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륜기로 가버렷-82화 (82/401)

< 그가 특별한 이유 (3) >

나한테 혜정이가 너무 큰 존재라 다가가지 못하고 멀리서 지켜본 거지. 나도 한때는 여자애들이랑 농담도 하고 장난도 치고 그랬던 적이 있었다.

그 모든 관계의 사슬을 끊어버린 것이 바로 내 기준 최악의 여자 채민서

중학교 때 일진 출신에 고등학교 올라와선 과거를 싹 지워버리고 모범생인 척하는 아주 경악스러운 존재였다.

"걔가? 봤을 땐 그냥 조용조용하고 착해 보였는데?"

"후후후. 여자의 변신은 무죄라는 말이 있지."

"유죄야 유죄. 그년은 존재 자체가 중죄라고."

아직도 기억난다. 열 네 살 가뜩이나 외모 자존감이 떨어지던 때 채민서가 했던 말들을...

"진짜... 썅년. 생각만해도 스팀 터지네."

"진정해 새끼야. 썅년은 또 뭐야."

"김태윤. 이 새끼는 내 사정도 아는 놈이 말을..."

"뭐. 알았다고. 진정하라고."

"내가 걔를 왜 건드려 미친놈아..."

그러자 태윤이가 한숨을 훅 쉬면서 말한다.

"너 진짜 몰라?"

"뭘? 내가 걜 왜 알아야 하는데?"

"걔가 지금 우리 학교 애들 중에 니 자랑 젤 많이 하고 다니잖아."

"..."

"마하야. 인상 좀 풀어. 나까지 무서워."

"허허허... 와 나 씨발 이건 또 뭔 개소리냐?"

"진짜야."

"존나 어이없네... 야 자세하게 말해 봐."

올림픽이 끝나고 행사인형으로 사느라 학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몰랐다.

친구들 통해서도 학교 여자애들 가운데 팬들이 많다고 듣긴 들었다만. 뭐라고? 누가 뭘 어쩌고 다닌다고?

"걔가 지 입으로 그랬대? 내가 지랑 친했다고?"

"여자애들 가운데 제일 열정적이지. 거의 뭐 이야기만 들어봤을 땐 구마하 전 여친이야."

"허허허허. 허허허..."

"아~ 그래서 그랬구나."

"남수 넌 또 뭐?"

채민서의 과거를 아는 우리와 다르게, 남수는 최근들어 걔를 알게 됐는데, 그렇게 친하게 다가오더란다.

"모르는 애가 갑자기 다가오니까. 난 우리가 너랑 친해서 그래서 저러나? 했거든."

"아마. 정석이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걸."

"허허허... 진짜 사람 무섭다..."

유명세를 치르다보니 이런 일도 있구나.

내가 제일 싫어했던 애가 나를 팔며 설치고 다녔단다.

생각만해도 괘씸해 죽겠다.

* * *

"정말요? 대 사부님이 허락해 주셨어요?"

"그럼. 너가 해달라면 선생님은 무조건 패스지. 지금 형님들은 선생님 천병욱이 아니라 구병욱이라고 부르고 있어."

"하하하... 대 사부님..."

"아무튼, 너 진짜 스키 잘 아는 거 맞지? 그쪽 관련 질문이 많은 거 같던데. 대답할 수 있겠어?"

"그럼요. 근데 스키 탄다고 연맹에서 뭐라고 안 하겠죠?"

"뭘 뭐라고 하냐. 그리고 말했지. 구병욱이라고. 다치지만 말고 즐기고 오라고 하시더라."

"네. 알겠습니다."

다음 날 다시 일 때문에 서울을 올라왔다.

화보 촬영 겸 잡지사를 만나 인터뷰를 하는데, 스키 대회를 주최한 기업측에서 마련한 자리였다.

감독님과 함께 촬영 스튜디오를 찾아왔다.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오늘 잘 부탁드립니다."

컨셉은 정장이었다.

