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륜기로 가버렷-11화 (11/401)

〈 11화 〉 땀은 노폐물을 배출해 피부를 맑게 해준다. (7)

"잘 먹었다 상률아."

"가야되냐? 아니면 2차 고?"

"맥주 한 잔만 더 하고 가자. 내가 살게."

"오늘은 내가 쏴야지. 운동장도 빌려줬는데."

"그럼 비싼 데로 가자."

"꺼져. 하하하!"

아이들과 있을 때나 선생님이지 둘만 있을 때의 한상률과 이주영은 영낙없는 청춘이었다.

그래도 제자를 가리키는 몸. 사회인의 대화는 진중함을 담고 있다.

"지민이라고 했지? 인물 좋더라."

"재능은 있는데, 애가 겉멋이 들어가지고"

"그 나이 때 다 그렇지. 자신감 잃지 않을까 걱정이네."

"전국엔 10초 뛰는 애들도 수두룩 해. 자극되고 좋아."

"너 생각보다 엄격한 감독이구나."

"엄격해야지. 현실은 냉정한데. 그게 정신차리라고 줘 패는 것 보다 낫지 않겠냐?"

"그건 그렇지."

가까운 호프집에 도착해서도 대화는 부드럽게 이어졌다.

"그래서. 마하는 진짜 니가 데리고 있을 거야?"

"대한체고라고 뭐 다를까?"

"당연하지. 시스템이 다른데."

"주영아. 운동 시작한지 한 달 조금 넘은 애가 엘리트 체육을 견딜 수 있을거라 생각해?"

"흐음."

체육계엔 빛과 어둠이 있다.

빛이 승리자의 영광. 명성. 보상이라면 어둠은 거기까지 가는 길에 겪어야 하는 운동계의 구타와 억압. 그리고 비리가 되겠다.

어느 사회나 명암이 존재한다지만 체육계는 그 격차가 더욱 커다란 닫혀있는 세계였다.

"다시 돌아가면 난 혼자 운동할 거야."

"그게 되겠냐."

"내가 말해주지 않았나? 우리 고등학교때 감독이 개새끼였는데."

"야. 난 맞다가 선수생명 끝날 뻔 했어."

"그때는 왜 그런 걸 당연하게 받아들였는지..."

"요즘도 똑같애."

일반 체육교사와 전문 체육 특기생을 다루는 두 사람은 의견 차이가 있지만, 그럼에도 문제가 있다는 점에서는 동의하고 있었다.

"나도 애들 가리키는 입장이지만. 그것도 냉정히 선수가 이겨낼 과제가 아닌가 싶어."

"왜? 잘못 된 건 고쳐야지."

"고칠 수 있어야 고치지. 모난 돌이 정 맞는거야. 목소리 높이면 병신 되는 게 이 바닥인데 누가 고쳐?"

운동으로 일상을 버틸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평생을 체육 하나만 보고 달려온 이들은 서로가 서로를 끌어주는 시스템을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그렇기에 부조리를 끊어내기란 생각같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마하는 재능이 있어. 알잖아. 잘하는 놈 아무나 못 건드린다는 거."

"천부적인 재능을 가졌어도 결국 그 통에 들어가면 똑같아 지는 거야."

"그래도 요즘엔 학부형들도 많이 변해서, 마냥 코치라고 굽신거리진 않는다니까."

"학부형이 있을 때 얘기지."

"왜? 그 친구 부모님 뭐 하는데?"

"담임 선생님한테 들었는데 형이랑 둘이 지낸데."

"그럼. 좀 어렵긴 하겠네."

"처음에 잘하다 애 성적이라도 안 나와 봐. 어떻게 될 거 같냐?"

굳이 답하지 않아도 끔찍한 일이 예상 되는 듯 이주영은 씁쓸하게 맥주 잔을 들었다.

"우리 코치가 그랬어. 기록 떨어지니까 그때부턴 어우..."

"잊어. 다 큰 놈이 뭘 아직까지."

"데리고 있고 싶다. 마하 정말 잘 키우고 싶어."

"진짜로? 니네 학교에서?"

"뭐 내가 육상을 모르는 것도 아니고. 그리고 너가 조금만 도와주면."

"어이고... 말이 쉽지..."

하지만 구마하 같은 존재가 선수들과 함께 있는 건 나쁜 이야기가 아니었다.

천부적인 재능에 자신감이 떨어질 애들도 나오지만, 경쟁심리는 실력향상에 도움을 준다.

상률이와 함께 구마하를 품는다라...

이주영은 잠시 고민에 빠진 뒤 심각한 얼굴로 물었다.

"상률아. 진심을 말해 봐. 선수를 위한 거냐? 아니면 너의 어떤 체육계에 대한 반항심이냐?"

"둘 다. 그렇지만 선수를 위한 게 8:2."

