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왕의 시선 (5) >
이도형이 복도로 나왔다.
한수빈은 눈을 차갑게 뜨고 팔짱을 낀 채 쳐다보고 있다.
누가 봐도 화난 모습에 간담이 서늘해지는 기분이다.
방금까지 구마하랑 싱글벙글 거리더니 갑자기 왜 이러지?
"너 왜 그래?"
"오빠. 쟤들 뭐야."
"몰라. 세준이가 데리고 왔어."
"내 앞에서 치워."
"..."
"당장."
"응... 알았어."
그럼 그렇지. 지가 찜한 걸 건드렸다 이건가...
전달 내용은 알았으니 이도형이 그녀의 기분을 달래준다.
"수빈아. 마하가 원체 유명하잖아."
"그래서?"
"사람들이 알아보는 건 당연한 거야. 화 풀어. 아까 너네 춤 출 때도 주변에서 많이들 봤어. 넌 뭐 이런 걸로 기분이 틀어지냐?"
"내가 지금 이상하게 구는 거 같애?"
"..."
"으음. 아니. 아니다. 오빠 그냥 치우지 말고"
한수빈이 독기 가득한 얼굴로 돌아본다.
"혼 좀 내줘. 가서 데리고 온 사람들한테 말해."
"야. 뭘 그렇게 까지 해..."
"오빠."
"...알았어."
"나 화장실 갔다올게. 그때까지 치워."
"..."
기집애 또 난리네...
모르겠다. 어차피 이놈들도 그럴 마음이 없는 것도 아니고...
한수빈이 자리를 피하고, 이도형이 돌아가 여자들과 웃고 떠드는 김원석에게 귓말을 건넸다.
"원석아. 잠깐만..."
"하하하! 어 왜?"
속닥속닥 이야기를 전해 듣자 김원석도 놀란 듯 물었다.
"갑자기 왜?"
"왜겠냐... 아까 얘네가 마하한테 아는 척 했다고 그러지. 옆 방 비었어. 세준이한테도 말해."
"아 씨..."
"빨리. 또 지랄한다..."
"오케이..."
김원석이 강세준과 둘만의 신호를 주고 받자, 그도 놀란 듯 이도형을 쳐다보았다.
이도형이 눈을 감고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에 강세준도 한숨을 쉰다.
"오케이. 야. 우리 나가자."
"왜? 술 놔두고 어딜 가."
"나와. 빨리."
"오빠 왜 그래?"
"너도. 나와 봐."
"뭐야. 아 왜 이래! 힘으로?"
* * *
승우 형 찾으러 여기저기 기웃거리다 한쪽에서 스테이지를 보고있는 형을 만났다.
"형. 여기서 뭐하세요? 다들 방으로 갔는데?"
"마하야. 왜 나왔어?"
"형 찾으러 왔죠."
"하하하! 그래도 동문이 좋긴 좋구나. 끝까지 버리진 않네."
"당연하죠. 여기서 아는 사람 형 밖에 없는데."
형이 어깨를 다독이며 뭐라뭐라 하는데, 워낙 음악이 시끄러워 들리질 않는다.
"네? 뭐라고요?"
"나 간다고!"
"갑자기 왜요?"
"생각해 봤는데, 난 그냥 가는 게 맞는 거 같애."
"그냥 같이 놀아요. 여기까지 왔는데."
"그리고 너도. 나온 김에 그냥 형이랑 나가자."
"...네?"
형이 스테이지로 고개를 돌려 세운다.
"마하야. 진짜 적나라하지 않냐?"
"뭐가요?"
뭐가 적나라 하다는 거지? 여자들의 옷차림? 부비부비?
"그냥 다. 이 클럽. 이 세상에 여기만큼 인간의 계급사회를 목격할 수 있는 곳이 있을까?"
"..."
"남녀라는 성분 위에 자본주의 시스템이 합쳐진 곳. 클럽이 이런 곳이었구나."
