."
수빈은 의미심장한 한 마디를 더 하며 미소지었다.
"친구들이라면서."
"..."
"혜정 씨 우리 여기 있어도 돼죠? 나도 선아랑 친해지고 싶은데."
"아. 네. 그... 그래도 되겠지?"
"어? 어. 그. 그럼."
"선아도 미안. 갑자기 친한 척 다가와서 놀랬죠."
"아니요. 정석이한테 이야기는 들었어요. 며칠 전에 왔다 가셨다고."
김선아가 먼저 기다리고 있었기에 구마하가 그녀의 맞은 편에 앉았고. 마지막으로 들어온 두 사람이 서로를 보고 있었다.
구마하가 좌우를 돌아보며 말했다.
"저기. 그... 인사들 해. 선아랑 혜정이고. 그리고 여긴 내 여자친구 한수빈."
"안녕하세요."
"아 네. 안녕하세요. 정석이가 우리보다 언니시라고..."
"맞어. 누나야."
"말씀 편하게 하세요."
"미안. 먼저 약속이 있던 거 같은데. 우리가 불편하게 했네."
"..."
"아니요. 뭐 그렇게까지는... 이혜 그치?"
"어. 어. 그럼."
이혜정이나 김선아가 괜찮다는 식으로 웃어 넘기고 있었다.
구마하가 주변을 보며 말했다.
"그래. 이렇게 된 거 내가 살 게. 너네들 먹고 싶은 거 다 먹자."
"야. 너 여기오면 돈 내? 사장님 니네 형이잖아."
"그건 니 남자친구한테 물어봐라. 내가 돈을 내야하나 말아야 하나..."
"하하. 쟤도 참..."
"다 뜯어 망할새끼."
옆에서 웃긴 이야기를 나눠도 한수빈은 가만히 이혜정만 보고있다.
이혜정도 뚫어져라 바라보는 시선을 느끼며 묻는다.
"왜요?"
"혜정 씨는 학교 어디 다녀요?"
"동국대요."
"영연과?"
"아니요. 그냥 일반학분데..."
"하하. 자기야 사람 불편하게 왜 그래?"
"어. 아니 그냥. 너무 예쁜 친구라... 당연히 연기전공인줄 알았어."
"언니도 예쁘신데..."
"..."
"말씀 많이 들었어요."
"...어디서요?"
"먼저 마윤이 오빠가 둘이 오셨었다고."
한수빈이 이건 또 무슨 뜻이냐는 듯 구마하를 돌아본다.
구마하도 이혜정을 보며 물었다.
"형이 우리 얘기했어?"
"어. 되게 재밌었다고."
"으음."
"자기야. 오빠가 이 친구를 알어?"
"아. 얘 우리 윗 집 살어."
"..."
"바로 위는 아니고요. 몇 층 나눠지긴 해요."
"어... 그렇구나."
"걱정마. 친한 사이 아니야."
"맞아요. 그냥 친구죠. 친하진 않아요."
"내가 무슨 걱정을 한다고..."
이혜정도 두 사람을 한 번씩 돌아본 뒤 상관하지 않겠다는 듯 바로 선아에게 목소리를 높였다.
"그리고 너 뭐야? 너 왜 말 안 했어?"
"갑자기 나? 뭐?"
"정석이. 니네 언제부터 그렇게 된 거야?"
"뭐야. 우리가 뭐 나쁜 짓 한 것도 아니고. 표현이 이상하잖아."
"그럼 얘기를 해주든가. 언제? 니네가 언제 인사라도 했었어?"
이혜정과 김선아가 대화를 나눠도 한수빈은 구마하만 보고있다.
"왜? 자기야 뭘 그렇게 보는데."
"그냥..."
"그러니까 불편하면 자리 옮기자니까."
"불편한 건 없어."
"..."
사리분별을 하고있는 한수빈. 원래 그들의 약속에 우리가 끼어들었다.
무엇보다 옮긴다고 이혜정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었다.
이미 그녀를 알아버렸다.
"아 잠깐만! 좀 하나씩 물어 봐. 보자마자 정신 없게 왜 이래?"
"신기하잖아. 니네 얼마나 사겼어? 뭐하다 만나게 된 거야? 아니. 언제부터?"
한수빈도 이정석과 김선아의 이야기로 고개를 돌리며 구마하에게 말했다.
