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륜기로 가버렷-103화 (103/401)

< 신촌에 내려온 운석 (3) >

감독님을 만난 뒤 시간에 맞춰 신촌 번화가로 갔다.

체육과 말고도 이미 수많은 학부에서 이집 저집 큰 자리를 잡아놓고 술판을 벌이고 있었다.

"와... 우리 형도 이런데 가게 있으면 좋겠다."

대학의 술문화 술파티. 어이고야 왁자지껄하네. 여긴 매일이 월드컵이고 올림픽이구나.

"여긴가?"

사체과가 모여있는 곳을 찾아왔다.

그래 가보자. 원숭이면 어떻게 뭐면 어떠냐.

어찌됐든 그것도 내가 걸어온 길임은 부정할 수 없는 거니까.

적어도 놀림 받는 건 아니니 나쁠 이유 없잖아?"

"어!"

"어~ 어! 왔다!"

"아... 안녕하세요."

아니다. 역시 모르는 사람들이 다짜고짜 아는 척 하고 다가오는 건 어색하다.

아직 정식으로 시작되지 않은 자리라 여러 신체 건강해 보이는 사람들이 테이블에 앉아 있는데.

"야. 구마하! 이쪽으로 와!"

"아니! 이리로 와! 우리랑 먹자!!"

"하하하..."

친구들이 보고싶다.

아웃사이더 중에서도 더 멀고 먼 변경백의 삶을 살던 내가 대학에서 이렇게 되다니...

반겨주는 사람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겠다.

모르는 이들이 친한 척 말을 걸지만 어딘가 마음 둘 곳이 없었다.

그러다 그냥 대충 자리 있는 곳을 찾아 앉았다.

"와~ 반갑다."

"아. 네."

"야. 말 놔. 우리 다 동갑이야."

"그래? 선배님도 있을 거 같아서."

"하하하! 누구 보고 그런 생각 하는 거야?"

"그냥 불특정 다수들?"

그래. 언제까지 아는 사람들 가운데서 어리광 부리며 지낼 거냐.

어쨌든 대학이다. 낯선 문화라도 상관 없어. 애초에 난 시작이 그랬던 놈이니까.

"반가워. 난 구마하라고."

"근데, 너 이름 무슨 뜻이야?"

"마하가 저기 불교 인도 이쪽에서 많은 이란 뜻이라고."

"오오~ 그래서 메달을 그렇게."

"이야~ 멋있다. 난 속도 마하인줄 알았는데."

"후후후 그래?"

애들도 이야기를 나눠보니까 그렇게 어색하진 않네.

쳇 이럴 줄 알았으면 여자애들 있는 곳으로 갈 걸.

하긴 첫날부터 여자 테이블 떡 하니 몸 던지는 것도 좀 그렇겠지?

"다들 1학년이야?"

"어."

"근데 사람이 그렇게 많지가 않다."

"아무래도 팀 있는 애들은 빼고 모이다 보니까"

"으음."

스포츠엔 개인종목이 있고, 팀 종목이 있다.

우리 학교도 농구나 야구 그리고 아이스하키와 축구부가 따로 운영이 된다.

과거엔 부가 있고, 학과는 자유롭게 선택했던 거 같지만, 요즘은 다들 사체과같은 큰 틀을 정해두고, 각자 진로와 운동은 따로 두는 분위기였다.

"너네는 뭐야?"

"어? 뭐냐니?"

"아. 종목이 뭐냐고."

"난 2학년 때까지 기계체조 했어."

"오오~ 오오! 그러네. 어깨가 우와~"

"난 골프."

"난 중학교 때까지 테니스 했었는데, 고등학교 와서는 그냥 그만뒀어."

여기서도 육상 선수는 나 하나 였다.

많은 애들이 그냥 체육대학으로 수능 치고 들어온 애들인데, 그래도 다들 각자 하던 운동은 따로 있었던 거 같다.

"그렇구나."

"아마 사체과에서 지금 국가대표 선수는 너 하날 걸?"

"선배들로 올라가면 좀 있지 않을까? 농구부나 야구쪽은"

"아. 그 선배님 있다. 박상택."

"음? 그분은 뭐하시는데?"

"스키."

"진짜? 스키 선수가 계시다고?"

"맞다. 마하 너 스키도 시작했다고 그랬지?"

박상택이라. 애들 말에 의하면 올림픽은 못 나갔어도 국가대표까지 갔던 인물이라는데, 정준이 형도 알고 있을까? 가깝게 지내면 좋을 거 같다.

시간이 지나 선배님들과 교수님들이 찾아오셨다.

익범이 말대로 다들 시니어가 등장하자, 방금까지 있던 훈훈하고 즐거운 분위기는 사라지고 엄청 경직되고 굳는 모습을 보여주길래 나도 일단 흐름에 맞춰 일어나 인사를 건넸다.

"오오~ 왔구나!"

"이야 반갑다!"

"네. 안녕하십니까. 구마하입니다."

"야 됐어. 뭐하는 거야. 편하게 해."

"네...?"

"앉어. 앉어. 야 비켜 봐. 나도 여기 앉자."

