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륜기로 가버렷-123화 (123/401)

< 여왕의 시선 (8) >

구마하가 백스테이지로 빠지고, 곁에 앉은 친구가 한수빈에게 귓속말을 건넸다.

"수수. 방금 그 친구 연대생이지?"

"응? 어. 그럴 걸...?"

"몇 살이지? 작년에 고등학생인가 그러지 않았어?"

"...왜?"

"그냥 궁금해서."

사학재단 이사장을 조부모님으로 두고 있는 친구였다. 피차 부족할 거 없고 아쉬울 게 없는 처지. 자신이 그러는 것처럼 함께 있을 땐 몰라도 이 친구도 뒤로는 어떤 만남을 하고 있을지 모른다.

구마하를 보며 군침을 흘리는 모습에 한수빈은 일부러 시선을 피했다.

두 사람의 관심이 사그라들자, 오늘 이 자리에 그녀들을 초대한 당사자가 다급하게 말했다.

"얘! 얘들아. 저기 내 남차진구...!"

"뭐? 조용히 해. 자기가 아는 척하지 말라 놓고선?"

"..."

"수수. 수?"

"쟤한테만 그러지 말고, 너도 좀 얌전하게 있어."

"그래서 귓속말로 부르잖아. 방해돼?"

"...왜 그러는데?"

의도적으로 쇼에 관심을 두지만, 친구는 쉽게 단념하지 않는다.

"요즘도 혼자 레슨 받아?"

"아니..."

"그럼 학교 가?"

"..."

"오랜만에 신촌 좀 가볼까 하는데. 너 시간 어때?"

이게 지금 누굴 바보로 아나...

한수빈은 가슴 속 피어나는 거센 저항의 불길을 억누르며 태연히 미소를 지었다.

"난 원래 신촌 안 가. 우리 학교 앞도 거의 가본 적 없어."

"후후후. 역시 재벌가 따님은 다르네."

"..."

"장난이지. 우리 사이에 왜 그래."

그거 때문에 그러는 줄 아냐?

이것아 순서 지켜. 잡아도 내가 먼저지 왜 니가...

하지만, 속내를 밝힌다고 이 친구가 오빠들같이 굴종해줄 사람도 아니고. 애간장만 타들어 간다.

한수빈은 결핍이라는 걸 모르고 자란 사람이었다.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욕망. 질투. 그녀의 마음에 처음 느끼는 열정이 꿈틀 거린다.

감정이 가슴을 세차게 두드리고 있었다.

* * *

"와 떨려라."

"마하 씨. 정말 잘했어요!!"

"진짜요?"

"응!! 하나도 안 어색했어. 몸도 똑바로 나가고."

"워킹이 생각보다 운동 되네요. 긴장해서 그러나?"

"자 자. 수다는 나중에 하고. 준비 해야죠. 우리가 지금 젤 늦어요."

"네! 알겠습니다."

"옷 빨리 주세요."

백스테이지로 돌아온 구마하가 새 옷을 갈아입는다.

전담하는 스텝과 서둘서둘 준비를 하고 있는데 디자이너 이유이가 찾아와 그의 어깨를 찰싹찰싹 두드리며 말했다.

"어쩜 어쩜! 어떡하니 정말..."

"왜... 왜요? 제가 뭐 실수했나요?"

"실수했지. 큰 실수지. 관객들의 혼을 빼가면 어떡해. 다들 마하 씨 보는데 눈빛이 변했어."

"하하하. 옷이 좋아서 그랬겠죠."

"내가 모델을 너무~ 잘 못 골랐어 내 옷이 주목을 받아야 하는데. 모델이 분위기를 다 쓸어가면 어떡하니 정말. 속상하다..."

"왜 그러세요 선생님... 주변에 멋진 분들이 얼마나 많은데..."

구마하가 주변을 둘러본다.

날카로운 인상의 모델들이 다음 스테이지를 준비하고 있었다.

하나 같이 칼날 같은 턱선과 높은 콧대 그리고 진한 눈매를 가지고 있다.

주섬주섬 바지를 입고 셔츠를 잠그며 생각했다.

어떻게 이렇게 다 잘 생겼냐...

몸이라도 있으니 다행이지... 아니면 자존감 개 박살 날 뻔했네... 젠장 중학교 때 트라우마 도지는구만.

주변을 부럽게 바라보는 그와 달리, 곁에 있는 여성들의 시각은 다르게 비춰지고 있었다.

패션을 위해 만들어진 각진 어깨와 역삼각형 몸매도 멋있지만, 실제 경기를 위해 갈고 닦은 스포츠 근육은 다른 이들에겐 느낄 수 없는 거친 수컷의 향기를 뿜어내고 있다.