뭐야 갑자기? 아까 입구에서 야한 얘기 하던 사람은 어디가고 철학자가 나타났어??
"왜 그래요?"
"가자. 쟤들도 어울려서 좋은 애들이 아닌 거 같애."
"..."
"물론, 이게 나니까 더 그렇게 느끼는 걸 수도 있는데."
"형. 저도 저 사람들 조금 불편한 건 있는데. 그래도"
"마하야 봐 봐."
사회과 출신의 관점에서 지켜본 결과 이곳은 세 종류로 계급이 나뉘어져 있단다.
"존나 심플해. 하층민. 중위계급 그리고 상류층으로 갈라져."
"..."
"당연히 우리 있던 곳은 존나 상류층인 건 알테고."
"하층민은 누군데요?"
"스테이지에서 갈 곳 없이 서있는 애들."
"형. 근데 표현이 너무..."
"말고 달리 뭐라 할 말이 없어. 저 쉬지도 못하고 계속해서 춤만 추는 애들 봐라. 안 힘들겠냐?"
확실히 아까 수빈 씨와 춤 출 때도 생각보다 에너지 소모가 있었다.
몸짓이 힘든 게 아니라, 치대는 사람들과 시끄러운 음악이 주는 스트레스가 크다.
신나는 것도 잠시지 금방 피곤이 몰려왔었다.
"봐 봐. 보여? 저기 기둥 뒤. 저기는 그래도 앉는 자리가 있는 거 같은데. 저기가 중위 계급. 저런 데도 못 앉는 애들은 이렇게 나와서 서서 쉬어야 하는 거야. 그러다 또 지루해지면 가서 춤이나 추는 거지."
"글쎄요. 그냥 여자 꼬시려고 그러는 거 아닐까요?"
"몇 명이나 여자를 꼬실까? 그나마 인물 좋고 스타일 있는 애들이 여자랑 있는데. 여기 들어오는 여자애들이 서서 춤이나 추는 놈들 만나려고 하겠어? 너 알어? 아까 우리 입구에서 이야기 했던 애들 강세준이 데려간 거?"
"네. 방에서 봤어요."
"걔네도 저기 구석진 자리에 있다가 강세준이 다가가서 몇 마디 하니까 바로 신나서 따라가더라. 남은 놈들은 찍소리도 못 해. 그 새끼들이 파워가 있다는 소리지."
"으음."
승우 형은 이곳은 돈이 힘을 갖는다고 말했다.
우리가 만난 형들도 국희의원이니 방송국이니 하던 걸 기억하란다.
"적나라한 세상 아니냐?"
"너무 염세적으로 보는 거 아니세요? 뭘 그렇게 까지 관찰하고 있어요?"
"마하야. 우리 있던 방 되게 조용했잖아. 크고, 넓고. 술 음식 이런 것도 잔뜩 깔리고."
"네."
"대체 누가 얼마를 쓰는 걸까. 그거 생각하다 보니까 이런 게 보이더라."
"어? 그러고 보니까... 우리도 내야 하나요? 뿜빠이?"
"하하하! 설마 이제와서 우리한테 돈 쓰라고 하진 않겠지."
원석이 형은 B방송국 아들. 세준이 형은 국회의원 아들이었다.
승우 형은 도형이 형도 잘은 몰라도 장관이나 판사 정도 집안은 될 거란다.
"어우야..."
"그 정도 되지 않으면 공무원으론 급이 안 맞을테니까."
"진짜 로열 패밀리네요."
"수빈 씨겠지."
"뭐가요?"
"오늘 계산하는 사람. 그리고 너를 부른 값을 낸 사람."
"..."
"아까 둘이 뽀뽀하더만."
"하하하... 뭔가 순간적으로 너무 예쁘길래..."
"예쁘긴 하더라. 근데 난 지금 수빈 씨가 저 중 젤 위험한 사람인 거 같애."
"왜요?"
"돈을 너무 썼어."
승우 형이 툭 치며 말했다.
