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륜기로 가버렷-83화 (83/401)

< 그가 특별한 이유 (4) >

무거운 마음으로 교수님과 통화를 이어가고 있었다.

"네. 네... 아니요 그런 건 아니고요. 네..."

"마하야 나 좀 바꿔줘 봐."

"네... 네 알겠습니다. 네. 감독님 바꿔드릴게요."

대충 분위기로 어떤 말이 오고갔는지 짐작이 가시는가, 한 감독님도 전화를 받으며 진중하게 목소리를 바꾸셨다.

"아니 그런 게 아니라. 그냥 행사라고. 아 내가 뭘 마하를 팔어 팔긴! 무슨 말을 그렇게 해요!!"

생각지도 못한 거센 저항에 감독님이나 나나 당황하고 있었다.

"서울요. 네 알았어요. 바로 갈게요."

통화를 마치며 감독님이 참았던 한 숨을 몰아쉬신다.

"오라고 하세요?"

"후우우... 참 나 진짜. 너 저녁에 약속 있냐?"

"친구들 만나기로 한 거 말고는 없어요."

"그럼 신촌 좀 들렸다 가자."

"네."

* * *

연세대학교. 이현석 교수님의 사무실.

"아무소리 하지말고 있어. 형님이랑은 내가 얘기 할 테니까."

"네..."

쭈뼛쭈뼛 똑똑 문을 두드리자 교수님이 다가와 열어주신다.

"네. 지금 왔네요. 두놈 다."

누군가와 통화중이셔서 따로 소리를 내지않고 조용히 고개를 숙여 인사를 드렸다.

교수님도 인상을 잔뜩 구긴 얼굴로 소파를 가리키며 전화를 이어가셨다.

"네. 그래도 선생님. 저랑 상의를 하셨어야죠."

천병욱 대사부님 이시구나. 모든 육상인들의 지주와도 같은 분한테 감정을 드러내다니. 생각보다 교수님의 심정이 불편하신 것 같다.

"알겠습니다. 이야기 해볼게요."

통화를 마치고 맞은편에 앉아 감독님과 나를 번갈아 보셨다.

"상률아."

"네. 형님."

"그리고 마하 너."

"네..."

"이놈들아. 니네는 생각이 있는거냐 없는거냐? 머리는 왜 달고 다니는 거야? 갑자기 무슨 스키야 스키는...?"

"아니. 그런 게 아니라"

"무엇보다 너 이놈의 자식..."

"..."

"형. 애한테 왜 그래요?"

"왜 그러긴 뭘 왜 그래!! 이놈이 아직도 니 선수 줄 알어! 얜 이제 우리 학교 소속이야!! 그런데 어떻게 나한테 한 마디 상의도 없이!!"

스키라는 운동이 얼마나 위험한지 모르냐며 한참을 혼나야 했다.

"난 도무지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된다..."

"위험하긴 한데, 그래도 일단 한번 도전이라도"

"뭐 인마? 도전?"

"..."

나뿐만 아니라, 감독님도 세상물정 모르는 철부지 취급을 받는다.

"알아서 잘하겠거니. 회사를 차리든 연예인이 되든 가만 냅두니까. 이것들이 정도를 모르고."

"형님 그러니까."

이 와중에 핸드폰은 왜 이렇게 징징거리는지...

중요한 전화일수도 있어 잠깐 꺼내보는데, 그냥 김태윤.

"구마하."

"네. 교수님."

지금 친구 전화가 뭐가 중요하다고... 대화에 집중하자.

"죄송합니다. 자꾸 전화가 들어와가지고..."

"누군데?"

"아니요 중요한 거 아니었어요. 죄송합니다."

이현석 교수님이 다리를 무겁게 꼬고 앉아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그래 마하야. 지금은 온 세상이 다 니 편이고, 니가 하면 다 좋다고 해주는 거 같을거야."

"..."

"근데, 선수가 실력이 떨어지면 제일 먼저 돌아서는게 누군 줄 아냐? 바로 그런 사람들이다. 알어!"

"네..."

"스키? 메달리스트라라는 놈이..."

"..."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데, 감독님이 두둔해주고 나서셨다.

"형님. 근데 왜 그렇게 화를 내세요. 좋게 말하든가."

"화가 나니까 그러지!!"

교수님은 현실적인 말씀을 해주셨다.

