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륜기로 가버렷-35화 (35/401)

〈 35화 〉 승자의 품격 (1)

"구라치지마 병신아."

"진짜라고!"

"우승했다고? 정말로?"

"그렇다니까!! 속고만 살았냐!"

"..."

"애들 있어?"

오후 6시. 첫날 모든 일정을 마치고 숙소로 가는 길에 태윤이한테 전화를 걸었다.

학교에선 분명 야자를 앞두고 석식을 먹고 있을 시간이었다.

"야! 구마하 이 새끼 우승했데!!"

그렇게 우승 소식이 학교에 전해진다.

친구들의 축하가 이어지지만, 대부분은 다 욕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좆까 씨발놈아! 니가 뭘 이겨! 크하하하!!"

"야. 마하야 아픈 애들만 나온 거 아니냐! 카하하!"

"이것들이..."

감독님과 차를 타고 있어 난 욕도 못 하는데...

"마하야. 방금 아픈 애 어쩌구는 누구냐?"

"남수요. 저랑 다니는 애들 중에 젤 뺀질거리게 생긴 놈 아시죠?"

"학교가면 나한테 좀 들리라고 해라. 혼줄을 내줘야지."

"문과. 3반입니다. 이 자식 번호가 몇 번이더라..."

숙소에 도착했다.

바로 쉬고 싶은데, 그래도 우승은 우승이라고 근처 중국집으로 가자는 감독님이셨다.

"아이고~ 피곤해라."

"수고하셨습니다."

"선수가 수고했지. 내가 뭘."

"저야 뭐 한 거 있나요."

"아무튼, 아직 200 경기가 남았지만. 그래도 일단 뭐든 축하는 해야겠지?"

"네!"

"하하! 오늘 돈 좀 깨지겠구만."

곧이어 한주 고 선수들도 도착했다.

이 감독님과 친구들의 축하 인사를 받으며 회식을 가졌다.

여러 좋은 이야기가 오가는 가운데. 마침내 몰래 준비한 깜짝 선물을 꺼내 놓았다.

"800을 신청했다고?"

"네."

"우리가 하지 말라고 했었잖아."

"그래도 아깝잖아요. 훈련도 그렇고, 한번은 도전해보고 싶었어요."

포기하지 않고 계속 훈련을 하고 있었다고 말씀드렸다.

중거리에 나간다는 사실을 듣자, 역시나 이주영 감독님 얼굴에 훈훈한 미소가 스쳐간다.

한 감독님도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고개를 끄덕이셨다.

"그래. 맘대로 해라. 우리도 대회 중간에 술 처먹는 선생들인데."

"난 아냐. 너만 먹고 있지."

"이 자식. 받어!! 자 다들 주스 잔 들어라!"

한주 고도 장애물 넘기 선수가 좋은 성적을 기록한 만큼, 여러모로 기분 좋은 저녁시간이었다.

"아 배부르다. 잘 먹었다 마하야."

"동민아. 넌 이제 계주 남았나?"

"그렇지. 한 종목 남았지."

"높이뛰기 하고 싶다고 얘기해봤어?"

"됐어. 시설도 없는데 그런 소리를 뭐하러 해."

"그래도 말씀드려보지. 또 아냐? 코치를 초빙 할 수도 있고. 매트를 사줄 수도 있고."

"됐어 새끼야. 난 지금 이렇게 운동해도 충분해."

아까도 높이뛰기 예선전을 한참 지켜보던 동민이였다.

하고 싶은 게 있어도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어쩔 수 없는 것. 뭐 물론 모든 조건이 다 나에게 안정될 수 없음을 알고 있지만...

"선수가 운동만 집중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냐? 난 그렇게 생각 안 하는데."

"왜?"

"그찮아. 우리가 무슨 대단한 일을 하는 것도 아니고. 기껏 운동하는게 뭐 대수라고. 세상 사람 다 어떻게 지 편한 것만 하고 살겠어. 안 그래?"

"...씨발놈이 갑자기 무게 잡고 지랄이지?"

"니 때문에 그러는 거 아냐. 병신아."

"내가 뭐?"

