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불타는 청춘 (1) >
"진짜?! 걔네 둘이 사귄다고?!"
"어."
"...어쩌다가??"
"어쩌다간 뭔 어쩌다가야. 둘이 좋아하니까 그랬겠지."
휴가를 마치고 돌아온 김원석이 이도형을 만났다.
멕시코에서 신나는 여름을 보내는 이런저런 재미난 소식이 있었는데, 으뜸은 단연코 한수빈의 연애 소식이었다.
"말도 안 돼. 아니 그 새끼 맨날 운동만 하던 거 아녔어?"
"..."
"하하하. 아이고 딱한 새끼. 잘 빠져나가는 거 같더라니, 하필이면 수빈이한테 걸리냐?"
"얘가 매달려서 사귄 거야."
"어...?"
"세계선수권 때. 수빈이가 구마하 보려고 헬싱키까지 쫓아가서 매달렸어."
"한수빈이 매달렸다고??"
이게 다 무슨 소린지. 김원석은 아직도 외국땅을 밟고 있는 것 같았다.
"넌 그걸 어떻게 알았어?"
"같이 갔었거든."
이 자식 우리랑 여행 안 가고 거길 쫓아갔어...?
김원석이 가만히 술잔을 들어올리는 이도형의 어깨를 다독여준다.
"뭐하냐."
"넌 괜찮냐?"
"미친놈. 뭔데?"
"뭐긴. 차인 놈 위로해주고 있지."
"크하하! 꺼져. 새끼야. 같잖은 짓 하지 말고."
"아무튼, 애한테 전화 한번 해봐야겠네. 얼굴도 보고싶고."
"안 받을걸."
"뭔 소리야. 수빈이 내 전화 잘 받어. 나오라고 해야지. 클럽 왔다고."
"수빈이 클럽도 끊었어..."
"야. 그때는 걔도 학교 때문이지. 나 있다고 하면 분명히 나와."
걸어봐라. 수빈이한테 너가 얼마나 의미없는 인간인지 알 게 될 거다.
이도형은 그렇게 생각하며 술이나 마셨다.
김원석도 얼마 지나지 않아 응답없는 핸드폰을 머쓱하게 보며 말했다.
"흠. 뭐 바쁜 일 있나..."
"말했잖아. 얘 클럽 끊었다고."
"도형아. 수빈이야. 걔 클럽 못 끊어. 여기가 한수빈의 알파요 오메간데."
"연애하잖아. 그리고 수빈이 원래 뭘 하든 세 달 이상 관심 없으면 다시는 안 하는 애야. 늘 그랬어."
"허허. 젠장. 대체 뭔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
김원석도 전화기를 매만지다 시원섭섭하게 내려놓는다.
"기다려 보자. 오래 안 가겠지. 수빈이 늘 그랬으니까."
"..."
"안 그래? 얼마나 가겠어? 먹다 질리면 다시 오겠지."
"몰라. 관심 없어."
이도형의 머릿 속에 지울 수 없는 한수빈의 목소리가 울려퍼진다.
'꿈 깨. 알았어? 오빠를 연애상대로 보라면 내가 이렇게 오래 알고 지내지도 않어.'
'진짜 사랑해. 나 계속 이렇게 사랑해 줘...'
누군가에겐 차갑고 누군가에겐 뜨겁다.
돌아온다고 수빈이를 다시 예전과 같이 볼 수 있을까...
생각하면 가슴만 아픈 이도형이었다.
"야. 다 됐고. 세준이는? 너랑 같이 갔었잖아. 얘는 왜 조용해?"
"아. 세준이 새끼..."
"왜? 뭐 문제 있어?"
"음. 아니야. 근데 도형아 나 부탁 하나만 해도 되냐?"
"...나한테? 아니면"
"그야 당연히 아버지한테지..."
이도형이 딸그락 글라스 잔 속에 남은 얼음을 굴리며 말했다.
"뭐. 또 구속영장 기각해달란 얘기냐?"
"에이 씨! 아니라고!! 그리고 그땐 걔가 이상한 애였다니까!!"
"원석아... 너 내가 그렇게 여자애들 다룰 때 조심하라고..."
"아니. 다른 게 아니라. 나 지금 출국금지가 걸려서. 그것만 좀 풀어달라고."
"너 이번에 여행갔다가 돌아왔잖아? 왜 갑자기 출국금지가 걸려?"
"몰라. 그냥 입국하는 날 들었어..."
머리가 지끈거리는 이도형이었다.
함께 있으면 화려하고 재미난 친구들이지만 늘 한 번씩 이런 식이었다.
"야. 그냥 니네 아버지한테 말씀드려. 어른들끼리 전화하시겠지."
"아버지가 내가 알아서 하라고 그러셨어... 정신 못 차리고 또 여자들 끼고 외국이나 돌아다니냐고 그러셔서..."
"틀린 말은 아니시네."
"아 씨발. 이 새낀 뭔 말을."