이제 갓 스무살 된 청년이라는 것도 알게 모르게 완성된 몸과 다른 앳된 느낌을 주어 욕망을 자극 시킨다.

아무 것도 모르려나? 한참 혈기 왕성할 나이니 알 건 다 알고 있지만 경험이 없나? 내가 알려주고 싶다...

그의 몸에서 나는 은은한 체온조차 야릇함을 불러 일으키는 것 같다.

이유이도 참지 못하고 또 한번 다가와 아는체 하며 나섰다.

"마하도 머리 이렇게 나가니?"

"네. 컨셉이."

"바꾸자. 얘들아 시간 되지?"

"조금 부족한데요."

"선생님. 지금하면 늦어요."

"패션에 늦는 게 어딨어. 얘. 거기 스프레이 줘 봐. 빨리."

이번 의상은 면 바지에 데님 셔츠였다.

이유이는 구마하의 단추를 서너게 풀고 스프레이 뚜껑을 열어 손에 흠뻑 물을 적신 채 그의 머리를 쓸어 넘겼다.

슥슥 거칠게 머리를 만져주던 이유이가 흡족한 미소를 띄우며 말했다.

"됐어! 완벽해!! 이렇게 가."

구마하가 뚝뚝 머리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에 검게 변하는 셔츠를 보며 물었다.

"저 선생님... 옷에 물 떨어지는데요...?"

"응! 그게 좋은 거야! 가!"

패션의 세계는 존나 모르겠다. 하긴 그러니 패션이라는 거겠지.

구마하도 '에라 모르겠다.' 하는 마음으로 다른 모델들과 스테이지로 걸어나갔다.

이유이가 스텝들과 함께 고개를 빼고 구경하며 말했다.

"저 봐라. 다리 꼬고 난리 났다 난리 났어. 어이구 계집애들."

"선생님. 쇼에 집중해주세요..."

"얘. 세상 그 어느 때보다 집중 중인 거 안 보여?."

구마하를 올려다보며 멍해지는 젊은 손님들의 표정에 이유이가 씩 미소를 지었다.

"그냥 나랑 한번 자자고 물어볼까?"

"선생님!?"

"두 번만 이혼했으면 매달리는데. 우리나라 소송비는 너무 비싸..."

이유이가 함께 하지 못하는 마음을 페티쉬로 활용한다.

그녀는 오늘 구마하의 섹시함을 폭발시킬 예정이다.

단물 쓴물 다 빨아먹은 40대가 이렇게 흥분할 정돈데, 저기 조신한 척 구는 20대 부자집 여식들은 오죽하겠는가?

생리하는 애들은 다행인 줄 알아라. 너희들 오늘 쇼 끝나고 한 년도 의자에서 못 일어나게 만들어 버리겠어.

"흠."

"그냥 갈아입으시면 돼요."

"다른 분들도 그렇게 하고 계시는데?"

"음. 그렇긴 하지만..."

그리고 마침내 수영복 차례가 다가왔다.

스텝들이 타이트한 삼각팬티를 건네주는데, 다른 남자 모델들 거보다 조금 작은 거 같다며 구마하가 난처한 듯 다시 물었다.

"제가 이거 입는 거 맞죠?"

"네."

"그냥 여기서?"

"네!"

"다 벗고?"

미리 약속이라도 한 듯 스텝들이 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구마하가 슬쩍 옆을 돌아보는데, 진짜로 한 모델이 물건이 꺼내지든 뭐하든 아무렇지 않게 바지를 벗고 속옷을 갈아입고 있었다.

우와... 진짜 패션의 세계는 난해하구나...

"저희가 뒤돌아 있을게요!"

"편하게 입으세요."

"후우~"

그래. 이건 일이야.

부끄러울 것 없어. 여자들 앞에서 고추 처음 꺼내보는 거 아니잖아.

구마하가 당당하게 바지와 속옷을 벗으며 수영복으로 갈아입었다.

* * *

스테이지 앞. 한수빈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고 있다.

상대해주지 않으니 친구가 옆으로 대화의 물고를 텄는데, 이제는 남자친구도 있다는 사람과 구마하 이야기를 신나서 하고 있다.

"이유이가 확실히 뭔가를 아네. 머리는 젖어 있어야지."

"그렇지. 데님 셔츠는 좀 땀에 젖어야지. 그런 맛이 있어."

"야. 넌 아까 남자친구 지나간지 얼마나 됐다고..."

"뭐가? 난 쇼 컨셉이 좋다고 말하는 거야."

"그래. 수수 넌 섹시한 거 싫어?"

"..."

진짜 그날 목줄을 채워서라도 보내는 게 아니었는데...

