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륜기로 가버렷-32화 (32/401)

〈 32화 〉 메달의 그림자 (3)

춘계대회 당일 어둑어둑한 새벽시간이었다.

한 감독님이 차를 끌고 집으로 오셨다.

"감독님. 여기요."

"그래. 어서 타라. 잠은 잘 잤어?"

"네. 감독님은 언제 일어나신 거에요?"

"괜찮아. 어제 일찍 잤으니까. 근데 그건 뭐야?"

"아. 형이 감독님 드시라고 도시락 싸줬어요."

"장사하는 분이 이런 건 또 언제 준비하셨냐. 감사하다고 전해드려라."

"김밥으로 준비하려는 거 제가 직접 떠먹여드리긴 싫다고, 극구 샌드위치로 바꿨습니다."

"하하! 잘했다!"

대회가 열리는 경북 영주로 출발했다.

이번 시합의 결과로 체육특기생이 되느냐 마느냐, 학업에서 자유롭게 풀리느냐 아니냐가 결정된다.

어쩌면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수도 있는 시간인만큼 한 감독님도 대회기간 내내 출장을 빼서 같이 행동하기로 하셨다.

"그래도 감독님 있으니까 되게 좋아요."

"왜? 먼저도 태윤이랑 애들 같이 있었다며."

"친구들 있긴 한데, 그래도 좀 혼자 있는 거 같았거든요."

"나도 너 있어서 좋다."

"감독님은 왜요?"

"왜긴. 일주일 동안 학교 안 가잖아. 하하!!"

아침 7시. 다른 고3들이 꾸벅꾸벅 잠을 이겨가며 등교 준비를 하고 있을 때 우리는 영동고속도로를 지나고 있었다.

소풍가는 기분이다. 그래서도 더 연신 싱글벙글 웃음이 흘러 나왔다.

"감독님 더 드릴까요?"

"됐어. 배불러."

"전 더 먹어도 되죠?"

"시합 앞두고 탈만 안 난다면 상관없지."

그러고보니 요즘 알게 모르게 식욕이 늘어나고 있다.

아마도 감독님들 몰래 800훈련을 하면서부터 였던 거 같은데.

"음..."

"먹어. 괜찮아. 너 원래 잘 먹잖아. 차에 흘리지만 말어."

"네."

그래. 원래도 잘 먹지만, 이렇게 음식이 당길 땐 내공을 소모했을 때였어.

알게 모르게 내공이 소요되고 있단 말인가.

나쁠 건 없지. 그만큼 더 강한 퍼포먼스를 보일 수 있다는 얘기니까.

"우적우적. 근데요 감독님."

"왜?"

"이주영 감독님도 은근 애들 체중관리 하시던데, 왜 감독님은 저한테 뭐라고 안 하세요?"

"잘 먹고, 잘 뛰고, 성적 잘 나오고. 내가 뭐라고 할 게 뭐 있어."

"어어~."

"마하야. 샌드위치 남은 거 있냐?"

"세 개 있어요."

"하나 주라. 먹는 거 보니까 나도 먹고 싶어지네."

"여기요."

감독님이 한 손으로 샌드위치를 우물우물 드시면서 말씀하셨다.

"앞으로도 잔소리는 안 할 거야. 선수가 하기 싫으면 나도 관두면 그만이지. 안 그러냐?"

"아 왜 그러세요. 저 열심히 하잖아요..."

"하하! 버림받기 싫으면 부지런히 뛰라고."

배가 빵빵하게 부를즈음 휴게소가 나왔다.

오줌도 누고 간식거리도 사고 잠깐 감독님 운전피로도 풀겸 밴치에 앉아 휴식시간을 가졌다.

"한 시간 정도 남았나? 피곤하면 자라. 나 신경쓰지 말고."

"괜찮아요. 저도 어제 푹 잤어요."

"긴장 안 되냐?"

"네."

"오~ 이 녀석. 자신감이야 뭐야?"