이도형이 가만히 돌아보자 김원석이 꼬리를 말며 다가왔다.
"하하. 도형아. 부탁 좀 하자. 응? 한번만. 나 다시 나가야 돼. 우리 9월에 학기 시작이잖아."
지저분한 부탁이나 듣고 있자니 돌아가 공부나 하는 게 낫겠다.
이도형이 주섬주섬 자기 물건을 챙기며 일어섰다.
"야. 너 어디 가?"
"갈게. 나도 곧 시험있어. 그리고 큰 기대 하지마. 나도 요즘 부모님이랑 사이 안 좋으니까..."
김원석은 매몰차게 돌아서는 이도형의 모습에 자존심이 구겨진다.
친구가 부탁을 하는데 지 시험이 우선이라고? 이 새끼가...
"왜? 넌 부모님이랑 왜 사이 안 좋은데?"
"너랑 똑같애. 시험 앞두고 외국으로 스포츠 경기나 보러 다닌다고 박살 났어."
"수빈이 놓친 거 때문은 아니고?"
"..."
공부 잘한다고 맨날 잘난 척 하던 놈 한 방 먹였다는 승리감에 김원석이 개구지게 웃으며 말했다.
"아 장난이지 새끼야. 뭐 어때. 우리가 어른들 사정 모르는 것도 아니고."
"...간다."
"야. 진짜 가냐? 너 가면 나 혼자 놀라고?"
한수빈의 마음을 돌려세우려 독하게 건넨 말들이 이도형에게 부메랑이 되었다.
스스로가 만들어낸 배경 위에 서지도 못 하고 부모님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닌 놈.
누굴 비난하고 있었던 거냐...
비참한 건 다름아닌 자신이었는데.
"후우..."
좋아하는 여자애가 다른 놈과 오입질하는 소리나 듣고 자위나 하고.
그런 나니까 저런 친구들을 사귀고 있었겠지.
나이를 처먹어도 정신 못 차리고 하나같이 지저분한 짓들이나 하는 그런 친구들을...
정말. 나라는 놈은 생각보다 더 초라하고 볼품없었구나.
대체 뭘 믿고 그렇게 잘난 척 세상을 깔보고 다녔던 걸까...
"..."
갑자기 주머니에 담긴 핸드폰이 진동한다.
하필 이럴 때 가장 보고 싶고, 또 듣기 싫은 사람에게서 걸려 온 전화였다.
조금은 고민을 해보지만, 이도형은 한수빈을 거부하지 못했다.
"뭐 하는데 이렇게 전화를 안 받어?"
"어쨌든 받았잖아. 오랜만에 전화해서 짜증이냐."
"뭐야? 무슨 일 있어? 왜 이렇게 싸늘해?"
감정이란 게 참 무섭다. 이런 순간에도 수빈이가 보고싶다니...
"아니야. 별 일 없어. 왜 전화했어? 심심해서 걸은 거야?"
"아니. 다른 게 아니고. 오빠. 우리 자기가"
"하하하! 자기는 무슨"
"..."
"그래. 니네 자기가 뭐?"
"마하가 NICE 광고모델이잖아. 행사가 있는데, 오빠도 오고 싶으면 오라고 전해달라고 그래서."
"수빈아. 내가 걔 펜도 아니고 거길 왜 가냐?"
"브라운 제임스랑 우리 자기랑 같이 뭐 하는 그런 자리래."
그래. 이게 진짜 화려함이지... 이게 진짜 셀럽의 삶이다...
"그때 클럽에서 한 말을 기억했나 보구나."
"응. 오빠 농구 좋아하지 않냐고 한번 연락해보라고 해서 전화했어."
"고맙네. 너나 그 친구나."
"별일 없지?"
"없어. 너는?"
"나야 뭐. 늘 잘 지내지."
"그래. 가게 되면 전화할게."
"문자 보내 줄게. 올 수 있으면 와."
그래. 꿈 깨자. 깨어나야 한다. 이게 현실이야.
될 거면 진작 그런 관계에서 벗어나 다음 이야기가 진행됐어야 했다.
얘들은 집안에 돈이라도 있지, 난 아무것도 없어...
그나마 있는 것도 아버지 임기 마치면 다 끝인데. 이제 정말 정신 차려야 된다.
내 살길 찾아야 돼...
통화를 마치고 얼마 뒤, 한수빈에게서 문자가 도착했다.
이틀 뒤 여의도공원에서 벌어지는 행사의 주소와 시간이었다.
[와서 연락해. 아마 마하 통하면 브라운 제임스랑도 가까이 볼 수 있을 거야.]
"젠장... 비참하지만 궁금하긴 하네..."
* * *
NICE 행사를 앞두고 형이랑 수정이 누나가 서울로 올라왔다.
"어머~~ 마하야! 어머어머!"
"하하~! 누나 오셨어요."
"얘! 이게 얼마만이야? 나 너 왜 이렇게 오래 못 본 거 같지?"