"바로 옆에 있던 놈이 우승자가 되니까. 가오 빠지는 거 같아서 똥 폼 좀 잡아봤어."

"미친놈. 그래도 고맙다. 인정해줘서."

"마하야. 다시 한번 우승 축하한다. 넌 그럴 자격 충분해. 지난 1년 누구보다 노력한 거 내가 안다."

"땡큐. 너도 계주 파이팅 하자고. 고생했잖아."

"야 진짜 너 우리 계주로 뛰면 안 되냐? 어차피 훈련도 우리랑 같이 하는데."

"하하! 그럴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냐."

두런두런 다양한 이야기 가운데, 동민이가 물었다.

"근데, 대체 어떻게 그렇게 하는 거야?"

"뭐가?"

"아까 보니까 결승도 별로 긴장 안 하는 거 같던데?"

"아~ 뭐 별로. 특별할 건 없어."

"역시. 잘하는 놈들은 뭔가 다른가?"

"그런 게 어딨겠냐."

알게 모르게 긴장감 때문에 본 실력이 발휘 안 되는 동민이였다.

시합을 앞두고 평정심을 갖는 무슨 비법이 있느냐 물어보는데.

"글쎄. 있다면 역시 섹스가 아닐까?"

"섹스??"

녀석이 눈을 껌벅껌벅 거리며 물어본다.

"시합 전에 누구랑 했어?"

"하긴 누구랑 해. 감독님이랑 계속 붙어있었는데."

"설마... 감독님이 빨아주거나 그런 건 아니지?"

"미친 새끼. 하하하! 진짜 씨발 여기도 쌍 또라이 새끼 하나 있네."

준비 소리를 들으면 잡생각이 사라진다.

그리고 출발 신호가 들리면 섹스와 같은 기분으로 시합을 즐긴다고 해줬다.

"...뭔 소리야? 좀 알아듣게 설명을 해 봐. 꼴리지도 않고 변태 같애."

"그렇잖아. 결승선을 향해 존나 뛰는 거나. 쌀려고 미친듯이 허리 흔드는 거나. 무슨 차이가 있어."

"야 잠깐만 스톱. 너 이 새끼... 설마..."

"음?"

"너 혹시 해봤냐?"

운동은 나에게 섹스였다.

그러니 내가 운동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별 거 없다. 그저 진심을 다 해 따먹는 수 밖에.

*    *    *

대회 이튿 날, 200미터 시합일정이 잡혀 있었다.

전날 100미터 우승으로 아침부터 많은 사람들한테 인사도 받고 생각지도 못한 주목을 끌고 있는 중이다.

"축하한다. 엄청 빠르던데."

"고맙습니다."

"어. 구마하라 그랬나? 악수 한번 해."'

"하하! 아이고 악수라니요. 감사합니다."

다양한 사람들 가운데는 대학 관계자 같은 분들도 더러 있었는데, 아직은 그냥 긴 말없이 서로 이것저것 질문이나 건네는 편이었다.

"사람들이 그러던데, 운동 시작 한지 얼마 안 됐다면서?"

"네. 1년 됐습니다."

"그렇군. 대학은 어디로 갈 지 정해놨어?"

"아니요. 아직 거기까지는..."

"후훗 앞으로 잘 지켜보마."

와우. 이것도 스카웃 같은 거 아닐까?

뭔가 하루 만에 분위기가 너무 바뀌는데?

역시 승리의 맛은 달구나.

"저. 마하 오빠?"

"음? 뭐야?"

"우승 축하드려요."

그리고 여중생들이 인사를 건넸다. 달다 못해 이가 썩을 거 같다.

"어 그래. 너희도 힘내고."

"네!"

아이고. 병아리들. 삐약삐약 거리는 거 봐라.

세상 살다살다 내가 여중학생들한테 인사를 받다니...

올림픽의 신이 누구였지? 제우슨가? 고맙습니다. 앞으로 십자가고 불상이고 코란이고 다 무시하고 살게요.

"오빠 축하드려요!"

"어 그래! 고마워."

"풋! 고맙긴 뭐가 고맙냐!! 폼 잡고 있어."

