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4화 〉 반짝반짝 작은 별 (3)
남수는 올 초부터(혜정이랑 몰래 만날 쯤? 무서운 새끼) 조금씩 변했다는 걸 느꼈는데, 그때는 그냥 운동을 하니까 그렇구나 했었다는데.
"아니야. 아니었어. 너 했지? 맞지?"
"..."
"야. 진짜냐? 너 해봤어?"
"누구야? 씨발 진짜로 한 거야??"
상어 때에 피 뿌린다는 게 이런 건가?
'했냐?' 이 간단한 질문에 애들 눈빛이 훼까닥 돌아가는 게 보였다.
"말해 봐. 진짜냐고??"
"내가 하긴 뭘 해!"
"그치? 아니지? 그렇지?"
"야 그냥 솔직히 말해. 구라치지 말고."
"집단으로 돌았냐? 갑자기 내가 뭔 구라를 쳐."
"했어! 확실하다니까! 이 새끼 작년이랑 비교해서 생각해 봐. 사람이 변했잖아."
"운동했잖아 미친놈아."
"그거 말고. 뭔가 니 그 뭔가. 하여튼 그게 없어졌어."
"병신이냐? 말을 하려면 똑바로 하든가..."
"아니라고 해봐. 구라면 너 평생 아다."
개새끼야 내가 사람을 죽였어 도둑질을 했어 마약을 빨았어... 어떻게 그런 심한 말을...
아니다. 쫄 거 없다.
이미 아다는 아니니까 거짓말 한다고 타격 입을 것도 없잖아.
"아니야."
"진짜? 맹세할 수 있어?"
"이런 걸로 뭔 맹세까지 가!"
"남수가 아무 증거 없이 이런 말 하진 않을건데..."
"꺼져! 없어! 뭔 증거가 있는데!!! 저 새끼 혼자 미쳐서 지랄하는구만!!"
미안하다. 친구들아.
근데 이런 것도 다 혜정이가 알려줬는데, 여자애랑 해봤다고 어디가서 자랑하지 말래. 남자들 그러는 모습 정말 꼴사납고 한심해 보인다고... 그래야 또 다음이 있지 않겠니?
"진짜 아니지?"
"아. 아니라고 몇 번을 말해!!!"
"야. 씨발놈아 아니라잖아."
"그래. 미친놈아. 이 새끼가 했으면 했다고 우리한테 말을 했겠지."
"쓰읍... 그런가?"
"그런가는 뭔 그런가야. 닥치고 있어. 내가 누구랑 뭘 하는데. 여자친구도 없구만."
섹스에 대한 선망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런데, 한편으론 나도 이랬나 싶다?
뒤늦게 정말 부끄럽구나...
"아님. 말고."
"뭐야. 병신새끼 존나 싱겁게."
"야. 우리 마하보다 진짜 남수 누구라도 소개시켜줘야 될 거 같지 않냐?"
"누가 누굴 소개시켜 줘. 당장 우리도 없는데..."
헛소리를 마치고 교실로 돌아가는 길.
옆반 태윤이와 복도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진짜 아니냐?"
"와... 태윤아 너 지금이라도 문과 가라. 경찰 해. 의심하는 솜씨가 진짜 어처구니가 없다 어처구니가..."
"흠."
"니네가 볼 땐 여자애들이 나 막 좋아하고 그럴 거 같냐?"
"어."
"왜...?"
"왜긴. 너 그때 크리스마스 때 애들도 그러잖아."
중학교 때부터 친하게 지내 온 녀석의 말이다.
"생긴 거 뭐. 이제는 그냥 눈에 익어 그런가 별로 못 난 거 모르겠고. 몸은 말 할 것도 없고. 전국대회 우승자에. 아까는 보니까 키도 남수 넘었더만. 너 이제 나랑도 얼마 차이 안 나."
"그래? 그렇게 들으니까 좀 괜찮은 거 같은데?"
"씨발년이 하여튼 칭찬을 해주면 안 돼요. 아무튼 남수가 팔삼이랬나? 그럼 적어도 니가 팔사나 팔오 정도는 됐다는 건데. 너 괜찮다니까?"
"..."
"이참에 혜정이도 그냥 지나치지말고 사귀자고 해 봐."
