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륜기로 가버렷-88화 (88/401)

< 그가 특별한 이유 (9) >

"뭐야? 왜 안 받어?"

밖으로 나와 정석이한테 통화를 걸어보는데. 태윤이와 남수가 따라왔다.

"어이. 구마하."

"야. 이 새끼 전화 안 받는데?"

"당연히 안 받지. 손님 많을 저녁 시간에 일하는 놈이 무슨 전화를 하냐?"

"...뭐냐? 니가 전화 왔다며?"

"구라야."

이건 뭔...?

이 새끼 취했나? 그런 생각을 하면서 태윤이를 보고있는데, 녀석이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문다.

"..."

저건 또 뭐하는 거야? 하는 시선으로 보고있자, 태윤이가 칙~ 담배 끝에 불을 붙이더니 쓰읍 하며 숨을 빨아들이는데.

"콜록! 컥! 쿨럭!!"

"너 뭐하냐 지금...?"

"아. 옛날에 한번 펴 봤을 땐 이정돈 아니었는데. 존나 독하네."

남수도 웃으면서 태윤이 등을 두드려준다.

"그러니까 뭔 담배야 담배는."

"뭐 어때? 내 돈 아닐 때 사봐야지."

"야. 니네 지금 무슨...?"

"어이 병신."

태윤이의 눈빛이 더 없이 차갑게 느껴진다.

"내가 병신이냐? 필 줄도 모르는 담배 산 니가 병신이지."

"아니. 넌 병신이 맞어."

"남수야. 얘 왜 갑자기 시비냐?"

"후우..."

"병신? 뭐하냐? 부르면 대답 좀 하지?"

"야."

"넌 어떻게 올림픽까지 나갔다 온 놈이 변한 게 없냐? 메달은 왜 땄어? 남들이 육상 영웅 이라니까 니가 진짜 영웅인 줄 아냐 병신아?"

"..."

태윤이가 진지하게 시비를 거는 바람에 나도 표정에 여유가 사라진다.

"야. 김태윤."

"뭐 병신아."

"죽는다. 적당히 해라."

"좋아 죽여. 싸우자. 남수야 너가 사진 찍어서 언론에 제보 좀 해라."

"야."

"마하야. 태윤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

"몰라! 미친새끼 또 혼자 술 쳐먹고 취해서 지랄하나보지!!"

태윤이가 다시한번 담배를 입에 가져가 무는데, 여전히 적응 안 되는 독한 연기에 쿨럭쿨럭 기침을 해대고 있다.

"또라이 새끼 피지도 못하는 담배는 왜 사가지고."

"뭐? 너 돈 많잖아. 수십억 있다고 애들 불러 돈 지랄 하는 놈이 이깟 2000원 아깝냐? 알았어 이건 내가 줄게."

"이 새끼가 진짜!!"

"마하야!"

남수가 말리기도 전에 태윤이 멱살을 쥐어잡았다.

그래도 녀석은 하나 움츠리는 것 없이 당당하게 쳐다본다.

"하하! 이 새끼 힘 좋네"

"이 씨발 너 뭐하는 건데 나랑 지금!"

"어이 구마하. 몸만 키우지 말고 제발 속도 좀 키워. 어?"

"이게 진짜 끝까지..."

"야! 너도 그만하고. 구마하! 너도 주먹 안 내려!"

"어이 김태윤. 너 지금 채민서 그년 때문에 그러냐?"

"그래. 거기서 꼭 그렇게 애 개쪽을 줘야 됐냐?"

"씨발놈이 알면서!"

"야!!"

남수가 나를 강하게 밀쳐 떨어트렸다.

남수는 태윤이를 돌아보면서도 화를 낸다.

"너도 잘 말 한다면서 왜 자꾸 애를 자극하는데!!"

"병신이니까."

"아 진짜!"

"구마하. 넌 오히려 운동하기 전이 낫다."

"..."

"새끼야. 왜 이렇게 병신이 됐냐... 어?"

"아 모르겠다. 니들 맘대로 해라..."

남수가 한발 물러나며 싸울 거면 제대로 싸우라는 듯 판을 깔아줬다.

"대신, 한 놈이라도 주먹은 안 돼. 그건 지켜. 알겠지."

남수를 한번 돌아보고, 다시 김태윤과 시선을 마주쳤다.

"갑자기 왜 지랄이냐? 너 걔 좋아해?"

"아니. 그래도 싫어할 이유는 없지. 난 병신이 아니니까."