세상이 아무리 떠들썩해도, 결국 모든 건 한철이다. 다들 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너도 너지만, 마하야. 지금 가뜩이나 실업팀도 그렇고 언론도 다들 열심히 하려고 하는데. 이때 니놈이."

"형님. 아니, 애 어깨에 왜 어른들 사정을 얹어요."

"이놈이 애냐...?"

"틀린 말은 아니잖아요."

"상률아. 너도 이쯤하면 그만 고집 부리고 같이 어울릴 때 되지 않았냐?"

어쩌다보니 감독님과 교수님의 언쟁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육상의 인기를 왜 구마하 한 사람이 책임져야 하냐고요!"

"그럼? 이놈이 없고서야, 지금의 육상이 어떻게 있어!!"

"결국 그런 것 때문에 선수가 망하는 겁니다. 아시잖아요."

"이 새끼가... 그럼 뭐 마하가 내 밑에선 선수 생명 끝난다 이 소리냐?"

"아니. 내 말은..."

"상률아. 니네가 그동안 잘 해온 거 알어. 그렇지만, 결국 다음이라는 게 있는 거 아니냐."

전국민이 구마하라는 이름을 연호 했었다.

사람은 위치에 따르는 책임이라는 게 있다.

그리고 나는 지금 그렇게 국민들의 기대감을 모으는 인물이 됐다.

교수님의 날선 시선이 나에게 돌아온다.

"부상의 우려가 있어 그렇다고 말하고, 스키는 취소해. 그리고 당장 학교로 들어와서 운동 시작하고."

"네..."

"뭔 네는 네야. 넌 가만히 있어."

"야! 한상률!"

"형님. 소속이요? 마하 이놈 아직 대학생 아닙니다. 얘는 우리 한구 스포츠 선수라고요."

"..."

"가... 감독님 왜 이러세요..."

아이고. 갑자기 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감독님을 말리고 있는데, 이현석 교수님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면서 말씀하신다.

"너 지금 나랑 뭐하는 거냐?"

"형님. 앉아 보세요."

"이 새끼가 선배를..."

"아 씨! 선배니까! 형이니까! 좀 앉아서 이야기를 들어보라고!!"

"..."

"형. 나 상률이잖아. 형은 내 마음 알잖아. 옛날에도 그래놓고 왜 또 똑같은 실수를 하려고 하는데."

"......"

감독님도 오죽 속이 답답하신지 눈이 빨갛게 충혈되고 계신다.

"나도 육상 생각해요. 계속 생각했었고, 계속 안타깝게 보고 있었고. 그러다가 이놈을 만나게 된 거고. 그리고! 지금도!!"

"마하야. 너 좀 나가있어라."

교수님이 턱 끝으로 사무실 밖을 가리키셔서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감독님이 붙잡으셨다.

"앉어. 지금 이 싸움의 주체는 너다. 당사자가 왜 자리를 피해."

"감독님..."

"..."

감독님이 눈을 질끈 감으며 말씀하셨다.

"육상의 미래. 네 좋습니다. 육상의 미래를 생각해서도, 마하는 자꾸 밖으로 도는 게 맞아요."

"그래. 어디까지가나 한번 떠들어 봐라."

선수가 선수로만 존재한다면 과연 국민들의 관심은 어디까지 이어질 것인가.

우리에겐 야구나 축구같은 프로리그가 없다. 배구나 탁구 같은 실업 리그도 없다.

육상 같은 비인기종목은 국제대회 때 반짝하는 관심말고는, 국민들의 성원을 끌어모으기가 어렵다. 그것또한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그래서. 마하를 스포테이너라도 만들겠다?"

"네."

"하~ 이 새끼 봐라?"

스포테이너는 Sports star와 Entertainer의 합성어로, 유명 스포츠 선수가 TV 예능이나 방송출연으로 인기몰이를 하는 것이다.

교수님은 감독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부정적인 의견을 보이셨다.

"야 인마. 너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선수들이 방송국 기웃거리다가 망했는지 몰라서 그러냐?"

"그러니까. TV가 아닌 다른 곳으로 가자는 거죠."

"그게 어딘데?"

"동계 올림픽."

"..."

"..."

아까 차에서 잠깐 나눴던 이야기를 왜 굳이 지금 여기서...

"형님. 우리 이렇게 한번 보자고요. 구마하가 내년 토리노를 갑니다."

"..."

"그리고 실수 없이 경기를 치루고만 왔다고 생각해 봅시다."

