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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륜기로 가버렷-52화 (52/401)

〈 52화 〉 아테네로 가는 길 (3)

이별의 아픔은 오랜만에 갖는 형제간의 시간으로 채워지고 있다.

"아무튼, 앞으로 거짓말 하지마. 이번은 처음이니까 봐주지. 안 그랬음 너 형한테 진짜 혼났어."

"알겠는데, 사생활이 다 들킨다는 건 좀 피곤하네..."

"마하야. 원래 모든 무림인들은 몸을 조심할 줄 알아야 돼."

"형. 내가 무슨 무림인이야 난 한국사람이지."

서로간에 쌓여있던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술도 먹고, 맛있는 음식도 시켜먹고.

맨날 남 서비스만 해주던 형도 덕분에 하루 푹 쉰다며 마음 편히 즐기고 있었다.

"형. 그럼 나도 내공이 있는 사람들을 볼 수 있어?"

"더 수련하면 언젠가 그렇게 되겠지."

"와. 딱 봐도 강한지 아닌지 한눈에 알 수 있다라... 우와..."

"세상이 변했을 뿐이지, 여기도 강자들이 많어. 지나다니는 사람들도 그렇고."

"태릉가면 엄청나겠다."

"태릉?"

"어. 나 국가대표 제의 받았었어."

"정말로? 언제 그런 일이 있었던거야?"

"저번에. 상비군이긴 한데. 아무튼, 그런 일이 있었어."

지난 일을 어쩔 수 있나.

그냥 덤덤하게 말하고 있으니 형이 나보다 더 아쉬워하는 반응을 보였다.

"괜찮아. 어차피 다음 달에 선수 선발전 있어."

"국가대표라. 우리 마하가 국가대표가 된다라..."

"뭐야? 형이 나보다 간절해 보이는데?"

"마하야. 우리가 왜 한국으로 왔는지 말해줬지?"

"탈북자로 구라치고 국적 받았다고."

"그건 정말 결과적인 이유였고."

또 뭐가 있나? 하는 얼굴로 보고 있는데, 형이 현관 서랍장을 뒤적거려 국기함을 꺼내왔다.

"너. 이게 뭔지 알어?"

"형. 내가 연애를 제대로 못 했지. 병신이 된 건 아냐."

"뭔데?"

"하하! 와 미치겠네. 아니 나는 어릴 때부터 한국 사람으로 자랐다니까!!"

태극기를 뭐라고 설명하라고.

흰 바탕 위에 흑색의 건곤감리. 세로로 삼 사 오 육. 가운데 빨강 파랑 태극.

"형은 그거 알어? 태극 가운데 선이 우리나라 휴전선 닮은 거?"

"몰라. 그건 한국의 역사니까."

"뭐래. 한국 사람이? 구라로 탈북자 탈북자 하니 마음도 북조선에 가 있는거야?"

"...이게 우리 고향에도 있었어."

"음?"

"태극과 바로 여기 이 건곤감리. 이 문양들이 우리 고향 곤륜에도 있었다고."

형의 이야기다.

우리 아버지는 곤륜의 지존이지만 무당파에서도 수련을 하셔서 그곳에서도 큰 선배님 대우를 받았었단다.

"특히, 태극검선 어르신과 아버지의 비무는 아직도 잊혀지지가 않어."

"..."

"그날의 승리로 아버지가 어르신께 선물을 받았었어. 아버지 옷에 이 태극의 문양이 들어가 있었거든."

"오~ 진짜? 태극기가 고향에 있었다고?"

"완전 이것과 똑같은 문양은 아니었지만."

형이 태극기를 마치 잃어버린 자식이라도 되는 양 꼭 끌어안으며 말했다.

"그래도 있잖아 마하야. 정말 그 험한 세상에서... 저 멀리 펄럭이는 이걸 봤을 땐 어찌나 마음이 울컥하던지..."

"..."

