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륜기로 가버렷-145화 (145/401)

< 별 하나의 사랑과 추억 그리고 쓸쓸함 (5) >

"저기. 아까부터 멀리서 봤는데. 여자들을 다."

"가세요. 저 게이 아닙니다."

"아 네."

그리고 마지막엔 게이들까지 다가와 말을 거는데.

안되겠다. 이 상태로 한 시간은 너무 힘들어.

카페로 고개를 돌려 수빈이를 보니 전화를 걸어준다.

"후후. 자기야. 왜 그래? 힘들어?"

"...이제 그만하면 안 될까."

"왜?"

"부담 돼... 지쳐..."

"후후후. 엉덩이에 하고 싶지 않어?"

"모르겠어. 그런 걸 따지고 싶지도 않어... 나 그만할래..."

차라리 알아보고 사인을 부탁하거나 한다면 낫지. 호감을 가지고 오는 사람들을 밀어내는 건 조금 버겁다.

혼자 멍하니 벽에 기대어 있는데, 아까 왔었던 어떤 여자들이 다시 돌아와 말을 걸었다.

"저기. 역시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자기야."

"네...?"

그녀들의 뒤로 수빈이가 웃으며 보고 있었다.

"왜 이렇게 늦게 왔어..."

"미안. 차가 막혀서."

선글라스로 가려지지 않는 그 어떤 치명적인 미모를 뽐내며 수빈이가 다가오자.

여자들이 머리에 망치를 맞은 듯 동공이 커다란해져서 돌아서고 있었다.

신경이 예민하다보니 청각이 뜨이고 있었다.

그녀들은 가면서도 우리를 보며 한참을 속닥거렸다.

"흠. 딱하다. 뭔가 되게 상처받은 얼굴로 가버리네."

"가야지. 여자친구가 왔는데."

그녀들이 멀어지는 가운데 하는 말이 들렸다.

"자기야."

"응?"

"그 가방이 사천만원 짜리였어?"

"이거? 응."

"우와~ 진짜 대단하네."

"후후후."

나의 여자친구.

단지 예쁘고 매력적인 게 전부가 아닌 그녀.

"이야~ 우리 자기 무서운 사람이였구나."

"자기야말로. 이제 본인이 얼마나 멋진 사람인지 알았어?"

"와~ 나 여자들한테 인기 좋네. 하하."

"후후후. 이제 내가 왜 불안해 하는지 알겠지?"

"..."

뭔가 나도 주변의 시선을 끌어당기고 있지만. 거기에 수빈이까지 함께 있으니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우리를 보는 것 같다.

"자기야."

"응."

그녀의 손을 잡아 와락 끌어당겼다.

"어?"

그리곤 허리가 부러져라 끌어안으며 키스를 해줬다.

"으읍!!"

주변에서 꺅! 어머... 뭐야? 같은 소리들이 들리지만 아랑곳 하지않고 키스를 해주고 있으니. 수빈이도 당황해서 몸을 때어내며 말했다.

"뭐... 뭐야! 갑자기?"

"고마워."

"뭐가? 왜 이래?"

"난 오늘에서 와서야 자기 덕에 내가 얼마나 멋진 사람인지 알았어."

"..."

"진짜 처음이야."

기쁘다기 보다는, 조금 어딘가 쓸쓸함이 느껴지는 일들이었다.

내가 멋진 놈이라는 걸 알게 된 건 좋은 일이지만.

동시에 뭔가 너무 커다란 걸 잃은 기분이었다.

"..."

혜정아... 이혜정... 이 친구가 나에게 해줬던 말들이 가슴속에 메아리 친다.

넌 특별한 애야. 넌 너무 여자를 좋아해. 너 같은 애랑 어떻게 연애를 하라고... 나같은 애한테 너는 너무 위험해. 이제 연락하지 마. 나도 남자친구 만날 거야.

그런 뜻이었구나...

난 상대를 불안하게 만들고 있었구나...

둘 사이에 오갔던 막막한 대화들이 이제 좀 혜정이 입장에서 이해가 된다.

(그래서 넌 너 좋다는 사람들이랑 다 해? 자?)

(나 좋다고 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거절해.)

(...)

만약 내가 믿음을 줬다면 어떻게 됐을까.

나는 나만 떳떳하면 상대방이 그걸 믿을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한수빈도 나와 함께 있으면서 불안한 마음을 느낀다.

오스트리아의 시간은 그렇다 치더라도, 앞으로의 내가 그런 놈이 아니라는 걸 확실하게 보여줬다면. 그랬다면.

우리 사이에 뭔가 달라졌을까...

"자기야 안 먹고 뭐해?"

"어? 응 그냥... 생각할 게 많아서."