"이 개새끼가!"

"구마하. 김태윤 건들면 그땐 나도 가만 안 있는다고 했어."

"이 씨발 왜 나한테 지랄인데, 이 새끼가 자꾸 시비를 걸잖아. 왜 나한테만 뭐라고 그러냐고!!"

두 녀석을 보며 소리를 높였다.

그러자 김태윤이.

"병신이니까 그러지."

"야. 말리지 마라. 나 오늘 이 새끼 죽이고 선수 때려친다!"

"구마하. 운동하기 전의 넌 적어도 병신은 아녔어."

"..."

"그때 너는 어떻게든 바뀌어 보려고, 노력하고 발악하고, 진짜 옆에서 응원을 해주고 싶은 놈이었다."

우두커니 있자 이번엔 태윤이가 내 멱살을 잡았다.

"야. 이게 지금 졸업여행이냐? 니 팬미팅이지. 저 씨발, 안에 있는 애들 어떻게든 너랑 이야기 좀 해보고 점수 따고 싶어서 알랑방귀 뀌는 거 안 보여?"

"후우..."

"대스타? 육상영웅? 좆까. 넌 그냥 병신이야. 이만큼 성장해도 아무리 돈을 수십억 벌어도, 여전히 기집애 눈치나 보고 있으니까."

"알았으니까 이거 놔..."

"너랑 이혜정이랑 둘만의 무슨 이야기가 있는지 몰라. 알고 싶지도 않고. 근데, 너 아까 걔한테 지랄하고 난 다음부터 혜정이가 웃지를 않어. 그건 아냐?"

"..."

"행사장에서 니 개소리에 남들 다 웃을 때도, 걔는 멀리서 너랑 채민서 눈치만 보고 있었다고. 이 병신아..."

태윤이가 퍽 하면서 날 밀쳐내고 다시 웃음소리 가득한 식당으로 돌아간다.

한숨과 함께 고개만 숙이고 있으니 남수가 다가와 말해준다.

"마하야... 화 풀고."

"...니가 젤 나쁜 놈이야 새끼야."

"왜? 내가 뭐?"

"저 새끼 멱살 잡는 건 안 말리고 왜 나만, 씨..."

"후우우... 진짜 병신 아니냐...?"

짜증은 나는데, 태윤이 말이 틀린 게 아니라 한숨만 흘러나온다.

"대가리 좋은 새끼가 지랄하니까 존나 할 말이 없네..."

"무엇보다 화내니까 무섭다."

"담배는 뭐냐? 왜 샀어 저런 걸?"

"하하하... 우리가 담배만 샀겠냐..."

"그럼?"

"혹시 몰라서, 콘돔도 하나씩 샀어..."

"미친놈들 지들 돈 아니라고, 아니 대체 누가 누구더러 병신이라는지."

허무한 웃음과 함께 마음의 화가 사라지는 것 같다.

"그러게. 남수야. 이만큼 성장해놓고, 난 왜 아직까지 과거에 사로잡혀 있을까..."

"아픔이 그렇게 쉽게 떨쳐지나."

"혜정이가 눈치를 보더라고...?"

"그래. 저녁도 먹는 둥 마는 둥. 술도 깨짝깨짝 거리고. 아까 스키 탈 때도 처음 잠깐 그러더니 그냥 한쪽에 가서 앉아 있었어."

"..."

"아무튼, 들어가자 마하야. 나 추워."

"그래."

다시 식당으로 돌아오니 익현이가 중심이 돼서 떠들고 있는데, 남자애들 몇 명만 반응해주고, 나머지는 각자 자기들끼리 이야기 하거나 심드렁하게 과자나 먹고 있다.

태윤이는 쳐다도 안 보고, 채민서도 눈치 껏 주변과 어우러지고 있지만, 처음보단 텐션이 많이 떨어져 보인다.

그리고 혜정이가 정말 애들이 말한대로 당장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있었다.

민혜나 선아도 혜정이한테 너 어디 아퍼? 라며 묻는데, 으응 아니야 라며 고개를 가로 젖는다.

"혜정아."

"왔어. 정석이랑 통화 했어?"

"어. 뭐 별 거 아니고."

자리에 앉으며 주변을 슥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저기. 아까 민서가 물어봤던 체육이 우리 학주 아닌가?"

"응?"

그러자 채민서도 고개를 들고, 친구들 다들 우리를 주목한다.

