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륜기로 가버렷-19화 (19/401)

〈 19화 〉 천일의 밤 (3)

"형 오늘 몇 시에 끝나?"

"똑같지. 9시 마감."

"그럼 나 이따 들를게. 뼈다귀 남은 거 있으면 좀 싸주라."

"마하야... 고기가 먹고 싶으면 와서 먹어. 아무렴 내가 너 먹는 거 아깝다고..."

"아! 내가 먹겠냐고! 친구네 개 키우는데 거기 주려고 그러지!!"

오늘도 혜정이가 같이 운동하자고 했었다.

그런데 연락처도 없고 몇 시에 보자고 약속을 한 것도 아니다.

어떻게 될지 몰라 아파트 입구 근처에서 개인운동을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가볼까... 아니 가도 되나..."

10초에 한번씩은 아파트 입구를 쳐다본 거 같다.

인기척이 느껴질 때면 흘낏 고개를 돌려보고 다시 운동하는 척 몸을 움직였다.

뭐하는 짓이람... 애초에 그닥 뭐 할 것도 아니면서...

그러기를 두 시간.

8시 반 쯤 하늘이 깜깜해지며 두리번 두리번 슬리퍼 차림의 혜정이가 모습을 비추고 있었다.

"어? 마하야."

"어? 어. 혜정아."

"설마 계속 있던거야?"

"아니. 난 운동하고 있었지. 어디 가?"

"와~ 어떻게 딱 맞았네? 헤헤"

헤헤헤. 역시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구나.

오늘은 해피 안 데리고 나왔냐니 혹시 몰라 나 없으면 잠깐 편의점이나 갔다 오려고 했단다.

주머니 검은봉투에서 고기비린내가 진동을 한다. 그렇다고 나중에 전해주는 것도 이상하니 그냥 버려야겠다.

"원래 운동하려고 나온 건 아닌데. 두 바퀴만 돌고 들어갈까?"

"그래."

"가자."

어제와 같은 코스로 아파트 단지를 걸었다.

좋은 아파트야. 관리실에서 고생했어. 보도블럭도 잘 되어있고 곳곳에 놓인 가로등도 잘 작동하고. 놀이터도 깨끗하고.

혜정이와 있다보면 믿기 어려울 정도로 말이 술술 나온다.

집에서 뭐하고 있었어? 그냥 TV보고 뒹굴뒹굴.

넌 학원 안 가? 원래 다니던 데가 있었는데 요즘 성적도 별로고 다른 거 배워볼까 준비 중.

일상에 관한 소재가 끝날 즈음이면 이웃들 이야기를 했다.

몇 층 아저씨 목소리 너무 크다. 몇 층 오빠는 요즘 군대갔나 잘 안 보인다.

어떤 사람은 뭐다. 저 사람은 뭐를 하는 거 같다.

공감되는 주제에 지나가는 사람들 모르게 깔깔 웃고, 이웃에 관한 소재가 지루할 쯤이면 어릴 때 아무 선생님이나 학교 친구로 다시 대화를 이어갔다.

"웃기지 마. 그런 게 어딨었어."

"진짜라니까!! 니네 오빠한테 물어 봐!"

"야. 나도 같은 초등학교 나왔거든."

"와... 얘가 사람 이상하게 몰아가네..."

마치 처음부터 친구였던 것처럼. 소꿉친구가 그대로 나이를 먹은 것처럼.

우리는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며 그동안 몰랐던 서로에 관해 알아가고 있었다.

"아. 그럼 진짜로 부모님이 안 계시는 거구나..."

"응. 괜찮아. 이상할 건 없어. 형이 워낙 잘해주니까."

"너네 오빠네 맛있어. 엄마도 친절하고 좋다고 그래."

"자주 가?"

"어릴 땐 자주 갔지. 목욕 끝나고 가족끼리 밥 먹고 오고."

원래 내가 자기를 싫어하는 줄 알았단다.

싫어하는 게 아니라, 그 많은 시간동안 같은 반 된 적도 없고 접점이 너무 없어 아는척을 못 했다고 해줬다.

그래도 알고자 하면 알 수 있었잖아 라고 하는 말에는 용기를 가지지 못했던 자신이 후회스러웠다.

"뭐. 어쨌든... 음. 지난 일 뭐 중요하다고."

"그치. 뭐 중요하다고. 근데 너 핸드폰 있어?"

"..."

"없어?"

"아 아니!! 이... 이 있지!! 다... 당연히 있어!"

혜정이가 방긋 웃으며 물었다.

"가끔 말 더듬는 건 원래 그런 게 아니라 놀래서 그러는 거지?"

"어? 어..."

"왜?"

"..."

"내가 뭐 물어보는 게 이상해?"

"아니. 그건 아닌데..."

"안 그래도 요즘 운동이 필요했거든. 어제 오늘 이렇게 걸으니까 너무 좋아서. 근데 너랑 시간이 맞을지도 모르겠고. 너도 연습해야 하는데 방해하는 거 아닌가 싶고."

방해라니. 그런 거 없어. 왜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거야.