"아까 사람들 만난 거 때문에?"

"음. 뭔가 너무 신기한 경험이라."

"후후. 말은 그렇게 하면서 딴 생각 하는 거 아냐?"

"딴 생각 뭐? 자기 엉덩이?"

"야! 이게 미쳤나 봐."

"하하하~!"

아무튼 그건 그거고. 지금은 눈 앞의 수빈이와 함께 해야지.

"걱정마. 나 절대 바람 같은 거 안 펴."

"응. 믿어."

수빈이가 꾸물꾸물 다가와 이마에 키스를 해줬다.

"힘들었지? 근데, 난 자기가 자기를 비하하는 게 듣기 싫었어."

"비하는 아니고. 진짜로 예전엔 되게 못생겼었어."

"하하! 거짓말."

"다음에 내 친구들 보여줄게. 그놈들 이야기 들으면 내 말이 거짓말 아니라는 걸 알 거야."

눈 앞에 있는 사람한테 잘하자. 그녀는 이혜정 못지않게 매력적인 사람이다.

아니 어쩌면 더 나한테 잘 맞는 사람일 수도 있어.

"자기야. 이거 먹어 봐. 맛있다."

"아아~"

* * *

다음 날. 구마하가 다시 스케쥴로 여기저기 바쁜 하루를 보내는 가운데.

한수빈은 전날 구마하와 함께 온 백화점을 찾아갔다.

"그러십니까? 저희가 미리 알았으면 조치를 취해드렸을건데."

"아니에요. 대신 오늘 저녁에 혼자 조용히 쇼핑하고 싶은데."

"네. 그럼 어디어디 맞춰드릴까요?"

백화점은 VIP를 넘어서는 VVIP 등급으로 고객들을 관리한다.

하지만 한수빈이나 재벌오너일가 같은 경우 그 등급들도 넘어서는 특별 서비스 대상이 된다.

"시계도 하나 사고싶고. 그리고 음. 여기 매장도 하나 부탁드릴게요."

"어. 여기는 그냥 일상복 코넌데."

"네. 남자친구가 거기 옷을 좋아하더라고요."

"알겠습니다."

"부탁드릴게요."

그날 밤. 문이 닫힌 백화점에서 한 사람이 쇼핑을 했다.

"응? 그래서? 아직도 거기 있는 중?"

"후우... 언제 끝날지 모르겠다... 아 진짜 인간들 지긋지긋해..."

"정치하는 아저씨들 다 그렇지. 그래도 웃고 다녀. 알겠지?"

"물론이지. 자기는 뭐해?"

"쇼핑 중."

"이 시간에? 어디서?"

"후후? 다 있지."

"오오~ 그렇구나."

"뭐야? 하고 싶은 말 있으면 해."

"아니 그냥... 자기 돈 쓰는 걸 내가 뭐라고 해."

"후훗 자기야? 자기 시계 고르고 있는데, 뭐가 좋겠어?"

"시계? 나 시계는 잘 안 차고 다니는데."

"그럼 내가 고른다."

연인에게 주고싶은 시계부터 자신이 가지고 싶은 악세서리에 옷들까지.

금액은 빠르게 억 단위를 넘어가고 있었다.

통화를 마친 한수빈은 보조해주는 직원과 함께 에스컬레이터에 몸을 실었다.

주변 모든 샵들이 천막이 둘러진 상황에서 한 의류코너 매니저 김지애가 친구와 문자를 하고 있었다.

[몰라. 그래서 그냥 계속 대기 중. 퇴근도 못 하고 아 피곤해.]

[우와 그런 일이 진짜 있구나?]

[나도 소문으로만 들었는데, 이런 게 진짜 있네. 우리 층에도 지금 나 밖에 없어.]

[잘 됐구만. 김지애. 한턱 쏴.]

[쏘긴... 얼마나 판다고. 근데 신기한 게 꼭 나로 해달라고 지명을 했다는 거 있지?]

그 순간 한수빈이 매장에 닿았다.

"음? 아무도 없나?"

사람 목소리에 김지애 매니저가 깜짝 놀라 일어나 다가왔다.

"아 죄송합니다."

그녀가 놀란 얼굴로 한수빈을 마주보고 있다.

어라? 어제 그 싸가지 없는 년...?

"어..."

"미안해요. 오래 기다렸죠?"

"아... 아니요. 괜찮습니다."

"어제 여기 옷이 괜찮길래."

"아. 네..."

싸가지가 없더라니 그런 거였구나...

김지애는 마음을 고쳐먹고 정중한 서비스 정신으로 한수빈을 바라보며 인사를 건넸다.

"어서오십시오. 뭐든 원하시는 거 있으시면 또 말씀해 주세요."

