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을 앞의 그림자. (3) >
"너 아니였어. 남수야!"
"나야 새끼야!!! 니가 그때 나 불렀어!"
"하하하~! 아니 왜 이렇게 싸워? 소리를 안 지르면 이야기가 안 돼?"
정석이와 함께 하는 자리가 이어지고 있었다.
처음 달리기 시작할 때 옆에 있던 친구가 누구였냐로 둘이 쉬지 않고 입씨름 중이다.
"그때 남수가 나한테 너도 올림픽 가보라고 해서 그날 내가 운동장 뛰고."
"그러니까! 그 미친 소리 하면서 부른 게 나였다고!!"
"아닌데. 남수가 있었는데..."
"그 새낀 내가 불렀지!!"
"...그날 너가 있었어?"
"와! 우와!! 이 개새끼!! 기억 조작하고 있어!!"
"그래? 그럼 미안. 있었나 보지."
"미친! 이게 더 열받어!! 이딴 새끼가 무슨 메달리스트라고!!"
"아하하! 하하하하!!"
수빈이의 반응이 좋아 둘이서 더 시끄럽게 오버한 것도 있는 것 같다.
진짜 신기하네. 이게 웃기나? 그냥 우리끼리 병신짓 하는 게 뭐가 그렇게 재밌는 거지?
"친구들 덕분에 자기가 운동을 시작한 건 맞네."
"그건 맞는데... 아 좀 틀려..."
"우리가요 이 새끼 처음 한고 가는 날도 같이 가줬고. 전국체전도 가줬었고요."
"올림픽도 있잖아요."
"그렇죠! 올림픽! 그리스 그 먼나라까지 가서! 진짜 아무도 없을 때 우리가 지 이름 불러주고. 응원해주고 이 싸가지 없는 새끼..."
"뭐가. 어차피 니네 경비 우리 형이 다 냈잖아."
둘이서만 떠드는 데 듣는 사람 반응이 좋으니 정말 별의 별 이야기가 다 나오고 있었다.
"얘야말로. 나 운동하는데 따라온다고 지랄하다가"
"아 참 맞다. 산 할아버지 돌아가셨어."
"뭐? 언제?"
"올 여름에. 안 그래도 너한테 얘기 해줘야 했는데, 그때 너 저기 스위슨가 거기 나가 있어서."
"아 알았으면 가봤을 건데..."
"사장님이 다녀오셨어. 괜찮아. 나도 조기축구회 아저씨들 서빙하다 들은 얘기라. 부랴부랴 말씀 드렸지."
"그분은 누구신데?"
"어. 나 훈련 때 도와주신 분."
"또 거기는 왜 예의를 차리냐?"
"차려야지. 돌아가셨는데. 그리고 핀란드지. 내가 언제 스위스를 갔어."
"눈 있으면 다 똑같은 거 아냐?"
나도 나지만 수빈이가 정석이가 입만 열면 웃고 자지러져 난리도 아니었다.
"저 얘 첫 훈련 때 사진도 있어요. 트랙에 어벙하게 서가지고."
"진짜요! 나도 보여줘요!"
"아... 근데 보시면 실망하실 건데..."
"왜요? 귀여워서?"
"어이 구마. 오기 전에 둘이서 무슨 입을 맞췄어?"
"수빈이가 내가 못 생겼었다는 걸 안 믿어."
"이야... 사랑의 힘이 대단하긴 하구나..."
"하하하! 미친 놈."
"진짠데? 내 눈엔 멋있고 잘 생겼는데? 지금보다 몸만 작았던 거 아니에요?"
"그건 맞는데. 그 뭔가 조화가... 그때는... 머리도 크고..."
"지는! 지는 뭐 존나 멋있었는 줄 알어."
"오~ 그렇게 나오신다? 나 진짜 다 말해?"
"뭘? 니가 또 뭘 말하는데 병신아. 뭐? 해봐."
"어~ 어 그래. 알았어. 이렇게 나온다 이거지?"
이번엔 녀석이 또 무슨 장난을 치려나 여유롭게 있었는데.
"수빈 씨. 구마하. 기사 이런 거 다 구라고. 진짜로 운동 시작한 이유는요"
그럼 그렇지... 정신병자를 믿은 내가 미친 놈이지!!
"우리들 앞에서 울면서, 지는 앞으로 죽을 때까지 세ㄱ읍!! 읍읍!!"
"하하하... 야. 우리 선은 넘지 말자..."
"읍!! 으으!"
"자기야 왜 그래! 다쳐!"
상당히 강한 힘으로 정석이의 입을 틀어막고 있었다.
다른 걸 떠나 까딱하다 혜정이 이름이 나올 수 있는 주제였다.