중학부 여자애들도 있고, 여기저기 감독님들도 계시는 가운데, 난데 없이 들려온 여자애 목소리. 전국체전에서 만났던 성운여고 기연정이였다.

"뭐야. 너냐?"

"목소리 바뀌는 거 봐라. 왜? 난 축하도 못 해줘?"

"..."

하긴. 냉정히 따져보면 얘랑 나랑 굳이 거리 둘 이유가 없지?

"너도 대회 나왔어?"

"그럼 난 뭐 선수 아니냐."

"계주?"

"응. 오늘 도착했는데. 소식 들었어. 어제 우승했다며? 축하해."

"그래. 고맙다. 형은 잘 지내?"

"몰라. 잘 있겠지 뭐."

몇 달이 지났다고 또 여자친구를 바꾼 건가?

하긴 대학생도 됐는데, 그 형이야 또 다른 인물들 찾아 떠났겠지. 언제 봐도 인물 값 하는 형이다.

"중국 가서 좋겠다."

"중국? 베이징 올림픽?"

"꿈도 야무져. 뭔 올림픽이 먼저 나와?"

"근데 내가 중국을 왜 가?"

"너 100미터 우승했다며. 한중일 주니어 선수권 나가잖아."

"...왜?"

"허~!"

기연정이 하나하나 설명해 주는데, 춘계대회 우승자는 한중일 3국이 주최하는 주니어 선수권 대회를 참가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단다.

"그런 것도 있었어...?"

"야... 진짜 니네 감독은 뭐하냐. 이런 것도 안 알려줘?"

"예선 하고 있으래. 어제 과음했다고."

"허허... 허허허허~ 우승팀은 뭐가 달라도 확실히 다르네..."

그때 저 멀리 한 여 선수가 기연정을 부른다.

"연정아. 거기서 뭐해?"

"어. 다빈아. 야 나 갈게. 친구가 불러서."

"그래. 잘 하고."

"너도!"

"빨리 와!"

"알았어. 까칠하게 그러지 좀 마."

기연정은 다시봐도 기연정이고.

그나저나 최다빈이라... 귀엽게 생겼네. 저기야말로 동급생이구만.

"주니어 선수권이라."

중국에서 한다고? 일본 사람들도 온다고?

중국말은 니하오 밖에 모르지만.

일본? 니.혼.진.데.스.까~~!

올림픽 못 나가면 거기라도 나가면 좋겠다.

*    *    *

"그래서. 준결승은 끝났냐?"

"네. 결승 진출 했어요."

"아이고... 잘했다. 그럼 마하야. 우리 어제 그 국밥집 가서 점심 좀 먹자."

"약도 좀 사올까요? 감독님 아직도 술 냄새 나요."

"그러지마. 이것도 다 니 때문에 마신 술이니까. 젠장 아직도 설사가..."

식당에 들어와 한 감독님이 뜨거운 국물을 후루룩 후루룩 떠먹고 계시는 가운데, 나도 차근차근 수저를 들었다.

"오늘은 두 그릇 안 먹어?"

"네. 어제 과식해서. 오늘은 그렇게 배 안 고파요."

"아까 사람들 얘기 들어보니까 우승했다매? 축하해."

"고맙습니다!!"

"사장님... 축하해주시는 김에, 저 이거 국물 리필 안 되나요? 뜨거운 게 좋네요."

"이리주쇼. 거 선생이 애들 데리고 와서 술을 이리 먹으면 어떻게"

점심을 마치고 다시 운동장으로 돌아가는 길.

감독님이 조금씩 컨디션이 돌아오시는가 기운을 차리면서 말씀하셨다.

"오늘도 우승할 거냐?"

"모르죠. 뛰어봐야 알죠."

"...이런 말 어떻게 받아들일지 모르겠지만. 만약 오늘도 우승하면, 내일 난 돌아간다."

"네? 왜요? 중거리는요? 감독님 가시면 전 누가 코치해줘요?"

"주영이 있잖아. 좀 봐 줘. 죽을 거 같애..."

주머니도 간당간당하고, 오랜만에 만난 사람들 때문에라도 도망치고 싶다는 감독님이셨다.