타오르는 욕망에 감정만 졸이는 한수빈의 옆으로 음기 가득한 나지막한 함성이 들려왔다.

이번엔 또 뭐야? 라는 시선으로 고개를 들었다.

구마하가 검은 수영복 팬츠 차림으로 걸어나온다.

감출 수 없는 굵직한 심볼을 가지고서.

"..."

"미쳤다 진짜..."

"얘들아 나 말리지 마. 오늘 끝나고 여기 옷 내가 다 사갈거야..."

이번엔 머리만 젖은 게 아닌 몸에도 물이 흐르고 있었다.

말 같은 허벅지 근육이 그가 걸음을 딛을 때마다 꿈틀거리고 거북이 등짝같은 복근으로 물줄기가 흘러내려 수영복 위에서 멈춘다.

구마하를 보며 한수빈은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저걸 내가... 내가 손으로 먼저... 그가 나를 안고 키스를 하고 저 가슴과 굵은 목에 안기고... 그가 내 안으로 들어오고...

구마하도 유달리 뜨거운 시선을 느꼈는가 내내 정면만 보다가 살짝 눈을 돌렸다.

"어?"

알아봤다! 날 알아봤어!

한수빈이 눈동자를 크게 뜨며 아는체 하자, 구마하도 보면서 씩 웃는다.

그녀가 자그마하게 손 끝을 올려 인사를 건네자 구마하도 끄덕이며 웃고 지나쳤다.

두 사람의 짧은 커뮤니케이션에 친구들은 난리가 났다.

"너 쟤 알어?"

"수수! 뭐야? 방금?"

"응? 음. 그냥."

"야. 넌 계속 조용히 있었으면서..."

"이 요망한 기집애..."

개미소리로 따지는 친구들을 무시하며 한수빈은 다시 미소를 지었다.

그와 나눈 짧은 인사에 마음에 한결 여유로움이 찾아오는 것 같다.

초조하던 갈증이 누그러지고, 편해진 감정 속에는 애정이 싹트고 있었다.

마지막은 대놓고 섹스어필이었다.

상의를 벗고 긴바지만 입고 걸어오는 그가 팬츠의 훅과 자크를 다 풀고 주머니에 손을 넣고 스테이지를 가로질렀다.

바지 사이로 드러나 보이는 속옷과 뚜렷한 치골에 친구가 다급하게 물어본다.

"수수 뭐야? 무슨 관계야? 빨리 말해."

"그냥 잠깐 어디서 만났어."

"...정말?"

"응."

됐어. 이쯤하면 알아서 이해하고 물러서겠지. 그래도 우정에 선이라는 건 있으니까.

하지만, 기대와 달리 친구는 포기하지 않는다.

"아직 둘이 사귀거나 그런 건 아니지? 그냥 친구지?"

"..."

"빨리! 내 말이 맞아 틀려?"

"......"

서둘러야겠구나. 하긴, 어디 이 친구 하나뿐이겠는가.

이 공간에 있는 다른 모든 여자들도 다 비슷비슷한 마음이겠지.

* * *

"후~ 됐네. 그래도 다행히 급한불은 껐구만."

모델료로 급하게 카드값을 메꾸고 다음 날 학교로 나갔다.

5월은 축제의 계절. 우리 학교도 대동제가 열리는 중이다.

여기저기 학과 동아리마다 주점이다 행사다 바쁜 가운데, 육상팀도 이벤트 경기를 준비하느라 정신없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꾸 어제 모델일로 이것저것 물어본다.

"넌 이제 패션쇼도 나가냐?"

"아니에요. 그냥 잠깐 알바로 한번 해 봤어요."

"세계 챔피언이 알바를 해?"

"하하. 선배님."

"마하야. 그런 건 어떻게 하는거야?"

"저쪽에서 먼저 연락이 왔어. 쇼 한번 서보지 않겠냐고."

"크... 역시, 똥을 싸라 사람들이 알아줄 것이다. 틀린 말이 아니야."

"하하하! 재민아 개소리 그만하고 빨리 이거나 날러. 나 이따 청송대 가야 돼."

"연예인은 누구누구 봤냐?"

"아 그냥 모델만 있었어요! 선배님 제발! 시간 없어요!"

오후엔 학교 방송국에서 주최하는 인터뷰가 있어 서둘러야 하는데, 다들 왜 이렇게 일은 안 하고 입만 떠들고 있는지.

부랴부랴 준비를 마치고 인터뷰가 열리는 청송대로 갔다.

"여러분. 오늘 숲속의 향연에는 대한민국 육상의 자랑이자 연세대가 키운 올림픽 스타. 05학번 구마하 선수를 모셨습니다."

