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별 하나의 사랑과 추억 그리고 쓸쓸함 (4) >
"네. 제가 봐도 진짜 여자친구분이 너무 잘 골라오셨어요. 빨리 입어보세요."
"그렇다면 뭐..."
"..."
피팅룸으로 가느라 수빈이를 살펴보지 못했다.
잠깐 여자 직원을 돌아보는 거 같은데. 뭐 여자들끼리 수다수다 떨겠지.
하아... 흰 바지에 빨간 남방이라...
* * *
구마하가 옷을 갈아입는동안 한수빈이 여직원의 가슴에 달려있는 명찰을 차분히 지켜본다.
"..."
"정말 안목이 너무 좋으세요."
"저기..."
"네? 고객님."
한수빈이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물었다.
"지애 씨. 우리 애인 멋있죠?"
"네! 고객님도 그렇고 남자친구 분도 너무 멋있고. 두 분 다 연예인이세요?"
"아니."
돌아오는 말이 짧아지자, 매장 직원 지애 씨는 거리를 둔다.
"더 필요한 거 있으면 말씀해주세요."
"없어. 가."
"네..."
'뭐야? 미친 년 뭔데? 내가 지 남친이라도 뺐어?'
하는 식으로 그녀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물러서지만.
한수빈은 김지애라는 그녀의 명찰을 각인시킨다.
* * *
"후우... 흰 바지에 빨간 티라..."
에이 씨 모르겠다. 이건 패션쇼야. 그냥 입으라는대로 입고 나오면 되는 거야.
주섬주섬 옷을 갈아입고 있으니 똑똑 노크소리가 들린다.
"어. 입고있어."
"자기야 잠깐 문 열어 봐."
"응? 나 지금 윗도리 벗었는데."
"신발이랑 벨트도 같이 입어 보라고."
어이고야? 완전 풀세트로 갖춰주는데.
빼꼼히 문을 열어 손만 휘적휘적 물건들을 받았다.
"입어보고 나와."
"..."
뭐지? 메이커가 여기 물건이 아닌데? 옆 가게에서 빌려왔나?
아무튼, 옷을 갈아입고 밖으로 나왔다.
거의 완전 탈의하고 전신을 바꾸는 거라 생각보다 시간이 걸렸다.
"후우. 자기야?"
"..."
피팅룸에서 나오니 수빈이가 멍하니 의자에 앉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자기야 뭐해?"
"응? 어. 나왔어?"
"뭐해. 사람 옷 입어보라고 하더니."
"으음. 아니야. 거울 봤어?"
"아직..."
그래. 이것도 연애의 한 부분이지... 원래 연인끼리는 자기 스타일 없다고 들었어.
뭐 어때. 나도 이제 수빈이 스타킹 찢고 카터벨트 채우고 그러면 되는 거지...
"아 괜히 떨리네. 뭔가 되게 유치할 거 같은데..."
"후후. 멋있어. 빨리 돌아 봐."
"보라고 해봐야..."
그래서 돌아서서 거울을 보는데.
"..."
"팔 좀 걷어 붙이고."
어라? 어?
거울속에 비치는 내 모습에 놀라고 있는데, 수빈이가 팔을 슥슥 올려붙이고 있다.
"흠. 그리고 단추 한 두 개만 더 풀까?"
"어... 응."
"으음~ 티를 바지에 넣어 봐."
"어? 어."
그래서 슥슥 손을 이렇게 저렇게 해서 남방 끝을 바지에 밀어 넣으니. 얼씨구? 어라?
"..."
"어때. 멋있지?"
그러게. 신기하네. 어우 씨... 무슨 연예인 같은데?
"빨리 인정해. 멋지지?"
하지만 그걸 또 바로 인정하기는 뭐가 조금 개똥 같은 자존심이 꿈틀거린달지.
"뭐. 내가 원래 옷발이 조금은..."
"하하! 야."
"아니 근데. 흠. 음."
원래도 여기저기 입으라는 옷들 입었을 때 나도 모르는 내 모습이 놀랍긴 하지만. 와 이건 진짜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존나 멋있다. 존나 잘 나가는 사람같애.
"어때? 솔직히?"
"뭔가 성공한 사람이 저기 어디 지중해 이런 데 입고 가는 패션 같아 보여."
"후후후 그리고?"
"그리고. 음. 되게 잘 노는 사람같이 보이고..."
"다행이네 마음에 든다고 하니까. 나가자."
"어? 이렇게 입고?"
"응."
"...계산은?"
"했어. 나가면 돼."
"벌써? 아니. 그래도 내 옷도 안에 있고."
그러자 수빈이가 매장 직원을 돌아보며 말한다.
"저기요 지혜 씨? 저것 좀 정리해 줄래요?"
"...네. 알겠습니다."
"어어! 아니에요! 자기야 왜 그래!?"