"인간들. 어제도 우리끼리 조용히 보내려는 거 어떻게 알고 쳐들어 와서는..."

"알겠습니다. 사람은 살리고 봐야죠. 남은 경기는 이 감독님이랑 잘 해볼게요."

"그래. 어우 일단 화장실부터 좀 갔다오자..."

한쪽에서 감독님을 기다리고 있는데, 권지성이 보였다.

"지성아."

"마하 형...?"

어제 시합을 마치고. 이겼다는 기쁨보다 더 먼저 챙긴 것이 지성이란 친구의 컨디션이었다.

나도 내공을 배우고 많은 고생을 거쳐 오늘에 다다랐기에 알 수 있다.

이 선수도 어려서부터 여기까지 오고자, 정말 뼈를 깎는 고통을 이겨내 왔을 것이다.

그런 노력이 단지 10초 짧은 승부로 결과가 정해져선 안된다는 생각이었다.

"결승 때 보겠네."

"..."

"잘해보자."

"저기..."

"응?"

"어제. 저한테 축하한다고 왜 그러셨어요?"

"축하 받을 일이잖아."

"전 형한테 졌잖아요."

"대신 너 자신한테는 이겼지."

"...무슨 뜻이세요?"

"도망가지 않았잖아. 시합을 나왔고. 결과를 냈고, 완주를 했어. 그리고 3위라는 성적을 냈다."

"..."

"난 충분히 축하 받을 일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런가요..."

"200미터 잘해보자. 참고로 봐주지 않는다. 승부는 별 개의 문제니까."

저 멀리 또 한번 장청소를 마친 감독님이 부르고 계셨다.

슬슬 경기장으로 돌아가야겠다 싶어 돌아서는데.

"마하 형."

"응?"

"저도 안 봐줘요."

"하하! 당연하지!"

오후 2시. 200미터 결승전을 앞두고 있었다.

아무래도 단거리 주 종목이다보니, 전날과 비슷한 얼굴들이 대거 자리하고 있다.

"후우. 오늘은 덥네. 안 덥냐 인수야?"

"몰라. 우울해..."

"왜? 뭐 있어?"

"겨우겨우 지성이 따라잡았나 했더니, 구마하란 인간이 튀어나와서..."

"하하하! 왜 이래. 에이스께서."

"야. 우리 선생님 어제 너네 감독이랑 술 마셨다며?"

"어. 밤 늦게 오셨더라. 친구 분들 다 모이시는 거 같던데."

"젠장. 우리 애들도 오늘 하루종일 약 심부름 다니더만. 뭘 마셨길래 그러냐?"

"고량주."

"대단들하다···. 어떻게 보면 살아있는 게 대단하네. 누가 체육인들 아니랄까 봐..."

시합을 앞두고 시시콜콜 수다를 떨고 있는데, 우리보다 먼저 계주 선수들 시합이 진행되고 있다.

동민이를 비롯한 한주 고도 예선을 통과하고, 다음은 여자 선수들 차례.

"연정이도 나왔네. 잘해라."

"어? 너 쟤 어떻게 알어?"

"원래 우리 학교였는데 작년 2학기 때 장학금 받고 전학 갔어."

"아~ 스카웃 받은 거구나."

"작년 3학년들 졸업하면서 선수층 얇아진다고. 그때 여기저기 선수들 많이 불렀다고 그러더라고."

"나도 불러주지. 나도 잘 할 수 있는데..."

"하하! 여고를 니가 왜 가!"

여고중에선 체육 시스템이 잘 되어있는 성운여고.

원래도 유명한 선수가 많았다고 그러는데.

"어떻게 보면 쟤 때문에 애들 모았을 거야."

"누구?"

인수가 순서를 기다리고 있는 작은 체구의 여선수를 가리킨다.

"쟤가 저 학교 탑이야."

"오오~"

"얼굴도 귀엽고, 몸도 아담하고. 그리고 무엇보다 빠른."

마지막 주자. 최다빈. 고등학교 3학년.

고1 때부터 육상계의 아이돌로 군림하다 작년 부상으로 올해 복귀하는 선수였다.

역시 동급생.

그럼 그렇지.

어쩐지 존재감이 남다르더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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