"자기야 나 신경쓰지 마. 애들이랑 얘기해."
"음..."
동생이 왔다는 소식에 구마윤도 주방에서 나와본다.
"어? 뭐야?"
어딘가 신기한 조합으로 앉아있는 동생과 그 친구들이었다.
어떻게 이런 자리가 된 거지? 구마윤도 혜정이나 수빈이 한 사람 한 사람 인사를 받아주고 있는데 동생이 말한다.
"형. 애들이랑 인사는 나중에 하고. 밥 줘. 우리 배고파."
"어. 그. 그래. 일단 뭐라도 먹고있어."
마하가 왔으니 수빈이도 왔겠지.
혜정이도 본인이 거리두지 말고 놀러오라고는 했으니 있을 수 있다.
그런데 왜 하필 오늘? 저렇게 둘이? 마하랑??
혜정이는 그렇다쳐도 수빈이도 쟤를 아나???
구마윤이 서빙중인 이정석에게 물어본다.
"정석아. 어떻게 된 거냐."
"모르겠어요. 선아가 혜정이랑 보기로 한 거 같은데... 갑자기 구마가 쳐들어와서."
"수빈이는?"
"사장님. 이거 3번 테이블이었죠? 7번에 소주 2개 추가로 나갔어요."
"어. 그래. 빨리 갖다드리고."
"모르겠어요. 구마가 알아서 하겠죠. 저도 그래서 지금 선아한테 안 가고 있잖아요."
"후후. 그래."
다시 테이블. 구마하와 이혜정이 선아와 정석이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도 딱히 니네한테 숨길려고 숨긴 건 아니고... 어떻게 오며가며 하다보니까."
"얼마나 됐는데?"
"아직 그렇게 안 됐어..."
"진짜? 너 민혜랑 나는 연락도 끊어놓고!!"
"내가 언제 니네 연락을 끊었어. 너도 남자친구 있잖아."
"선아야 다행이다. 오래 만난 거 아니면 빨리 헤어져라."
"야! 하하. 뭔 소리야."
"잘 생각해. 저 새낀 정상이 아니야... 이름만 정석이지. 본성은."
"안 닥쳐 미친년아! 씨발년이 뒤질라고."
이정석이 다가와 상을 차려주며 너스레를 떨었다.
"수빈 씨나 이 새끼랑 빨리 헤어져요. 쓰레기 같은 새끼."
"하하하~ 정석 씨 바빠요?"
"네. 지금 마감 전이라 상도 치워야 하고."
"아저씨. 여기 물 갖다줘요."
"안 닥쳐? 야 니네 뭐해? 빨리 기자 불러. 이 새끼 진짜..."
"하하하. 집게나 이리 줘. 내가 고기 구울게."
"당연하지! 바뻐 새끼야."
정석이가 다가오자 한수빈은 그제야 어딘가 기댈 곳이 생긴 듯 얼굴이 환해졌다.
"오~ 그래? 여기 니가 낸다고?"
"그래야지 뭐."
"오케이. 그럼 주문 다 넣어야지. 어차피 너 많이 먹잖아."
"하하하! 선아야 봤냐. 이 새끼 이런다니까!"
"선아. 먹고 싶은 거 다 시켜. 혜정아 너 고기 싸가라. 수빈 씨. 다 주문하세요."
"아 꺼져. 가서 일이나 해!"
"정석 씨. 나 계란 찜 먹고 싶은데."
"그건 사장님이 이따가 갖다 주신다고 하셨어요."
"그래요?"
이정석이 지나가고 어딘가 안정감을 찾은 한수빈이 김선아를 보며 물었다.
"난 정석이 좋던데. 재밌고 책임감도 강하고."
"하하~ 고맙습니다. 저도 그런 거 좋게 봤어요."
"아니야. 자기가 아는 건 아주 단편적인 모습이라니까..."
"왜? 자기도 둘이 사귄다고 했을 때 좋아했잖아. 남수도 되게 좋아했었어요."
"박남수도 알아요...?"
"그러니까 빨리 끝내. 괜히 더 주변에 이상한 소문 번지기 전에."
"하하하! 야. 너 진짜 이게 오랜만에 만나서..."
"자기야 왜 그래. 장난도 분위기를 봐서 해야지."
