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륜기로 가버렷-109화 (109/401)

< 자부심과 자긍심. 그리고 자격지심. (4) >

연세대학교 대운동장.

축구 잔디구장과 함께 정식 트랙 400m를 가지고 있는 이곳에 사람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공강 시간의 지루함을 달래고 싶은 이들. 구마하의 인기에 호기심이 발동한 이들. 그냥 뭐하나 남들 따라와 본 이들까지.

운동부부터 일반 학과까지 다양하게 모여있는 사람들 중엔 인근에서 훈련하던 야구부원들도 있었다.

"몸 봐라. 쟤 진짜 스무 살 맞냐?"

"옷 입을 땐 몰랐는데 저러고 있으니까 진짜 장난 아니네..."

보통 사람들이 구마하를 크고 건강하게 본다면, 선수들은 그의 근육 하나하나가 남다르게 비춰진다.

"세계 신기록을 그냥 낸 게 아니구나... 금메달 세 개가 그냥 얻어진 게 아니야."

"운동 몇 년 했다고?"

"기사 보면 고2 때 시작했다지?"

"고2 여름 때. 정확하게는 아직 2년이 안 됐을거야."

"진짜 괴물이네..."

체육관 서전트 이야기가 체대생들 가운데 유명세를 떨치고 있었다.

농구부원들 중에도 덩크를 못 하는 이들이 많은데, 그를 훌쩍 넘는 높이를 뛰어넘긴 구마하.

그가 사람들과 운동장을 돌고 있을 때 이현석 교수가 다가가 인사를 건넸다.

"반갑다 모두들. 내가 반드시 여러분들 대우관까지 3분안에 도착하게 해줄게."

대우관은 학교 정상에 위치한 건물로 까마득한 거리에 있어 자칫하단 쉬는시간 미친 듯이 달려도 지각을 면치 못하는 곳이었다.

교수의 농담에 팀원들이 시원하게 웃어보인다.

"마하야. 다음은 뭐 하려고 했냐?"

"기록 재보기로 했습니다."

"기록이라. 그럼 둘씩 네 팀으로 해볼까? 각자 어떻게 되는지 말해봐."

17초도 있고 14초라 하는 사람도 있었다. 대부분은 고등학교 때 체력장 기록을 언급하는지라 자신의 속도를 조금 과신하는 측면이 있었다.

"민구는?"

"마지막 경기에서 11초 나왔었습니다. 아마 지금은 잘해야 13초 나올까 말까 할 거예요."

"단거리 선수였구나."

"네. 교수님."

"좋아. 그럼. 운동장은 달렸고, 햄스트링 좀 풀어볼까?"

이현석 교수가 준비체조를 지시하는데, 구경하던 야구부 감독이 찾아와 우리도 같이하면 어떻겠냐는 제안을 건넸다.

"교수님. 달리기라면 우리도 자신있는 애들이 몇 놈 있는데? 어떠세요? 애들이 보고만 있자니 몸이 근질근질 한 거 같길래."

"하하! 좋죠. 어떠냐 너희들은?"

가을의 전설 최동원의 모교이기도 한 연세대 야구부.

명문중의 명문 선수들과 함께 한다는 말에 다들 기대감이 차오르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야구 부원도 세계 챔피언과 같이 뛴다는 말에 웃음을 지으며 운동장으로 모였다.

구마하와 함께있던 서재민과 고익범이 말했다.

"일이 커지는데?"

"뭐 어때. 재밌지."

"야. 야구도 다리 빠른 애들은 엄청 빨러."

준족이라 부르는 몇 몇 선수들이 있었다.

야구부까지 함께 몸풀기 운동을 시작하자 더 많은 사람들이 운동장에 모여들었다.

관객이 생기자 다들 조금씩 주늑이 들거나 긴장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몇 몇은 대중들의 시선을 즐기는 이들도 있었다.

구마하도 태연하게 자기 운동을 하고 있었다.

"와... 사람들이..."

"재민아 테니스도 사람들 많이 보지 않어?"

"많아도. 난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운동해본 적 없어."

"나도. 그냥 학교 친구들 몇 명만 찾아오지."

동기들이 한 목소리로 구마하에게 물었다.

"넌 올림픽 때 어떻게 뛰었냐...?"

"이런 상황에서 긴장 안 돼?"

"그냥 즐기는 거지. 뭐."

모든 순서를 마치고 달리기 시간이 돌아왔다.

둘 둘 짝을 맞춰 100미터 기록과 함께 훈련을 시작하는데, 이현석 교수와 야구부 감독이 구마하를 부른다.