익현이를 부르며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익현아. 너 알지? 그 막 성격 존나 괴팍해서, 대머리 아저씨. 애들 수업할 때 앞에서 바지 이러고 막 팬티 만지던."

"하하하! 야! 넌 여자애들도 있는데 갑자기 뭐하는 거야?"

"아니. 그 인간이 그랬다니까? 민서가 말한 게 그 사람 아냐?"

그러자 채민서도 갑자기 기운이 살아나며 목소리에 힘이 실린다.

"맞어! 개변태! 너 기억 나?"

"지금 생각해보면 완전 미친 인간이지. 그거 다 교육부에 찔렀어야 되는데."

"존나 짜증나는 인간이야. 아침에 막 이러고 교문에서 여자애들 귀걸이 했다고 귀 만지고!"

"어어~! 야 하지마 소름 돋아!"

"하하하! 진짜 감독님은 매너 있는 분이자."

다른 친구들은 모르는 우리 중학교 때 몇 몇 황당한 선생님 썰을 풀며 우스꽝스런 자태를 보여주었다.

그러자 다들 언제 그랬냐는 듯, 웃고 떠들며 다양한 리액션을 보여주는데.

혜정이도 배꼽을 잡으며 웃고있고, 태윤이도 일어나서 지 앞에 있는 과자들을 주워 던지며 소리친다.

"아 저 미친놈. 그만 좀 해. 애들이 웃어주니까 적당히를 몰라."

"땡큐. 안 그래도 과자 먹고 싶었는데. 야. 몇 개 더 던져 봐."

"오~ 구마하. 잘 잡는데? 여기서 던지면 받아 먹을 수 있냐?"

"해 봐. 컴온!"

태윤이와 둘이 장난스레 과자도 받아먹고 농담도 나누자, 분위기가 살아났다.

어떻게 시간이 가는지 모르게 웃고 떠들었던 거 같다.

9시가 지나자, 감독님도 오셔서 말씀하셨다.

"얘들아. 난 먼저 가서 잘테니까. 졸린 사람들 알아서 쉬고. 그리고 마하 너도 적당히 놀아라. 여기 다 치워놔야 한다. 너네들."

"네."

"선생님도 같이 술 마시면 안돼요?"

"아서라. 아까 듣자니 체육선생은 다 변태 이런 얘기 하던데. 내가 어떻게 너희랑 어울리냐."

"선생님! 그거 마하가 그랬어요."

"뭐? 구마하 너 이자식."

"아니에요. 그거 민서가 한 말이에요."

"야!! 내가 언제!!"

* * *

"자. 봐 봐. 태윤아. 담배는 그렇게 피는 게 아니고. 이렇게 쓰읍~"

"어. 어어~ 그렇게~"

친구들이 우르르 담배 피우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

태윤이가 익현이나 다른 친구들한테 흡연을 배우는데, 옆에서 지랄지랄 해주고 있다.

"끊어 새끼들아. 시작을 하지마."

"쓰읍~ 으음. 오~ 다르네. 확실히 부드럽게 넘어가는데?"

"그치?"

"어이고 뭐 좋은 거라고... 열심히도 배운다..."

주로 남자 친구들만 있는 자리에, 채민서나 다른 여자애들도 한 두명 따라나와 야 너네 담배 펴? 이러면서 다가온다.

"우리도 하나만."

"오~ 여자애들과 흡연이라니."

"불량한 인간들. 야 난 들어간다. 꽁초 아무데나 버리지 말고. 여기 지금 우리만 쓰고 있으니까."

"알았어. 걱정 마."

"어이. 구마하?"

태윤이가 부르길래 돌아보니, 녀석이 씩 웃으면서 말한다.

"그냥 버리면 나중에 니가 다 치우냐?"

"내가 다른 놈들은 몰라도 너는 여기 버리고 간다."

"병신."

"뭐래 미친놈이."

서로의 눈을 보면서 마음을 알 수 있었다.

새끼. 이제 좀 만족하냐?

그래. 병신아.

애들을 피해 다시 식당으로 가는 길.

복도 가운데를 지나는데 타다닥 경쾌한 발 소리가 따라온다.

고개를 돌려보니 채민서가 웃으면서 다가오고 있었다.

"마하야~!"

"왜?"

"그냥. 불러봤어."

"뭐야. 가서 담배 펴. 나 신경쓰지 말고. 괜찮으니까."

"으응. 그냥. 아까 고맙다고..."

"뭐가?"

"내 이야기 들어준 거."

"고마울 것도 많다. 내가 뭐라고."

