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0화 〉 승자의 품격 (6)
춘계대회 마지막 날.
남아있는 모든 시합이 진행되는 가운데, 남자 중거리 800미터 예선이 시작되었다.
사람들은 한 선수를 주목한다.
100미터 대회 신기록과 200미터 준우승을 이뤄낸 단거리 선수 구마하.
이제는 고교 육상 관계자 모두가 그를 알고 혜성같이 나타난 신인이 이것저것 경험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라는 시선으로 지켜보았다.
하지만, 결과를 보자 또 한번 말이 줄어든다.
"단거리에 중거리라..."
"심지어 기록도 나쁘지 않어..."
"대체 상률이랑 주영인 저런 놈을 어디서 구한 거야?"
시합을 마친 구마하도 땀을 뻘뻘 흘리며 전광판을 돌아본다.
1:58:65라는 기록에는 감출 수 없는 미소가 지어졌다.
육상연맹이 제공하는 기록표를 뒤집어봐야 알겠지만 2분의 벽을 넘었다는 건 전국 100위 안에 들 수 있는 성적이었다.
이주영과 한상률도 하이파이브를 나누며 말했다.
"어떠냐? 전설의 800미터 전력질주를 드디어 봤는데."
"그러게. 진짜 연습 많이 했나본데."
"마하야!! 일로 와 봐."
"네. 감독님!"
구마하의 활약에 이주영의 가슴도 뜨거워진다.
스포츠란 아무리 떠들어도 선수가 답을 찾지 못하면 길이 없는 법.
그렇게 어려워하더니 혼자 많은 노력을 했구나.
선수의 기특함에 이주영이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잘했다."
"감사합니다!!"
곧이어 2차 예선을 치루고 결승전을 앞두게 된 800미터 시합.
대한 체고 진영에선 조영욱 감독이 출전명단을 들어보며 눈을 흘기고 있었다.
"2차는 얼마 나왔다고?"
"더 줄었습니다..."
"몇인데?"
"1분 57초 59였습니다."
조 감독은 머리가 지끈지끈 거린다.
뛰면 뛸수록 빨라진다는 선수라니... 그것도 초 단위로 기록을 줄이고 있다...
"참. 나 신기하구만. 뭔 괴물도 아니고..."
"왜 이런 재능이 우리한테 안 오고 시덥잖은 경기도 구석에 밖혀 있을까요?"
"시끄러."
"네..."
지나가던 어린 중학생 선수들도 그의 이름을 꺼내고 있었다.
"800미터 결승 언제하지?"
"그 형 또 우승할까?"
"진짜 미쳤다. 어떻게 두 개를 다 할 수 있어??"
조영욱과 코치도 서로를 보며 한숨을 쉬었다.
뭐가 답답한지는 모른다. 그냥 한숨이 절로 나오는 상황이었다.
"승태는...?"
"1분 54초 78 나왔습니다. 조 1위로 통과 했습니다."
"3초 차이라..."
대한 체고 800미터 간판 3학년 유승태.
2학년 때 이미 대학 입학을 확정지을만큼 단일종목에 있어서 압도적인 기량을 보이는 선수였다.
"잠깐 불러 봐."
조영욱 지도자의 부름에 친구들과 앉아있던 유승태가 달려나왔다.
"네. 감독님. 부르셨어요?"
"애매한 녀석이 하나 있더구나."
"걱정마세요. 걔 뛰는 거 봤는데 제가 질 일은 없습니다."
역시 듬직하다. 그러나 세상일 어찌 될지 모르는 것. 설마 지성이가 그렇게 나가떨어질 줄 누가 알았겠는가. 조 감독은 강력한 메시지를 남긴다.
"승태야. 만약에 말이다."
"네."
"저놈보다 늦게 들어오면 부모님들한테 전화해서 데리러 오시라고 해라."
"왜... 왜요?"
유승태가 겁먹은 듯 쳐다보자 조 감독이 피식 콧방귀를 끼며 말했다.
"안 그럼 내가 너네들 다 죽일 거 같아서."
"..."
감히 대한체고가 어떤 학굔데 이렇게 조롱을 받는단 말인가.
조영욱의 경고에 유승태는 얼굴이 파랗게 질려 다시 없을 승부욕을 불태우고 있었다.
"너랑 또 누가 결승 올랐냐?"
"지... 진운이랑 1학년 성호요."
"진운이도 잠깐 오라고 해 봐."
"네..."
성호는 아직 신인이니 가만두고. 진운이는 우승과는 거리가 있는 선순데, 어떻게 간신히 끝자락에 걸쳐 들어왔구나.
설마 이런 일까지 해야하나 싶지만 역시 승부란 모르는 거니까.
"감독님. 찾으셨다고요."
"음. 진운아. 결승 나갔다며."
"네!!"
처음으로 받는 관심.
대한 체고라고 모든 선수들이 엘리트 취급을 받는 건 아니다.