뭐지? 대체 뭐지?

아까 그 사람들은 요 자 쓰지 말라고 딱 잘라서 말하던데, 그게 전부가 아닌가?

반반씩 마음을 놓고 사람들을 보고 있었다.

신입생 환영회가 시작되고, 다들 자리에서 일어나서 인사를 하는데, 나는 어쨌든 나다보니까 큰 박수갈채를 듣는다.

"네. 05학번 구마하입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처음의 긴장감과 다르게, 생각보단 편하게 대해주는 사람들도 있지만.

역시, 선배는 선배다 하고 무게감을 잡는 분들도 있었다.

무엇보다 상대가 내가 되니 저쪽들도 행동이 바뀐다.

"마하야."

"네. 선배님."

"안 그래도 우리 아버지가 너 우리 학교 온다니까 만나면 사인 좀 받아오라고 하던데."

"아... 제가 뭐라고..."

"야. 누구 종이 없냐?"

저쪽 옆 테이블에서 동기들한테 큰 소리로 무게를 잡던 분이 다가와 사인을 부탁하셨다.

늘상 사람들한테 해주던대로 영어로 K를 좀 멋들어지게 써서 건네드렸다.

"뭐야. 이거 진짜 니 사인이야?"

"네... 저 실은 뭔가 사인이라고 할 걸 못 만들어서. 처음부터 이렇게 하고 있었어요."

"하하하! 무슨 안전마크도 아니고. K가 뭐냐? 좀 제대로 만들어 봐! 멋있게."

"어... 별로세요?"

"하하하! 아니야 멋있어. 고맙다!"

그렇구나. 이분들도 상대가 나라서 다른 애들같이 강압적으로 못 대하는 거다.

신기하네. 사람 따라 대우가 달라진다라...

적어도 무시받는 상황은 아니라 다행이긴 한데...

"마하야. 교수님이 부르신다."

"네? 어. 네."

교수님들이 잘 왔다고 인사해주시며 술잔을 채워주셔서, 고개를 꺽고 마시고 있는데.

방금 나한테 사인받은 선배가 종이를 여러번 접어 주머니에 넣으며 다른 테이블로 건너가는 것을 보았다.

"어쭈. 이 새끼 봐라? 선배가 주는 잔을 거부해?"

"아... 아닙니다!"

"야. 거기 글라스 줘 봐. 너 원샷."

"죄송합니다!!"

"죄송할 건 없고. 쭉. 그렇지 쭉쭉 마셔! 크하하하!"

"어어... 우후..."

이거 참. 난 어떻게 행동해야 되는 걸까...

모르겠다. 뭐 어떻게든 되겠지. 입학 첫날부터 그런 걸 고민해.

교수님들이 올림픽 때 경험 좀 알려달라고 하시길래, 이런 저런 걸 말씀드리고 있는데.

또 한 차례 딸랑딸랑 벨소리가 울리며 여기저기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

"오셨습니까 선배님!!"

뭐야? 이번엔 또 누군데 저렇게 난리야? 하는 시선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한 무리의 신체 건장해 보이는 사람들이 다가오는데, 그중 한 가운데 있는 사람에게서 은은한 흰 빛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

"교수님. 늦어서 죄송합니다."

"어. 그래 상택이 왔구나. 애들이랑 얘기 잘 하고."

"네."

흰 빛이라. 3학년 박상택. 으음.

"이봐. 마하도 너무 우리가 붙잡는 거 아닌가?"

"그러게. 이 교수 못 온다고 좀 불러 봤는데, 너도 그만 가서 사람들 사겨라."

"네. 고맙습니다."

자리를 옮겼다.

그러고보니 동계체전 때 내 시합에 정신없어 다른 선수들 경기를 잘 못 챙겨 봤는데, 이정도 내공이면, 분명 메달 선수 중에 하나 아니었을까?

"저 선배님."

"음? 뭐야? 왜?"

"안녕하세요. 저 05학번"

"됐어. 너 모르는 사람들 없으니까 괜한 짓 하지마라."

"..."

아니. 뭐 딱히 나 대우해줘, 우쭈쭈 해줘 이런 건 아닌데...

그래도 이렇게 딱 잘라서 거절하니 좀 뻘쭘해지네.

박상택 선배와 같이 있던 사람들도 뭐라고 한다.

"야. 너 뭐야 인마?"

"뭐가. 너네 얘 몰라?"

"하하. 이 새끼. 마하야 앉아라."

"네."

"형 술 한잔 받어. 형도 육상 출신이야."

"아 정말요?"

"그래. 아이고 우리 육상의 자랑. 앞으로 모르는 거 있으면 형한테 많이 물어 봐."

"네!!"

그러자 박상택 선배가 한 마디 한다.

"정말'요'라."

나른하던 술잘리에 차갑게 눈뭉치가 하나 던져지는 기분이었다.

"죄... 죄송합니다."

"..."

육상부 출신이라는 선배님도 박 선배를 보며 말했다.

"야. 너 뭐해?"

"뭐가? 내가 틀린 말 했어? 얘는 신입생 아냐?"

