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화 〉 남자는 허리가 생명 (3)
"오~ 그래서 그 분이 역기를 만들어 줬어?"
"응. 첨엔 좀 이상했는데, 해보니까 제법 운동 되더라고."
"마하야. 할아버지는 건강하시냐?"
"이정석 뭐냐? 마치 지가 아는 사람인 듯."
"알지. 나도 마하랑 같이 모래주머니 들고 날랐는데."
어이없는 반응에 껄껄 웃고 있으니 친구들이 알아서 밟아준다.
"하여튼 입만 열면 구라."
"야. 마하도 아니고 니가 무슨 모래주머니를 들고 산을 올라가."
"와... 이 새끼들... 걸까? 걸자. 걸어. 뭐 걸래? 만원? 십만원?"
"남수야. 그래서 연정이는 된다고 해?"
"친구들한테 물어본다고는 했는데."
"이것들이 씹어? 걸자니까. 내가 산을 올라갔다 만원. 모래주머니 들었다 십만원."
"야. 꺼져."
"그래. 수고했네. 고생했다."
"구마하 뭐하는데 병신아! 내가 억울한 일 당하고 있으면 니가 나서야될 거 아냐!"
"정석이 나온 것도 맞고. 근데 모래주머니는 진짜 잠깐"
"들었지! 됐지! 내놔. 돈 내놓으라고! 새끼들아!!"
방학을 이틀 앞둔 오늘도 사소한 것에 목숨 거는 평화로운 아침이었다.
"여자애들이 온대?"
"남수가 힘 좀 썼다고 그러네."
"와... 박남수. 너 우리 쪽팔리다고 여자친구 안 보여 주지 않았냐?"
"뭐래 미친놈아. 내가 언제 너넬 쪽팔려 했다고."
"마하도?"
"솔직히 말해라. 우리가 아니라 마하가 부끄러웠던 거 아니냐?"
"세상에서 젤 악랄한 놈들은 김씨 이씨라고. 이 새끼들 보면 틀린 말이 아니야..."
남수가 시험기간 내내 여자친구와 독서실을 다니며 설득했다.
듣고보니 정석이 말도 일리가 있다면서, 우리가 지금 아니면 언제 고등학생 신분으로 놀러가냐고 큰 이벤트를 기획했단다.
"연정이가 숫자는 맞춰 온다고 했는데, 정확하겐 아직 몰라."
"예쁘냐?"
"예뻐?"
"니 여자친구보단 당연히 낫겠지?"
"꺼져. 없던 일로 하자. 그리고 앞으론 아는 척도 하지마."
학창시절 마지막 여름이 될 수도 있는 시간이었다.
친구들과 놀러갈 수 있는(여자애들 포함) 마지막 순간이 될 수도 있지만.
"날짜가 언젠데?"
"7월 말. 8월 초. 그쯤이지."
"완전 골드시즌이네. 존나 비싸다던데."
"야. 골드고 뭐고 나 안돼."
"왜? 괜찮아. 우리 시골에 집 있어서 거기서 자고 먹고 할 거야. 돈 얼마 안 나가."
"부산이 시골이었냐?"
"우리 아빠 부산 사람인데. 갑자기 촌놈 되네."
친구들은 차 밥 등 기본 경비만 부담하면 된다고 크게 신경쓰지 말라고 했다.
하지만, 문제는 돈이 아니라.
"난 그때 훈련간다니까."
"훈련?"
"아. 그 한주 고랑 가는 거?"
"어."
정석이가 벼락이라도 맞은 얼굴로 돌아보며 물었다.
"너가 그 학교랑 훈련을 왜 가?"
"방학하면 합숙간다고 몇 번을 말했어 병신아."
"그랬나? 니네 들었냐?"
"야. 이 새끼 모래주머니 들은 것도 아니야. 느려터져가지고. 유치원생이 이정석보다 빠를 거다."
친구들은 내가 빠지면 여행을 보류하겠단 말을 꺼냈다.
그러지말고 니들끼리 재밌게 다녀오라고 했지만, 학창시절 마지막이 될 기회를 다 같이 한다는데 의미가 있다는 건 솔직히 감동이었다.
"무엇보다 너가 와야지."