"그치만. 너 오늘 하루종일 불러도 계속 외면하고..."

"내가 언제? 일 때문에 정신 없어서 그랬겠지."

대충 둘러대며 돌아서는데 민서가 붙잡았다.

"저기. 그리고. 그... 나도 전부터 너보면 이 말을 해주고 싶었는데."

"..."

"예전에 내가 너한테... 했던... 그 장난은..."

"야."

보다 더 소중한 사람들을 위해 미움을 의식하지 않을 뿐. 그때의 아픈 감정을 완전히 떨쳐버린 게 아니다.

주변에 다른 친구들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가볍게 숨을 들이마셨다.

"응. 말해."

"야. 채민서."

"응..."

170정도? 혜정이나 다른 애들이랑 있을 땐 꽤 크구나 싶었는데 이렇게 앞에서 보니까 얘도 그냥 작은 여자애구나.

그래 김태윤 이 대가리 좋은 놈아. 니가 맞다.

얘가 뭐라고 자꾸 사로잡혀 있냐. 내가 이제 여자가 없는 것도 아니고...

"그런 거 신경쓰지 말고. 온 김에 재미나게 놀아. 와줘서 고맙다."

"그. 그치만! 나 너한테 미... 미안하다고.."

"됐어. 이제와서 그러지 말고, 아까 스키 잘 배웠어?"

"..."

"다치지 마라. 가서 자려면 자고, 더 마실거면 마셔."

"마... 마하야?"

복도 중간에서 채민서를 놓고 돌아섰다.

저벅저벅 걸어오니 식당 앞에서 쓰레기를 버리려던 혜정이가 우두커니 멈춰 있다. 우리 이야기를 들었는가 은은하게 지어보이는 미소에 나도 그냥 피식 웃어 보였다.

"그래. 잘 했어."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고개를 끄덕끄덕 해주는 혜정이 마음에 거리감을 풀며 다가가 같이 쓰레기를 주워들었다.

"정리하고 가서 자려고?"

"응."

"아까는 화내서 미안..."

"됐어."

주섬주섬 이것저것 분리수거를 하고 있으니, 지가 한다고 내일 대회 있으니 가서 쉬라는데.

"됐어. 진지한 정식 시합도 아닌데, 그 정도는 무리없이 탈 수 있어."

"정석이는 왜 전화 했데?"

"아. 그거. 별 거 아냐."

"혹시 이제라도 오고 싶다고 그런 거 아니고?"

"음..."

정석이. 우리 친구... 그러게. 정석이 너무 보고싶다.

"혜정아. 너네 올 때 얼마나 걸렸어?"

"별로 안 걸렸지? 차 막히는 거 계산해서 2시간?"

홍천에서 성남이면. 이 시간엔 차가 없으니까.

"마하야. 아까 애들이랑 나갔을 때 혹시 싸웠어?"

"아니. 왜?"

"그냥. 태윤이 먼저 들어오는데, 분위기 안 좋길래."

"그놈이 내 멱살은 잡았지."

"진짜! 왜?"

"몰라. 미친놈이 취했나 갑자기 지랄이데. 그런 주제에 무슨 담배는 핀다고... 대학교 가면서 뒤늦게 방황이 시작되나."

"흠."

"혜정아. 나 잠깐만 나갔다 올게. 혹시 애들이 물어보면 그냥 감독님이랑 미팅 갔다고 좀 전해주라."

그러자 이혜정이 주먹을 쥐어 퍽! 진심어린 펀치를 옆구리에 찔러 넣는다.

"...왜 때려?"

"야. 내가 무슨 니 부인이냐? 그런 걸 왜 나한테 시켜? 니 친구들한테 말하고 가!"

"하하하!"

혜정이도 다시 본래의 기분으로 돌아왔다.

역시 이 좋은 분위기를 우리끼리만 보내는 건 아닌 것 같다.

이건 우리의 돌아올 수 없는 마지막 졸업여행이니까.

연수원을 나와 지나가는 택시를 붙잡았다.

"기사님. 성남이요. 빨리 가주세요."

"어이고 이 시간에 장거리를... 어라? 혹시?"

"네. 구마하 맞습니다."

"하하하! 아니 이게 누구야! 반가워요. 악수 한번 부탁해도."

"그럼요 물론이죠. 기사님 부탁 좀 드릴게요. 다시 돌아올 거니까요. 괜찮으시죠?"

"거기다 왕복이라고? 그럼 나야 좋지! 갑시다 성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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