"오래됐죠. 저 올림픽 가기 전에, 아니. 학교로 전지훈련 가기 전에 누나 마지막으로 봤었으니까. 1년 넘었네요."
"우리 마하 진짜 많이 컸구나... 형이 너 형보다 커졌다고 듣긴 했는데, 진짜 사람이 변한 거 같은데?"
"저기. 수정아. 이야기는 들어가서 하고. 언제까지 현관에 세워둘 거야..."
"아! 미안해요. 마윤 씨."
"하하. 누나 들어오세요."
"응! 와~ 집 진짜 좋다. 너 정말 성공했구나!!"
"하하하! 누나 저기가 여의도. 풍경 좋죠?"
"야 인마. 아무리 그래도 넌 형은 보이지도 않냐...? 인사도 안 해줘?"
"어. 장 본 거 거기 식탁에 내려 놔."
"하하하... 이 자식..."
형은 주방에서 요리를 하고, 나는 오랜만에 만난 수정이 누나와 쉴 세 없이 수다를 떨고 있었다.
"그래서 2학기는 어차피 전지훈련도 있고, 학교 거의 못 나갈 거 같아서 휴학하기로 했어요."
"그래. 근데 마하야. 너 뭔가 좀 분위기가 변했다?"
"제가 뭐가 변해요?"
"너 예전엔 누나한테 이렇게 편하게 말 못 하지 않았어?"
"하하하! 여자친구가 있어서 그런가?"
조용히 이것저것 부엌에서 준비하던 형도 물어본다.
"여자친구는 오늘 안 와?"
"오기로 했는데. 모르겠어. 레슨이 늦게 끝날 거 같다고. 연락 준다고 했어."
"레슨? 뭐 음악하는 친구야?"
"네. 성악이요. 여기 이대 다녀요."
"어머어머. 얘 너 완전 멋있는 삶 사는구나."
형도 하던 걸 다 마쳤는지 손을 씻으며 다가와 말한다.
"반찬 다 정리했으니까. 꺼내 먹기만 하면 돼. 밥은 할 줄 알잖아."
"아 뭔 반찬을 꺼내먹어. 여차하면 그냥 사먹으면 되지."
"운동한다는 놈이 말하는 거 봐라..."
"그래. 너 형이 너 음식 챙겨준다고 얼마나 신경 썼는데 그렇게 말하는 거 아냐 얘."
"하하하... 죄송해요 누나."
"야. 나한테 사과해야 되는 거 아니냐?"
셋이 앉아 저녁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눴다.
"그럼 너도 거기 가서 뭔가 하는 거야?"
"그렇지. 나도 사람들이랑 육상 시범 같은 게 있지."
"마하야. 누나가 궁금해서 물어보는데, 달리기도 누가 시범을 보여야 되니?"
"하하! 아니요. 이 행사가 뭐냐면 그러니까. 신제품 프로모션 같은 자린데. 홍보에요 홍보."
"수정아. 마하 신발 나왔어."
"신발? 뭐 조던 이런 거?"
"응."
수정이 누나가 손을 꼭 잡아주며 말했다.
"얘. 너 진짜 성공했구나..."
"하하. 아 누나! 나 그래도 육상계에선 나름 알아주는 놈이에요!"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형이 갑자기 물어본다.
"그래서. 성공한 인생이라 그런 여자친구 사귄 거야?"
"뭐라는 거야... 형이 뭘 안다고."
"감독님이 그러시더만. 여자애 장난 아니라며?"
"후우... 형 감독님이랑 나 뭐 스토킹해?"
수정이 누나도 관심있게 물어본다.
"근데 마하야. 너 혜정인가 그 예쁘장하던 애 좋아하던 거 아니었어?"
"아 누나! 진짜 왜 그래요!!"
"하하하~ 수정아 하지마. 마하 혜정이한테 차였어."
"아 누가 또 뭘 차여!!"
"으음. 어떤 애야?"
"후우... 그냥 뭐..."
마침 핸드폰이 우웅 우웅 수빈이에게 전화가 들어온다.
"어. 자기야."
"자기야 미안. 나 지금 끝났어... 형 오셨지?"
자기라는 말에 형이랑 수정이 누나가 키득키득 귓속말을 하면서 놀려댄다.
"아냐. 신경쓰지 마. 둘 다 갔어."
"진짜!"
"하하. 농담이고. 아 씨 내가 자기라고 했다고 자꾸 앞에서 놀려..."
"후후후. 빨리 갈 게. 디저트 뭐 사갈까?"
"됐어. 그냥 와. 형 뭐 이것저것 사와서 먹을 거 많어."
통화를 마치자 수정이 누나가 웃으면서 말했다.
"역시. 형제가 매력이 넘치니까. 여자애가 아주 매달리는구나?"
"뭐 그렇게 봐주면 고맙지."
"하하하... 누나."
잠시 뒤. 헐레벌떡 한수빈이 도착해 벨을 눌렀다.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