"그럼. 여자애들 온다는데 마하가 있어야지."
"..."
"야. 남수야..."
"왜..."
"지금 이 새끼들 나랑 같이 하고 싶은 게 아니라, 내가 깔아줘야 지들이 산다고 이해해도 되는 거 맞지?"
"몰라. 시험 끝났어. 머리 쓰지 마."
* * *
"휴가철이지만, 또 8월 중순이면 바로 대회가 있어서. 날짜는 7월 말로 결정됐다."
"저야. 뭐 그쪽 스케쥴에 맞춰야죠. 괜찮아요."
"그래. 우리 입장에서야 끼워주는 게 고마운 일이지."
방과 후. 한 선생님과의 시간이다.
이제 시험도 끝났고 운동장에서 개인 트레이닝 및 교육을 가지고 있었다.
훈련에 앞서 합숙에 대해 들었는데, 어디로 가는지 물으니, 선생님들이 선수시절 훈련하던 울산의 바닷가로 간단다.
"해변도 있고, 시골 구석에 있어서 관광객들도 없고. 모래밭 뛰기 딱 좋지."
"뭔가. 친구들이랑 조금씩 스케쥴이 어긋나는 거 같아요."
"원래 운동하면 평범한 애들관 다를 수 밖에 없어. 일단 예체능이잖아."
"아... 그렇네요. 제가 예체능이 됐네요."
"그나저나 마하 너 시험기간 동안 몸 좀 커진 거 같다? 어깨가 꽤 벌어졌는데?"
"보이시죠? 선생님 저 진짜 산 미친듯이 탔어요."
"하하! 야 인마. 공부는?"
"공부도 했죠. 그리고 산에 어떤 할아버지가 역기를 만들어 주셔가지고 상체 많이 끌어올렸어요."
"오~ 역기를 만들어 주셨어?"
"네. 콘크리트로 된 무식한 역긴데, 운동하긴 나쁘지 않아요."
"그래. 얼마나 훈련했는지는 뛰어보면 알겠지."
* * *
"자. 다들 모였지?"
"네!"
"놀러가는 거 아니니까 너무 풀어지지 말고. 주장 인솔해라."
"네."
방학이 시작되고, 다른 애들이 여름방학 특강이나 가족 여행으로 바삐 움직일 때.
나는 한주 고 사람들을 만나 기차를 타고 있었다.
"야. 마하야. 한 감독님은 훈련할 때 어떠시냐?"
"어. 아직 잘 모르지만, 그냥 차분차분 하신 거 같애요."
"젠장. 좆됐네..."
"왜요?"
"우리 감독님이랑 똑같애서."
어떻게 지난 훈련과 주니어 선수권 응원이 좋은 점수를 받았는가 사람들이 더 편하게 대해주는 것 같다.
훈련이나 합숙 기간 등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는 가운데, 두 코치님들의 성향에 대한 주제가 나왔다.
"차라리 맞는 게 낫다 싶을 때도 있어."
"진짜요? 이 감독님 별로 그렇게 무서운 거 같진 않은데."
"보기와는 다르시지."
"야. 그러고보니까. 그때도 마하 데려온 거 우리 기 죽일려고 하신 거잖아."
"너 왔다가고 우리 대회 전까지 존나 뛰었어."
"그러게. 우리 왜 이렇게 이 새끼 이뻐해주고 있냐? 마하가 악의 축이잖아."
이런저런 이야기도 나누고 간식도 먹고.
놀러가는 건 아니라지만, 단체로 기차를 타고 움직인다는 자체가 가슴 설레이는 경험이다.
출발 두 어시간 뒤. 다들 낮잠에 빠지거나 가까운 친구들과 시간 보내고 있을 때 지민이 형이 찾아왔다.
"마하는 안 자냐?"
"아. 어제 푹 잤어요."
"먼저 응원 와줘서 고맙다."
"결승 아까웠어요. 형 진짜 빨랐는데."
"그게 레벨이라는 거겠지."
대회 이야기도 나누고, 소소한 여러 잡담을 나누는 가운데 지민이 형이 말었다.
"맞다. 그리고. 너 그때 걔 맞더만 혜정이네 아랫집 사는 애."
