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륜기로 가버렷-122화 (122/401)

< 여왕의 시선 (7) >

카드 명세서를 보고 또 봤다.

"뭐야? 내가 언제 이렇게 돈을 썼어??"

술 값 밥 값... 혼자 사니까 공과금이나 이런 것도 무시 할 수 없고 장본 목록들 하며...

"불주먹은 또 뭔데? 내가 언제 이런 거에 돈을 썼어? 사기 당한 거 아냐?"

당장 카드사에 전화해서 의심가는 것들을 이것저것 물어보았다.

그러나.

"아. 네... 닭갈비 집이요? 네... 그날 맞아요. 네 수고하세요. 고맙습니다."

내가 간 식당 맞네. 그때구나. 익범이랑 농구부 친구들과 있을 때 쏜다고 냈던 날.

맞구나 내가 쓴 거...

"..."

이렇게 보니까 술 값이 미쳤네... 이것만 모아도 얼마냐 대체...

다들 학생이고 운동한다고 많이 먹고 마시라곤 했지만. 전에는 크게 탈 없던 지출이 자취에 차 할부금 보험에 뭐가 뭉텅이로 빠져나가니 바로 휘청거린다.

"진짜 차 값이 미쳤구나..."

그 와중에 영롱하게 찍혀있는 BMW 할부비... 아이고야 어질어질하다...

"후우..."

식탁에 놓여있는 차 키를 가만히 보면서 생각했다.

지금은 차를 거의 안 몰고 다니니까 상관이 없지만, 여기에 기름 값 들어가고, 그러다 만에 하나 고장이라도 나 수리비까지 더해지면...

"어쩔 수 없지. 감독님한테 말씀드리자."

.

.

.

.

"내가 왜?"

"네?"

"말했잖아. 니 녀석이 알아서 하라고."

"..."

한구 스포츠 사무실로 찾아와 '저 차 세워만 놓는데 감독님 타실래요?' 라고 여쭤보니 일언지하에 거절하신다.

"감독님. 얼마 전에 차 좋다고 하셨잖아요?"

"응. 차 좋지. 근데 난 내 차 있어."

"..."

"이야~ BMW가 멋지긴 해? 역시 비싼 게 좋긴 좋더라!"

"감독님... 그냥 회사에서 쓰면 안 돼요...?"

"뭔 소리야. 한구 스포츠에서 중고로 사라고? 얼마에 줄 건데?"

"아니요... 그게 아니라요... 새 차를 왜 중고로..."

"그럼 뭐? 그냥 타라고? 돈은 니가 내고? 그럼 나야 좋지! 기름 값 정도는 내가 내고 다닐 게! 키 어딨냐?"

진짜 이렇게까지 하실 건 없잖아요...

"감독님 살려주세요... 카드값이 너무 비싸게 나왔어요..."

엉엉 우는 소리를 하고 있는데, 감독님이 배꼽을 잡고 쓰러지신다.

"하하하! 크하하하하!"

"당장 급한 카드 값만이라도. 제발요..."

"카하하하! 아이고 마하야. 하하하! 이 녀석아."

"저 이제 세계 선수권 준비도 해야 하고... 아시잖아요 엄청 먹는 거. 식비도 무시 못하는데..."

"아이고 배 아파라. 야. 그만 좀 웃겨라. 하하하! 크하하하!"

"아 감독님!!"

"뭐 이놈아. 그래서 내가 말했지? 돈 가지고 까불지 말라고."

"회사에서 처리해 주세요. 네? 한번만요."

"안돼."

"감독님!! 저 이렇게 진짜 버리실 거에요?"

"내가 널 언제 버렸냐. 인마. 니가 국산차로 샀으면 말을 안 한다. 만약 니 녀석이 돈 무서워 중고로 산다고 했으면 오히려 그러지 말라고 회사 차원에서 사줬을 거야."

"그럼 지금이라도 중고차로 바꾸면요?"

"BMW는 어쩌고? 중고로 팔고?"

"..."

"우리 마하 돈 많아서 좋겠다~ 하하하!"

"진짜 이러실 거에요?"

"그래서 내가 말했잖아!! 고집부릴 땐 언제고 지 놈 아쉽다고 성질이야 성질은!"

절대 안 된단다. 혼쭐이 나라신다. 쳇. 매정하기는.

"뭘 잘했다고 그렇게 매정하니 뭐니 하는 얼굴을 하고 있어."

"제가 언제요..."

"니가 선택한 일이다. 정 뭐하면 형님한테 말씀드려 봐. 형님이 그러라면 내가 처리해 줄게."

"형한텐 말씀하지 마세요. 알면 저 진짜 죽어요..."

"하하하하!"