3년동안 이렇다 할 메달을 획득하지 못 한 청년은 마침내 노력에 대한 보상을 받는 것 같아 뿌듯한 미소를 지어보이는데.
조영욱이 퉁명스런 표정으로 그의 발목 쪽을 쳐다본다.
"다리는 좀 어떠냐?"
"네? 다리요? 괜찮습니다."
무슨 다리를 말씀하시는 거지? 김진운이 아리송한 얼굴을 하고 있을 때, 조영욱이 다가와 어깨를 감싸쥐며 조용히 말했다.
"김 코치한테 왼쪽 발목이 아프다고 했었다며?"
"예? 아니요. 그런 적 없는데요."
"했잖아. 왜 아니라고 그래."
"..."
"뛸 때 조심하고. 넘어지거나 하면 안 될 거 아냐. 그치?"
도통 영문을 모르겠다는 김진운에게 조 감독이 시선을 피하며 귓말을 건넸다.
"인사이드 파고들 때 구마하 옆에 바짝 붙어."
"지... 진로 방해 하라는 말씀이신가요...?"
"야 이 새끼야. 누가 진로 방해라고 그랬어. 다리 조심하고. 괜히 아파서 넘어지거나 하면 안 되니까 하는 말 아냐."
"가. 감독님..."
"잘 해주면 삼국대 정도는 써주마."
"..."
"가봐라."
건국 단국 그리고 동국 대학교 추천서를 조건으로 반칙을 지시받은 김진운.
자존심이 땅끝으로 떨어져 내리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본능은 솔직하다. 대입추천서가 주는 유혹은 그만큼 강렬했으니까...
결승전은 오후에 열릴 예정. 아직은 시간이 있다.
과연 뭐가 정답일까. 바른 판단이 내려지질 않는 김진운은 운동장을 배회하고 다녔다.
만약 내가 구마하를 방해한다면, 승태의 우승은 손쉽게 이루어질 것이다.
그 조건으로 대학을 갈 수 있다면...
역시, 실력이 없어서 그렇다... 실력이 있다면 이런 대우를 받을 일도 없으니까.
감독님이 잘하는 애한테 그런 작전을 내리겠어? 절대 아니지...
뭐가 문제인지 알면서도 그렇게 받아들이는 게 속이 편했다.
그래야 대학이라도 나와, 헬스장 트레이너라도 될 수 있으니까...
울컥울컥하는 속상함을 그렇게 현실과 타협하는 김진운의 눈앞에.
"뭐야 저건 또...?"
멀지 않은 곳 구마하가 몇 사람에게 붙들린 모양새로 구석진 곳으로 끌려가고 있었다.
김진운은 본능적으로 그들을 따라가 본다.
한 사람이 구마하의 멱살을 붙잡고 감정 섞인 목소리로 소리쳤다.
"이 새끼가 똑바로 말 안하냐고!!"
"미치겠네 진짜. 아니 그런 게 아니라..."
"그런 게 아니면 뭔데? 걔가 왜 너한테!?"
김진운은 황급히 달려들어 두 사람을 때어내며 말했다.
"야!! 니네 뭐하는 거야! 그 손 안 놔!!"
"...뭐야? 이건?"
"뭐하는 짓이냐고. 저리 안 비켜!!"
구마하를 붙들고 있던 건 한주고 3학년 이동민이었다.
주변에 있던 얼굴도 수원 체고 김인수나 다른 단거리 3학년 선수들이었다.
김진운이 다급한 얼굴로 노려보는데 김인수가 나서며 달랬다.
"진운아... 너 왜 그래?"
"왜 그러긴! 그러는 너야말로 왜 이러는데!!"
이동민도 놀란 얼굴로 구마하에게 물었다.
"...마하야. 얘 누구냐?"
"몰라... 야. 너 왜 그래?"
"어...?"
"얘네들 나 괴롭히고 그런 거 아니야."
누가봐도 오해를 살 법한 상황이지만, 자초지종을 듣고나니 김진운만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래서...? 여자애 때문에 이런 거라고?"
"야. 걔가 그냥 여자애냐!? 너도 3학년이면 최다빈 존나 까칠한 거 알 거 아냐."
"알기야 알지만..."
성운여고 최다빈이 구마하에게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는 것이 이 사달이 난 원흉이었다.
진짜 누가 운동하는 놈들 무식하다고 안 할까 봐, 하는 행동 하고는...
"그냥 숙소가 같은 곳이라 그렇다니까."
"지랄할래? 그 숙소 니네만 써? 다른 애들도 있고. 어!? 다른 남자애들도 있고!!"
"그래. 저기 경북에서 온 애들도 거기 있다더만."
"하하. 미치겠네..."
아무튼, 큰 일 아니라니 김진운이 가슴을 쓸어내리는데, 구마하가 말했다.
"야. 근데, 너 진짜 뭐냐? 대한 체고가 이래도 돼?"
