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륜기로 가버렷-12화 (12/401)

〈 12화 〉 남자는 허리가 생명 (1)

[5번 레인. 한주 고등학교 안지민]

"지민이 형 파이팅!"

6월 말. 학교를 조퇴하고 한 선생님과 주니어 선수권 대회를 보러 왔다.

처음 보는 육상 대회였다.

적은 관중에도 불구하고 긴장하는 선수들의 얼굴이나 운동장의 분위기에 나는 말로 표현 못 할 큰 매력을 느끼고 있었다.

탕!

달려! 가라! 코치와 동료 선후배들의 힘찬 응원 소리를 들으며 선수들이 달려나갔다.

"와. 다들 엄청 빠르구나..."

"지민이도 결승까지는 가겠다."

"그때보다 기록 더 좋아진 거 같죠?"

"너한테 깨지고 연습 많이 했다더라. 뒤늦게 정신 차리는 케이슨가 보네."

달리는 선수들을 보고 있으니 가슴이 두근두근 거렸다.

나도 뛰고 싶다. 가슴에 번호표 붙이고 싶어.

"선생님! 전 언제 대회 나가요?"

"마하야. 너한테 올 시즌은 없어."

"네?"

마라톤은 추울 때도 경기가 있지만, 육상 단거리 시즌은 4월부터 11월까지다.

우리가 아는 그 이상으로 대회는 많고 선수들 스케쥴도 학사일정보단 시합일정에 맞춰 바쁘게 돌아간다. 운동하는 사람들이 학생 때 교복보다 체육복만 입고 다녔다고 말하는 게 거짓말이 아닌 것이다.

"당장은 그래도 가을이면 참가할 수 있지 않나요?"

"공부 해. 훈련은 다음이야. 지금은 성적을 유지해야지."

"아니 제가 뭐 대학 갈 것도 아니고..."

"이 자식이 선생님 앞에서. 대학 안 갈 놈은 공부 안 해도 되냐? 그럼 그냥 학교 관두든가."

선생님은 운동한다고 수업을 빠지는 건 오늘 하루만. 이것도 다 나름의 계획이 있어 그러시단다.

"넌 다른 애들보다 한참 늦게 시작하는거야."

"그러니까 더 연습을 해야죠? 대회도 나가고."

"안돼. 초등학교 중학교부터 해오던 애들은 그게 몸에 익숙해서 가능하지. 너가 지금 그렇게 따라했다간 부상만 입고 그대로 선수생명 아웃이다."

사람은 어려서부터 체득 된 생활을 벗어날 수 없다.

내가 아무리 열심히 하고 싶어도 나는 평범한 생활이 더 몸에 익숙해져 있는 상황.

남들은 훈련할 시간도 부족해 수업도 빠져가며 운동에 매진할 때 나는 수업은 수업대로 마치고 나머지 시간을 운동에 전념해 내년 쯤 선수 활동을 시작하라고 하셨다.

"그렇게 될까요?"

"돼. 너가 가진 재능이면 충분하다."

"..."

"다른 길을 걷는다고 실력이 안 늘어나면, 할 때 집중하지 못한 거지. 연습량이 부족해서가 아니야."

"선생님 근데 체육이랑 공부랑은 다르잖아요."

"같아. 체육도 공부야. 너 운동은 인문학이라는 말 못 들어봤어?"

대통령부터가 인문학 어쩌구 하더니 그 여파를 타시는가?

이해 못 한 얼굴로 멀뚱멀뚱 선생님을 보고 있으니 미소를 보여주신다.

"공부만 한다고 다도 아니고, 운동만 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야. 인류 최고의 지성도 양쪽을 병행해 좋은 성과를 남겼어."

"그런 사람이 있어요?"

"있지. 플라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이자 아리스토 텔레스의 제자. 소크라테스의 스승이라는 플라톤.

네임 벨류 끝판왕 중 하나인 플라톤은 학자이자 레슬링 선수로도 당대 엄청난 성과를 남겼단다.

"지성을 단련하는 건 몸을 단련하는 것만큼 중요한 거야."

"무식해도 상관 없는데."

"마하야. 얻어야 할 걸 잃는 대신 거둬가는 실력은 올바른 성과가 아니야."

"저... 선생님. 제가 이렇게 생겼다고 뭔가 머리가 좋을 거라 생각하시는 거 같은데요. 저 그렇게 공부 못 해요."

"하하! 그럴수록 더 공부를 해야지!"

선생님이 손을 들어 어딘가를 가리키셨다.

"저쪽 좀 봐 봐."

운동장 구석. 방금 예선전을 마친 한 선수가 힘 없이 걸어 선글라스를 쓴 어른 앞에 멈춰 뒷짐을 지고 고개를 숙였다.

코치와 학생 같아 보이는데, 선수는 죄 지은 사람마냥 가만히 있고, 코치로 보이는 사람은 입을 씰룩씰룩 거리며 선글라스로 감출 수 없는 분위기를 자아낸다.