"마하야 잠깐만 이리로 와 봐."

"네! 교수님."

"여기 야구부 감독님이신데."

"이 교수님. 우리 먼저 지나가다 인사 했었습니다."

"아. 그러십니까?"

"잘 지냈냐?"

"네. 안녕하셨어요. 감독님."

"그래. 마하야 나보다 이 친구랑 서로 인사해라."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구마하는 연세대 도루왕 김태석 선배를 만났다.

현역 4학년으로 군필자 양민구보단 한 학번 아래였다.

"니가 짝이 없는 거 같아서. 그래도 태석이가 우리 야구부에선 제일 빠르거든."

"반갑다. 안 그래도 인사하고 싶었는데."

"선배님 안녕하십니까. 05학번 구마하입니다."

"하하! 그래."

육상이 100미터 트랙을 전력으로 질주하는 거라면, 야구는 27미터 루를 달린다.

최단 거리 속도라면 단거리 못지않게 빠른 것이 야구였다.

"당연히 우리 태석이보단 빠르겠지만, 그래도 비교라도 해보자는 측면에서."

"야 살살해라. 우리 곧 춘계리그 시작이다."

"네! 선배님."

"구마하 너 이 자식. 오늘 기록 떨어지기만 해봐. 그땐 스키고 뭐고 다 그만두게 할 거야."

"교수님. 저 반년 만에 기록인데요. 조금만 봐주세요."

구마하도 오랜만의 트랙이었다.

자줏빛 우레탄 필드에 올라서자 아름다운 여인이 고환을 핥아주듯 전신에 짜릿함이 밀려온다.

땀과 도전이라는 두 단어가 주는 젊은 매력에 관객들도 웃음을 잃지 않는다.

하나씩 조를 짠 팀원들이 출발선에 자리하며 기록 훈련이 시작되었다.

"민구 선배님 파이팅!"

실력을 감안해 양민구가 야구부원 허준석과 출발대에 섰다.

구마하도 친구들과 지켜보며 말했다.

"궁금하긴 하다."

"뭐가?"

"민구 선배랑 야구부. 한쪽은 육상 선출이지만 운동을 쉬었고. 다른 한쪽은 계속해서 달렸지만 육상보단 다리가 느릴 것이고."

그 말을 곁에 있던 야구팀원들이 흘려듣지 않는다.

"크하하! 어이 구마하. 너 방금 뭐라 그랬냐? 지금 육상이 당연히 우리보다 빠르다 이 말이야?"

"네? 아하하! 아닙니다. 저는 그게 아니라."

"준석아! 구마하가 니가 진다고 그러는데!!"

"정말입니까? 야! 너 이 새끼!"

"아~ 아닙니다! 선배님! 그게 아니라!"

양민구가 함께있던 허준석에게 말했다.

"준석이 니가 2학년인가?"

"네."

"열심히 해라. 형도 최선을 다해서 뛸 거니까."

"네!"

일반인들의 그저 그런 속도에 지루함을 느끼던 가운데 그나마 흥미가 생기는 경기였다.

양민구와 허준석. 육상과 야구의 첫 대결.

이현석 교수가 스타트 건을 하늘 높이 들어 올린다.

"음. 준비."

준비 신호에 맞춰 양민구는 클라우칭 스타트를, 허준석은 스탠딩 스타트 자세를 취했다.

잠시의 정적 뒤, 청명하게 울리는 총소리.

양민구보다 허준석이 먼저 달려나갔다.

"쳇!"

스타트 훈련이 부족한 양민구의 반응속도가 뒤처진다.

20미터 지점까지는 확실히 허준석이 월등하게 앞서나갔다.

"준석이 파이팅!!"

"민구 선배 힘내세요!!"

운동하는 이들에게 승부욕은 떨칠 수 없는 숙명이었다.

가벼운 게임이어도 두 사람은 최선을 다해 달린다.

50미터 지점 양민구가 허준석을 거의 따라잡았다.

"오오!"

"우와! 오오~!"

"야구부도 진짜 빨러!"

그러나 역시 양민구의 운동부족이 여실히 드러나면서 허준석이 끝까지 속도를 지켜 100미터를 통과.

양민구도 숨을 몰아쉬며 패배를 인정했다.

"후우. 후우~! 와 준석아. 너 빠른데?"

"선배님도 대단하십니다. 한 3년 쉬었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하하하. 와~ 아하하! 이야아~ 진짜 숨 차라..."

오랜만의 전력질주에 양민구가 하늘 높이 숨을 몰아쉬었다.

