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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륜기로 가버렷-26화 (26/401)

〈 26화 〉 도전하는 자세 (3)

"들어와."

일단 혜정이를 집으로 데려왔다.

애가 정신을 못 차리고 하도 울고불고 난리를 치길래 조용한 장소가 필요했다.

더군다나 얘네 부모님은 딸이 남자친구 있는거 모르고 계시는데 엉엉 울면서 나타나면 놀라실 것 아닌가.

누군가는 굳이 뭐하러 거기까지 신경쓰냐 하겠지만, 젠장 눈앞에서 울고 있었다고.

그것도 14층 사는 혜정이가!

"마하야... 혹시 휴지 있어?"

"휴지? 어. 있지. 잠깐만."

혜정이를 소파에 앉혀두고 눈물을 닦을 무언가를 찾는데, 남자 둘이 사는 집에 딱히 각티슈 같은 게 있을린 없고. 화장실가서 두루마리 휴지를 꺼내다 건네주었다.

"고마워."

패앵~! 종이가 찢어져라 콧물을 푸는 혜정이.

어우야... 누가보면 감기라도 걸린 줄 알겠네...

"야. 보지마."

"너 콧물 늘어졌어..."

"아 그런 얘기 하지 말라고...!"

역시 인간은 가오가 있는 존재다.

이 와중에도 거울을 꺼내 얼굴을 확인하는 혜정이를 보면서 피식 웃고 말았다.

그러자, 얘도 뒤늦게 부끄러운가 괜히 심술을 부린다.

"다들 이러거든. 내가 이상한 거 아니라고."

"누가 뭐래. 괜히 버럭해서 난리야."

그렇다고 해줘야지. 이 마당에 뭘 따지겠냐.

소파에 풀썩 앉아 물어보았다.

"거긴 왜 갔어. 끝내라니까."

"...크리스마스 이브잖아."

"그럼 좀 제대로 확인을 해보고 가든가."

"..."

오면서 대충 들었다.

울먹울먹 지 혼자 떠드느라 자세하진 않지만, 어떤 상황인지는 유추가 된다.

성탄절을 맞이해 혜정이가 지민이 형한테 먼저 연락을 걸었고, 저쪽은 이제 그만하자고 분명히 얘기를 했는데도 얘는 그걸 못 견뎌 혼자 집 앞으로 찾아갔다.

예쁘게 차려입고 화장도 했다.

누가봐도 한눈에 마음이 돌아설 수 있게 제대로 빡! 기합을 주고 갔는데.

집 앞에서 그때 포니테일 여자애랑 지민이 형이 같이 나오는 모습을 봤고.

혼자 드라마를 찍고 울고불고 속이 터지려는 걸 꾹 눌러 참으며 간신히 집으로 돌아왔는데 아무도 없는 순간 감정이 폭발했단다.

"나쁜 새끼. 나한테 막 가라고 소리치고..."

"..."

역시. 지민이 형. 그럼 그렇지. 참 대단해. 어떤 의미론 그 빠른 행동력이 존경스럽기도 하고.

"...근데 마하야."

"응?"

"저 술들은 뭐야?"

"아. 저거. 오늘 우리집에 애들 온다고 그랬었잖아."

"너네 술 마셔?"

"하하! 아니야. 저것도 그냥 맥주 몇 병 형한테 받은 거야."

"진짜로...?"

"그럼. 야 뭐 우리가 그러고 노는 애들이냐. 날이 날이니까 분위기 한번 잡아보자는 거지."

"그럼 나 한 잔만 줘도 돼?"

"너 술마실 줄 알어...?"

"그 새끼랑 먹어 봤어."

하긴. 뭐. 이제와서 굳이.

"나도 합숙 때 형들이랑 술 마신 게 처음인데."

"니가 그런 놈들이랑 왜 어울려!!"

"야 야 진정해. 왜 나한테 난리야."

슬픔 뒤엔 분노라고 하던가.

감정이 폭발해 있는 상태다보니 애가 잘잘못을 따지자고 마구잡이로 지민이 형과의 이야기를 폭로하고 있었다.

"분명히 가족들이랑 여행간다고 했는데 그걸 못 참고!"

글쎄다. 두 사람 이야기는 두 사람만 알테니 단지 그 이유만으로 헤어진 건 아니었겠지. 얘도 지 입장에서 불리한 이야기는 하지 않을 것이고.

여행 전이라, 그럼 합숙 때란 말인데 그게 벌써 몇 달 전이냐.

전주에서 형이 진작에 끝냈다고 했는데 그말도 어느정도 일리 있는 말인 거 같다.

집요하게 군다고 그런 얘기도 했었지. 혜정이가 이런 성격도 있구나.

"너도 그만해."

"죽여버릴거야..."

"어떻게 죽이려고?"

"뭐...?"

"칼? 총은 구하기 어려울 것이고. 지나가는 버스 앞에서 밀어버리나?"

"야. 뭐하는 건데."

"너 정말 좋아했던 건 맞어?"

"..."