탈의실에 들어가니 이것저것 디자이너 선생님이 입어보라며 전해주시는데 갑자기 등을 만져보신다.

"구마하 선수. 잠깐만요."

"네. 뭐 묻었나요?"

"아니. 어쩜 사람 몸이... 어머~"

"하하하! 그런 의미로 만져보시는 거였어요?"

"미안해요. 그치만 우리는 모델도 상대하고 연예인도 보는데. 운동선수는 뭐가 달라도 다르구나."

디자이너 선생님네 직원분이 아무리 그래도 남자 몸 너무 더듬는 거 아니냐고 뭐라고 하는데, 옷 만드는 입장에서 이런 몸을 어떻게 가만히 볼 수 있냐며 당당하게 말씀하신다.

"진짜 너무 아름답다. 다음에 우리 패션쇼 좀 서줄 수 있을까?"

"아우 왜 그러세요. 저보다 더 멋진 분들도 많은데."

"왜? 구마하 선수가 어때서?"

"아니 그게... 잘생긴 사람들이랑 있으면 제가 기가 죽어서..."

"하하하! 농담도 잘해."

농담 아닌데. 진짠데...?

아무튼, 디자이너 선생님이 좋게 봐주신 덕분에 이것저것 많이 신경을 써주신다.

"흠. 머리를 한번 올려볼까?"

"..."

"왜?"

"못 생긴 거 드러나지 않을까요..."

"하하하!! 젊은 친구라 그러나 역시 재치가 넘치네!"

뭐지? 솔직한 자기방어를 재치라 그러나?

아무튼, 디자이너 선생님이 신경을 많이 써주셔서 내가봐도 멋진 모습이 아닐 수 없게 변하고 말았다.

"어이고 이게 누구냐?"

"감독님. 저 오늘 좀 괜찮죠?"

"그래. 잘 어울리네. 너 앞으로 그러고 다녀라."

"하하하. 제가 무슨 연예인도 아니고. 꾸미는데 시간 오래 걸렸어요."

머리도 만지고 멋지게 옷도 입혀주신 덕분에 여러 가지 어색한 포즈를 취하면서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잡지사 분들과 마주보고 앉아 인터뷰를 나눴다.

"어떻게 지내셨어요?"

"잘 쉬고 있고요. 지금은 대학 준비 하고 그러고 있습니다."

"이번에 들리는 소문에 스키 대회 나가신다는 말이 있던데요."

"들리는 말이 아니라, 바로 여기 스키 주최자 분들이 옆에 계시는..."

"하하하! 다 이렇게 하는 거니까."

"죄송합니다. 진지하게 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주최측에서도 괜찮으니 편안하게 이야기 하라면서 손을 들어보였다.

"스키는 언제 타보셨어요?"

지난 겨울 이야기를 하며 접했던 스키 이야기를 전해드렸다.

"스테판네 친척 중에 챔피언쉽 출신도 있으셔서, 배우니까 재밌더라고요."

주절주절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 기자님이 이것저것 받아 적으면서 질문을 해주셨다.

"스테판 선수와는 아직도 가깝게 지내고 있나요?"

"네. 다음엔 제가 한국에 오라고 했습니다. 알고보니까 집안이 스포츠 집안이기도 해서 이야기가 잘 통했었어요."

"올림픽에서 만난 인연들과 꾸준히 친분을 이어가고 계시는 게 보기 좋네요."

"처음엔 이메일도 서로 주고받고 했는데, 요즘엔 좀 뜸하고요. 선수권 나가면 또 보겠죠 뭐."

"그럼 다음엔 동계 올림픽에 도전하시는 건가요?"

"하하하! 아니요. 그냥 겨울이다 보니까 운동도 없고. 몸이 근질근질해서 도전해보는 거에요."

"보통 선수들이 겨울엔 운동을 쉬나요?"

"원래는 준비를 많이 해야하죠. 하지만 조심해야 되는 것도 있습니다. 추울 땐 근육이 굳어서 부상이 오기 때문에"

"그런데 스키를 탄다고요?"