"자신감이 어딨어요. 그냥 연습대로 가겠죠."

"그러다 또 괜히 잘 생긴 놈들보고 기죽는 거 아냐?"

"아. 감독님. 저 이제 그런 거 없어요."

"하하하. 혜정이랑은 좀 친해졌어?"

"네. 많이 가까워 졌어요."

얼마나 가까워졌는데요. 이제는 가깝다 못해 서로 들어갔다 나왔다 하는걸요.

잘 준비해왔다.

훈련도 많이 했다.

기록도 좋다.

더 이상 기죽을 이유도 없다.

조바심 낼 게 아무것도 없었다.

남은 건 경기를 즐기는 마음 뿐이다.

*   *   *

"여기에요?"

"그래. 아이고 지긋지긋하다 생각했는데. 이런 분위기도 보니까 반갑구만."

아침 8시 반. 경북 영주 시민운동장에 도착.

아기자기한 시골도시에 제법 그럴싸한 운동장과 체육시설이 갖추어져 있었다.

14회 춘계전국중고육상대회 선수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라는 현수막이 걸려있다.

많은 숫자는 아니지만, 삼삼오오 전국에서 몰려든 인파들로 소박하면서도 나름 북적거리는 분위기가 느껴진다.

"은근 사람 많네요. 지방이라 많이 안 올 줄 알았는데."

"올 시즌 첫 대횐데 와야지."

"동민이도 지금 아침 먹고 오고 있다고 문자 왔어요."

"그래. 우리는 아침 어떻게 할래? 너 배 안 고프냐?"

"괜찮습니다. 빵 많이 먹었잖아요."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짐가방과 이것저것 챙겨들고 나오는데 근처에 큼직큼직한 버스들이 눈에 띄었다.

"감독님. 버스 대절해서 오는 학교도 있어요?"

"그럼. 체고들은 선수단 규모가 있는데."

전국 열 다섯 곳의 체육고등학교가 있다.

각 지방자치단체의 이름을 걸고 있거나 대도시의 간판이 되는 곳들로 엘리트 선수들의 산실이 되는 곳이다.

"감독님도 체고 출신이라고 하셨죠?"

"그랬었지."

"우와~~"

"뭘 우와냐. 우와는. 그냥 고등학교랑 똑같은데."

"어떻게 똑같아요. 엘리트 코스를 걸어오셨는데. 체고에 대학 선수 출신에."

"..."

"아는 분들도 계시지 않을까요? 그때 전국체전때도 이 감독님 여기저기 막 인사 하시던데."

"글쎄다. 날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까? 난 이 판을 떠난지 오래라."

라고 말씀하시는 순간, 저 옆에 어떤 선글라스 아저씨가 이쪽으로 성큼성큼 다가오신다.

"상률아?"

"감독님. 저분이 감독님 부르시는데요."

"누구? 아이고... 이런 젠장맞을..."

"야. 진짜 상률이 맞어? 맞구만 이 새끼!!"

우와. 누가 알아보냐더니, 바로 아는 사람 나오는 거 보소.

"안 그래도 주영이한테 듣긴 했는데, 요즘 같이 운동한다며?"

"어. 이 친구가 재능이 좋아서."

"그래?"

"아... 안녕하세요. 구마하라고 합니다."

"이야! 생긴 거 봐라. 누가봐도 운동 잘하게 생겼는데!"

최고의 칭찬이라고 받아들인다. 난 스포츠 맨이니까.

"하하하! 야 이 씨. 우리 애 놀리지 마."

"아무튼, 반갑다. 여기서 널 보게 될 줄이야."

"그러게... 기분이 참 묘하다 나도."

한 감독님은 나중에 따로 이야기 하자며 친구분을 보내셨다.

"누구세요?"

"같이 운동했던 친구. 지방에서 코치하고 있다 그러네."

"우와! 그래도 어떻게 바로 알아보네요?"

"이 바닥이 원체 좁으니까. 아는 얼굴들이 거기서 거기라는 얘기지."