한수빈이 무표정한 얼굴로 옷걸이를 하나하나 들추며 말했다.

"저기. 부장님?"

"네 아가씨."

"궁금한 게 있는데, 이 언니는 월급이에요? 아니면 인센티브가 조금 있어요?"

"답해드려."

"아... 저희는 외국 메이커라. 실적에 따라서 그런 게 있긴 해요."

"정말? 너무 잘됐다.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했는데."

"아니요 괜찮습니다."

아가씨라... 부장까지 따라다니는 걸 보면 정말 보통 배경 아닌 것 같다.

김지애는 조용히 한수빈의 스타일을 살펴본다.

명풍 구두에 옷. 팔찌나 목걸이 장신구 하나하나...

억을 입고 다니는구나... 진짜 이런 사람이 있구나...

"언니. 여기서 젤 비싼 게 뭐에요?"

"네? 어. 어떤 스타일로?"

"음. 뭐든. 하나만 골라줘 봐요."

"잠시만요 고객님."

그런들 무슨 상관이람. 돈 많이많이 쓰고가라. 월세도 내고 사고 싶은 것도 많고. 한참 욕망하는 게 많을 나이에, 김지애는 거리낌 없이 매장 최고가 코트를 가지고 왔다.

"가을 시즌으로 나온 건데요."

"주세요."

"네?"

"달라고."

"아 네. 바로 포장해드릴까요?"

"응."

혀가 짧으면 어떠리. 싸가지가 없으면 어때. 백화점에선 돈 쓰는 놈이 왕이고 장땡이지.

이게 웬 떡이냐.

두 시간 기다린 끝에 하루 일당 그 이상의 인센티브를 가져가다니. 열심히 살아온 날들이 보상을 얻는 기분이다.

"카드로 하시겠어요?"

"여기."

플래티넘 카드다... 플라스틱이 아니야. 실물로는 처음 봤다.

"뭐해?"

"아 네 고객님. 죄송해요."

"후후. 얼빵하게 굴고 있어."

"..."

싸가지 없는 손님 한 두 번 보나. 실제로 서비스 종사자로서 잠깐 얼이 빠진 건 사실이니.

"죄송합니다. 여기 받으시고요."

"..."

"즐거운 쇼핑 되세요."

기쁨의 미소를 건네며 퇴근 후 친구들을 부를까 어쩔까 하고있는 김지애의 앞에서.

한수빈이 커터칼을 꺼내더니 쇼핑백에 대놓고 북북 찢어 버렸다.

"고!! 고객님!!"

"보자. 그리고."

"뭐... 뭐하시는 거에요!!"

"왜? 내가 산 물건 내가 맘대로 하겠다는데?"

"..."

뭐하는 거지...? 진짜 미친 앤가...?

김지애가 그녀와 함께 온 부장이란 쳐다보는데, 그도 놀란 표정이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 사이 한수빈은 다시 옷 하나를 들고와 계산대에 올려놓았다.

"계산해 줘."

"..."

"빨리."

"고... 고객님..."

"안 해?"

고개를 돌리자, 부장이란 사람도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끄덕인다.

부들부들 떠는 손으로 카드를 긁자 그녀는 이번에도 칼로 옷들을 난도질 했다.

상식을 넘어서는 행동을 광기라고 한다.

평범한 서비스직 종사자의 눈에 한수빈은 이해할 수 있는 범주를 넘어서고 있었다.

김지애가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물었다.

"대 대체... 왜... 왜 이러세요..."

"너."

"..."

"여기서부터"

한수빈은 커터칼을 걸려있는 옷들에 가져간다.

"하... 하지마세요...!!"

"하면?"

"..."

"경비원 부를꺼야? 부장님?"

"..."

"언니 이리 와."

어제 그 사람 때문인가... 잠깐 그들의 대화에 끼어들었다고 이러는 건가...?

아니 그랬다고 이런 짓을 해?

"잘못했습니다. 제가 너무 선뜻 선을 넘었습니다."

"계산 해. 빨리."

옷들이 잘려나간다.

한수빈의 히스테리에 스트레스를 받는 건 정신이 건강한 사람이다.

"했어?"

"흑... 흐윽..."

"지애 씨. 빨리 계산 해드려."

돈이 뭐길래... 아니 사람이 뭐길래... 내가 뭘 잘못 했길래...

인센티브가 쌓일수록 존엄성이 갈려나가는 기분이다.

"일 할 거면 똑바로 해. 넘볼 수 없는 사람 쳐다도 보지말고."

한수빈은 코트 다섯 벌. 셔츠와 바지 열 두 벌. 800만원에 가까운 돈을 버리면서 경고장을 날렸다.

그녀 입장에선 그리 비싼 금액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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