"그만하지. 좋은 자리에."

"그리고 누가 누구한테 뭘 물어봐. 질문은 니가 얘한테 해야 되는 거 아냐?"

"뭐?"

"그렇잖아. 구마하는 메달리스트고, 양민구 너는 그냥 대학 선순데. 니가 얘한테 뭘 알려줄 수 있어?"

"..."

대학 첫날 하나는 확실히 알았다.

박상택은 나를 좋게 볼 마음이 없다. 아니. 나도 이런 사람과는 가까이 지낼 수 없을 거 같다.

"이 새끼가 진짜 미쳤나..."

양민구 선배가 주먹을 불끈 쥐는데, 주변 다른 분들이 교수님들도 계시는 자리라면서 싸움을 말렸다.

박상택은 그럼에도 하나 흔들림 없이 나를 보며 말했다.

"어이 구마하."

"...네."

"선수면 선수고 학생이면 학생이다. 알겠냐?"

"..."

"하나만 하는 건 어때? 괜히 여기저기 기웃거리지 말고."

이건 시비잖아...

받아쳐? 아니면 그냥 넘겨.

이 사람 그거네. 육상이 자기네 영역 기웃거리지 말라고. 돌려서 까는 거 아냐.

정준이 형에게 들었던 이야기가 있었다.

모든 스포츠와 종목은 다 각기 다른 배경에서 출발한다.

그 중 육상같이 고대부터 몸뚱아리만 건강해도 할 수 있는 운동이 있는가 하면, 어떤 종목은 애초에 집에 돈이 없으면 시작을 못 하는 운동들이 있다.

펜싱이나 스키가 약간 그런 식이었다.

특히나 기업까지 달려들어 금메달을 육성중인 펜싱과 다르게, 정부나 기관 등에서 손을 놓고 있는 스키 같은 경우엔 더 그런 고립된 상황에서 자기만의 세상을 쌓아올린 도련님들이 많은데.

"죄송합니다."

"됐다."

박상택이 그쪽이구나. 자기 프라이드가 강한 사람이야.

어느정도 정준이 형을 겪어봐서 안다.

친하게 대해주던 형도 내가 정식으로 스키를 타겠다 말하자 조금의 거부반응을 일으켰는데. 다른 이들은 오죽하겠어.

"씨발새끼 저거."

"야. 민구야. 갔잖아."

"어후..."

"죄송합니다. 괜히 저 때문에..."

"야. 됐어. 술이나 마셔."

"네."

"어후... 마하야. 넌 술 잘 마시냐?"

"아직은 잘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크게 자리를 많이 가진 편은 아니라서."

"하긴 운동만 했겠지! 그러니까 메달을 땄지. 안 그래?"

"고맙습니다."

"하하! 아무튼, 별 이상한 새끼가 하나 끼어들어서 분위기를 망쳤는데, 야 나 너 메달 딸 때 진짜 울컥 했잖아."

"감사합니다 선배님."

선배들과의 자리를 통해 한 가지 의문을 해결할 수 있었다.

"아까 걘 상택이라고. 스키 선순데. 애가 현역 부심이 조금 강해."

"네. 저도 그래서 인사 드리려고..."

"씨발놈이. 학교도 잘 안 나오는 새끼가 왜 와서 지랄이야..."

"마하 너도 앞으로 학교 다니면서 알겠지만, 선수는 보통 학생이랑 조금 틀려."

"어떻게 다른가요...? 아니. 다릅니까?"

"후후후. 어떻게 다르냐라."

다 같은 대학생이지만 선수는 학생의 영역에서 벗어난다.

말 그대로 선수의 삶을 이어가기 때문에 교수님들도 어느정도 인정하고 수업을 빠져도 용인 되는 부분이 있다.

"어떻게 보면 고등학교 선수와 크게 다르지 않은 삶인 거 같네요. 아니. 같습니다."

"후후후. 마하야. 적어도 이 자리에 있는 형들은 그런 거 따지지 않으니까. 편하게 해."

"그래! 야. 누가 너한테 뭐라고 그래! 어? 우리 육상의 보물을!"

"..."

대학. 진짜 뭔가 기대와는 너무 다르다.

난 그냥 대학생만 되면 그때 그 옆방 원룸 커플같이 그러고 살 수 있는 줄 알았는데. 맨날 섹스만 하고 앙앙거리는 일상이 쉬운 게 아니었구나.

어쨌든 선수와 학생. 육상과 스키. 두 개의 양립하기 어려운 조건을 해내야만 한다.

뭐 어떻게든 되겠지.

쓰리섬도 했는데 그거보다 어렵겠어?

다음 날. 지나가다 익범이를 만났다.

"여!"

"어? 마하야."

"운동가냐? 오늘은 체육복이네."

"응. 오늘부터 바로 훈련 시작이라서. 너는?"

"나도!"

뭐가 됐든 운동을 해야 된다는 현실은 바뀌는 게 없다.

하던 대로 가는 거다.

마치 어떻게 해도 변할 수 없는 이 얼굴같이.

그냥 가지고 갈 건 끌어안고 잘 해내면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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