녀석도 뒤늦게 눈치를 채며 아 그래 이건 안 되는구나. 라고 받아들였다.
"하지 마."
"알았어 알았어. 안 할게."
"뭔데? 왜? 왜 시작했는데? 얘기해 줘 나도 듣고 싶어!"
"그냥 애들한테 인기 얻고 싶어서라고. 자기도 알잖아. 기사도 났고."
"정석이는 기사 다 구라라는데?"
"아니야. 이 새끼 넌 말을 이상하게 해서."
"누구야?"
"음?"
"정석 씨 누구였어요?"
"..."
"보통 그런 각오를 하면 꼭 누가 있던데?"
역시. 한수빈... 이런 쪽으론 왜 이렇게 눈치가 빠른지.
"음. 반응이 내가 알면 안 되는 앤가 보구나?"
"아니... 그게 누구라고 하기가 애매해서..."
"그냥 한 사람을 뽑기가 애매해. 난 교복입고 다니던 애들 다 좋아했어서."
"거짓말. 먼저 남수도 그러고 정석이도 그렇고. 누가 있는 거 같은데?"
내가 이래서 하지 말라고 했던 건데...
수빈이는 은근 첫사랑에 굉장히 목을 매고 있었다.
마치 자기가 나의 모든 것에 처음이길 바라는 사람처럼.
가만히 분위기를 살피던 정석이가 입을 열었다.
"마하가요"
"야. 하지 마."
"우리 앞에서 울면서 지는 죽을 때까지 섹스도 못 하고 죽을 거라고..."
"정말? 자기가?"
"네. 그래서 남수가 올림픽 나가보라고. 거기가면 선수촌에서 존나 한다고"
"아하하하! 말도 안 돼! 자기야 이거 진짜야?"
슬쩍 정석이와 눈빛을 주고받았다.
미안하다. 근데 어쩔 수가 없잖아... 이미 말은 나왔고 의심은 하고있고.
오케이. 접수. 혜정이 이름이 나오는 것 보다는 그게 낫지.
"아 새끼. 넌... 사람 쪽팔린 이야기를..."
"뭐. 아니냐? 이것도 남수 불러서 팩트 체크 해?"
"하하하! 아하하하하!! 대박 웃겨!! 자기야 이거 알려지면 큰일 나는 거 아냐? 하하하하!"
"어우 근데, 너 쪽팔린 이야기를 너무 좋아하시는데?"
"몰라. 맨날 저래. 놀리고 뭔가 내가 이상한 거 하면 좋아하고."
남수에 이어 정석이도 좋은 점수를 받는다.
오히려 이쪽은 한수빈 입장에서 처음 보는 인종이라 호감을 얻었다.
"정석 씨는 왜 대학 안 갔어요?"
"대학요. 뭐 별로 공부에 뜻도 없고. 사장님도 대학 안 가셨는데 멋지게 사시고."
"그쵸! 나도 오빠 너무 멋있어."
"근데 수빈 씨는 진짜 뭔가 이렇게 보고 있으면."
"잠깐만. 둘이 얘기 잘 하는 건 좋은데. 누나라고 불러. 수빈이 우리보다 나이 많어."
"그럼 너도 누나라고 해. 지는 안 하면서 왜 나한테만 지랄이냐?"
"맞어. 자기도 누나라고 해. 자기도 나보다 동생이잖아."
"..."
"이중적인 새끼. 수빈 씨. 아 이런 건 좀 옆에서 제대로 가르쳐 줘야돼요. 이 새끼는 계속 뭐라고 해야"
"응. 그래야 될 거 같애. 나도 자기한테 이런 면이 있는 줄 몰랐어."
"둘이 언제부터 그렇게 알고 지냈다고... 아 몰라. 얘기들 해. 난 고기나 먹을 테니까."
"어이. 구마."
"왜?"
"먹는 건 좋은데. 너 이거 꼭 계산하고가라."
"야 이 새끼야! 여기 우리 형 가게야!!"
"내 직장이야!!"
"하하하! 아니 왜 너네는 대화가 한 방향으로 가는 일이 없어? 이 얘기 하다가 저 얘기하고. 다른 얘기 하다가 돌아가고."
정석이도 수빈이 반응이 재밌는가 돌아보며 물었다.
"하하! 근데 우리 맨날 이러지 않냐?"
"그치. 넷이 있으면 그냥 각자 떠들고 각자 대답하고."
"그러다 한 새끼 헛소리 주절거려서 욕 쳐듣고."
"그게 너지."
"너 아니었냐?"
"하하! 이것 봐. 또! 또 싸워!"
정석이가 수빈이를 돌아본다.
