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륜기로 가버렷-34화 (34/401)

〈 34화 〉 메달의 그림자 (5)

"어린놈의 새끼들이 근성머리가 빠져가지고. 뭐해 빨리 엎드려!!"

중학생 같아 보이는 애들이 코치의 구령하에 매를 맞고 있었다.

"어떻게 된 놈의 게. 한 새끼도! 결승전을 못 나간다는 게!! 말이 되냐고!!!"

야구경기도 없는데 배트는 어디서 나온 걸까? 설마 들고 다니는 건가?

구마하가 멍하니 아이들이 맞는 걸 보고 있는데, 한상률이 주의를 돌렸다.

"가자. 뭘 보고 있냐."

"...감독님. 왜 저러는 거래요? 사람들도 있는데."

"일로 와 이놈아. 신경쓰지말고"

아픔을 씻으려 엉덩이를 비비는 아이들과 눈이 마주친 구마하. 슬프고 분해보이는 눈빛이 뇌리에 깊이 박힌다.

두 사람은 운동장 구석 그늘진 곳에 누워 체육계의 어둠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다.

"학생 지도자의 실적은 결과로 나온다."

많은 예선이 오전 시간에 끝났다.

성과를 내지 못 한 책임을 선수에게 돌리는 모습에 구마하의 표정도 그늘이 드리워졌다.

"그래서요?"

"그래서는 뭐 그래서야. 실적이 없으면 자리가 힘들어지는거지."

"감독님들은 안 그러시잖아요."

"주영이도 없지않아 실적 압박은 받는 편이야. 난 뭐 조금 다르지만."

두 사람은 대학시절 중간에 선수를 은퇴.

임용을 거쳐 체육교사가 되었지만 많은 코치들은 계약직으로 묶여있는 상황이다.

"실적을 내야지. 안 그러면 생계의 위협을 받으니까."

"어른의 사정이네요..."

"그렇지. 어른이기 때문에 그렇지."

저 멀리 삼삼오오 지나가는 어린 여선수들이 있다.

한참 꾸미기 좋아할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짧은 스포츠 머리.

간식 하나를 나눠먹으며 꺄르륵 꺄르륵 자지러지는 천진무구한 모습을 보고 있자면. 저런 아이들에 누군가의 생계가 걸려있다는 사실이 애석하게만 느껴진다.

"마하야. 이런데 와서 보면 생각보다 운동하는 애들 많지?"

"네. 진짜 많은 거 같아요."

"저 많은 애 중에 몇 명이 프로가 되고, 국가대표가 되고, 메달을 딸까?"

"...엄청나게 적겠죠."

"그럼 나머지 운동하던 애들은 뭘 하고 지낼까 생각해 봤니?"

"아니요. 머리 아프게 굳이 뭐 거기까지..."

"하긴, 넌 인기 얻고 싶어서 운동 시작했다고 그랬지. 하하하!"

많은 이에게 운동은 삶의 수단이었다.

그나마, 학교 지도자라도 된 이들은 나름 선수 때 큰 업적을 쌓은 인물들이다.

평생 운동만 보고 살아서 자기 직업을 가지게 된 케이스가 되는 것이다.

그렇게 일평생을 승패만 따지던 이들이 어른이 되어 똑같은 과정을 제자들에게 되풀이 한다.

한상률은 덤덤하게 말했다.

"비난하지 마라. 그것도 살아가는 모습이다."

"차라리 감독님 같이 체육선생님하면 되잖아요?"

"훗. 체육선생이라..."

느긋하던 한상률의 분위기가 조금 무겁게 변하고 있었다.

"나랑 주영이는 선수로 성공하지 못했기 때문에 지금에 올 수 있었던 거야."

"..."

"어떻게 보면 실패자들의 결과지."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들었다.

대학 시절. 이주영 감독이 먼저 은퇴를 선언하고 입대를 신청했단다.

원인은 부상이었다.

"군대 갈 정도면 충분히 더 할 수 있는 거 아니었어요?"

"군인은 돼도 선수는 할 수 없다. 선수는 늘상 육체의 한계를 넘어서야 하는 사람들이라."

"...어디를 다치셨길래요?"

"여기저기. 청소년 때부터 십 몇 년을 운동만 했는데 몸이 남아나겠냐."

"감독님은요? 감독님도 어디 부상입으셨어요...?"