"아니야. 좋아. 운동 좋지. 나도 이렇게 슬슬 다니면 스트레칭 되고 도움 되는 거야."

"그럼 진짜 연락해도 돼?"

"물론이지! 같이 하자."

전화번호만 불러주면 되나? 주민번호도 같이 알려줘야 하는 거 아닌가?

"너 근데 운동 시작하면서 진짜 큰 거 알어?"

"어. 좀 나도 놀라고 있긴 해."

"나도 운동하면 조금 더 커질 수 있을까?"

"지금 키 몇인데?"

"164."

"여자애들 치고는 충분히 큰 거 같은데."

"음. 그래도 워너비가 170이라. 최소 168까지는 되면 좋겠고. 스타일이 완전 다르거든."

불러준 전화번호를 톡톡 핸드폰에 저장하는 혜정이를 보면서 말해줬다.

"지금도 충분히 스타일 좋아."

"음?"

"아니! 그게 아니라!!"

"후후. 그래? 좋네. 고마워."

미친 내가 지금 뭐라고 한 거지??? 그리고 얘. 분명 좋다고 하지 않았나?

어벙벙 방금 지나간 대화나 분위기를 워쇼스키 브라더의 매트릭스 3차원 다각도로 분석해보는데 혜정이가 전화를 건다.

"이거 내 번호. 저장해."

1번에 저장해야지.

형 뭐? 가족 번호는 이미 알어. 지워도 상관없잖아.

*     *     *

다음날 학교. 오랜만에 남수 포함 다 같이 점심을 먹고 있었다.

"어이고 그래서? 그런 걸로 삐졌냐?"

"삐졌냐. 병신아. 열이 받은 거지."

"야. 우리 좋자고 그랬냐고. 어차피 넌 끝났잖아."

"씨발놈들이 진짜... 아직까지 지랄들이네."

태윤이와 정석이한테 남수 마음을 전해줬고, 남수도 친구들의 마음을 알게 됐다.

그 결과 급식실에서 3자 대면이 벌어지고 있는데 갈등은 좁혀지지 않는다.

애들이 당장이라도 한판 붙을 듯 으르렁 거리는 걸 지켜보며 혼자 무겁게 반찬이나 씹고 있는데.

혜정이가 친구들가 지나가다 눈이 마주쳤다.

"마하야."

"어."

"맞다. 근데 너 어제 돈 안 갚았더라?"

"아 미안. 하하 오늘 밤에 줄게."

"나 오늘 약속있어. 다음에."

"어 맛있게 먹어."

짧은 대화를 나누고 혜정이와 친구들이 저 멀리 자리를 잡았다.

나도 고개를 돌려 다시 숟가락을 드는데.

"...왜?"

"야. 뭐냐?"

"이 씨발 너 방금 뭐야?"

"혜정이랑 얘기한 거 맞어??"

"...너네 싸우고 있던 거 아니냐? 하던 거 계속해. 왜 나한테 관심인데."

쪽바리들도 독립군을 그렇게 괴롭히진 않았을 거다.

와 집요한 놈들. 그냥 별 거 아니라 어쩌다 보니 같이 운동 좀 한 게 전부라고 하는데.

"남수야. 그제 마하 운동할 때 같이 있었다고 안 했냐?"

"어! 맞어!"

"새끼야. 남수가 지랑 있었다잖아. 똑바로 말하라고."

그냥 다시 싸우게 정석이가 남수 뒷담 한 거 얘기해버릴까?

*   *   *

"진짜 전화번호를 받았다고?"

"수업중이잖아. 아 왜 자리까지 바꿔서 지랄인데..."

"전화 걸어봤어? 그거 걔 번호 아닐 걸?"

"넌 좀 앞에 보라고."

"태윤이가 맞어. 걔가 너 놀리는 걸 걸?"

"선생님! 이 새끼들 자꾸 말 걸어요!!"

수업시간 쉬는시간을 가리지 않고 매달리는 버러지 같은 놈들.

다음 쉬는시간엔 남수랑 남수 친구들까지 몰려와 질문을 퍼부었다.

"너 이혜정이랑 친해?"

"같이 운동한다고? 어디서?"

"..."

"야. 가라. 다른 반 놈들이 와서 난리냐."

"그래. 우리 반 애들도 지금 마하한테 제대로 못 물어보고 있는데."

"니들도 하지마! 다 꺼지라고!!"

나는 구마하다. 최근 몸이 좋아졌지만, 그래도 성격 좋고 못 생겼다는 아이덴티티는 변하지 않는다.

그리고 상대는 이혜정이었다. 영군 고등학교의 여왕과 지나가는 인사 좀 했다는 이유만으로 이제는 학교 일진들까지 찾아와 난리였다.

"야. 구마하. 너 이혜정이랑 같이 산다며?"

"후우..."

"그럼 가서 책 좀 빌려와 봐."

이것들이 진짜... 일진이고 나발이고 그냥 다 뒤집어 버려?

그때. 또 한번 호출이 왔다.

"야! 씨발 구마하!!"

"..."