"......"

분노 일색이던 이현석 교수님의 표정이 사르륵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감독님도 자신감 있는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더 나아가서, 만에 하나"

"..."

"메달이라도 땄다고 생각해 봅시다."

다들 아무말도 못하는 가운데, 감독님이 물어보신다.

"그럼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교수님이 나를 돌아보셨다.

가까운 제자가 아닌 무언가 경이로운 존재를 보는 것 같은 표정으로.

"...말도 안돼. 그런 일은 있을 수가 없어."

"얘가 언제 우리한테 상식적인 모습은 보여준 적 있습니까?"

"형님. 제가 이놈 처음 학교에서 만났을 때 어디까지 봤는지 아세요?"

"어디까지 봤는데?"

"잘해봐야 체대 입시. 아니면 그냥 거기서 끝. 근데 마하는 우리한테 뭘 보여줬습니까?"

"세계 신기록..."

"그리고 말도 안 되는 금메달 세 개. 이놈은 할 수 있어요."

감독님이 나를 보며 물으셨다.

"그렇지?"

"저 감독님... 근데, 좋게봐주신 건 감사한데, 저 진짜 그냥 스키 재밌어서 도전해 보는 건데."

"그러니까. 넌 그냥 재밌게 해. 나머진 우리가 알아서 할 테니까."

이현석 교수님도 곰곰이 생각에 잠기셨다.

한참을 그렇게 아무 말도 못 하고 째깍째깍 시계바늘 돌아가는 소리만 들렸다.

교수님도 목소리가 한결 누그러지셨다.

"그래도 스키는 너무 위험해."

"위험하지 않게 탈 수 있다고 지 입으로 자신합니다."

"야. 그건 어디까지나 가능성의 이야기지."

"그러니까. 그 가능성이 있나 없나 한번 가서 보자고요. 저기도 마하 온다고 쌍수를 들고 환영하고 있는데, 이게 결국 육상으로의 관심도 되지 않겠습니까?"

"후우. 망할놈의 자식. 말이나 못 하면 밉지나 않지..."

그러니까. 고교 선생이 대학 교수님을 설득하고 있네.

"소리 질러서 죄송해요. 형님도 다 이놈 아껴서 하시는 말씀인데..."

"됐다. 니 새끼 싸가지 없는 거 내가 모르던 것도 아니고."

"큭-!"

친구들과 나눌법한 거리감 없는 대화에 참을 수 없는 웃음이 푹 터지고 말았다.

더 없이 살벌한 시선들이 나를 향한다.

"죄... 죄송합니다...."

"우리가 지금 누구 때문에..."

"야. 아무리 그래도 너 이 자식..."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아니 그럼 애시당초 싸우지를 말든가. 웃기지를 말든가...

괜히 난리들이야... 이러니 선수들이 어디가서 무식하다는 소리를 듣지...

* * *

"하여간 꿈도 야무지다..."

싸움 뒤엔 화해. 신촌으로 넘어와 어른들과 술자리를 가졌다.

"마하도 받아라."

"네. 고맙습니다."

"우리 동생도..."

"동생? 그럼 한 손으로 받아요?"

"야. 예의 안 지켜. 이게 확 그냥!"

"죄송합니다 선배님."

"그리고. 사람을 대할 땐 제발 진심을 담고!"

다시 평상시의 감독님과 교수님의 모습으로 돌아오셨다.

이렇게 보면 감독님 대하는 연맹이나 어른들의 말도 아주 틀린 건 아니야.

두 분을 지켜보면서 조용히 고기나 주워먹고 있었다.

감독님이 말씀하신다.

"근데, 진짜 나도 계속 생각 하고 있었어요."

"뭘?"

"왜 우리는 엘리트 체육에 사로잡혀 있는가."

"..."

"그냥. 늘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이놈이 나타난 거죠."

"상률아. 그건 너뿐만이 아니라, 우리 모든 체육인들이 고민하는 문제고, 한 사람이 잘 한다고 해서 고쳐질 수 있는 게 아니야."

"저도 아는데. 근데, 우리는 뭐 구마하가 금메달 딸 줄 알고 있었습니까?"

"있었지. 구병욱이라고. 나이 오십 넘어서 주책떠는 아저씨."

아. 웃어야 말아야 돼 진짜...

"마하야?"

"네. 교수님."

"상률이 말 어떻게 생각하냐?"