"뜬근 밑도 끝도 없이 걔는 또 왜 나오냐?"
"너가 혜정이말고 또 누가 있어."
"됐어. 걔랑 연애 할 일 없어."
"이젠 전 만큼 안 좋아하나?"
"뭐. 적당히 그런 감정은 넘어섰지."
섹스는 해도 연애는.
음. 혜정이랑은...
"아. 몰라 들어가서 잠이나 잘래. 가뜩이나 지쳤는데 니네 때문에 더 피곤해."
"저기 잠깐만?"
"야 태윤아. 이따가"
"어이 어이. 구마. 스톱. 쟤가 잠깐만이라고 하잖아."
"뭐 누구?"
교실로 가는 길에 어떤 여자애들이 불렀다.
누구지? 왜 불렀지? 모르는 애들인데? 하는 식으로 쳐다보니 자기들끼리 막 속닥거리더니 한 사람이 나선다.
"왜? 뭔데?"
"아니. 너 구마하 맞지?"
"어."
"그냥. 전국대회에서 그거 축하한다고."
"오오~~~ 이 새끼~~ 우오오~~~"
"시끄러... 좀 가만히 있어... 고맙다."
"하하~ 그럼 갈게. 힘내."
자기들 할 말만 남기고 꺄르륵 도망치는 아이들.
처음 듣는 웃음이다. 예전 지나가다 사귀었던 수많은 여친들의 '야. 니 남친 지나간다 깔깔깔~!' 과는 확실히 다른 성질의 웃음이야.
태윤이도 툭 치면서 말했다.
"봤지 씨발아. 너 인기 있다니까. 몇 번을 말하냐."
"아니야. 착각해선 안돼. 쟤들도 분명 지들끼리 구마하한테 인사하고 오기 이런 벌칙 같은 거 수행중이었을 거야."
"와~ 나 미치겠네 진짜... 돌겠어 자신감 병신새끼 때문에"
"훗. 하루 이틀이냐. 내가 쉽게 당할 줄 알고."
정신 차려야지. 방심하면 안 돼. 저런 거에 속으면 안된다고.
인기? 있으면 좋지. 근데 여기는 학교잖아.
경기장이면 내가 조금 인정한다.
거기는 실력으로 평가 받고 외보보단 피지컬이 더 외적 요인이 될 수 있으니까.
무엇보다 경기장에선 못 생겼다고들 안 해. 운동 잘 하게 생겼다고들 그러지.
안 당해. 못 믿어. 내가 그동안 당한 게 얼만데.
"자. 다음 내용에서 중요한 것은"
오후 시간.
선생님은 수업을 진행하시고 나는 여자친구란 주제로 논리적 사고중이다.
와 진짜 어떻게 알았지?
맞다 이것들아. 섹스 했다. 많이 했어. 그것도 두 사람이나.
정색하고 지랄지랄해서 미안한데, 그래도 이건 사생활이니까 니들이 다 알 필요는 없잖아.
하지만 여자친구는 없어. 그건 진짜라고.
여자친구라... 나도 여자친구 사귀고 싶다.
"..."
니가 혜정이 말고 누가 있는데?
그렇다 하더라도 내가 혜정이랑 사귈 일은 평생 가도 없을 거다.
걔가 싫다거나 몸만 취하고 싶은 그런 게 아니라, 사귀자고 하면 가버릴 애라는 걸 알기에 그 말을 할 수가 없다.
하지만 언젠가 혜정이도 누군가는 만나겠지. 그때는 반드시 온다.
그럼 난 누구를 만나야 될까?
고개를 돌려 하늘을 보았다.
길고 작은 구름 하나가 떠있는데, 포니테일 머리가 슬쩍 떠올랐다.
다빈이가 참... 아 진짜 미치겠네.
다빈이는 귀여운 애다. 동민이나 인수 말대로 나한테는 과분한 애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빌어먹을. 연락처를 안 물어봤어...
어떻게 할 짓 다 하면서 전화번호 챙길 생각을 안 했을까...
발가락 쪽쪽 빨면서 왜 그 생각은 못 했는지 그게 너무 황당해서...
대회 때는 각자 시합 때문에 정신없고, 끝나고는 단체로 움직이느라 시간이 없었다.