"괜찮아. 그런 거 해주는 사람이잖아."
"수빈아."
이것도 자꾸 경험하다보니 어느정도 익숙은 해지지만. 아닌 건 아니다.
"그러지 마. 이분한테 실례야."
"..."
수빈이를 잠시 진정시키고 직원분께 말했다.
"죄송합니다. 쇼핑백 하나만 주시겠어요? 제가 할 게요."
"괜찮아요. 잠깐만 기다리세요..."
"주세요. 죄송합니다."
주섬주섬 옷을 정리하고 밖으로 나왔다.
아니 그냥 백화점 밖으로 나가는 게 좋을 거 같아 자리를 피했다.
수빈이도 보조석에 앉아 멍하니 앞만 보고 있다.
"자기야?"
"..."
"자기야. 앞으로 사람들한테 그러지 마."
"왜 그러면 안 되는데...?"
"몰라서 물어?"
"어."
"...옷파는 사람한테 무슨 시중을 들라고 하고있어? 그건 아니잖아."
"..."
그녀의 남다른 배경을 이해하며 말해주었다.
"하지 마. 일하는 사람들은 그냥 그 돈 받고 일하는 거지. 자존심까지 숙이게 해선 안돼."
"내가 그 여자 자존심을 꺾었어?"
"거기서 내 옷이니 양말이니 주워 담다보면 그렇게 됐겠지."
"..."
"무엇보다 내 이미지는 생각 안 해?"
"자기 이미지?"
"응. 자기가 나 이렇게 멋지게 꾸며주려고 하듯이. 나는 국가대표잖아. 내 행실이 사람들한테 언급이 된다고."
"..."
아무 말 없이 눈만 껌벅껌벅 거리고 있는 수빈이를 안아주었다.
"자기야. 우리 형도 장사하는 사람이야."
"..."
"그러지 마. 사람들 다 힘들게 돈 벌고 있어."
"미안..."
"됐어. 사과할 이야기는 아니니까. 그리고 자기가 사과할 정도로 문제가 커진 것도 아니고."
수빈이가 나를 보는 눈빛에 형용하기 어려운 떨림이 느껴진다.
"나 싫어진 거 아니지?"
"왜 싫어져. 나 이렇게 멋지게 만들어주는 사람인데."
"...미안. 안 그럴게."
성악하는 사람이라 그런가. 왜 이렇게 연약할까.
살짝만 만져도 깨지는 마치 크리스탈 조각품을 다루는 것 같다.
"가자. 우리 멋지게 입었는데. 어디가서 맛있는 거 먹자."
"응. 근데 그 전에 할 게 있어."
"뭔데?"
잠깐 일이 있어 그렇지, 수빈이는 원래 날 이렇게 꾸며 입힌 건 목적이 있어서란다.
"응? 무슨 목적?"
한쪽에 차를 세워두고. 수빈이가 거리에 날 세워놓았다.
"자기야. 잘 들어. 지금부터 나는 저쪽 카페에 가서 자기를 지켜볼 거야."
"어. 그리고?"
"자기는 여기서 한 시간 동안 서 있어."
"서서 뭐 하라고...?"
"그냥 있어. 여기 지나다니는 여자애들 많어."
뭐라는 거야???
"나 여자 언급조차 하는 거 싫어하는 사람이 왜 그런 짓을?"
"그냥 그러고 있으면 자기가 얼마나 멋있는 사람인지 알게 될 거야."
"하하하! 그런 걸로 내가 멋진 걸 어떻게 안다고."
"자기야. 여긴 압구정이야."
수빈이는 대한민국 제일 콧대높고 자존심 강한 애들만이 이 거리를 돌아다닌단다.
"..."
"있어 봐. 그럼 알겠지."
"오~ 뭐지. 꼭 무슨 범죄영화의 한 장면 같은데?"
"후후후. 자기야 이리 가까이 와 봐."
귓속말을 하게 이리 다가오라는 듯 손짓을 한다.
상체를 낮춰주니 소곤소곤 말을 해주는데.
"경고하겠어. 만약, 지나가는 애들한테 눈길이라도 줬다간. 그땐 진짜 범죄영화의 한 장면을 보게 될 지도 몰라."
"에이. 무슨 말도 안 되는 협박을. 그리고 나 이렇게 입기 전에도 가끔씩 알아보고 전화번호 묻고 그런 사람들 있었는데."
수빈이는 어딘가 살벌함이 느껴지는 미소를 지으면서 손을 꼭 붙잡고 말했다.
"난 우리 자기가 아까 나한테 부족한 걸 알려준 것처럼."
"응."
"나도 자기한테 있어서 부족한 걸 알려주는 것 뿐인데."
"..."
"방금 한 말은 가볍게 흘려듣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래. 한번 지켜보자고. 근데 여자들이 와서 말 거는 건 상관 없다 이거지?"