"좋아했던 사람을 죽인다? 쓰읍. 내가 볼 땐 아닌 거 같은데."

"됐어. 나 갈게."

"아 좀 잠깐만 앉아서 들어 봐."

누군가 아직도 이 친구를 좋아하느냐 묻는다면 전만큼은 아니어도 조금의 감정은 남아있다고 답하고 싶다.

그건 어쩔 수 없지. 정말 오랜 시간 봐왔고, 거리가 무색하게 급속도로 관계가 진행됐는데.

그 만큼, 이혜정을 친구라고 생각하며, 진심어린 마음으로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상처는 누구나 받어."

"갑자기 무슨 소리야...?"

"너 지금 그 형 좋아하고 못 잊어서 이러는 거 아니라고."

"그럼? 내가 왜 이러는데?"

"니가 하는 행동이 애정이라고 생각해? 거절당하고 상처 입는 걸 못 견뎌서 더 찌르고 다니는 거 아니고?"

"..."

정말 친구들 말대로 10년을 지켜봐오지 않았던가.

학교에서, 지나다니는 길에서. 이웃들에게서.

내가 봐온 이혜정의 모습이 전부라고 할 순 없어도, 지금 보여주는 날 선 감정이 절대 이 친구의 평균이라 말할 순 없다.

"넌 얼굴도 예쁘지만 못지않게 친절하고 착한 애니까"

"..."

"그래서 사람들한테 상처입어 본 경험이 많이 없었을 거야."

"너가 그런 걸 어떻게 알어."

"아니야? 니가 막 애들한테 놀림받고 무시받고 그랬던 적 있어? 지나가는 사람들이 너 보면서 비웃고 그랬던 적 있냐고."

"나도 어릴 땐 애들이 장난 많이 쳤거든."

"그건 관심 받으려고 하는 거지. 그것도 결국 애정이잖아."

"흠..."

"진짜 미움. 상처. 이런 거에 면역이 안 돼 있으니까. 그래서도 지금 감정이 주체가 안 돼서 더 공격적으로 나가는 걸 거야. 형이 당사자니까 그쪽으로 매달리는 거고."

혜정이의 얼굴이 슬픔 분노의 단계를 넘어 어느정도 차분하게 진정 되어가는 게 보인다.

"그런 걸 어떻게 알어?"

"하하하! 야. 나 구마하야. 내가 이 얼굴 때문에 얼마나 많은 피멍이 들었는데."

아마 5, 6학년 때부터 였을 것이다.

그때도 진짜 인물 없다고 친구들과 놀리고 장난치고 지냈지만, 태연한게 구는 이면에 말 못 할 상처가 조금씩 쌓여가고 있었다.

그러다 중학교에 들어와 완전한 이성에 눈 뜨기 시작한 다음부터는 내 모습이 마치 저주와도 같단 생각에 성격이 바짝 오그라들고 말았다.

못 생긴 사람들은 보통 상처가 많다.

아니라고 하고 싶지만 우리도 밝다고 하고 싶지만, 그냥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되도록 세상이 흘러가는 거 같다.

반면 예쁘고 잘생긴 애들은 마음이 좀 수더분하다.

좀 덜 공격적이고  조금 더 부드럽고 조금 더 많이 웃는다.

그래서 길이 갈리는 거 같다.

상처가 있어도 꾸준히 정진하면 마음이 평안을 얻고.

멀쩡하던 감정에 갑작스레 생처기가 나면 상처를 이겨내지 못 해 무너지고.

"모든 건 내가 얼마만큼 이 아픔을 감당할 수 있느냐에 따라 달려있지."

"...애늙은이 같은 소리를 하고 있어. 무슨 도를 믿습니까도 아니고."

"몰랐어? 우리 형이 도를 믿습니까잖아."

"진짜? 마윤이 오빠가?"

"하하! 아니지."

그러고보니 딱히 틀린 말도 아니구나.

우리는 곤륜 사람으로 도교라는 것도 곤륜파의 무공에서 나왔다고 하니까.

아무튼.

"그만해. 끝난 건 끝난 거야. 괜히 더 힘들어지지말고 마음 잡어."

"..."

"시합도 그렇잖아. 졌다고 재시합 하자면 해줘? 아니거든. 결과는 나왔어. 받아들이고 더 강하게 훈련하면 돼. 마음도 똑같애."

"정말 그럴까...?"

"당연하지. 야 뭣보다 지나간 놈 때문에 앞으로 모습까지 왜 흔들리냐? 너는 충분히 누구든 사랑해주고 좋아해 줄 수 있는 앤데."

혜정이가 멀뚱멀뚱 눈이 빨개져서 쳐다보더니 목소리가 바뀌어서 묻는다.

"그럼 넌 어떻게 강해진 거야...?"

"나? 나야 뭐. 운동하고 그러고."

"중학교 땐 되게 조용했었잖아."

"아. 그때는 친구들 도움을 받았지."

죽은 듯이 지내가던 어느날. 같은 반 태윤이가 불쑥 말을 걸었다.