"..."
"왜 모른다고 했어?"
"아... 하하. 그게... 누군지는 알죠. 아는데, 개인적으론 모르는 애라."
"진짜? 혜정이를?"
"네. 인사 한번 해본 적 없어요."
"초중고 같이 나왔다며? 심지어 같은 아파트 사는데 인사를 해본 적 없다고?"
"초중고 나왔으면 다 아나요. 아까 저기 동민이도 보니까 저랑 같은 초등학교 출신인데, 서로 몰랐잖아요."
"허..."
"왜요?"
"그냥 신기해서. 혜정이 정도면 먼저 다가가서 말 걸고 그러지 않나? 난 걔 꼬시려고 엄청 노력했는데."
호감을 갖고 와주는 건 좋은데 왜 이렇게 불편한 이야기만 나오냐...
"그냥. 뭐 별로 알고싶지 않았어요. 매번 보던 애 보는 기분이라."
"하긴, 각자 취향이라는 게 있는 거니까."
취향을 따지라면 나도 당신과 큰 차이는 없겠지만.
"형. 제가 걔 모른다고 그렇게 큰 문제가 되는 건 아니죠?"
"하하. 그건 아니지."
"저 선배님."
"음? 왜?"
"감독님이 부르시는데요."
후배 하나가 다가와 형을 데리고 갔다.
아이고 숨 막혀라. 사람은 좋아보이는데, 또 어떻게 그렇게 이어져가지고...
"..."
형은 어떻게 혜정이를 아느냐고 물었다. 그러니 부모님이 자주 찾아오는 단골이란다.
이웃이기도 하고 손님이기도 한 관계.
어쩌면, 내가 조금만 더 자신감이 있었다면.
그럼 나도 친구 정도의 관계는 될 수 있었을까...
됐어. 뭐하러 생각해. 저 형도 단순한 호기심에 나온 이야기겠지. 굳이 나한테까지 여자친구 자랑 할 이유가 뭐 있어.
고개를 빼꼼히 내밀어 저 앞 감독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지민이 형을 보았다.
저렇게 생긴 사람도 여자애들 꼬시려고 노력을 하는구나. 난 그냥 가만히 있어도 알아서 고백하고 편지 주고 초콜렛 받고 그럴 줄 알았는데.
험난한 세상이다. 역시 올림픽밖에 없어. 운동이나 열심히 하는거야.
땀 흘리고 노력해 한계를 극복하다보면 성적이야 오르겠지.
한 쌤도 그러셨어. 하나 씩 하나 씩 단점을 고쳐가다보면 기록이 단축 된다고.
실수 하나에 0.1초라고 따지면.
13개만 고치면 9.7이다.
와~ 세계 신기록! 구마하 육상 금메달!
그럼 금의환향해서, 공항에서 사진 막 찍히고.
나도 혜정이 못지않은 그런 여자친구를 사귀고.
데이트도 하고 손도 잡고.
그리고 대망의 섹ㅅ
"마하야?"
"...어?"
"일어나 다 왔어."
젠장. 역시, 경험이 없어 그런가, 꼭 그 전 단계에서 꿈이 깨. 후가 없어.
눈앞에 상대가 있는데 만지지를 못 하는 절망. 안타까움.
꿈에서조차 할 수 없다는 간절함. 그 모든 힘을 담아.
"와! 바다다!!
훈련장소에 도착. 앞으로 신세 질 식당 사장님께 인사를 드리고 바로 백사장으로 뛰어나갔다.
철썩 철썩! 동해바다라 그런가 파도 소리도 어마무시하다.
"바다 오니까 좋지?"
"네!"
"이 새끼들. 곧 그 기쁨이 절망이 되게 만들어 주겠다. 뛰어!"
운동이 시작됐다.
이렇게 또 한 발짝 올림픽 선수촌에 다가가는 거야!!
* * *
"주영아. 더 뛰게 해?"
"뛰어야지."
"첫날인데 너무 빡세게 굴리는 거 아냐?"
"..."
선수들을 백사장에 풀어놓은 것도 벌써 30분 째.
한상률은 슬슬 파김치가 되어가는 선수들이 걱정되지만, 이주영은 그 가운데서도 밝게 웃고있는 구마하를 보고 있다.