거칠고 절박한 외침. 이 패턴은 분명 여자애가 찾아왔다는 반응?

우르르 몰려있는 교실 뒤편에서 다 같이 고개를 돌렸을 때 역시나 혜정이와 친구들이 옹기종기 몰려 있었다.

"야. 뭐해? 빨리 가봐."

"그래 새끼야. 왜 사람을 기다리게 하는데!"

얼굴만 알고 지내던 학교 일진들이 친한 척 등을 밀었다.

친구들은 싱글벙글 난리다.

아이고 피곤하다.

"왜?"

"뭐야? 왜 이렇게 몰려있어? 너네 반 뭐 해?"

"별 거 아냐..."

"아니 다른 게 아니라. 나 오늘 책 놓고 왔는데, 너네 혹시 영어 책 있어?"

정석이와 태윤이가 알아서 서랍에서 책을 가져온다.

"여기! 가져 가!!"

"안 돌려줘도 돼. 너 써."

"야 이 씨... 쪽팔리게..."

"하하하... 어떻게 그래. 고마워."

우르르 몰려드는 무식한 사내놈들의 기세에 밀려 여자애들이 살짝 당황하는 웃음을 짓고 물러가자, 애들이 달려들었다.

"마하야 너 혹시 담배 피냐? 담배 피러 갈래?"

"매점갈까? 뭐 먹고 싶은 거 있냐?"

"근데 너 어디 산다고 그랬지? 집 갈 때 나랑 같이 가자."

아이고 난리도 아니구만.

진짜 뭐 어떻게 사귀기라도 했다간 죽어나겠네.

"일단. 오케이. 너랑 걔가 아는 사이라는 건 인정한다."

"꺼져. 너한테 인정받고 자시고 할 거 없어."

"걔는 너가 걔 스토킹 하는 거 아냐?"

"아 씨발 진짜..."

옆에선 태윤이가 앞에선 정석이가 선생님과 수업시간은 아무 의미가 없구나...

"어이 구마하."

"또 왜?"

"걔네 집 망했냐?"

"야... 이 새끼 뭐라는 거냐?"

"일단 뭐라고 하는지는 들어봐. 듣고 욕해도 되잖아."

정석이는 혜정이가 나와 가까워진 이유가 걔네 집안이 어렵고 우리 형이 장사를 잘하기 때문에 돈이 아닐까 한단다.

"오 정석이. 오랜만에 논리적인데?"

"그치? 아니고서는 걔가 굳이 왜 마하한테."

"너. 넌 진짜 농담 아니라. 언젠가 나한테 존나 맞을거야."

결국 너무 떠든다고 선생님한테 셋 다 불려 복도로 쫒겨나고 말았다.

어차피 수업도 들을 수 없고 차라리 이게 낫다고 밖으로 나와 원 없이 떠들었다.

"그냥 운동하는 거라니까."

"그러니까 왜 너랑?"

"밤에 이상한 사람들이 달려드니까 무섭다잖아."

"스토커는 안 무섭고? 따져보면 혜정이한테 너가 젤 위험한 놈 아니냐?"

"..."

"하하하. 야 그만해 새끼야. 마하 눈깔 돌기 직전이네."

"후우... 나도 내가 혜정이 상대로 정말 별 소리 다 한 거 아는데. 그때는 모르던 사이고 지금은 어쨌든 친구잖아."

지민이 형도 있고, 또 우리 형이나 그쪽 집안이나 서로 잘 알고. 계기가 없었을 뿐이지, 서로가 가까워 지는 건 이상할 게 아니라고 했다.

"놀리고 싶은 건 아는데, 너네 이러는 건 그냥 원체 좆밥인 내가 어떻게 이혜정이랑 친해지냐 무시하는 꼴 밖에 안 된다고. 솔직히 존나 짜증나는 거 참고있어. 아냐?"

"흠..."

"음. 뭐 그렇기도 하지만."

"그리고. 좀 친해지면 어때서? 어쨌든 내가 걔한테 호감을 갖고 있던 건 맞잖아."

"글쎄... 너의 감정이 단지 호감이라고 하기엔..."

"그것보단 조금 더 본능에 솔직한 편이었지..."

"아 진짜."

다음 쉬는 시간. 혜정이가 책 돌려주겠다고 찾아오면 또 한번 난리가 날 거 같아 내가 찾아갔다.

미친놈들이라니까. 하여튼 친구라는 새끼들이 어떻게 더 지랄인지.

애들한테 열 받은 걸 씩씩 거리느라 나도 모르게 내공이 웅측되고 있었던 거 같다.

귀가 멍멍해지면서 소음과 공기의 흐름이 구분되고 있었다.

혜정이네 교실 근처에 도착함과 동시에 교실 앞 저 멀리 얘가 친구들과 이야기 하는 게 들려왔다.

(근데 이혜정. 너 왜 갑자기 요즘 걔랑 친하게 지내는거야?)

(맞어. 인사도 안 하던 애라고 하지 않았어?)

(어~ 어. 재밌기도 하고. 또 뭐 좀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

"..."

뭘? 갑자기 뭘 물어보려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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