(마하야. 너 스타 할 줄 아냐?)

(어. 조금.)

(그럼 우리 끝나고 피씨방 갈 건데 껴라. 한 사람 부족하거든.)

(그래...)

지금도 우리 중에 가장 크지만 태윤이는 그때도 키가 크고 남자다운 아이였다.

친해지자 이놈도 못 생겼다느니 뭐니 놀려대지만, 그래도 그 안에 무시가 아닌 서로에 대한 우정과 존중이 있다는 걸 알고 조금씩 나아질 수 있었다.

"태윤이 아니었으면 진짜 모르는 일이지. 양아치가 됐을지 어디 누구 빵셔틀이나 다니고 있을지."

"너가 그런 성격은 아닐 거 같은데."

"아니야. 표현을 못 해서 그렇지 나 원래 되게 세상 저주하고 여자애들 욕도 많이하고 그러고 다녔어."

대화는 계속 되었다.

외면받는 아픔을 누구보다 이해하고 있는만큼 여러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원래 사람이 나를 지키려면 공격적으로 되는 법이거든."

"너도?"

"야. 나 상처 장난 아니었다니까! 하하!"

이렇게 돌아보면 친구도 친구지만, 역시 우리 형의 존재감을 무시할 수 없다.

그나마 마지노선으로 형이 있어 크게 어긋나지 않고 지나올 수 있었던 거 같다.

단지, 그 방법이 위로가 아닌, 나쁜 짓 하고 돌아다니면 맞아 죽을 수 있었다는 게 문제지만.

"지금은 형도 나한테 크게 뭐라고 안 해."

"마윤이 오빠 멋있어. 인사하면 되게 잘 받아주고."

"너 은근 연상 스타일이구나?"

"야. 미쳤어? 아무렴 니네 오빠한데."

"이번엔 우리 형인가... 그럼 널 형수라 불러야 하나...?"

"진짜 미쳤나봐! 사람을 어떻게 보고!!"

가벼운 농담에 혜정이가 불쑥 주먹을 지르고 달려들었다.

울고불고 우울할 땐 언제고, 갑작스레 버럭 화내는 모습이라니.

더 놀리고 싶어져 이것저것 개소리를 지껄이니 주먹은 갈수록 강도가 올라간다.

"하하하! 아. 아퍼. 그만해. 미안 미안."

"정신 나갔어. 못 하는 말이 없질 않나."

"아 아프다고!! 진짜 아퍼!"

소파 구석에서 쭈그리고 맞다가, 정말 아프길래 팔을 와락 잡았는데.

그만 자세가 흔들리며 혜정이가 나한테 덥썩 안기고 말았다.

"..."

"..."

서로의 얼굴이 바로 앞에 있었다.

원래 예쁜 애지만 오늘은 화장도 했고 무엇보다 울고 난 다음이라 눈가가 더 빨갛게 올라와 있었다.

혜정이도 당황하는 표정으로 멀뚱멀뚱 쳐다보는데. 뭐라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감정이 내몰리고 있었다.

"미... 미안."

"..."

"야. 비 비켜."

어우야. 그만해야지. 이건 진짜 위험하다.

"마하야."

콧김이 닿을 만한 거리에서 나직한 목소리로 혜정이가 말했다.

"어?"

"내가 정말 그렇게 예뻐?"

"그 그럼..."

"..."

말똥거리는 눈매가 좌우로 차분하게 나를 관찰한다.

시선을 마주치기 어려워 눈을 돌렸는데 짧은 치마와 검은 스타킹의 긴 다리가 눈에 닿았다.

젠장. 안돼! 지금은 아니야!

조용한 침묵. 마치 안기듯이 닿아있는 몸.

이성이 아무리 명령을 내려도 아랫동네 친구는 저 혼자 미친 듯이 꿈틀대기 시작했다.

"..."

"혜 혜정아. 자... 자 잠깐만 비 비... 비켜줘 봐."

"하고싶어?"

제정신이냐? 이 마당에 그런 말을 하면 어쩌라고...

"야..."

"너 나 좋아했다며."

"..."

"그거 알어? 애들이 요즘 니 얘기 되게 많이 물어봐."

"애들 누구?"

"내 친구들."

"왜?"

"멋있다고. 누구냐고. 나랑 친하냐고."

조금 어색하게 겹쳐져 있던 자세가 점점 무게로 인해 자연스럽게 겹쳐지고 있었다.

그녀의 배와 가슴 어디쯤에 물건이 요동치고 있고 심장은 저 혼자 운동장을 달리고 있는 줄 안다.

"너... 너는 그럼 뭐라고 그래?"

"좋은 애라고."

"..."

"오늘도 느꼈어. 넌 정말 좋은 애야. 착하고 친절하고 따뜻한 말을 해줄 줄 아는 사람."

모르겠다. 진짜 모르겠어.

하지만 더는 참을 수 없다는 것만 알겠다.

부들부들 떨면서 입이라도 맞추려고 고개를 들자, 혜정이도 슬며시 올라오면서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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