"웃네."
"뭐가? 마하?"
"안 힘드나?"
"야. 너 지금 마하 때문에 그러냐? 애랑 왜 기싸움을 하고있어."
"그게 아니라."
저 체력. 그날의 속도.
이주영의 머리가 바쁘게 돌아간다.
"상률아. 마하가 단거리 한다고 그랬지?"
"어."
"중거리는?"
"몇 번 물어봤는데, 애가 큰 관심이 없는 거 같더라고."
"관심이 없다라..."
구마하의 단거리 재능은 어디까지나 가능성.
그러나 중거리로 시각을 바꿔보면, 가능성이 아닌 당장 선수로 뛰어도 부족하지 않을 실력이다.
"상률아 확실히 하자."
"뭘."
"마하도 내 제자 맞는거지?"
"맞어. 굴려도 돼."
"오케이. 접수했어."
말이 끝나는 순간 이주영이 호루라기를 불어 선수들을 집합시킨다.
"그만. 다들 이쪽으로 모이고. 그리고 구마하"
"네!"
"넌 더 뛰어."
"저만요...?"
"그래. 뭘 보고있어. 빨리 안 뛰어? 돌아갈 거야?"
다른 선수들이 이주영을 폭력은 없지만 갈굼이 있는 코치라 말했다.
처음 참가한 합숙훈련. 그것도 타 학교에 곁다리로 들어왔다.
구마하는 거칠어지는 호흡을 훅 내뱉고 다시 백사장으로 뛰어나갔다.
"상률아. 애들 좀 부탁한다."
"응. 다녀 와."
이주영도 속도를 올려 구마하의 곁에서 같이 뛰었다.
"힘드냐?"
"헉! 허억! 아니요!"
아니긴 뭐가 아니야.
여긴 모래밭이다. 일단 평지가 아니야. 힘든 게 당연하다.
선수들도 몸이 무거워지는데. 이 녀석은 아직 목소리에 힘이 있다.
여력이 있다는 소리다.
"다리 더 높이들고!!"
"훅! 넵!!"
"더 빨리 속도 올려! 혼자 뛰고 있잖아. 누가 너 막어? 치고 나가란 말이야!!"
"으아악-!"
역시 이 녀석은 힘이 있다.
"아아아악!"
팍팍팍! 모래를 치고 달려가는 구마하의 기합 소리가 파도에 삼켜진다.
이주영은 고개를 돌려 선수들에게 다음 훈련을 지시하는 한상률을 보았다.
그리곤 은은하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헉! 헉!"
"숨 몰아쉬지 말고."
"네!"
그 사이 구마하는 지점을 찍고 돌아와 다시 이주영의 앞에 다다르고 있었다.
이주영도 따라 뛰며 묻는다.
"힘들어? 아주 죽겠지?"
"아닙니다!"
"뭘 아니야. 힘들어도 돼. 쉬어."
"더 뛰겠습니다!!"
"야. 야! 여기 군대 아니야. 쉬어. 아 멈추라고 이 녀석아."
"헉. 헉... 진짜요?"
"하하하~ 왜 이렇게 기합이 들었어?"
선수들은 다른 훈련을 시작하고 있었고 파도 소리와 바람 소리에 두 사람의 주변에 벽이 둘러지고 있었다.
구마하가 활짝 웃으며 이마의 땀을 닦아내며 말했다.
"꿈이 있습니다!"
"무슨 꿈이냐?"
"올림픽에 나갈 겁니다!"
올림픽이라 아주 허무맹랑한 꿈은 아닐지도 모르겠다.
아니, 어쩌면 대한민국 육상 최초 결승무대에 오를 선수가 나올지도 모를 일이지.
그것도 두 종목이나.
"가자. 마무리 훈련하고 저녁 먹으러 가야지."
"네."
"참고로 말하는데, 난 상률이 같이 물렁하지 않다. 긴장해."
"네!"
한상률은 구마하를 재능있는 아이라 보았다.
이주영은 그보단 더 큰 꿈을 품어 보았다.
그러나 사람들이 가늠할 수 있는 이상은 늘 실제보다 낮게 측정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