그나마 하나 있던 게 800 예선 끝나고 잠깐인데, 그때는 또 친구들이 있다보니 그냥 인사나 하고 지나가는 정도에서 끝나고 말았다.
이래서 뭐든 기본부터 가야 돼.
숫자도 74 다음에 69 나오는 거 아니잖아. 근데 빼면 5? 그래서 오입이라고 하나??
아무튼, 종별 때 다빈이가 올까? 그때 만나면 사귀자고 해봐?
싫다면 어떡하지...
아니. 애초에 연애란 뭘 하는 거지? 섹스와 연애에 무슨 차이가 있지?
다음에도 상처 입은 사슴이 우물가를 알려줄 거란 보장은 없고.
여자친구 있다는 게 꼭 뭐 섹스를 위해서는 아닌 것 같고.
근데 또 하고는 싶고.
연애는 뭔가 다를 거 같고.
아 여자친구...
섹스를 해봐도 왜 나아지는 게 아무것도 없는 거 같지?
"야. 자냐? 일어나 봐."
"음? 뭐야. 언제 왔어?"
얼마나 머리를 썼는지 잠깐 엎드렸는데 네 시간이 지나있었다.
후우... 정말 철학적인 사고였다.
"아우 푹 잤네."
"이 새끼 진짜 피곤한가 보네."
"어 오줌 마려라. 방광이 터질 거 같네."
"오줌 누고 밥 먹으러 가자. 오늘 훈련 없다며? 너도 야자 할 거 아냐."
"됐어. 뭔 야자야. 난 집에가도 돼."
"씨발 존나 부럽네. 나도 데려가라."
"아무튼, 나가자. 요즘 우리 석식 안 먹고 나가서 먹거든. 밥은 먹고 가도 될 거 아냐?"
"그래. 근데 화장실 먼저 갔다가."
후문 쪽이 번화가랑 가까워 다들 설렁설렁 걸어가고 있다.
"야자때 뭐하냐? 학교에서 공부가 돼?"
"일단 남아 있으면 뭐라도 보지."
"우리는 담임이 지랄이라. 어쨌든 있어야 돼."
"정석아 너는?"
"집에가도 할 것도 없고. 어차피 학원이 10시라."
"10시에 학원을 간다고??"
"그럼. 다 그때 해."
"...잠은 언제 자? 끝나고 도서관도 간다며?"
"늦게 자야지. 난 어제도 2시에 잤다."
"난 맨날 3시... 죽겠어."
"와~ 이 새끼들 딸은 언제 치냐?"
"그건 다 해."
"그럼. 그건 뭐 알아서 잘하고 있어."
전공이 바뀌니 서로의 시간이 어긋나는구나.
앞으론 점점 더 이런 밥 한 끼 먹을 시간이 소중해질 거 같다.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며 후문 가까이 닿고 있었다.
그때.
"태윤아. 김태윤. 마하? 어!? 같이 있네!!"
"음? 마하야. 혜정이다."
"쟤 왜 저렇게 뛰어오냐?"
"뭐야? 너 혜정이한테 뭐했어?"
"내가 쟤한테 하긴 뭘 해 병신아..."
"근데 왜 저래?"
"몰라 나도."
뭐지? 아까 지나가다 우승 축하는 받았는데.
웃는 얼굴을 봐서는 나쁜 소식은 아닌 거 같고.
아무튼 불렀으니 다들 걸음을 멈춰본다.
"왜? 뭐야?"
"헉 헉-! 잠깐만. 나 교문에서부터 뛰어서 지금 숨이 너무 차서..."
"뭔데? 플래카드 바꿨어?"
"아니 그게 아니라. 헉 헉. 지금 학교 앞에!!"
후문은 번화가랑 이어지고, 정문은 여자애들이 잘 가는 분식집이 있다.
혜정이도 친구들과 저녁을 먹으러 나가는 길이었단다.
그런데.
"어떤 애가 널 찾아왔어."
"어떤 애?"
"응! 엄청 귀엽게 생겼어. 다람쥐 같애!!"
혜정이는 마치 자기 일이라도 되는 양 웃으며 그 말을 전해주는데. 상어 때가 또 한번 피 냄새를 맡는다.
"다람 쥐가 뭐??"
"누가!! 어떤 새끼가!! 이 새낄 왜!!!"