"재밌으니깐요."

육상선수에게 스키란 어떤 느낌이냐는 질문을 받았다.

"육상 같은 기록 경기이기도 하면서, 익사이팅 스포츠 장르가 주는 짜릿함이 있는데, 거기에 조금 반한 거 같애요."

"으음. 역시 선수다 보니까 운동을 그렇게도 느낄 수 있겠구나."

"거기다 전신운동이고. 생각보다 근력도 많이 써야하고. 재밌습니다."

알프스가 주었던 웅장한 설상의 풍경들도 잊을 수가 없다고 말씀드렸다.

처음 스테판과 함께 리프트를 타고 올라가 보았던 장엄한 광경이 아직도 머릿속에 선하게 펼쳐진다.

"거기서 그대로 떨어지는데!! 어우!"

"하하하~ 굉장히 즐거웠나봐요."

"아마. 시간만 맞았다면 겨울 내내 거기 있었을지도 모를 일인 거 같아요."

화보는 다음 달 잡지에 실리고, 인터뷰는 오늘 밤 인터넷에 올라간다는 말을 들었다.

인사를 나누고 있는데, 대회 주최측과 잡지사 분들도 서로 의견을 조율하고 있었다.

"잘 부탁드립니다. 스키 팬들도 지금 구마하 선수 온다고 생각보다 기대가 높아서."

"들으셨어요? 팬들의 기대가 높다는데."

"그럼. 일반인에서 우승을 노려볼까요?"

"어어! 절대 그러지 마세요. 아무리 그래도 초심자가 타기엔 난이도가 있는 코스라, 무리하다가 부상이라도 입으면 우리 회사 큰일 납니다!"

일정을 마치고, 감독님과 이른 저녁을 먹는데, 주변에서 쳐다보는 시선에 감독님이 수저를 놓으시며 고개를 들었다.

"감독님 왜요?"

"그냥. 사람들이 너무 보니까, 소화가 안 돼서."

"드세요. 갑자기 주변을 의식하고 그러세요."

"아이고. 앞으로 너랑은 편하게 국밥도 먹기 어려울 거 같다."

"에이. 그런 게 어딨어요. 감독님이랑 저는 국밥이죠."

"아무튼, 마하야. 너네 갈 때 나도 따라간다."

"네? 감독님이 왜요?"

"연맹에서 빌려주는 자린데 연맹 관계자가 있어야 할 거 아냐. 어떻게 애들만 보내냐?"

"연맹 관계자 저 있잖아요."

"까불지 말고. 그리고 아까 부상 이야기 하는데, 조금 겁나더라."

"저 부상 없어요. 괜찮아요."

"아니야. 우리도 그냥 스키를 레저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러지. 대회라고 하면 니 놈 또 승부욕 가질 거 뻔해. 따라가야겠어."

"감독님. 저 내공 있잖아요."

"어."

"...이거 다 먹고, 차에 가서 말씀드릴게요."

* * *

"운룡대팔식?"

"네. 집안에 전해지는 무공이 있는데요."

"음. 그래서?"

"이게 그러니까 저도 형한테 듣기만 하고 잘 몰랐었는데"

분명, 스키는 생각보단 무시무시한 운동이고, 나도 알프스의 설상을 내달리며 크고 작은 위험한 순간들을 겪어야만 했었다.

위기의 순간이 있기에 몸이 본능적으로 힘을 쓰게 되었다.

나도 모르게 곤륜에서 아버지와 형이 펼쳤던 무공의 이론을 깨우친 것이다.

"공중에서 몸을 띄운다고? 하늘을 난다는 소리야?"

"아우.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하늘을 날아요. 그냥 이론적으론 코어랑 허벅지 힘으로 확 몸을 비트는 그런 거거든요."

"어. 그래서?"

"제가 이번에 그걸 배웠어요."

스키를 타보고 싶은 건 순간적으로 느꼈던 운룡대팔식을 몸에 익히기 위한 목적도 있다.