"그렇게 한국을 알게 된 거야. 그 뒤는 너가 아는 그 내용이고."

형은 선수들 가슴에 달려있는 태극기가 그렇게 멋있었단다.

그렇구나. 내가 막 태어난 갓난 애기 때 우리 형은 한국 나이로 열 세 살이었다.

고생을 했다고 알고는 있지만...

생각해보면, 정말 상상을 초월하는 경험을 한 건 내가 아니라 우리 형이었겠지.

"형 걱정하지마. 내가 꼭 국가대표 돼서. 태릉에서 밥 먹여줄게."

"하하! 그날은 전날부터 밥 굶고 가야겠다."

"태릉 밥 장난 아니게 잘 나온데. 다 있다고 그랬어!"

"그래? 그럼 밥 값도 비싸겠다."

"공짜야! 그러니까 국가대표지!"

"크~ 멋지다. 정말 그런 시간이 오면 좋겠다."

국가대표 츄리닝 받으면 한 벌 더 받아서 형도 주면 좋아하겠다.

어휴. 태릉만 가면 앞으로 선물 값 굳고 좋네.

*    *    *

"자. 부담가지지 말고. 파이팅이다."

"네!"

육상 연맹 천병욱 전무와 관계자들이 선수들과 함께 호주 멜버른을 찾아왔다.

해외의 유명 기업이 후원하는 국제육상대회가 열리고 있었다.

여기서 높은 성적을 거두어야 올림픽으로 가는 길이 열린다.

천 전무도 웃는 얼굴로 응원을 건네나, 속으론 몇 명이나 살아남을지 가슴을 졸이는 중이다.

선수들은 최선을 다했다.

몇 몇은 자기기록의 한계점을 넘는 이들도 있었다.

그럼에도 세계의 벽은 너무 높았다.

"마라톤 쪽은 어떤가...?"

"괜찮다고 합니다. 선수들 컨디션도 많이 올라왔고요."

"이번에도 마라톤만 보고 있어야 하나..."

연맹은 메달이 필요했다. 어떤 색이든 무슨 종목이든 상관없다.

올림픽 경기 가운데 가장 세분화되고 많은 메달을 보유한 경기에서, 어떻게 단 하나의 메달이 허락되지 않는 것일까.

연맹이 필요악이란 말까지 받아들이며 모든 비난을 감수하고 있는 입장에선 애간장이 타들어가는 일이었다.

성과 없는 협회란 존속되기가 어려우니까. 협회가 무너지면 선수들도 무너진다.

과연 해결책은 어디 있을까.

"전무님."

"음?"

"부회장님이 오셨습니다..."

"..."

그런 가운데, 신임 육상연맹회장의 오른팔 박문기가 그들을 찾아왔다.

"부회장님. 여긴 어쩐 일로."

"예~ 예. 근처에 출장 왔다가 선수들 한번 보고 싶어서."

"아 그러시군요..."

"보아하니 뭐 별로 반가운 소식은 없는 것 같네요."

박문기는 신임 회장과 같은 계열사 출신으로 말년에 낙하산을 타고 왔음에도, 성과에 대한 욕심이 높은 사람이었다.

"돈을 걸어도 안 된다라. 전무님 대체 원인이 뭘까요?"

"아직 상금을 올린지도 얼마 안 됐고... 성과가 나오려면 역시 시간이 걸리니까요."

"시간은 충분히 있지 않았습니까? 우리나라가 올림픽에 처음 나가는 것도 아닌데."

"..."

"축구도 4강에 들었는데, 대체 원인이 뭘까요? 다른 종목은 메달만 잘 따던데? 네?"

"...죄송합니다."

박문기의 부주의한 발언과 행동에 천병욱이 고개를 숙인다.

그들을 보며 오랜 시간 체육계에 몸을 담가 온 이들의 마음에 커다란 상처가 남는다.

그럼에도 뭐라 할 수 없다.

연맹은 기업의 후원금으로 운영되니까.