"근데, 진짜 예쁘시네요. 와~ 마하가 이런 분을 만나다니."
"고마워요. 정석이 여자친구도 보고싶다."
"아직 재수중이라. 특히 연세 이화 이런 사람들 만나기엔 애가 자존감이..."
"왜? 그게 뭐 어때서?"
"그래. 그게 어때서? 나 공부 못 해. 수업 들어가도 얼마나 해매는데."
"자랑이다 새끼야."
정석이는 수빈이가 성악을 전공하고 있다는 말에도 큰 반응을 보여주었다.
"어우... 거기다 성악까지. 진짜 수빈 씨는 분위기가 참..."
"왜요? 나 어떤데요?"
"럭셔리 하시다고요. 진짜 그 말이 잘 어울리시는 거 같애요."
"후후 고마워요."
"가방 혹시 마하가 사준 거에요?"
"이거요? 아니요. 내가 샀는데?"
"으음..."
"왜? 너 걔 선물 해주려고?"
"그냥 기운 내라고 하나 사줄까 했는데. 야 요즘 A급 이런 거 어디서 사냐? 동대문?"
그 말에 수빈이가 엎드려 고개를 들지 못한다.
"음? 왜 그러시지?"
"정석아. 수빈이 가방이... A급 짝퉁같애?"
"아니야? 저거 존나 비싸다. 아니. 꽤 한다고 들었는데."
"큭! 크윽! 윽-. 으으윽..."
"왜? 왜 저러셔? 뭐야? 나 뭐 실수했어?"
"아니야. 정석아... 아니야..."
친구의 모습이 부끄러운 게 아니다. 그냥 그런 사고방식이 너무 의외라 눈을 마주치지 못 하겠다.
한수빈이한테 짝퉁 어디서 사냐고 물을 수 있는 사람이라니... 역시 내 친구.
"정석아. 난 진짜로. 이럴 때마다 너가 내 친구라는게 너무 자랑스러워."
"왜 지랄인데?"
"하하하! 아하하하!! 자기야! 나도 이 친구 너무 좋아!!"
"하하하? 왜? 뭐가? 왜 웃으시는거지?"
"나중에. 내가 설명해 줄게. 하하!"
웃는 소리가 너무 크다고 형이 문을 열고 말한다.
"아이고. 정석이도 그냥 마하 온 김에 놀라고는 했지만 너네 너무 떠드는 거 아니냐?"
"어? 손님이... 사장님 죄송해요. 바로 나갈게요."
"괜찮아. 있어. 너도 요즘 쉬는 날 없이 바빴는데. 우리끼리 할 수 있어."
"고맙습니다..."
우리와 있을 때와 일할 때 정석이는 역시 분위기가 달라진다. 보면 볼수록 멋진 놈이다.
"너 형한테는 왜 이렇게 깍듯하냐? 형 얘 때렸어?"
"내가 너냐? 맞을 짓을 하게."
"감독님이나 이름으로 부르지 마."
"너희들 뭐 필요한 거 없어? 수빈이는 왜 저러고 엎드려 있어?"
"웃는 거야. 신경쓰지 않아도 돼."
"제가 너무 마음에 든데요."
"그래 다행이네. 아무튼 조금만 조용해주고"
"형. 나 고기 5인분만 더 갖다 줘. 웃다보니까 배가 꺼졌어."
"사장님 주지 마세요! 이 새끼 돈 안주고 갈 놈이에요."
"꺼져! 우리 형이야!"
"우리 가게야!!"
한 차례 진정된 수빈이가 눈물을 닦으며 고개를 든다.
"아. 너무 웃었어. 진짜 배 아퍼..."
"잘 드시고 잘 웃고. 수빈 씨도 에너지가 넘치시네."
"하하... 아... 마하랑 있다보니까 그렇게 된 거 같아요."
수빈이가 손수건과 화장품을 꺼내 얼굴을 확인하며 말했다.
"자기야. 나 눈 번진 거 아니지?"
"어. 괜찮아."
"..."
누구나 다 아는 프랑스 명품 로고가 떡하니 박혀있는 손 거울.
현란한 문양과 이미지가 작품이 되는 실크 손수권.
정석이가 그녀의 소품들을 가만히 보더니 다가와 소곤소곤 귓속말로 물었다.
"뭐? 그냥 말 해. 또 무슨 미친 소리를 하려고?"
"어이 구마. 설마... 다 진짜냐...?"
"신경쓰지마. 짭이야 짭. 개짭."
"..."
수빈이도 부드럽게 웃으며 물었다.
"정석 씨는 메이커에 관심 많아요?"