"응. 내가 보고 있을 게."
"오케이. 누가 나한테 와서 말을 건다고."
수빈이는 씩 웃으며 카페에 돌아가 창가에 자리를 잡았다.
나는 혼자 약속이라도 있는 사람인양 멀뚱멀뚱 서서 주변을 둘러보고 있다.
이것 봐. 누가 와서 말을 걸어.
보는 사람들도 그냥 옷이 빨갛고 바지가 하야니까 보는 거지.
뭐 키 크고 그러니까 쳐다볼 수도 있고. 아니면 누군가는 어? 구마하다 하고 알아볼 수도 있는 거
"저기..."
"네?"
그 순간. 아직 생각이 정리되지도 않은 찰나에 어떤 여자분 두 분이 다가오셔서 물었다.
"누구 기다리세요?"
"..."
"혹시 약속 있으세요?"
뭐지? 도를 믿습니까인가? 아니면 당신에게 좋은 기운이 느껴집니다? 뭐지?
"아. 저. 친구를..."
"여자?"
"..."
"남자면 저희도 둘인데, 같이 노실래요?"
뭐. 뭐야. 왜 이래? 처음 보는 사람들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아니요. 죄송합니다."
"아 그럼 전화번호 주시면 안되세요?"
"..."
"너무 제 스타일이셔서..."
"저기... 저..."
그녀들의 이야기를 듣는데 머릿 속에서 수빈이가 "으아악 이년들아 내 남자야!!' 거리면서 달려들어 머리채를 휘어잡고 쓰러뜨리는 범죄영화의 한 장면이 빠르게 지나갔다.
여자들이 2:1로 머리채 잡고 싸우면 범죄영화지... 다른 게 범죄영화겠어?
수빈이가 앉은 창가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우리 고혹적인 여자친구는 어느새 큰 선글라스를 쓰고 있는데, 감춰진 표정에서 여유롭게 웃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죄송해요. 저 일행이 있어서."
"네..."
"저 근데... 혹시..."
"아 죄송합니다. 저 여자친구 있어요."
정중한 거절 끝에 여성분들을 돌려보내고 자리를 비켜서는데 주머니 핸드폰이 울린다.
"어디가?"
"자기한테."
"안돼. 거기 있어."
"자기야. 나 아까 그 여자들이 전화번호 물어봤어..."
"응. 봤어."
"보면 어떡해? 나와서 구해줘야지."
"후후후. 움직이지 마."
"에이 이건 아니지. 그래도 내가 어찌됐든 얼굴이 좀 팔린 사람인데."
"가만 있어. 이것도 나름 나쁘지 않네. 은근 두근두근 했던 거 알어?"
"뭐야. 사람을 무슨 동물원 취급하는 것도 아니고."
"알았어. 대신, 거기서 한 시간만 있으면 뭐든 다 해줄게."
"뭐든?"
뭐든? 뭐든?? 우리가 아직도 해보지 못한 뭐든의 범위가 있나??
그 순간 문자가 하나 들어오는데,
)*(
이건 또 뭐야...?
"자기야?"
"뭐든."
"이게 뭐야...? 이게 뭔데?? 이게 무슨 뜻인데??? 이거 내가 아는 그걸로 이해해도 되는 거야?"
"응."
하하하. 미치겠네 진짜...
"아니. 이런 건 어디서 봤어?"
"그냥. 예전에 인터넷에서 봤는데. 웃기더라고."
와 이건 진짜 뭐지? 하... 항문...? 애널?? 애널이라고???
야동에서 본 적은 있어. 확실히 뭔가... 느 느낌은 몰라도, 그... 그 어떤 미지의 영역을 탐구한다는...
"..."
수빈이를 돌아보니 씩 웃으면서 공중에 쪽 하고 키스를 날려준다.
"오케이 알았어."
좋아 씨발 버틴다.
무슨 일이 있어도 버틴다!
다 꺼져! 백만 대군이 밀려와도 이 자리를 벗어날 수 없어!
나는 장비다. 이곳은 장판파다! 내 뒤로 아무도 지나갈 수 없다!!
그릇된 성적 판타지에 대한 원념은 둘째치더라도 정말 많은 여자들이 다가와 말을 건넸다.
"혼자 오셨어요?"
"누구 기다리세요?"
"저. 오늘 시간 되세요?"
"이게 제 전화번혼데 문자 하나만 보내주시면 안 돼요?"
정말 태어나서 처음 알았다.
이렇게 여자들이 적극적인 존재였구나.
이렇게 여자들이 남자한테 말을 잘 거는구나.
이렇게 여자들이 남자를 좋아하는구나.
아니. 나를 좋아한다고 해줘야 하는 건가.
"..."
내가 꽤 멋진 놈이었구나?
다들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니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