"맹세할 수 있는 거야? 니 욕심이 선수 발목을 잡을 수도 있어."

"걱정 마. 마하가 포기하지 않는다면 나도 포기하지 않는다."

"애는 뭐라는데? 너한테 계속 배우겠다고 그래?"

"그러니까 오늘 훈련도 시키는 대로 왔겠지. 어차피 우리 학교에 나 아니면 육상 가르칠 사람도 없어."

따져보면 내 학생도 아닌 상황이었다. 한상률의 마음은 진심이었다.

"주영아. 그런 거 보고 싶지 않냐?"

"뭐?"

"진짜 밝은 에너지를 가지고 있는 선수. 사람들한테 존재만으로 힘을 줄 수 있는 그런 녀석 말이야."

"보고 싶지. 그러지 못하는 환경이라 그렇지."

"고된 훈련도 이겨내고. 또 한번 더 도전하고."

"세상에 그런 놈이 어딨어. 다 이 악물고 하는 거지..."

"그러니까. 우리는 정말 괴롭게 운동했잖아. 그 반대를 보고 싶지 않냐고?"

"..."

"다른 길을 가보자. 우리가 문제라고 생각했던 것만 애들한테 시키지 말자고."

"말 한번 거창하네. 뭐 파냐? 정수기? 보험? 케이블? 계약서는 가지고 왔어?"

선수 시절을 돌아보는 이주영의 마음도 다를 건 없었다.

심심하면 벌어지는 집합과 구타 폭언.

말도 안 되는 부조리를 정신력 강화라는 명목으로 강요하는 모순들.

뛰어난 실력을 보여 태릉에 가더라도, 메달 종목이 아니면 쓰다 버려지듯 내쳐지는 잔인한 현실에 많은 이들이 눈물을 삼키며 이 바닥을 떠났다.

재밌고 좋아서 시작한 운동을 원망할 수 밖에 없던 시절이었다.

"엘리트 체육과는 다른 길을 걷자라..."

"우리가 해보는 거지."

"이것도 인연이라면 인연인가..."

"해주는 거냐?"

두 사람 생계 걱정 없는 체육교사였다.

평범한 일상에 작은 일탈 하나 덧붙인다고 큰 일도 아닌 거. 이주영은 끄덕끄덕 고개를 흔들며 악수를 내밀었다.

"오케이. 콜."

"고맙다 주영아!"

"방학 때 합숙훈련이 있어. 그때까지 몸이나 만들어서 와."

"그래!"

"단, 너도 도와줘야 돼. 나도 혼자서는 은근 벅찼는데. 니네 교장이랑 잘 상의해 봐."

"물론이지!"

"웃지마 새끼야. 넌 이제 좆됐어. 선수 키우는 게 쉬운 거 같지? 겪어 봐라."

"하하하!"

500cc 맥주잔을 청명하게 부딪히며 두 사람은 합의점을 찾았다.

"진짜로? 올림픽이라고?"

"그렇다니까. 대학도 아니야. 처음부터 올림픽은 어떻게 나가냐고 찾아왔어. 재밌는 놈이야."

"패기 있네. 그럼 베이징인가?"

"모르지. 내년이 될 지도."

"아테네라. 국가대표 선발전까지면 뭐 어떻게든..."

"지금 한국 최고 기록이 몇이지?"

"지난 달 안양시청 선수가 10초 48인가 나왔었어."

"10.48."

구마하는 성장기에 놓여있는 고등학교 2학년이었다.

본격적으로 운동을 시작하면 기록은 빠르게 단축 될 것이다.

이상대로만 간다면 국가대표 선발도 허무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  *  *

"껌이구만. 한주 고도 별 거 없네."

"근육 있으면 뭐하냐고. 잘 생기면 뭐해. 좆같이 생겨도 빠른 게 장땡이지."

운동을 마치고 집에 가는 길. 동네까지는 친구들과 하하호호 잘 떠들고 왔는데.

"마하야? 너 왜 그래? 어디 아프냐?"

"그냥 배고파서..."

처음은 잘 못 느꼈지만 가면 갈수록 배가 고프다 못 해 위에 구멍이 나는 거 같았다.

"야. 니네 이제 뭐 할 거냐?"

"집에 가야지."

"난 여자친구랑 약속 있어."

"학원 가서 한 시간이라도 앉아 있어 보련다. 아직은 수업중이라."

"그래. 그럼 안되겠네."

"왜? 뭐 할 거 있었어?"

"아니. 배고파서 뭐 먹자고. 내가 살 게."

"됐어. 들어가."

"돈 아껴 새끼야. 어제도 신발에 뭐에 막 써놓고."

"나도. 연정이 끝날 시간이라 가봐야 돼."

"어쩔 수 없지. 가라."

응원해 준 것도 고마운데 더 붙잡기도 미안해 애들과는 적당히 동네에서 흩어졌다.