아무리 사정을 해도 안 되는 건 절대 안 된다고 거절하신다.

진짜 상금만이 답인가?

대학 실업팀 경기랑 세계 선수권까지 두 대회 어떻게든 상금으로 때우면 될까?

근데 내가 또 나가서 반드시 우승을 한다는 보장도 없잖아?

특히 세계 선수권은 차원이 다른 경긴데.

"미치겠네 진짜... 저걸 어째야 되냐..."

돈 걱정 때문에 운동에 집중하기가 어렵다.

육상팀 훈련이 있는 날인데, 며칠 뒤 대회 있단 핑계를 대면서 '다들 그냥 몸 푸세요.' 하고 혼자 끙끙 거렸다.

"젠장!"

남들은 훈련비 생활비로 쓰는 상금으로 차 값 메꾸는 것도 모양 빠진다.

아니야.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말자. 이건 의미가 있는 소비였어.

실제로 지금 우리 학교엔 선배들의 강압적인 분위기가 많이 사라지고, 선후배 다들 서로를 편하게 대하면서 전에 없던 좋은 사체과 문화가 시작되고 있잖아.

"칫!"

라고 아무리 변명을 해봐야 철 없는 행동에 대한 당위성이 성립되질 않어!

승우 형 같이 날카롭고 철학적으로 분석하는 눈 따위는 나한테 없다고!!

무엇보다 손해는 나만 보고 있잖아.

누가 그런다고 알아주기나 하냐?

어린 새끼 잘 나간다고 싸가지 없단 소리나 수근 거리고 가까운 사람들이나 상대해주지.

누가 나한테 오~ 마하야. 너가 그런 큰 뜻으로 BMW를 샀구나 해주겠냐고.

물론 뭐... 나도 외제차 사고 싶어 사긴 했지만...

설마 이정도로 나갈 줄은 몰랐지!

"우승이다. 우승만이 살 길이다."

그리고 대학 실업팀 연맹 대회날이 다가왔다.

한국에서는 처음 참가해보는 시니어 대회였다.

"어이! 구마하!"

"하하하! 마하야!!"

"왔냐."

실업팀으로 간 동민이와 진수를 만났다.

언제 와도 트랙은 가슴을 뜨겁게 만든다.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여기저기 찾아와 사인도 해달라 그러고 사진도 찍어달라고 부탁 해 팬 서비스를 해드렸다.

"오~ 이 새끼! 존나 잘 나가!!"

"와... 진짜 너 좀 달라보이는데?"

"하하하! 일단 들어가자."

경기장에 들어왔는데 관객들이 제법 많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많다. 실업팀 경기라 그런가?"

"뭔 소리야. 다 너 보려고 왔지."

"후우..."

"왜 한숨이냐? 스타의 부담감 이런 거냐?"

"부담은 무슨..."

부담이 아니라 쪽팔려서 그런다...

대부분은 일반 관객이 아닌, 육상 꿈나무들이 나를 보기 위해 찾아준 견학이었다.

자라나는 저 초롱초롱한 눈동자를 볼 면목이 없다...

얘들아 형이 미안해... 나는 너희가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야. 형은 지금 돈이 필요해...

"오늘 존나 열심히 뛴다."

"이 새끼 눈사람 되면서 몸 둔해진 거 아냐?"

"오~ 구마하 각성하는데?"

"두고보자. 오늘 다 이길거야."

진수도 요즘 10초의 벽을 뚫기위해 노력하고 있단다. 당장은 어려워도 1~2년 필사적으로 매달리면 될 것 같다면서 애가 도전 의식을 불태우고 있었다.

동민이는 원체 단거리 실력이 들쑥날쑥 했는데, 실업팀에 와선 장애물 달리기로 완전히 자리를 잡고 그쪽에서 큰 기량을 선보이고 있었다.

높이뛰기를 하고 싶었던 친구인 만큼, 속도와 점프를 혼합한 경기가 재밌는가 보다.

오늘은 감독님이 아닌 이현석 교수님과 경기장을 찾았다.

교수님과 함께 예선전을 보는데 확실히 다르다는 게 느껴졌다.

"교수님. 다들 꽤 빠르네요."

"실업팀은 대학팀이랑 분위기가 또 다르지?"

"네. 제가 꼭 이긴다고 말 못 할 거 같애요..."

"후후후. 집중하자."

순서가 다가오고 신발끈을 질끈 묶으며 트랙으로 나섰다.

동민이와 진수가 또 한번 반갑게 다가오는데, 미안하다 친구들아...

"야. 뭘 그렇게 씩씩거리고 있어? 여기 올림픽 아니야."

"후우. 훅. 얘들아 미안한데, 끝날 때까지 나한테 말 걸지마. 집중해야 돼."