"...뭐? 우리 학교가 뭘 어쨌는데."
"아니. 어찌됐든 위험한 거 알고 구해주러 온 거 아냐. 폭력사건이 될 수도 있는데. 이렇게 막 나서는 거 쉽지 않잖아."
그 말에 주변 다른 사람들도 감탄사를 아끼지 않았다.
"그러게. 존나 멋있다."
"의인이네 의인. 요즘 세상에 흔치 않은데."
"동민이만 나쁜 새끼지."
"아니 씨발 황당하잖아. 이 새끼 지가 뭐라고 최다빈이랑 친하게 인사하는데..."
다들 단거리 선수들이라 시합이 끝나서도 더 그렇겠지만. 승부를 떠나서 여자애 이야기를 이렇게 한다는 자체가 신기한 김진운이었다.
여유로운 분위기에 그의 마음 속 긴장이 조금 녹아드는 것 같다.
구마하도 그의 어깨를 꽉 움켜쥐며 말했다.
"야. 고맙다. 진짜 이러기 쉽지 않은데."
"별 일 아니면 됐어..."
김인수가 서로 인사를 시켜줬다.
"진운아. 너도 결승 나가지?"
"어..."
"둘이 인사 해. 같은 종목이잖아."
"..."
"하하! 반갑다. 잘 부탁한다."
"씨발 너 중거리냐? 응원해야겠네. 이 새끼 발라버려. 처음 나온 주제에 결승이라니 존나 건방지지 않냐?"
"그러게. 발라버려 진운아."
"하하! 인수야. 우리 알고 지낸 지 며칠 안 된 걸로 아는데?"
"닥쳐. 최다빈이랑 가깝다는 점에서 넌 이미 적이나 다를 바 없어."
"미친놈들. 걔 그렇게 까칠한 애 아니라니까..."
"까칠해. 까칠하다고! 최다빈은 중학교 때부터 계속 그랬어. 신인이 뭘 안다고 떠들어."
김진운은 이동민을 보면서 한주 고도 계주시합에서 은메달을 땄지... 라는 걸 떠올린다.
구마하나 김인수는 말할 것도 없고, 여기 있는 대부분이 다들 이번 춘계대회에서 나름의 성과를 거둔 애들이었다.
가자. 내가 어울릴 애들이 아니다...
김진운이 그리 생각하며 빠져나가는데. 구마하가 그를 놔주지 않는다.
"어디가?"
"왜?"
"우리 아이스크림 먹으러 가는 길인데 같이 가자."
"됐어... 너네끼리 먹어."
"안돼! 우리 형이 고마운 사람 만나면 함부로 보내지 말라고 그랬어."
"야. 아니. 야! 난 됐다니까!!"
힘이 장사다. 이런 파워로 그런 지구력을 내다니... 대체 이 놈은...
구마하를 떨쳐내지 못 한 김진운도 옹기종기 매점 앞에 모여 아이스크림을 먹는다.
"여기."
"땡큐."
"뭘 땡큐야. 내가 땡큐지."
어찌보면 상대를 알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아닐까?
김진운이 구마하를 보며 궁금한 걸 물어보려는데. 김인수가 먼저 그에게 질문을 던졌다.
"진운아. 승태는 뭐하냐?"
"뭐 그냥 있겠지."
이동민도 그들을 보며 어떻게 아냐고 물었다.
"우리 다 중학교 때 같은 학교."
"오~ 넌 왜 대한 체고 왜 안 갔어?"
"나야 집이 원래 수원이니까. 중학교를 서울로 다닌 케이스지."
"하긴. 집 멀면 고달프지."
김진운도 구마하를 돌아본다.
"넌 왜 체고 안 왔어?"
"나? 나 원래 운동하던 놈 아니야."
"근데 왜 이렇게 잘해...?"
같이 훈련하는 이동민이 말해줬다.
"마하 이 새끼 장난 아니지."
"뭘 또 장난 아냐. 말 좀 지어내지마."
"솔직히 이 새끼와서 우리만 더 좆빠져. 지민이 형 있을 때가 좋았는데..."
"우리 선생님도 용인 한번 갔다오자고 그러시던데. 세 학교 모이면 시끌시끌 하겠다."
"세 학교라고 해봐야. 우리는 나 하난데 뭐."
구마하도 김진운을 보며 물었다.
"너네는 합동훈련 같은 거 안 하지?"
"대학교 찾아가는 거면 몰라도, 고등학교 선수들이랑은 그런 거 거의 없어."
다들 오오~ 역시. 하는 식으로 감탄사를 날리는데, 그것이 그렇게 부끄럽게 느껴지는 김진운이었다.
그래. 우리는 대한 체고다.
최고의 학교가 왜 비겁한 승부를 지시한단 말인가...
"마하야."
"응?"
"결승 잘 해보자."
"그럼. 당연하지."
드러낼 수 없는 각자의 명예를 걸고 남자 800미터 결승전이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