"아우 졸리다. 뭐 이렇게 쓸데없는 질문이 많냐."

"죄송합니다..."

"좀 자. 결승만 생각해. 실적은 따지지 않더라도 우승은 보고 싶으니까."

"네."

선선한 봄바람과 포식감에 한상률이 바로 코를 골았다.

구마하는 머리를 받치고 누워 멀뚱멀뚱 생각에 잠겼다.

훈육은 정말 훈련과는 땔래야 땔 수 없는 관계다.

한상률 이주영 두 사람도 훈련 중 독한 말들을 서슴치 않는다.

못 하겠으면 그만해라. 운동 취미로 해도 되잖아. 남들 놀 때 뭐하러 고생하냐. 나 같음 지금이라도 공부해서 대학 가겠다.

힘들어 죽을 거 같은 상황에 살살 약을 올리는 코치들.

구마하와 선수들은 차라리 패든가, 뭐 저렇게 빡치게 만드냐는 식으로 분노를 태워가며 승부욕을 끌어올렸는데.

"흐음..."

이제보니 머리를 쓰고 계셨던 거구나.

때리는 건 빠르고 간단한 방법이지만 상처가 남으니까.

하긴, 두 분은 우리같은 아픔을 너희가 겪지 않게 하고 싶다고 하셨지.

선수의 자발적인 움직임은 발전과 책임감을 동시에 가져갈 수 있으니까.

"감독님."

"아 왜? 잠이나 자라니까."

"잠이 안 와요."

"아직도 맞던 애들 신경 써?"

"뭐. 그정도는 아니고요..."

"그러다 결승 때 컨디션 떨어져 지면, 이번엔 또 누굴 원망하려고?"

"저 감독님. 하나만 여쭤볼게요."

"뭔데?"

구마하가 물었다.

두 분 대학 때 만나셨다고 했는데, 무슨 대학 나오셨어요?

한상률은 피식 웃으며 대수롭지 않게 답해준다.

"서울대."

"아 놀리지 마시고요."

"진짜야 인마. 그래서 주영이랑 나랑 바로 전과해서 임용 본 거야."

와우! 우와우! 구마하가 짐승 소리를 내며 감탄 시끄럽다고 혼쭐이 났다.

"거 참. 소란스럽네..."

"와... 학교 애들 모르는 거 같던데?"

"굳이 너희가 알 필요 있나."

한상률도 피식 웃음을 흘렸다.

"내가 왜 다른 방법으로 널 가르키는지 그게 궁금하냐?"

"네."

한상률이 다시 저 멀리 지나가는 선수들을 보며 말했다.

"심심했거든."

"아 감독님."

"후후. 그리고 좀 이 바닥에 대해서 반발심도 있었고."

지난 여름 이주영에게 들려준 이야기를 제자에게도 건네주는 한상률이었다.

운동은 즐거워야 한다.

물론 훈련은 고통스럽지만, 그것은 발전 과정에서의 고통이지.

성취를 얻고자 존엄성을 짓밟으며 가는 방법이 과연 언제까지 통용될 것인가.

"마하야. 너 아까 2등도 잘 한 거 아니냐고 물었지?"

"네."

"맞어. 잘 한 거야. 근데 말이다. 금메달이 아니면, 마치 죄라도 지은 거 같은 선수들을 뭐라고 해야할까..."

"..."

"2등도 그런 대우를 받는데, 그보다 더 밑에 있는 애들은? 아예 시합도 못 나간 사람들은?"

"감독님. 전 1등이 있는 건 2등이 있어서 그렇다고 생각해요."

제자를 돌아보는 한 감독의 표정에 은은한 미소가 어린다.

"그렇지."

"2등도 3등이 있고. 모든 결과에 승자가 대우받는 건 역시 승부를 겨뤄준 누군가가 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자식. 기특하구나. 인물은 없지만."

"맞잖아요! 저 같은 놈들 없고서야 어떻게 잘 생긴 놈들이 대우를 받아요. 안 그래요!!"

"하하하! 그렇지!"

한상률의 고백이다.

이 감독이 전학을 보내라고 수차례 강조했지만 내가 고집을 부렸다.

커다란 재능을 가진 너라는 학생을 보면서 개인적인 욕심을 부리느라 그랬었다.

"어떤 욕심요?"

"만약 내가 남들과 다른 방법으로 챔피언을 키워낸다면, 그것이 모든 체육계로 퍼지지 않을까? 하는 욕심."