그의 가슴 속 막혀있던 답답함이 풀리는 것 같앗다.

"후우~"

양민구는 가벼운 걸음으로 구마하와 신생 육상팀 앞에 서서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와 진짜 존나 빡세네. 하하하하!"

"몇 년을 쉬셨는데 그 정도면 대단하시죠."

"선배님. 엄청 빠르신데요?"

"멋있으셨어요."

"그러냐? 후우우~ 기록은 몇 초 나왔지?"

허준석이 11.62 양민구가 12.98이 나왔다고 조교가 전해줬다.

"그래도 13까진 안 떨어졌구나..."

"다시 훈련하셔서 11로 올리시면 되죠."

"그래. 다시 시작해야지."

마지막 메인 이벤트. 구마하와 김태석의 시합이 시작된다.

"마하야 형 복수를 갚아줘. 태석이 새끼 발라버려!"

"아 민구 형! 당연하지! 내가 세계 챔피언을 어떻게 이기라고!!"

"하하하... 선배님. 두 분 친하십니까?"

"그럼. 오래 알고 지냈잖아."

"저도 열심히 하겠습니다."

야구부원들이 경기 때나 하는 메인 응원가를 부르며 분위기를 띄운다.

신입생들은 소문으로만 듣던 연대 운동부의 에너지에 가슴이 들뜬다.

분위기가 달아오르자 구마하와 나란히 선 김태석이 볼멘소리를 시작했다.

"미치겠다. 아 이게 뭐라고 긴장 되냐고?"

"선배님.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야. 좀 봐 줘. 형 기죽이지 말고..."

"하하하!"

"그래도 영광이다. 세계 챔피언이랑 같이 뛰어볼 수 있어서."

"저도요. 아니. 저도 그렇습니다."

"야. 그냥 편하게 해. 어차피 너랑 나랑 부도 다른데. 뭐 그런 걸 따지냐."

"고맙습니다."

두 사람이 악수하며 출발선에 자리하자, 이현석이 야구부 감독에게 슬쩍 도발을 걸었다.

"감독님. 정 뭐하시면 한 10m 앞에서 출발하셔도 됩니다."

"크하하! 이거 웬만하면 자존심을 지키겠지만. 태석아. 교수님이 10m 앞에서 출발해도 된다고 그러시는데 어떻게 할래?"

김태석이 구마하를 보면서 묻는다.

"진짜 그래도 돼?"

"네. 그럼요."

"오~ 그럼 체면 따지지 않고. 한 20m는 안 될까?"

"하하! 선배님. 그건 저도 조금..."

"뭐 인마? 금메달이면 그정도 아량은 가질 줄 알아야지."

김태석이 걸어가자 후배들이 웃으며 난리를 부린다.

"하하하! 아 저 형! 쪽팔리게 뭐하는 거야!!"

"태석이 형! 정정당당하게 해요! 사람들도 보는데!!"

"시끄러! 니네가 얘랑 있어 봐!! 아우라가 틀려!"

구마하가 리스크를 감수하자 관객들의 반응도 뜨거워진다.

"에이. 아무리 금메달이어도 저러고 어떻게 이겨."

"이길걸? 100미터 세계 신기록인데. 야구 아무리 빨라 봐야 한국에서 이야기고. 그것도 대학레벨인데."

"아니지. 아까 야구 선수 뛰는 거 보니까, 초단거리는 훨씬 빠르더만."

100미터 대 90미터. 육상 세계 챔피언과 대학 야구 도루왕.

시범경기의 흥행이 뜨거워진다.

"구마하 파이팅!"

"마하야! 보여줘!!"

동기들의 응원을 받으며 구마하도 스타트 자세를 취했다.

클라우칭 스타트. 넓게 벌린 두 팔과 뒤로 뻗은 허벅지의 근육이 바짝 올라선다.

"우와..."

"진짜 장난 아니다..."

"다리 봐... 사람 다리가 무슨..."

명경지수의 마음에 물방울 하나 떨어지길 기다리는 감각으로 눈을 감은 구마하.

떨고 있는 건 앞서가 있는 김태석이었다.

"아 진짜 이러고 지면 개 쪽팔리는데..."

그 순간 이현석 교수의 총성이 울렸다.

긴장하던 김태석도 정신을 바짝 차리며 정면을 향해 힘차게 달렸다.

"우와아!!"

"오오오~!!"

뭐야? 누구를 보고 놀라는 거야? 나야? 구마하야?

이를 악물고 있는 김태석의 옆으로 트럭이 달려오듯 강한 에너지와 바람이 일어난다.

"하하하! 크하하하하!"