원체 좁다고 하기엔,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감독님을 알아보고 계셨다.

운동장에 들어서자 이제는 아예 둘러 쌓고 너가 여긴 어떻게 왔냐는 식으로 인사도 건네고 농담도 나누고 그러고 있다.

"아 좀 다들 반가운 건 고마운데, 나중에 봅시다. 나도 지금 처음이라 뭐가 뭔지 모르겠단 말야."

"코치 한상률의 데뷔전이다 이거냐?"

"근데 저 친구 작년에 주영이가 데리고 있던 거 같던데 전학 갔어?"

"아니야. 아무튼, 나중에 봐. 우리 둘 다 처음이라 정신 없어."

모두를 물리치시면서 다가오는 한 감독님을 경외에 가득 찬 시선으로 올려다보게 된다.

"오오~ 우오오~~ 감독님. 우오오오~! 인기쟁이."

"시끄러 인석아. 까불고 있어."

"와 감독님 생각보다 대단한 분이셨네요?"

"까불지 마라 죽는다. 몸이나 풀어."

이주영 감독님과 한주고 선수들도 합류했다.

인사도 나누고 숙소 이야기도 하며 두리번 두리번 몸풀기 운동을 하고 있는데, 동민이가 툭 치면서 물었다.

"마하야. 저 사람?"

"응? 아 감독님들이랑 같이 운동했던 사람이래."

"씨발! 저 인간 수원체고 감독이잖아."

"그래?"

아까 나더러 운동 잘하겠다 했던 사람 옆에 수원체고 감독이란 인물이 있었다.

"와... 나 저 학교 갔다가 떨어졌는데."

"어이고야. 너네도 보고 있었냐?"

"한 감독님이 뭔가 있긴 있었나보네. 우리 감독님은 별로 저런 사람들이랑 아는 척 안 하고 지내던데."

"으음."

역시 한 때 대한민국 육상의 가능성이란 별명이 그냥 붙은 게 아니었구나.

한주고는 한주고로 따로 모이고 나도 감독님과 둘이 자리를 잡았다.

선 후배가 있는 학교와 달리 우리는 관계자가 한 감독님 한 분이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쁘시다.

"은근 할 게 많네."

"감독님 제가 할 수 있는 건 제가 할 게요. 말씀해 주세요."

"가만있어. 선수라는 놈이 시합만 집중해."

잠깐 자리를 비키신 사이, 운동장 가운데서 넓이뛰기 선수들이 예선전을 시작했다.

혼자 스트레칭 하면서 시합을 구경하고 있는데 어디선가 굵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가 상률이 외아들이냐?"

"네? 아 네. 안녕하세요."

뒤돌아보니, 거구의 그림자가 느껴진다.

체육복에 대한체고 로고가 떡하니 박혀있어 뭔가 압도적인 포스를 풍기는 분이셨다.

대한체고라... 아무리 경력 짧은 나도 체육계에서 대한체고의 위상을 모를 순 없지.

"단거리겠네."

"네..."

"상률이는?"

"감독님 잠깐, 아. 저기 오세요."

한 감독님이 온다는 말에 거구의 대한체고 아저씨가 씩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감독님도 조금 놀라며 꾸벅 고개를 숙였다

"어? 선배."

"이 새끼 왔으면 형한테 바로바로 인사를 올 것이지."

"하하 죄송해요. 계신 줄 몰랐어요."

"몰라? 주영이 어딨냐. 이것들이 빠져가지고."

대충 감독님들 선배나 뭐 그런 인물 같아 보이는데, 별로 좋은 사람은 아닌 것 같다.

"그래도 반갑다. 난 니가 올 줄 알았어."

"네. 어떻게 하다보니 그렇게 됐네요."

"자식. 저녁에 보자. 술 한잔 해야지?"

"하하. 저녁에 볼 수 있을까 모르겠어요. 새벽부터 움직여가지고, 숙소가면 바로 기절할 거 같은데."