때리지 않고 윽박 지르지 않고. 스스로 자발적으로 커나갈 수 있는 선수.

앞서가는 이들은 남들의 주목을 끄는 법. 무엇보다 여기는 대한민국이 아니던가. 조개구이 집이 돈을 벌면, 그 근처가 언젠가부터 조개구이 골목이 되는 곳이다.

"그랬어. 대신 나도 할 말은 있다."

"뭔데요?"

"코치비 안 받았으니까 원망할 건 없지?"

"감독님."

"음?"

"제가 진짜 꼭 이겨드릴게요."

즐겁게만 여기던 운동에 많은 이야기가 담겨있음을 알아가는 구마하였다.

하긴, 여기도 사람 사는 세상인데. 여러 가지 사정이 있겠지.

"반드시... 꼭 우승해서 감독님 꿈 이뤄드릴게요."

"그래. 가보자."

운동을 시작했기에 마침내 숙원하던 욕망(그것도 14층 사는?)을 손에 쥘 수 있었던 구마하.

그는 스포츠에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어떻게든 보답을 해주고 싶은 마음이다.

에이스는 에이스의 숙명이 있다고 말하지 않았떤가.

구마하는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받아들인다.

승부에서 메달의 그림자를 지워버리고 싶다.

*    *    *

고교부 남자 100미터 결승을 앞두고 대한체고 에이스 권지성이 화장실에 앉아 있었다.

팔 다리가 심하게 떨린다. 초조함에 밥도 제대로 못 먹었다. 그저 심한 갈증을 이겨내기 위해 빈 물통만 발 주변에 굴러다니고 있다.

"씨발. 씨발. 씨발... 씨발!"

10초 56이다. 개인 최고기록이란 말이다.

근데도 조영욱 이 씹쌔끼. 칭찬 한 마디 해주지 않다니...

아직은 죄송할 건 없다고? 아직은...?

조 감독의 편애가 있기에 권지성은 남들과 다른 시절을 보낼 수 있었다.

한 겨울의 손빨래나 잡심부름 같은 훈련과는 거리가 먼 것들.

집합을 해도 열 외가 된다. 감독의 매타작도 그는 벗어난다. 선배들도 그는 건드릴 수 없다.

모든 건 그가 시합에서 이겨왔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2학년 시작하자마자 구마하란 벽이 나타나다니.

대체 어디서 굴러 먹다 온 새끼지?

그나저나 최고기록을 냈는데도 이보다 더 어떻게 빨리 뛸 수 있는지...

녀석은 예선전보다 0.1초를 더 줄였다.

도망치고 싶다. 처음으로 승부가 두려워진다.

시간은 흘러가고 움직일 수는 없고.

덜덜 다리만 떨려오는 가운데 친구들이 그를 찾아왔다.

"지성아... 감독님이 너 빨리 데려오래."

"알았다고 씨발!"

대안이 보이질 않는다. 일단은 최선을 다하는 수 밖에...

결승전을 앞두고 트랙이나 필드가 많이 한산해진 풍경을 보여준다.

따뜻한 오후 햇살과 선선한 봄바람이 동시에 불어오고 있었다.

각 학교와 지역을 대표하는 선수들이 시합을 대비하는 가운데, 권지성도 조영욱에게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그렇게 긴장되냐?"

"괜찮습니다..."

"밥은 먹었고?"

"아니요... 소화가 안 돼가지고..."

"지성아. 그동안 잘 해왔잖아. 하던 대로 하면 될 거야. 알았지?"

"네. 감독님."

고교부 여자 결승전이 먼저 진행되고 있었다.

남자 참가자들은 먼 발치에서 시합을 지켜본다.

"와~ 여자애들도 이렇게 보니까 존나 빠르네."

"빠르지. 저기 5번 뛰는 애는 태릉도 갔아왔어."

"진짜? 어이고야. 그나저나 앞에서 보고 싶었는데. 뒤에서 보는 것도 나쁘지 않네."

"하하하! 미친 놈!!"

구마하가 수원체고 김인수와 실없는 농담을 하고 있었다.

대체 언제 친해졌다고 저러고들 있을까... 저러니까 운동하는 놈들이 무식하다는 소리를 듣지.

권지성은 작게 고개를 흔들며 나는 저런 놈들과는 다르다는 정신무장을 가진다.