김태석은 천천히 속도를 줄이며 트랙에 멈췄다.

저 멀리 앞서가는 구마하의 뒷모습에 웃음을 참기가 어렵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50미터도 가기전에 역전하는 건 너무하잖아 후배 새끼가...

"씨발 진자... 하하하~!!"

황당함과 경이로움이 동시에 벌어지는 광경에 구경하던 이들도 감탄을 금치 못했다.

"미쳤네. 애시당초 게임이 안 되는 이야기잖아?"

"와... 저래서 월드클라스라는 거구나..."

"진짜 존나 빠르다..."

구마하도 골인 지점을 돌아서며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후우~!"

결승점에서 기록을 재던 조교들도 놀라며 다가왔다.

"마하야! 9.84!"

"그래요? 와 그래도 많이 줄지는 않았네요."

육상팀원과 야구부원들. 이현석 교수와 야구부 감독. 운동장에 있던 모두가 그에게 다가왔다.

"하하! 녀석. 기록은?"

"조교님이 9.84 나왔다고 하셨어요."

"느려진 거 아냐?"

"교수님. 저 작년 전국체전 기록이랑 똑같애요."

김태석을 비롯 야구부원도 놀라운 리액션을 가감없이 비춰준다.

"미친... 너 진짜 사람이냐? 태석이 형이 느린 게 아닌데."

"아니 뭐 이렇게 빠른 건데!!"

"와... 이게 9초구나..."

"하긴, 계산하면 1초에 10미터를 넘게 간다는 말인데, 9초면 그거를 더 뛴다는 거니까."

"1초에 10미터 이상... 허허허..."

"오늘 같이 뛰어주셔서 고맙습니다. 혹시 야구부원 중에 육상팀에 관심 있으시면"

그 말에 야구부 감독이 말을 싹둑 잘라버린다.

"아니! 내가 봤을 땐 우리가 육상팀으로 갈 게 아니라, 자네가 우리한테 와야 돼."

"하하하! 고맙습니다. 감독님."

"그나저나 진짜 대단하네! 어?! 금메달이 괜히 금메달이 아니였어!!"

이현석 교수도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어떠십니까? 80미터도 한번 해보시겠습니까?"

"뭐요? 하하! 교수님. 지금 우리 야구부 놀리십니까?"

어른들의 농담에 호기심과 도전정신이 발동한 야구부 몇 사람이 자기가 해보겠다며 손을 들고 나섰다.

"근데 교수님. 마하 또 뛸 수 있어요?"

"당연하지. 이 녀석 세 번 째 주특이 뭔지 다들 몰라?"

800미터 메달리스트이기도 한 구마하.

체력에 자신이 있기에 당당히 출발선으로 걸어 나갔다.

네 개의 트랙이 있어 구마하와 세 사람의 야구부원이 80미터 경기를 뛰었다.

웅성거리며 지켜보던 관객들도 박수를 쳐준다.

"야 이것들아! 너희들 이러고도 지면 오늘 추가훈련인 줄 알어! 크하하!"

"와... 우리 진짜 목숨 걸고 뛰자 얘들아..."

"20미터 핸디캡... 이러고도 지면 진짜..."

"근데 왠지 우리가 질 거 같지 않습니까...?"

구마하도 멀찌감치 떨어져 사람들을 보며 웃었다.

"와~ 이건 좀 먼데?"

"마하야!"

"어~!!"

"파이팅이다!"

친구들의 응원에 구마하가 주먹을 불끈 쥐어보이며 출발 자세를 갖췄다.

"자. 준비."

탕!

* * *

그날 밤 신촌에선 구마하와 야구부의 승부 이야기가 화두에서 끊이질 않았다.

"그래서? 80미터는 어떻게 됐어?"

"아슬아슬하게 구마하가 이겼어."

"대단하다..."

"아 씨! 나도 가볼 걸..."

"진짜 인간이 아니야. 괴물이야! 괴물!!"

남학생들이 승부에 초점을 맞춰 이야기를 나눴다면, 여학생들은 사람에 포커스를 집중한다.

"평상시 그냥 돌아다닐 땐 몰랐는데, 은근 멋있더라."

"그러니까. 무엇보다 몸이 진짜..."

"어으~ 야! 넌 몸이 뭐냐?"

"아니야. 그렇게 말하면 안돼. 너도 봤으면 우리가 말하는 게 뭔지 이해할 거야."

"진짜 장난 아니었어... 사람 몸이 무슨 영화 트로이 같았다니까?"

입소문과 함께 연세대 육상팀도 빠르게 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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