"전무님. 그때 그 선수는 나왔어요?"

"누구 말씀이십니까?"

"그 뭐. 어린 친구 하나 있다며. 천부적인 재능을 가졌다고."

"아~ 아직 학생이라..."

"농담이시죠? 학생이 무슨 벼슬도 아니고?"

"..."

"설마 까인 건 아니죠?"

천병욱의 곁에 있던 젊은 코치 한 사람이 더는 못 참겠다는 듯 앞장섰다.

"부회장님. 선수들은 각자의 베스트 컨디션과 훈련 일정이 있습니다. 마하도 지금 누구보다 노력하고 있고요."

"마하?"

"그 친구 이름이 구마하입니다."

"오~ 이름 멋진데? 홍보하기 좋겠어요."

"기량이 뛰어난 친구입니다. 단거리는 한국 신기록에 가깝고 중거리도"

"한국 신기록?"

박문기가 고개를 돌려 턱 끝으로 운동장을 가리켰다.

"그거 가지고 저기서 메달 딸 수 있겠어요?"

사람들이 주먹을 움켜쥐며 감정을 누르고, 천병욱은 마음 심(心)자를 그려내며 입을 열었다.

"메달이 그렇게 쉬운 건 아니지 않습니까..."

"필요하다면 국제대회도 보내 줘. 전지훈련도 시켜 줘. 상금도 올려 줘. 전무님. 보통 회사에서 이렇게 까지 했는데도 결과 없으면 어떻게 되는 지 아시죠?"

"...잘 모르겠습니다."

"에이. 아무리 사회생활 안 하고 운동만 했어도 그걸 모르면 어떡해."

천병욱이 두 눈을 질끈 감으며 고개를 숙였다.

참는다. 참아야만 한다. 버텨라. 여기서 내가 무너지면 저 밑에 있는 사람들은 더 심한 모욕과 압박을 받아야 되니까.

"짤려요. 모가지라고. 예?"

두 눈을 질끈 감은 천병욱의 어깨로 툭툭 가벼운 손길이 다가왔다.

"부탁드립니다."

"네..."

"아무튼, 마하인가 뭔가 그 친구도 확실하게 하세요. 기자들 만나서 이야기도 나눠봐야 하니까."

박문기가 물러가고 사람들이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전무님... 그냥 제가 저 새끼 박살 내고 콩밥 좀 먹고 올까요?"

"조용히 해. 감정에 휘둘리지 말고."

"저도 선배님 의견에 동의합니다. 저 개새끼만 오면 육상이고 뭐고 다 꼴 보기 싫어서 미치겠어요."

"야. 너 그러지 말고 나랑 같이 나가서 치킨집이나 차릴래?"

"이 친구들아. 장사는 아무나 하는 줄 아나."

한국으로 돌아온 천병욱 전무는 육상 대표팀 코치들과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트랙은 알겠고, 필드 쪽은 어떤 상황입니까?"

"문제 없이 준비되고 있습니다."

"선수선발전이 한 달 앞으로 다가왔으니, 각 실업팀과 대학에 부상에 유의하라고 전달해 주세요."

자리를 마치며 피로감에 누워있는 천병욱에게 육상 국가대표 감독 이두희가 찾아왔다.

"피곤하면 들어가서 자요. 사무실에서 이러지 말고."

"아이고 할 게 너무 많다. 두희야..."

"선배님. 애들이 그러는데, 박문기 이 자식 거기까지 찾아와서 지랄하고 갔다면서요?"

"놔둬. 그 친구 그러는 게 하루이틀인가."

"썅놈의 새끼. 사람이 무슨 기곈 줄 아나."

"아무튼 왜? 무슨 일로 찾아왔어?"

"쩝. 이 와중에 정말 죄송스런 이야기지만..."

한국 계주의 유력한 대표팀 선수가 될 사람이 부상이 왔단다.

"...그럼 아예 못 뛰게 되는 건가?"