사람들의 함성과 응원소리에 묻혀 뭐라고 하는지는 모르겠다.

단지, 좋은 소리가 나오고 있지 않다는 건 그들을 보고있는 모두가 알 수 있었다.

"쯧쯧 저런다고 선수 실력이 늘어날까. 자신감만 떨어지지. 안 그러냐."

"모르겠어요."

"너. 올림픽 나가고 싶다고 했었지?"

"네."

"올림픽은 스포츠의 기원이야. 올림픽이 원래 신에게 바치는 제천행사였던 건 알지?"

"어... 알몸으로 뛰어다녔다는 건 들었어요."

"하하하! 그래. 맞어."

플라톤 나오고 소크라테스 나오더니 선생님도 철학적인 이야기를 해주신다.

바른 몸과 마음을 갖추는 것. 다른 말로 심신단련(心身鍛鍊)

선수들이 알몸으로 경기를 뛰었다는 건 그만큼 스스로가 바른 인간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함이었단다.

"규칙이 엄격했어. 얼마나 엄격하냐면, 부정 출발하면 그대로 사형이야."

"와... 세상 쫄려서 올림픽 나가겠나..."

"올림픽이란 그만큼 큰 영광을 얻을 수 있는 자리였다는 소리야. 고대인들은 운동을 향한 순수함을 가장 큰 가치로 여겼다고도 봐야겠지."

고대의 순수함과 신을 향한 열정은 현대로 넘어와 국제적인 이벤트가 되었다.

그리고 우리나라 체육계는 이 국제적인 이벤트에서 좋은 성과를 얻기위해, 선수들의 심신이 아닌 결과 하나만을 바라보며 마음을 내버렸다.

"잘하는 사람은 많어. 하지만, 실력과 비례하는 인성을 가진 사람은 보기 어렵다."

"실력과 인성이라..."

"둘 모두를 고루 갖췄을 때 스타라 할 수 있는 거야."

"저. 선생님. 전 딱히 스타가 되고 싶은 건 아닌데요. 전 그냥 올림픽 선수촌, 아니 참가만 해도 되요."

"우리나라에서 육상으로 올림픽을 나가려면, 육상스타가 되어야지만 가능해."

뭔가 구체화 되어가던 꿈이 갑자기 저 멀리 가버리는 것 같다.

"올림픽이 그렇게 어려워요?"

"후훗. 쉽진 않지."

"실력과 인성이라..."

"둘 중 하나를 택하라면 뭘 택할래?"

"그래도 일단 실력인 거 같애요. 인성 좋다고 실력이 좋은 건 아니니까."

"그래. 정답은 없다."

정답은 없다. 그렇다고 선생님 이야기가 딱히 거북하게 들리는 건 아니었다.

형도 늘 인성을 강조하는 말을 많이 하니까.

실력이 좋아도 반쪽짜리 인간이 되어버리고 마는 선수들.

올림픽이나 메이져 대회가 끝난 뒤, 목적을 잃고 방황하는 선수들.

선수 생활을 경험한 선생님은 교육자가 되면서 많은 고민을 가지셨단다.

"스포츠가 어째서 스포츠일까? 생각해 봤니?"

"운동이라는 게 원래 이렇게 질문이 많은 건 아니죠?"

"야. 운동하려면 공부 많이 해야 돼."

"전 그냥 시키는 거 잘 하고, 잘 뛰고 잘 먹고 잘 자면 그만인 줄 알았는데."

"옛날 코치들이 들으면 정말 좋아할 말이구나."

우리는 왜 스포츠를 즐기는가. 선수들은 무슨 이유로 존재하는가.

선생님은 체육이란 즐거움의 다른 말이라며, 스포츠를 엔터테인먼트라고 하셨다.

"선수는 대중 앞에 서야 하는 사람들이야. 연예인이랑 똑같애."

"확실히 국가대표는 연예인 급 인기를 얻죠."

"그렇지. 그래서 뭔가를 짊어지고 있는 사람들은 큰 책임감이 따르는 법이야."

노브라, 아니. 스파이더맨네 삼촌이 했던 말과 비슷하다.

남들 앞에 서는 사람은 큰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

선수는 개인의 영광을 떠나, 스포츠에 열광하는 불특정 다수의 희열을 책임진다.

그렇기에 선수란 실력도 중요하지만 인성이 우선이 되어야 한다.

"아무리 실력이 좋아도. 맨날 훈련 빼먹고 밤마다 파티하고 술이나 쳐먹고 다니면 사람들이 그런 선수를 응원하고 싶을까?"

"안 하죠. 저 같아도 그런 인간은 싫을 거 같아요."

"그래. 그러니 공부를 하라는 거야."

"...아 왜 또 아야기가 그렇게."

"마하야. 넌 늦게 시작하는만큼, 아직 다른 학생 선수들에게 없는 맑음이 있어."

운동하는 애들이 더럽게 맞고 다닌다는 건 얼핏 들었다.