"야. 여자애야. 새끼가 뭐야."
"여자애!!"
아이고 상어가 낫지... 이 무슨 좀비 때도 아니고...
"혜정아... 여자애가 마하를 찾아왔다고?"
"어~~어! 그렇다니까!"
"씨발년아! 아니라매!!"
"잠깐만 진정하고..."
"뭐야. 운동하는 새끼가 나가서 뭔 짓거릴 하고 다니는데 여자애가 찾아와."
"아... 피곤하다고... 이 손은 좀 놓고 이야길 하든가..."
오늘 아침엔 그렇게 우승을 축하해주던 친구들이었는데. 대체 뭐가 그리 화가 나는 걸까. 고3이라 그러나?
"구마하 넌 진짜... 아니다. 됐다."
"일단 뒤졌어. 그건 알아 둬."
"야. 일단 가보자... 누군지 얼굴은 보고 얘기하자."
세 녀석이 먼저 후다닥 가버리고, 혜정이가 이마에 땀을 닦아내며 허리를 펴고 일어선다.
"대체 저것들은 왜 이렇게 남 일에 진심인 거냐고..."
"후우~ 아고 숨차라. 후우우~ 그래서? 누구야?"
"몰라. 가봐야 알지. 근데 왜 너까지 난리냐?"
"교문에서 두리번거리고 있길래. 누구 찾아요? 물어보니까 플래카드 슥 보면서 혹시 너 아냐고 하길래. 바로 뛰어왔어."
"고맙구만."
"여자친구야?"
"몰라. 다른 학교에서 보낸 도전자나 암살자일 수도 있잖아."
"하하! 인기 좋은데? 축하해!"
"축하받을 일인가..."
저 멀리 친구들이 "아 씨발 뭐해! 빨리 오라고!!" 큰 소리치는 바람에 혜정이한테도 인사를 전했다.
"간다 가. 새끼들 진짜... 야 나 갈게. 저 새끼들 아침부터 지랄이라."
"아무튼, 잘 해. 아무 이유 없이 찾아오진 않았을 거 아냐."
"그래."
"..."
"왜?"
"아니야. 가."
"어. 간다."
"응..."
혜정이의 눈빛이 파트너 쉽의 종결을 말하고 있다.
무엇보다 아쉬워 하는 감정이 보여 나도 조금 놀라는 중이다.
얘도 나한테 아무 마음이 없던 건 아니었구나... 정말 그냥 섹스만 하려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어.
물론 내 착각이라고 할 수 있지만, 어느정도는 마음을 확신한다.
그 정도의 감정은 알 수 있지. 말 그대로 우리는 꽤 많은 경험을 함께 했으니까.
눈빛이나 몸짓. 작은 호흡까지 서로를 맞췄는데, 시선 하나 모를까.
"안녕 마하야. 진짜 잘 해."
멀어지는 가운데 나직한 인사말이 들렸지만 모르는 척 걸었다.
나도 마음으로 인사를 건넸다.
그동안 정말 고마웠다 혜정아.
* * *
"마하야~"
귀엽다고 하길래 혹시 다빈인가? 싶었는데. 역시나 다빈이였다.
다람쥐라. 그렇게 보니까 또 다람쥐 같이 보이기도 하는구나.
"여긴 어떻게 왔어?"
"으음. 테니스 하는 친구가 성남에 시합 있어서 응원 왔다가."
"아~ 그래."
다빈이는 운동복이 아닌 교복을 입고 있었다.
그래서도 애가 더 작고 어딘가 인형 같다는 느낌을 주는 것 같다.
"오늘은 교복 입었네?"
"응. 나도 운동 없을 땐 교복 입지."
그래서. 왜 찾아왔지?
나도 얼굴 보니까 반갑긴 한데.
"야. 비켜."
"좀 나와 봐."
"아. 또 뭐?"
"안녕하세요. 김태윤입니다."
"전 마하랑 베스트 프렌드 이정석이라고 합니다."
"저도 마하랑은 정말 둘도 없는 사이죠."
후우... 그래 뭐 일단, 소개는 해주자.
한숨을 훅 내쉬며 친구들을 알려주려는데.
다빈이가 꾸벅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안녕하세요. 저 마하 여자친구 최다빈이에요."
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