"기절은 무슨 애도 아니고. 아무튼, 잘해라. 너도 힘내고."

"네. 고맙습니다."

"선배 가세요."

저벅저벅 위암감 넘치는 걸음으로 멀어지는 대한체고 감독.

가는 길에도 여기저기 젊은 선수들에게 인사를 받아주고 어른들 어깨도 두드려주고 있다.

"뭔가 무게감 있는 분이시네요."

"저 형도 나이를 먹긴 먹었구만. 언제 저렇게 살이 쪘냐."

"저분은 주종이 뭐셨어요?"

"단거리지. 나랑 선수 선발전까지 같이 뛰었어."

"오~ 빠르셨구나."

"..."

"감독님."

"음?"

"대한 체고면 아무래도 젤 잘하는 애들이 가는 데겠죠?"

"그렇지. 체중, 체고. 순수 엘리트 코스를 밟는 애들이 주로 있지."

"제가 이겨드릴까요?"

"하하! 까불긴. 니 시합이나 잘 해."

딱히 라이벌 의식을 불태울만한 뭐가 없는 상황이었다.

대한 체고라. 아주 높은 곳 탐스럽게 익어있으나 손에 닿지 않는 과실을 바라보는 느낌이라 해야할까?

뭐든 최고의 위치에 올라 있다면 으레 따먹어 주는 게 예의가 아니겠는가.

*   *   *

"다 했냐?"

"어. 뭐 이렇게 귀찮은 게 많냐. 애들 시합에..."

"대회라는 게 다 그렇지."

코치나 가족 등 많은 관계자들이 운동장 객석에서 선수들을 응원해주고 있다.

한상률도 이주영과 나란히 앉아 구마하를 지켜보며 말했다.

"아까 영욱이 형 봤다."

"어. 왔더라고. 원래 이런 데 잘 안 오는 인간인데."

"대한 체고라... 성공했네."

"몰랐어?"

"모르지. 너 말고 따로 연락하는 애들은 다 그냥 운동했던 애들이지. 팀 관련으로는 아무도 연락 안 해."

"뭐라고 안 하냐?"

"보자마자 지랄이지. 술 마시자고 그러던데 같이 갈래?"

"니나 가. 나이 쳐먹고 똥구멍 닦아줄 일 있나."

[4번 레인. 성남 영군 고등학교 구마하.]

"나왔네."

"후후후. 주영아 마하가 뭐라는지 아냐?"

"뭐라는데?"

"아까 영욱이 형이랑 있던 거 보더니, 대뜸 대한 체고 잡아드릴까요? 이러더라."

"크하하! 아 우리 애들은 왜 그런 패기가 없나 몰라."

"어린 놈이 눈치만 빨라가지고..."

"조용히 하시죠 감독님. 선수들 준비하는데."

준비라는 말에 운동장에 정적이 내려앉는다.

곧이어, 탕! 출발을 알리는 총성이 울리며 선수들이 뛰어나갔다.

"가라! 구마하!!"

"뛰어라. 그렇지."

1차 예선. 10.64 구마하 조 1위로 통과. 준준결승 진출.

오랜만의 승리가 기쁜 듯, 한 손을 불끈 쥐며 돌아서는 그에게 한상률과 이주영 그리고 같이 땀 흘려온 한주 고 선수들이 가볍게 미소 지으며 박수를 쳐줬다.

"안정적이구만. 나쁘지 않네. 그치?"

"후후. 상률아. 마하는 됐고, 저기 좀 봐라."

"왜? 뭐 있어?"

"인간들 눈빛 봐라. 살벌하다."

"어디?"

갑작스레 등장한 고3 신인선수. 10초 64라는 뛰어난 실력.

각 학교 육상부를 전담하고 있는 코치들의 얼굴에서, 오랜만에 만난 동료와의 반가움은 더이상 찾아볼 수 없다.

"이봐 한상률이. 트랙에 돌아온 걸 환영한다. 무한경쟁의 시작이구만."

"뭘 이제와서 새삼스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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