뉴스에서도 나오고, 건너건너 어릴 때 태권도 다니던 친구들도 그런 걸 당연하게 말해주곤 했으니까.

하지만, 난 운동을 시작했어도 아직 그렇게 위계나 폭력에 물들지 않았다.

순수함을 잃지 않는 것.

그것이 더 선수의 발전을 불러일으킬 것이란 한 선생님의 말씀이었다.

"근데, 왜 공부를 해요?"

"모든 학교 수업이 대입에 맞춰있어 그렇지 대학만 빼고 보면 우리나라 교육이 그렇게 나쁜 편은 아니야."

"그런가? 난 잘 모르겠던데."

교과서를 찬찬히 살펴보면 전인교육으로서 훌륭한 역할을 해준단다.

바르고 구체적인 언어생활을 위한 국어.

논리와 직관력을 키워주는 수학.

세상을 배워가는 사회탐구나 자연에 대한 이해를 돕는 과학.

교양과목으로의 윤리나 기술도 그렇고, 예체능의 음악 미술 체육 등.

현직 교사인 선생님은 굳이 대학을 안 가더라도, 고등학교 공부만 충실히 마쳐도 사회가 원하는 인재가 될 수 있다고 하셨다.

"운동이라면 내가 알려줄 수 있어. 단, 심. 마음의 수련은 스스로 해내야 된다."

"허허허... 허허허허."

"왜? 공부하기 싫어서 운동하겠다고 한 거야?"

"아니요. 그건 아닌데. 더 어려운 길을 가야 될 거 같으니까 그러죠."

"그걸 혼자 해낼 수 없으니까. 너가 학생이고 내가 선생이지."

대회는 내년부터. 그때까지는 공부와 훈련을 병행하는 걸로.

가끔은 느리게 가는 것 같아도 그 길이 지름길이 될 수 있다고들 하니까. 선생님을 믿어보자.

옳은 것은 바른 길로 간다. 곤륜의 정신이 아니던가.

*  *  *

7월 첫 주. 본격적인 무더위가 시작됨과 동시에 학교는 기말고사 기간에 돌입했다.

난 선생님과 약속한 대로 밤에는 공부를, 새벽과 쉬는 시간엔 운동을 병행하고 있었다.

"훅. 후욱!"

좋은 성적을 낼 필요는 없다. 학습태도가 일그러지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처음은 좀 반신반의 했던 이야기지만, 이게 또 그렇게 나쁘지가 않은 게.

나는 몸을 쓰고 싶고, 나가서 뛰고 싶은데, 그러질 못하니. 짧은 쉬는시간 운동이라든지 방과 후 체력 단련이 꼭 노는 것 같은 기분이라 운동하는데 집중력이 높아지는 기분이다.

그래서 집 뒤 작은 동산을 오르내리던 것이 이제는 점점 거리를 벌려 거리가 있는 남한산성까지 오게 되었다.

"후우. 아 숨차라."

초등학교 때 소풍으로나 한두 번 와 본 곳을 이렇게 매일같이 뛸 줄이야.

인생 정말 어떻게 흘러갈지 아무도 모르는구나.

방학 시작되면 한고 선수들과 전지훈련을 간다.

부상 방지를 위해서라도 지금부터 체력을 더 키워놓아야 했었다.

선생님한테도 요즘 새벽과 저녁 틈틈히 등산을 하고 있다 말씀드리니, 산은 모든 체력의 기본기를 튼튼하게 만들어 준다고 좋은 선택이라고 하셨다.

등산 정말 좋은 운동같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그나마 운동 좀 하는 건 산이 많아서가 아닐까?

거친 돌길은 골격을 강화시켜주고 오르막을 오르는 과정은 심폐지구력을 발전시켜준다.

모든 과정에서 근육이 단단해지는 건 기본이었다.

산이 거기있어 오른다는 말은 그냥 나온 게 아니다.

"좋아 이제 30분. 마지막 스퍼트다!"

단순하게 올림픽 선수촌 이라는 단어에 꽂쳐 시작하게 된 체육이지만, 진짜 잘 선택한 거 같다.

오늘도 빠르게 서문을 찍고 내려왔다.

이제 집에 가서 씻고 학교 갈 준비를 해야지.

약수터에 들려 바가지로 물을 벌컥 거리고 있으니 할아버지 한 분이 다가와 말씀을 건네셨다.

"자네 그제도 여기 왔었지?"

"네."

"뭐하는 친구야? 운동 해?"

"하하! 그렇게 보이세요?"

"그럼. 누가봐도 운동선수 같구만."

뿌듯뿌듯 뭔가 칭찬이라도 들은 듯 기뻐하고 있으니 할아버지가 말씀하셨다.

"내일도 올 건가?"

"네. 매일 해야죠."

"그럼 작은 부탁 하나만 해도 될까?"

"뭔데요?"

할아버지가 옆에 모래주머니를 가리키셨다.

"올라갈 때 이거 하나만 들고 와줄 수 있겠나?"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