"어우... 모신다는 말이 조금 부담스러운데..."

"연대가 키운 건 동의하시나요?"

"작년에 여기서 훈련했으니까. 동의합니다."

"하하하! 학우 여러분들게 인사 한번 해주세요."

"안녕하십니까. 05학번 사체과 구마하입니다."

인터뷰라긴 뭐하고 그냥 사람들 모아놓고 떠드는 토크쇼 같았다.

"구마하 선수는 대학에 와서 제일 하고 싶었던 게 뭔가요?"

"역시, 연애죠."

"오~ 이미지를 고려하지 않는 강력한 발언."

"그럼 지금 여자친구는?"

"아직. 없습니다."

"여러분 들으셨습니까!!"

진행자의 발언에 여자 방청객들이 함성을 질러줬다.

"아. 근데, 저도 여기에 대해서 한 마디 할 수 있는지?"

"네. 하세요."

"친구들이 얘기해 주는데, 뒤에서 제 이야기 많이 하신다고 들었거든요? 저는 근데 누가 와서 말도 안 걸고."

"아무래도 선수로서 위상이 있다보니까 여성 학우분들이 다가가기 조심스러운 거 아닐까요?"

"저 절대! 그렇게 다가오기 어려운 사람 아니고요. 그러니까 언제든지 오셔도."

"구마하 선수가 다가가고 싶은 사람은 없나요?"

"한 사람 있는데, 우리 학교가 아니라서... 무엇보다 그 사람을 좋아해도 되는지 잘 모르겠고..."

"오오~ 혹시 이대생?"

"음. 노 코멘트 하겠습니다."

"여기 이대생 계십니까? 이화여대 분들 손 한번 들어주세요!"

정신없이 흘러간 대동제를 마치고 친구들과 백양로를 걸어가고 있었다.

"와 존나 피곤하네... 대회 여는 게 이렇게 빡셀 줄이야... 선수로 뛰는 게 낫지..."

"니네 진짜 아카라카 안 보고 갈 거야?"

"익범이도 그냥 가잖아."

"우리 내일 시합 있어. 지금도 늦은거야. 나 집에가서 컨디션 조절해야 돼."

"재민아 너는 있어 다른 애들도 있는데, 나도 피곤해."

"선수 새끼들 참여도 진짜 없어요..."

"하하하! 좀 봐줘 우리도 놀고싶지."

익범이가 분위기를 바꿔 물었다.

"근데, 마하야. 너 아까 청송대 가서 이대생이랑 썸 탄다는 얘기 했냐?"

"소문 존나 빠르네... 누가 그러디?"

"농구부 여자애들이. 학교에서 만나지 뭐하러 이대생을 만나냐고."

"야! 그거야 내 마음이지."

여자 얘기에 재민이도 관심있게 물었다.

"누군데? 어디서 만났어?"

"클럽."

"오오! 클럽!"

"가봤냐? 재밌어?"

"음. 근데 뭔가 자주 가기는 좀 뭐하고..."

수빈 씨. 어제 패션쇼 하는 데도 와 있었지. 설마 거기서 보게 될 줄이야.

아는 척 하길래 반가움에 웃긴 했는데, 다른 걸 떠나서 여전히 예쁘더라.

클럽에서의 모습과는 또 다른 청초한 분위기가 있었어. 역시 대통령의 숨겨진 외손녀...

"예쁘냐?"

"뒤져. 장난 아니야."

"클럽에서 노는 애들은 좀 그렇다고 하던데."

"그러니까. 나도 그런 게 걸려서..."

"야 잠깐만. 우와? 저 차 뭐야?"

"뭐야... 저것도 행사야?"

대동제엔 여러 기업이 다양한 홍보나 체험부스를 만든다.

우리는 교문 앞에 번듯하게 주차되어 있는 포르쉐도 그런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설마. 학교에 포르쉐 광고할까? 저런 걸 누가 탈 수 있다고..."

"있지. BMW 타는 애도 있는데."

"아 진짜 그건."

그 순간 문이 열리며 긴 머리의 여자분이 또각또각 다가온다.

"..."

"..."

재잘재잘 차로 놀려대던 재민이와 익범이가 그녀를 보고 입을 다물었다.

나도 머리가 멍해지는 기분이었다.

수빈 씨였다.

여전한 미모와 그에 뒤지지 않는 화려함을 가진 사람이 주변의 공기를 압도하며 다가와 멈췄다.

"안녕."

"...아. 네."

친구들이 알아서 한 발짝 두 발짝 물러서며, 나와 그녀 단 둘이 마주보고 있었다.

"여긴 어쩐 일로...?"

"공연이 있어요."

"..."

"난 마하 씨가 와줬으면 좋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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