"엘리트 체육을 박살내고 싶다는 말씀이요?"

"그래. 지금 이 한반도에서 누구보다 엘리트 선수가 된 너의 의견은 뭐냐?"

엘리트 체육이라... 너무 어려운 문젠데...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하나밖에 없는 것 같다.

"일단, 전 엘리트 선수로 키워지진 않았어요. 그건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흠..."

"..."

"그리고 우리 감독님..."

나의 스승님 한상률. 그가 나에게 보여주었던 행동과 믿음 그리고 신념.

제자는 응당 스승의 뜻을 따르는 것이 무림인의 자세라고 생각한다.

물론 난 한국사람으로 자랐지만. 아무튼간.

"전 감독님을 믿습니다."

"후후후. 마하야 너가 그렇게 상률이를 믿고 따르는 이유가 뭐냐?"

"..."

"그러게. 감동은 좋은데, 뭐냐? 나도 좀 궁금하다."

"그냥. 코치비를 안 받으셨거든요."

어른들이 내 말에 참을 수 없는 웃음을 터트리셨다.

"하하하! 아이고. 이놈들아... 진짜 끼리끼리 잘도 만났다..."

"형님도 잘 만났죠 뭐. 왜 이래요 모르는 사람같이?"

"몰라. 이놈아. 아무것도 모르겠어. 니네들 보고 있으면 내가 알던 상식이 박살나는 기분이야."

교수님의 선잔에 두 손으로 잔을 들었다.

"그래도. 이 정신빠진 무리에 내가 함께 할 수 있어서 일단, 기분은 좋다."

건배와 함께 다음으로 넘어간다.

"너도 우리같은 스승들 만나서 고생이 많다."

"저야 늘 감사드리고 있죠."

"근데, 마하야. 스키는 진짜 생각보다 위험한 운동이야. 그건 알고 있는 거냐?"

"네.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도전하고 싶어? 너의 뜻이 중요하다."

두 분이 진지한 눈빛으로 가만히 대답을 기다리고 계셨다.

"네. 해보고 싶습니다."

"젊어서 좋다."

이어지는 술자리에 뒤늦게 친구들과 통화를 할 수 있었다.

태윤이도 있고, 혜정이도 있고, 아무래도 스키 여행 때문에 할 이야기가 많은 것 같다.

"어. 미안. 어른들 좀 만나고 있어서."

"어우 우리 대스타~ 오늘 기사도 나오고."

"뭐래. 암튼 여행 때문에 그러지?"

"응. 일단, 애들이 쫌 올 거 같은데, 거기 몇 명이나 갈 수 있냐?"

"몇이나 오는데?"

"익현이도 가고싶다 그러고, 또 애들도 더 있고."

정석이가 빠진 고등학교 때 친했던 친구들이 두루두루 열 댓명 참가하겠다고 한다.

"오라고 해. 연맹에서 연수원 빌려주셨어."

"허허허~~ 오오~ 구마하~~ 오오~"

"시끄러. 우리도 돈주고 빌리는 거야. 근데 괜찮으니까 일단 애들 오라고 해. 자리는 있어."

"알겠다. 적당한 선에서 끊어보지 뭐."

"그려. 부탁한다."

태윤이와 통화를 마치고 혜정이한테 들어온 문자도 확인한다.

[전화를 안 받네. 스키장 가는 거 애들이 생각보다 좀 많은데...]

"어. 혜정아."

"응. 지금은 통화 돼?"

"그럼. 애들 다 오라고 해. 시끌벅적하게 놀아보자."

"근데, 이 기사는 뭐야? 너 무슨 대회 나가?"

"하하하! 그러니까. 응원단 좀 잘 꾸려서 오라고."

* * *

구마하가 식당 밖에서 친구들과 웃으며 통화하는 가운데, 한상률과 이현석이 잔을 기울인다.

"엘리트체육을 박살내고 싶다라. 너라면 그런 짓을 하고도 남지."

"제가 아니라, 마하가 할 수 있을 거에요."

"너야말로, 왜 애한테 과중한 책임을 지우려고 하냐."

"..."

"상률아... 취지는 좋다. 좋은데, 잘 못 되면 너 쟤 어떻게 보려고 그래."

"그때는 뭐."

한상률이 고개를 돌렸다.

누구와 통화를 하는지 구마하가 그늘 한 점 없는 환한 미소를 보인다.

"책임지고 목숨을 끊든가 해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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