서로를 자기라고 부르는구나.
구마하와 한수빈을 보며 이혜정이 은은한 미소를 짓는다.
짧은 대화가 오가는 가운데 구마윤이 2차로 음식을 들고 나왔다.
"얘들아 잠깐만. 마하야 비켜 봐."
"형. 고기 더 갖다 줘. 이거 얼마나 먹는다고."
"이따가. 상이 지금 좁잖아."
밑반찬만 널려있는 테이블에 요리를 올리며 구마윤이 물었다.
"연락도 없이 왔어."
"내가 형한테 오는데 전화 해야 돼?"
"하하. 이 자식."
"수빈이가 자꾸 가자고 그래서."
"정말? 수빈아 고맙다. 덕분에 바쁜 놈 얼굴 보는구나."
"괜찮아요."
"그리고 형. 이따가 나랑 얘기 좀 해. 뭐 물어볼 거 있어."
"그래. 끝나고 얘기해."
다들 조용히 식탁이 완성되길 기다리는 가운데 한수빈의 시선이 노란 빛을 담고있는 뚝배기 그릇으로 향한다.
구마윤과 원수정의 귀여운 사랑 이야기를 담고있는 요리였다. 그것을 먹고 싶어 무리해서 연인을 끌고 온 자리였었다.
"자. 혜정아. 이거 얘기했던 서비스."
"고맙습니다! 잘 먹을게요 오빠."
"..."
하지만, 구마윤이 계란찜을 혜정이 앞으로 놔주는 순간 그녀의 마음 속에 무언가가 사라져 버렸다.
"..."
"술은? 너네 술 뭐 마실래?"
"나 안 마셔."
"저도요."
"사장님. 전 엄밀히 재수생이에요..."
"하하! 수빈이는?"
"......"
"자기야."
"어. 나도 별로... 오빠 죄송해요 차 가져 왔어요."
"알았어. 그럼 음료수로 갖다줄게."
구마윤이 빠지고 다시 네 사람.
구마하가 불판 위에 고기를 올리자 이혜정과 김선아가 밥 먹을 준비를 한다.
"여기 계란찜이 있었어?"
"너 이거 안 먹어봤어?"
"난 그냥 정석이가 주는 밥 먹어..."
"하하! 니네 진짜 뭐하는 거야?"
"어쩔 수 없잖아. 쟨 일하고 난 공부하고. 저녁에 만나서 이렇게 보내는 거지."
"먹어 봐. 은근 달어. 맛있어."
"혜정아 잠깐만. 우리도 좀 덜어줘."
"그래."
구마하가 계란찜을 건네받아 한수빈 앞에 놔주는데 그녀가 드르륵 자리에서 일어선다.
"어? 자기야. 어디가?"
"나 잠깐만 나갔다 올게...."
"갑자기 왜?"
"그냥 조금 답답해. 에어컨도 그렇고. 사람도 그렇고."
적당한 이유를 대면서 한수빈이 가게 밖으로 나갔다.
"뭐야. 이거 먹자고 여기까지 왔으면서..."
이혜정이 밖으로 가버린 한수빈을 걱정스레 돌아보며 말했다.
"어디 안 좋으신 거 아냐?"
"아니야. 올 때까지 혼자 시끄럽게 운전하고 왔어..."
"야. 저 언니가 운전해?"
"어."
"와... 진짜 뭐하는 분이셔?"
"성악. 아직은 학생이고."
"후우... 이혜에 수빈이 언니까지... 내가 이래서 사람들 안 보고 살았는데..."
"야. 난 거기 왜 들어가냐?"
구마하가 조용히 가게 밖을 돌아본다.
갑자기 분위기가 바뀐 한수빈. 원인이 있다면 분명 혜정이겠지...
하지만 그걸 문제 삼을 수 있을까? 뭔가 변명을 할 필요가 있나?
"나 고기 굽는다."
그냥 덮어버리고 외면해버리기로 결정해 버렸다.
* * *
야외로 나온 한수빈이 가슴을 부여잡고 있었다.
그깟 계란찜이 대체 뭐라고 이렇게...
아니야. 가게가 좁아. 너무 시끄러. 무엇보다 답답해 미치겠어...
초조하고 화가 난다...
"후우... 후우우... 후우..."
이유는 알지만 뭐라 할 수 없다...