"왜? 뭘 그렇게까지 해?"

"오늘 꼭 이겨야 되니까."

대학 대회 땐 9.89로 우승을 차지 했지만, 오늘은 세계 신기록과 타이를 이루는 9.73으로 100미터를 마쳤다.

관객은 함성을 질러주고 동민이가 찾아와 지랄지랄한다.

"야 이 새끼야! 이건 반칙이지!! 한국 대회에서 뒤지라고 뛰는 게 어딨어!!"

"뭐가 반칙이야... 내가 뭐... 부정 출발한 것도 아니고..."

쭈물쭈물 죽어가는 목소리로 변명하고 있으니 진수가 웃으며 말했다.

"하하! 이번 대회 상금은 다 마하가 가져가겠네."

그런 소리 하지마... 실제로 돈이 급하단 말이야...

남은 두 경기. 200미터와 800미터도 말도 안되는 성적으로 마감했다.

거의 세계신기록을 세웠는데, 바람이 강하게 분 탓에 정식 기록으로는 인정되지 않았다.

그러자 대한 체대 소속 진운이까지 뭐라고 하면서 다가온다.

"너 왜 이래? 여기 한국이야. 적당히 해?"

"아 씨... 1500도 그냥 나갈 걸..."

"세계 선수권 준비하는거야?"

"몰라. 이 새끼 미친 거 같애."

"진짜 승부욕 대단하다. 리러니 챔피언이지."

"마하야. 근데 저 차 니꺼냐? 니네 교수님 거야?"

실업팀 상금으로 일단 급한 불을 끌 수 있었다.

"후우. 이 정도면 세계 선수권 까지는 버틸 수 있겠지."

라고 한들, 다음 달이면 다시 또 카드값이 날아온다.

누가 BMW 좀 데려가세요...

새 차에요. 사서 몇 번 타지도 않았어요. 어딘가는 비닐도 때지 않았어요. 아직도 새 차 냄새 폴폴 나요...

혼자 끙끙거리고 있는데, 갑자기 전화가 울렸다.

"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구마하 선수 핸드폰이죠?"

"누구세요? 제 번호 어떻게 아시고?"

"아, 이거 한상률 감독님한테 여쭤보고 전화하는 겁니다. 죄송해요. 설명을 먼저 드렸어야 하는데."

"아 네. 그러시다면."

경계심을 풀고 전화를 받았다. 돈이 없으니 사람들 의심하는 것도 어렵지 않구나.

"패션쇼요?"

"네. 선생님이 구마하 씨 핏을 너무 좋아하셔서요."

아아~ 그때 그분이신가? 올 초 화보 촬영 때 어떤 여자 디자이너 분이, 내 몸 막 더듬던 분이 계셨지?

그때 터치 한번에 10만원 씩 받았으면...

미쳤구나. 씨발 돈에 미쳤어!

"저 그럼 뭐 모델 이런 건가요?"

"네! 맞아요!"

"제가 할 수 있을까요...? 저 그런 거 한번도 해본 적 없는데."

"그냥 걸어서 나갔다가 돌아오시면 돼요."

"으음."

"제발요... 선생님이 꼭 구마하 선수가 서주셨으면 좋겠다고 하시고, 저희들도 꼭 보고 싶고."

그래. 자본주의 사회에 이런 걸 묻는 건 실례가 아닐거야.

"저. 뭐 하나만 여쭤봐도 될까요?"

"네. 말씀하세요."

"혹시... 모델비가 있나요?"

"당연하죠!!"

"하겠습니다! 제가 어디로 몇 시까지 가면 될까요?"

금액을 듣는데, 제법 주시는 것 같다.

왜 그렇게 주냐고 물으니.

"구마하 선수가 쇼를 서주는데."

"아... 고맙습니다. 좋게 봐주셔서..."

그래. 대학생이면 알바도 하고 그러잖아. 돈 벌면 되는 거지. 이상한 게 아니야!

"저 잠시만요. 선생님이 바꿔달라고 하셔서."

디자이너 선생님과 통화를 가졌다.

"미안해요. 다 듣고 있었는데 거절당하면 어쩌나... 내가 우리 팀원한테 대신 말하라고 시켰어..."

"하하하. 괜찮습니다. 잘 지내셨어요?"

"응 그럼! 며칠 전에도 대회에서 우승했다며? 뉴스 잘 봤어요. 보는데, 아 맞다. 내가 왜 이 사람을 놓치고 있었을까 싶어서 전화 해 봤어."

무슨 옷을 입냐고 물어보니, 그냥 정장이란다.

대신, 컨셉에 맞춰 조금 변형은 있을 거라는데.