여자애들 보면서 시시껄렁한 놈들과 나는 다르다.

나는 오직 훈련만 보고 달려왔다.

이기는 것만이 나의 목적.

이긴다. 반드시 이긴다.

"다음. 선수들 준비하세요."

선수 소개가 지나가고, 권지성의 이름이 호명되자 가장 많은 선수단을 출전시킨 대한체고 관중석 함성이 크게 울렸다.

0.02초 차이라면 찰나에 불과하다.

눈을 감는 권지성의 머릿속에 고통을 참아가던 모습이 지나간다.

이긴다. 아까는 그저 놈이 운이 좋았을 뿐이니까.

구마하의 이름이 호명되며 권지성도 눈을 떠 그를 보았다.

"..."

그런데 구마하도 그를 보고 있었다.

마치, 지목이라도 하듯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뭐지? 왜 날 보고 있지?

순간적으로 권지성이 동요하는 가운데 구마하가 씩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파이팅."

"네..."

[준비.]

파이팅. 파이팅. 파이팅...

탕!

단 한번도 동년배의 누군가의 등을 보고 달린 적이 없었다.

나보다 뛰어난 사람은 세계를 나가야만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도 언젠가 반드시 넘어서겠다는 마음으로 운동을 해 왔다.

진다는 건 그의 인생에 누려보지 못 한 경험이었다.

마지막 100미터 결승에서 권지성은 김인수의 뒤를 이어 3등으로 결승점을 통과했다.

"10초 50!! 10초 50!!! 구마하 선수!! 오늘 하루만 고교 신기록을 연이어 경신하며 춘계대회 100미터 우승자가 됩니다!!"

중계석에서 호들갑스레 떠드는 바람에 그의 닫힌 귀가 뚫렸다.

터덜터덜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니, 구마하는 주변 사람들에게 축하를 받으며 승리를 만끽하고 있었다.

멍하니 지켜보고 있는 그에게 수원 체고 김인수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괜찮냐?"

"인수 형..."

"정신차려. 뭘 그렇게 얼 빠진 표정을 하고있어."

"저런 사람이 왜 이제야 나타났죠...?"

"진정해라. 널 상대하던 우리도 늘 그랬으니까."

10초 58. 미약한 차이는 있지만 권지성의 다리가 늦었다고 말할 순 없다.

그럼에도 패배는 패배.

터벅터벅 대한 체고 관중석 앞으로 다가가니 친구들도 지도자들도 아무도 박수를 쳐주지 않고 멍하니 보고 있었다.

"감독님..."

"..."

차갑게 내려보는 조영욱의 시선에서 그와 감독의 거리가 100미터 코스보다 더 멀어지는 기분이었다.

끝났구나. 이제 나도 끝났어... 나도 다른 애들과 똑같은 평범한 선수로 돌아간다.

빨래를 해야되고, 3학년들 뒤치닥 거리를 해야하고. 감독의 짜증을 받아가며 운동을 해야한다.

권지성의 멘탈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 그를 툭 하니 건드린다.

고개를 돌리자 구마하가 환하게 웃으며 말을 건넸다.

"축하한다!"

"뭘요...?"

"3위 했잖아! 메달 딴 거 아냐?"

뭐지? 놀리는 건가? 아니면 지가 이겼다고 자랑하나?

원래 알고 지내던 사이도 아닌데, 갑자기 불쑥 찾아와 말을 거는지.

도통 이해되지 않는 행동에 권지성의 표정이 난처하게 변해가는 가운데, 구마하가 고개를 올려 조영욱 감독을 보며 큰 소리로 묻는다.

"감독님! 이 친구 내일 200도 나오나요?"

"...그래."

"그렇군요. 지성아. 내일도 파이팅이다!!"

"네... 형도요."

구마하는 멀리 가버리고 권지성도 관중석으로 올라왔다.

"감독님..."

"됐다. 내일 200 잘 준비하자."

경기를 지고 온 제자에게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조영욱이었다.

저 건방진 녀석 말대로 아직 시합이 끝난 건 아니니까.

지금 선수의 자신감을 꺾을 순 없는 노릇 아니겠는가.

권지성도 고개를 돌려 한주 고 선수들과 축하를 나누고 있는 구마하를 본다.

"..."

3위를 축하한다는 인사는 처음이다...

그래. 나도 단상에 오를 수 있지.

어떻게 보면 잘 한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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