"계주는 말 할 것도 없고, 단거리도 잘하면 머릿수를 못 채울 거 같아요."

"한 사람이 필요하단 이야기네."

"네. 그래서 여기저기서 지금..."

"두희야. 청탁 받았다간 골로 간다. 늘 얘기해줬지?"

"아는데, 다들 실력이 고만고만한지라..."

"..."

"받은 건 없어요! 아무렴 내가 누군데."

"안다. 그런 걱정이 아니라..."

"혹시, 누구 봐둔 사람 없으신가 여쭤보러 왔어요."

"한 놈 있긴 한데"

"아. 걔는 내가 싫다니까."

이두희는 구마하에 대해서 부정적인 의견이 강했다.

실력을 떠나서, 태릉의 손길을 거부했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어디 어린 놈의 새끼가 감히"

"두희야. 실력만 보라고 했잖아."

"실력도 뭐? 계속 10.50 똑같더만."

"넌 그걸 보고도 아무렇지 않냐?"

"왜요?"

"어떻게 선수가 그렇게 칼로 잰 듯이 매번 똑같은 기록이 나올까."

"그럼 뭐 뛰는 놈이 속도 조절이라도 할 수 있단 말입니까?"

"안 그래도 너 마침 잘 왔다. 실은, 나도 상의할 일이 하나 있었는데."

"뭔데요?"

"초청선수로 구마하를 뽑을까 하는데."

"아 싫다니까!!"

"두희야. 상률이가 9초대를 보여준다고 했다."

"뭐라고요...?"

꿈의 숫자가 언급되자 이두희의 표정도 누그러진다.

"걔가 9초를 뛴다고요?"

"그렇다는 거 같애. 너도 알다시피 상률이 이놈이 그런 걸로 허세 부리고 할 놈은 아니잖아."

"그럼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죠. 당장 기자들 부르고."

"그렇게 난리 부리는 게 부담스러워서 조용히 있는 게 아닐까 싶다."

"새끼 하여튼 옹졸해가지고. 난 그때도 그랬지만, 영욱이가 잘 못 했다고 생각 안 해."

"이러니 상률이가 연맹이라면 기겁을 하지 이놈아..."

두 사람은 긴밀한 회의를 가진다.

"그래서. 선배님은 구마하를 초청선수로 부르고 선수 선발전을 내보내지 말자?"

"비공식 테스트를 제안하기는 했다. 평가는 해야지."

이두희도 감정을 덜고 차분하게 생각해본다.

9초면, 분명 결승전까진 밟을 수 있다.

단, 메달은 자신하기 어렵다. 세계엔 9초 선수들이 0.01초를 가지고 승부를 겨루니까.

"상률이 말도 틀린 건 아니야. 괜히 언론이 또 금빛 레이스니 뭐니 설레발이라도 쳤다가 안 되면 부담감은 오롯이 니가 안지 않겠니?"

"그럴 가능성이 크죠."

"어떻게 할래? 감독은 너다."

"9초만 보여준다면 거절할 이유는 없죠."

"그렇지."

이두희가 씩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무엇보다 박문기 모르게 메달이라도 따오면 뒷통수도 한 대 칠 수 있고."

"거기까진 바라지도 않는다."

"에이~ 선배님은 사람 아니요? 감정 없어요? 하하!"

"하하하! 이 자식."

뒤통수가 뭐냐. 무릎 꿇려 절이라도 받고 싶다.

하지만, 감정은 덮어놓는다.

모든 건 선수가 우선이니까.

연맹은 선수가 최적의 효과를 낼 수 있게 서포트를 해주는 것이 본래의 목적이다.

"대신, 올림픽 가까워질수록 엄청나게 갈굴 겁니다."

"버티면 그만이다. 나 10000미터 출신이야."

"마라톤도 있는데 그깟 10000미터 뭐라고..."

"뭐라고? 야! 우린 물 안 먹고 뛰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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