나는 형의 단전을 살려줘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역시 내공과 무공에 관한 더 깊은 깨우침을 알아야 했다.

"운룡대팔식만 잘 쓰면 부상은 절대 없어요. 걱정마세요."

"..."

"진짜라니깐요."

"야. 마하야. 근데, 그렇게 되면..."

감독님은 실력 여하에 따라 다르긴 하겠지만, 국내에서 주최하는 스키대회도 결국 스키연맹의 주관이 들어가 있다고 하셨다.

"그쪽에서 너. 같이 운동하자면 어떻게 하려고 그러냐?"

"그럼 같이하죠 뭐."

"..."

"안 될 거 없잖아요. 여름엔 육상 겨울엔 스킨데."

"안 될 건 없는데..."

마침 차가 신호에 걸린다.

감독님이 핸들을 붙잡고 가만히 생각에 잠기셨다.

"연맹에서 뭐라고 할까요?"

"아니. 그게 아니라... 방금 뭔가 말도 안 되는데, 또 그렇게 어색하지 않은 장면이 그려져서..."

"뭐요?"

"너가 동계올림픽을 나가는 모습이..."

아까 잡지사 분들과 인터뷰 할 때만 해도 그냥 웃어 넘기셨지만.

"이야 이거... 생각보다 큰 이벤트가 될 거 같은데?"

"에이. 감독님. 아무리 그래도 제가 뭐라고. 저 스키 한달 타 봤어요. 그것도 따져보면 삼주나 될까?"

"스테판네 가족이 스키 챔피언쉽 출신이 있다고?"

"왜요? 설마 부르시려고요?"

"그 사람 영어 하냐?"

"네. 스테판 말고 그쪽 가족들 중에 거의 유일할 정도로."

"이번 너 스키 타는 거 봐서... 한번 이야기 좀 해봐야겠다."

무슨 꿈을 품고 계시는 걸까? 올림픽 마치고 조금 느슨하던 감독님 표정에 활기가 드리운다.

"마하야."

"네."

"후우. 와 진짜..."

"하하하! 왜요?"

"이야... 만약에 말이야. 너가 동계올림픽을 나가서 메달을 딴다면 그땐 어떤 일이 벌어질까?"

"글쎄요. 저도 잘 모르겠어요."

"뭔진 몰라도 무시무시할거야. 그치?"

"하하하! 모르겠습니다. 전 감독님만 믿고 따르겠습니다."

"어이고 이 괴물같은 자식..."

동계올림픽 도전이라.

확실히 생각만해도 가슴이 두근두근 거리긴 한다.

"다음 하계 올림픽은 4년 뒤지만 동계는 2년만 있으면 바로 열리죠?"

"2년이 뭐야. 앞으로 1년이지."

"네? 2005 2006. 아~ 그렇구나."

"내년 2월이야. 지금 해가 바뀌었으니까."

"..."

"..."

감독님과 둘이 동시에 돌아보았다.

"미친 척 하고 한번 해볼래?"

"그럼. 훈련을 좀 해볼까요?"

"근데 겨울 운동은 난 아무것도 몰라서. 뭐라 해줄 말이 없네..."

"전체적인 체력 관리는 육상이랑 비슷했어요."

"아니지. 그래도 기물을 쓰는데. 테크닉이 있겠지."

대화중에 감독님한테 전화가 걸려왔다. 이현석 교수님이셨다.

"네. 형님."

통화를 하고 계셔서 나도 친구들한테 온 문자나 답해주고 있는데.

"어이고 소문도 빨라라... 마침 옆에 있어요. 잠시만요. 받아봐라. 이 교수님."

"네. 교수님. 마하입니다."

반가운 마음으로 전화를 받았다.

하지만 이현석 교수님의 목소리는 반가움이 느껴지질 않았다.

"야 인마. 너 생각이 있는 놈이냐? 없는 놈이냐?"

"네? 왜... 왜요?"

"뭔 스키야 스키는. 당장 때려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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