"여성의 시각으로 마하 씨의 매력을 말하는 거야. 당신은 너무 아름다운 몸을 가지고 있어."

"어... 그래서 지금 벗으라고요?"

"짧은 수영복이 있는데, 그것까지 부탁하기는 조금... 무리겠지?"

"저. 혹시 벗으면 돈을 더 주시나요?"

"설마 하려고? 진짜 괜찮겠어?"

"페이만 맞으면 얼마든지 벗어드리겠습니다!"

* * *

디자이너 이유이의 패션쇼.

한수빈이 객석에 앉아 얌전하게 팜플렛을 보고 있었다.

"수빈아."

"어? 왔어."

"일찍 왔네."

"응. 오늘 수업도 없고 심심해서."

두 사람의 친구들이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여자 친구들과 있을 때의 한수빈은 이도형이나 남자들과 있을 때완 전혀 다른 순박하고 고상한 느낌을 전해준다.

친구들도 하나같이 반듯한 인상을 주는 사람들이었다.

"여기 앉으래? 뒤로 가지."

"이리로 가래."

"니가 예뻐서 그런가 보다."

"그런 게 어딨어. 재밌으면 좋겠다."

억지가식 연기를 하는 게 아니다. 이 모습도 그녀고 저 모습도 그녀였다. 다만 환경에 따라 달라질 뿐.

친구들과 함께 스테이지 맨 앞 자리에 앉은 한수빈은 스물 두 살 젊은 또래 아가씨들같이 소소한 수다를 나눴다.

"정말? 누구?"

"야. 그런 걸 왜 말해..."

"뭐 어때. 구경하자. 어떻게 생긴 사람일까?"

"후후후. 잘 생겼어?"

"그냥 그렇지 뭐. 키는 커."

친구 중 하나가 여기 모델이 남자친구라며 자랑을 하고 있었다.

그런들 뭐하리. 구마하를 만나고 난 뒤 뭔가 남자들이 다 시시해 보인다.

놓친 물고기라 커 보이는 걸까...

세상에 나를 거절하는 남자도 있다니. 아직도 그날 밤이 믿기지가 않는다.

"시작하는거 같다. 조용히 하자 얘들아."

"수수? 내가 알려줄게."

"응."

"야!? 아는 척 하지 마."

"뭐? 모델이잖아."

"수선 안 필게 걱정마."

"...조용히 봐."

조명이 스테이지에 집중되고, 잔잔한 믹스음악과 함께 모델들이 걸어 나왔다.

한수빈도 도도하고 고상한 눈으로 그들을 지켜보았다.

얌전한 표정에 감춰진 사람을 관찰하는 눈매가 매섭다.

별로. 어깨가 작어.

괜찮은데 너무 올드해. 아직 그럴 취향은 아니지.

눈매가 좀 그렇다...

키가 작어. 무엇보다 거북목이야.

패션도 패션이지만, 사람을 선별하는 눈으로 쇼를 즐기는 한수빈.

그 순간, 저 앞에서 오오~! 감탄을 아끼지 않는 함성이 터져 나온다.

"뭐야? 누군데? 연예인 왔나? 니 남친 아냐?"

"아니야. 얘 안 나왔어."

한수빈도 호기심 가득한 시선으로 고개를 돌렸다.

모델과 비교해도 부족하지 않은 큰 키와 넓은 가슴을 가진 한 남자가 땀내 나는 아우라를 풍기며 걸어오고 있다.

"..."

쟤가 왜 여기에...?

구마하는 맨발로 걷고 있었다.

정장 바지에 상의를 탈의하고 자켓만 걸친 채 스테이지를 가로지른다.

전문 모델이 아니지만 단단한 코어 덕에 걸음에 중심이 있었다.

어딘가 화가 난듯한 사나운 표정.

단지 긴장됨을 감추기 위해 무게를 잡고 있을 뿐이지만, 보는 이들은 그의 표정에서 남성의 거침을 느낀다.

맨발부터 복근까지 드러낸 살결도 야성미를 더해준다.

한수빈은 침을 꼴깍 삼키며 다가오는 그에게서 눈을 때지 못했다.

"..."

"와..."

"어머 어머. 수수 이 사람 그 사람 아니야?"

"......"

주변 다른 여성들도 구마하를 보며 자그마하게 웅성거렸다.

와... 누구야? 분위기 있다.

그 사람 아냐? 작년에 메달 딴? 맞지?

저렇게 생겼었나...?

선수는 진짜 몸이 다르구나...

모델을 애인으로 두었다는 친구나 수다스런 친구. 다들 놀란 토끼눈이 되어 그들의 앞을 돌아서는 구마하를 쳐다본다.

한수빈은 꼬고 앉은 다리를 풀지 못 했다.

속옷이 너무 젖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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