"음. 원래는 아니었는데. 아무래도 손님 상대하다 보니까 점점 눈에 보이더라고요. 여자친구도 생기고."
"그럼 언제 둘이서 나랑 같이 쇼핑"
"어이고! 자기야 너무 나만 먹었지!! 형 뭐해! 빨리 고기 좀 갖다 줘!!"
수빈이는 마지막 남은 퍼즐도 관심있게 물어보았다.
"이제 자기 친구들 중에는 김태윤이란 친구 한명 남았네."
"누구지? 정석아. 우리 주변에 그런 애가 있었나?"
"그러게. 누구지? 김 씨가 있나?"
"하하하! 아니 없는 사람을 어떻게 그렇게까지 말할 수 있어?"
"그렇게 할 수 있어. 없으니까."
"맞아요. 그 새끼는 그래도 싸요."
"왜요? 태윤이는 어떤 친군데요?"
"보자. 김태윤은... 이놈은 뭐라고 해야할까..."
"악의 축. 빈라덴?"
"어! 그 새끼 은근 빈라덴 닮지 않았냐?"
"그러니까. 키 크고 코 존나 커가지고. 그래놓고 무슨 기타를 친다고"
적당히 씹은 다음에 태윤이는 우리의 중심이었고 나름의 리더쉽을 갖춘 친구라 말해줬다.
"공부 제대로 했으면 서울대 갔을 것이고. 싸움을 제대로 했으면 건달이 됐을 놈이지."
"으음. 팔방미인이구나."
"근데 못 했으니 병신."
"공돌이 새끼. 여행 갔다가 언제 온다고 했더라?"
"후후후. 다 같이 볼 수 있으면 좋겠다."
우리 넷을 한 자리에서 모아서 지켜보고 싶다는 말에 정석이도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야. 근데 그렇게 시간이 되겠냐?"
"어렵지. 나 또 전지훈련 가는데. 니네가 나한테 맞추지 않고서야... 근데 그러자니 너도 일이 있고."
"전지훈련? 어디로?"
"뉴질랜드로 간다고 했잖아."
"언제?"
"아 병신아!! 며칠 전에도 얘기했어. 제발 말을 하면 좀 들어두라고!"
"한상률도 같이 가냐?"
"하다못해 선생님이라고 하든가!!"
드르륵 형이 찾아와 아까 부탁한 음식들을 가져왔다.
"이거 받어. 먹고 더 필요하면 얘기해."
"형! 정석이가 감독님 자꾸 이름으로 불러."
"정석아. 그러지 말라고 형이."
"아우 사장님 그냥 장난이죠."
"스승님한테는 장난치고 그러는 거 아냐. 언제나 스승님은"
"알았으니까 형도 고기나 주고 나가. 괜히 훈계하고 있어."
"니가 젤 나쁜 놈이야!!"
* * *
"진짜 너무 웃었다... 그 친구 왜 이렇게 웃겨?"
"얘기했잖아. 미친 놈이라고. 정석이 있으면 분위기가 달라져."
"하하. 아~ 배가 너무 땡겨..."
"많이 먹었어?"
"응! 자기야. 우리 여기 또 오자! 다음엔 남수랑 은정이랑 우리 그냥 가게 전세내서!"
"진정해 진정하고. 그렇게까지 안 해도 돼."
이렇게까지 내 모든 것을 사랑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정말 그런 게 너무 감사한 순간이었다.
"아! 맞다!! 나 어떡하지... 큰일 났어! 자기야..."
"왜? 가게에 뭐 두고왔어?"
"계란 찜! 나 계란 찜 안 먹었어."
"난 또 뭐라고..."
"자기야. 우리 내일도 여기 오자."
"아 시간 없어. 지금 가뜩이나 나가기 전에 이것저것 할 거 투성인데."
"그럼 나 혼자 올까? 와도 되려나? 이제 오빠도 알고. 정석이란 친구도 나 아니까 뭐라고 하는 사람 없지?"
"하하하! 저기요? 수업 안 가세요? 학기 중인 거 아녔어?"
돈도 많은 양반이 왜 이렇게 사소한 것에 목숨을 걸까? 알다가도 점점 모를 사람이 바로 한수빈인 거 같다.
* * *
오후에 동생과 한수빈이 다녀간 날.
퇴근하고 집으로 돌아가던 구마윤의 앞에 익숙한 그림자가 보인다.
"혜정아."
"음? 오빠 안녕하세요."
"지금 오는 거야?"
"네... 진짜 통학하다가 대학 다 보낼 거 같아요... 경기도 살면 삶의 20%를 지하철 버스로 보낸다더니..."
"오늘 마하 왔었는데."
"정말요? 혼자요?"
"아니. 여자친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