"너를 보는데 그 돈을 쓴다. 뭔가 좀 이상하지 않냐?"
"음..."
"구마하 보려면 학교로 오면 돼. 지도 말하잖아 너 운동장에서 봤다고. 팬심이면 그때 다가가서 이야기 해도 되는 걸 여기까지? 그 돈을 써가면서?"
"으음."
"그리고 애들 반응. 아무리 지들끼리 웃고 떠들어도 수빈 씨 말이라면 세 놈이 껌벅 죽어."
"그건 저도 느꼈어요. 뭔가 수빈 씨가 말하면 형들도 좀 눈치를 보는 거 같은?"
"스물 일곱이 그 어린 애한테 휘둘린다? 보란 듯이 집안 자랑하는 놈들이? 아무리 예뻐도 그렇지. 그건 예쁘서 봐주는 게 아니야. 네 사람 중 한수빈이 젤 큰 힘을 가지고 있다고 봐야 돼."
와... 방송국 국회의원 판사니 장관이니 하는 사람들 이상이면.
"대통령 딸인가?"
"하하하! 우리나라 대통령이 한 씨는 아니잖아."
"그럼 세컨드의 딸?"
"하하하하! 그런 거면 저렇게 애가 당당하진 않겠지."
"근데. 형 그렇다고 절 뭐 어디다 팔아먹겠어요?"
"모르지. 근데 마하야. 넌 국민적인 인물이야. 어울려서 좋은 애들이 있고 아닌 애들이 있어. 모르는 인간이 잔소리 한다 생각하지 말고, 너를 보는 사회적인 시선에서 이야기라고 생각해."
승우 형의 이야기가 혜정이가 해준 말과 같은 뜻으로 들렸다.
사람을 의심해라. 아무나 좋다고 다 받아주지 마라.
"가자 마하야. 이건 널 여기까지 부른 입장에서 내가 책임을 지는 거야. 나도 이런 자린 줄 몰랐어. 아무리 봐도 아닌 거 같애."
진짜 가라고? 한수빈을 놓고 가라고? 그 미모를? 우리 똘똘이한테 엉덩이 치덕치덕 해주던 그 예쁘고 귀여운 사람을...?
"선택해라. 어떻게 할래?"
"형. 저 근데... 다시 방으로 가긴 해야 하는 게..."
"왜?"
"핸드폰 놓고 왔어요."
"오케이. 일단 난 나가 있을게. 30분 지나서 안 오면 그냥 간다."
"알겠어요..."
최근 자동차 관련 돈에 관한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다들 돈 무서운 줄 알아야 한다고 하는데, 나도 돈 무섭다. 무서운 만큼 쓰는 거 좋아하고.
그래도. 이런 자리에 그 돈...
대체 얼마길래? 마침 눈앞에 웨이터가 지나고 있어 물어보았다.
"저기..."
"네. 뭐 필요하신 거 있으십니까?"
"아. 저기 복도 끝 방에서 왔는데요."
"알고 있습니다. 무슨 일 때문에 그러십니까?"
"음. 그냥 호기심에 여쭤보는 건데, 아 나중에 외국에서 친구가 놀러온다고 해서."
"네. 말씀하십시오."
"저 안에 있는 술이랑 음식이랑 다 하면 가격이 어떻게 되나요?"
"천 이백 정도 나올 겁니다."
미친... 뭐라고...?
"아... 네..."
"필요하실 때 언제든지 연락해주십시오. 세팅해놓겠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하룻밤에 천 이백...? 아무리 내가 돈이 많아도 하룻밤 술자리에 천 만원 그 이상을 태우는 건 상식 밖의 이야기로 들린다... 완전 자동차 값이잖아...
수빈 씨의 마음과 행동들. 그리고 미친 술 가격.
으음... 흠...
"와 진짜 모르겠다."
모르긴 몰라도, 형 말대로 어울리기 편한 사람들은 아니다.
일단 룸으로 돌아왔다.