여기는 원래 그들의 공간. 내가 외지인인 건 당연하다.
저들이 알고 지내고 저들의 시간 속에 그들만의 이야기가 있는 게 맞다.
하지만, 이혜정... 마하 옆에 왜 이런 애가...
두 사람이 서로를 보던 눈빛들. 아닌 척 하지만 선뜻선뜻 보이던 행동들.
너무나도 가까이 지냈음을 나타내주는 신호들...
"..."
너였니...? 그 첫사랑이었다는 파트너가...?
우리 마하가 무섭다고 피해버렸다는 게 그게 너야...?
* * *
"진짜 주변에 논두렁밖에 없어... 그런 거 보면, 내가 공부를 못 해서 이런 곳에 있나 싶기도 하고..."
"에이 뭔 과장 해석을 하고있어."
"그래. 우리도 뭐 없어. 얘네나 학교 주변 재밌지."
"우리도 신촌보단 애들 다 홍대로 가는 분위기라."
"구마. 수빈이 언니도 연대생이야?"
"저긴 이대."
"우와... 이대 성악과..."
"심지어 생긴 것도 예뻐..."
"하하하... 수빈이가 인기가 좋네."
이혜정도 가게 밖을 돌아보며 말했다.
"근데 너 왜 이러고 있어?"
"왜? 내가 놀고있냐. 고기 굽고 있지."
"고기가 뭐가 중요해. 빨리 나가 봐."
"괜찮아. 화장실이라도 갔겠지."
"가보라고. 빨리."
"에이 씨 잔소리는..."
구마하가 밖으로 나가는 모습을 보며 김선아가 혜정이에게 작은 목소리로 묻는다.
"너도 참..."
"뭐."
"이래서 우리가 말 안 한 거야."
"기껏 한다는 변명이 그거냐? 민혜는 알어?"
"민혜는... 알지."
"와... 진짜 니네들..."
"어쨌든. 저 언니는 나중에 이야기하고."
"할 것도 없어. 무슨 상관이라고 나랑."
밖으로 나와 주변을 두리번 거리는 구마하.
옆에서 한수빈이 돌아오고 있었다. 표정은 다시 밝아진 듯 보인다.
"어디 갔었어. 좀 괜찮아?"
"응. 자기야 왜 나왔어?"
"안 온다고 애들이 나가보라고 뭐라고 하잖아."
"후후. 혜정이가?"
"왜 그래. 쟤 진짜 아무 사이 아니라니까."
"알았어. 들어가자."
구마하가 한수빈을 붙잡으며 말했다.
"이상한 생각 하지 마. 진짜 아무 사이 아니야. 왜 그래 갑자기. 여럿 불편하게."
"미안. 그냥 답답했어. 아까 갑자기 주변에서 연기가 확 나길래."
"..."
"들어가자 배고파."
두 사람이 자리로 돌아와 앉는다. 이혜정과 김선아도 걱정스레 물었다.
"언니 괜찮으세요?"
"네. 괜찮아요."
"물 드릴까요?"
"으음. 아니야. 괜찮아."
한수빈도 두 사람에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먼저들 먹지. 설마 기다렸어?"
"아 그냥 이야기하고 있었어요."
"그렇구나. 먹자. 먹어요. 선아도 먹자."
"네."
"난 고기 굽는다."
한수빈은 한 달에 한 두 번 '가족의 시간'이라는 상징적인 저녁 식사 자리를 갖는다.
싫은 사람과 있으면서 밥 한 끼 먹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녀는 지금 연기를 하고 있었다.
"..."
눈앞에 덜어진 계란찜이 있었다.
뚝배기 밖에 나와 이미 차갑게 식은 요리.
크게 한 숟갈 덜어진 음식은 노란 표면과 다르게 중간중간 거무튀튀한 색상과 기분 나쁜 공기구멍을 보여주고 있다.
한수빈이 주변을 둘러본다.
구마하는 불판에 집중하고 이혜정과 김선아는 대화에 열중하고 있었다.
직원들도 바쁘고 다른 이들도 저마다의 시간에 빠져들고 있었다.
테이블 옆 작은 쓰레기통이 보였다.
한수빈은 아무도 모르게 그릇채 툭 밀어 음식을 버렸다.
그제야 답답한 속이 조금 뚫리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