시끌벅적한 바깥 분위기와 다르게 안에선 웅웅거리는 우퍼 소리만 들려오고 있었다.
다들 어디 가고 수빈 씨와 도형이 형만 조용히 있는데, 수빈 씨가 나를 보자 얼굴에 화색을 띄며 일어서서 다가온다.
"마하 씨! 어디 갔다 와요!"
"아. 저. 그게. 승우 형 찾으러..."
"없는 사람은 없는 거지! 어서 앉자. 응?"
이렇게 예쁜데... 이렇게 날 애타게 찾는데...
흑흑 로미오와 줄리엣인가...
어떻게 말을 꺼내나 생각에 잠기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어?"
"왜?"
"..."
뭔가 희미한 소리가 들려온다.
바깥에서 들려오는 소음이 아니다. 이곳은 문이 닫히면 차단되듯 소리가 막힌다.
오히려 내공이 있기에 들을 수 있는 그런 작은 소리가...
뭐지...
"저 도형이 형. 화장실에 누구 있어요?"
"아니 없는데. 왜?"
"마하 씨. 왜 그래?"
"아니요. 그게 아니라."
그래 맞어. 이건... 분명 섹스 소린데...
"..."
뭔가... 불편하다... 한 사람이 울고 있다.
그것도 소리치면서 울고 있었다...
"저. 다른 형들은요?"
"나갔어. 편하게 마셔."
"마하 씨. 우리도 러브 샷~!"
"...같이 온 분들은요?"
도형이 형이 가만히 쳐다본다.
"왜?"
"아니. 그냥요."
"마하야. 너 지금 수빈이랑 같이 있잖아..."
형 말에 고개를 돌리니 수빈 씨가 당장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보고 있었다.
"왜 그래요?"
"...나랑 있는데 왜 다른 사람들한테 관심을 가져?"
아 씨발 진짜 모르겠네...
승우 형은 몰라도 혜정이가 날 망하게 할 애는 아니다.
의심하자. 의심하는 거다. 의심 해야 해. 무엇보다 저 소리가 너무 걸려.
"아니. 그냥 있던 사람들이 없으니까..."
"그게 왜? 아는 애들도 아닌 데 뭐 하러 신경 써."
"아. 형들한테 인사 좀 하려고."
"..."
도형이 형이 놀라며 물었다.
"인사라니 그게 뭔 소리야?"
"형. 저 가야돼요."
"왜!?"
그게 그렇게 놀랄 일인가?
수빈 씨도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왜!! 왜 가? 우리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미안해요. 근데 제가 대회가 있어서."
"무슨 대회? 마하야 너 대회 갔다 왔다며."
뭐야? 사람이 갈 수도 있지. 다들 왜 이래?
도형이 형이 따지듯 묻는 바람에, 나도 냉정하게 답할 수 있었다.
"다음 주에 대학실업팀 연맹 육상대회가 있어요."
"...그래서?"
"그래서라뇨. 훈련 해야죠."
도형이 형도 초조한 얼굴로 입술을 적신다.
"마하야. 너 세계 챔피언이잖아."
"네. 그래도 훈련은 해야죠."
"아니... 야. 그걸 왜 이제 와서..."
"마하 씨. 나 봐 봐."
한수빈이 고개를 붙잡고 돌린다.
"어어..."
"오늘 나랑 같이 있는 거 아니었어?"
"..."
절박한 표정이다. 천 이백이 날아가서 그런가?
그녀가 내 손을 가져다 자기 가슴 골 가운데 놓고 애절하게 말했다.
"오늘 나랑 같이 있자. 응?"
역시. 섹스각이구나.
근데 이렇게 따지면... 이건 승우 형 말이 맞잖아.
날 지금 이 술 값으로 때운다는 거니까... 그건 아니지.
"미안해요. 수빈 씨. 저 원래 시합 앞두고 여자들 잘 안 만나요."
존나 만나지만. 할 수 있으면 열과 성의를 가지고 하지만.
이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