먼저도 느꼈지만 내공을 쓴다는 건 생각지도 못한 에너지를 소비하는 것 같다.

안되겠는데. 이거 너무 힘이 없는데...

이 상태로는 도무지 집까진 무리고, 형이라도 찾아갈까.

바로 옆에 포장마차 분식집이 보인다.

일단 먹고 계산해드린다고 말하고, 눈앞에 보이는 튀김이나 김밥 같은 것들을 마구마구 집어 먹었다.

"아우! 학생. 파는 걸 그렇게 먹으면 어떻해?!"

"죄송해요 아줌마. 제가 다 계산해 드릴게요. 지금 너무 배가 고파서."

"그래도 천천히 먹어. 운동하는 학생이야?"

"네."

"으이구. 운동도 적당히 해야지."

먹지 않으면 죽을 거 같았다.

아줌마도 걸신들린 모습이 딱해보이는가 천천히 먹으라며 이것저것 챙겨주셨다.

어제 용돈 받았는데. 신발 사고 운동복 사고 오늘 떡볶이 먹고 다 썼네.

칼로리 높은 분식을 그렇게 먹어도 겨우 허기만 가시는 기분이라 마지막 힘을 쥐어 짜 형한테 갔다.

"혀엉..."

"어? 사장님. 마하 왔어요."

형은 주방에 있고, 알바하는 형들이 대신 맞이해 주고 있었다.

어쩐 일로 왔냐는데, 운동하고 너무 배가 고파 찾아왔다고 말했다.

"하하. 자리잡고 있어 봐."

반찬과 밥이 차려지고 형도 나와 왜 집으로 안 가고 여기로 왔느냐고 묻는데, 대답할 겨를도 없이 일단 숟가락을 들어 밥 공기를 비워내고 있었다.

"야. 마하야?"

"나중에. 나 지금 먹지 않으면 죽을 거 같애."

4인분에 가까운 밥을 흡입하고 직원들이 쓰는 작은 탈의실에서 기절하고 말았다.

준비되지 않은 몸으로 내공을 쓴다는 게 이렇게 위험한 일이구나.

아... 이게 뭐냐. 괜히 혼자 흥분해가지고.

혜정이 남자친구를 이긴다고 올림픽에 나갈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어?"

"일어났냐."

"뭐야...? 아 내려줘."

"가만 있어. 혼자 걷지도 못하면서."

얼마나 잠들었는지 모르지만, 눈을 떠보니 형한테 업혀 집으로 가고 있었다.

"훈련이 그렇게 힘들었어?"

"아니..."

"그럼?"

"..."

내공을 쓴 게 잘못은 아니지만 뭔가 말하면 혼날 거 같아 가만 있었다.

물론, 형도 다 알고 있는지 더는 깊게 묻지 않는다.

"내가 걸을 게. 내려 줘."

"가만있어."

"아 누가보면 어쩌려고"

"하하! 야 인마. 보면 뭐? 내가 니 똥 오줌 다 갈아줬어. 까불고 있어 찌그만게."

에이 씨 모르겠다. 자기가 그런다는데 그냥 있을란다.

흔들흔들 형 등에서 어렸을 때 기억을 떠올리고 있었다.

뭔가 편하고 그리운 기분도 들어 그냥 힘을 축 빼고 있었는데.

"어? 안녕하세요."

"그래 혜정아. 심부름 가니?"

"네. 근데 거기는?"

"아. 내 동생."

아 진짜. 쟤는 또 왜 여기서 나와가지고...

이제와서 아는 척 일어나기도 뭐하고 그냥 눈을 질끈 감은채 잠들은 척 하고 있었다.

"오늘 운동했는데 피곤했나 봐."

"아. 저도 들었어요."

"그래? 누구한테?"

"남자친구요. 둘이 같이 시합했다고 그러던데."

"진짜?"

몰라. 아무것도 몰라. 애시당초 난 티벳인의 선조지 한국말 자체를 모르는 거야.

형이 뒤를 돌아보는 거 같은 느낌이 전해졌다.

명경지수다. 잠드는 것만 집중해라. 난 지금 물에 떠 있다.

"후후. 그래서 그랬구나."

"뭐가요?"

"아. 별 일 아니야."

"남자친구가 그러는데, 저 모르는 애라고 그랬다던데요?"

"하하. 마하가 널 왜 몰라. 집에서도 니 얘기 많이 하는데."

아 제발 그냥 좀 가자... 동생 마지막 자존심은 지켜줘야 될 거 아냐.

허벅지로 형 등을 퍽퍽 때리고 있으니 슬슬 움직인다.

"그래. 다음에 보자."

"네. 들어가세요."

혹시나 혜정이가 지나가다 얼굴이러도 볼 까 형 등으로 느릿하게 고개를 돌리는데.

"훗."

웃었어.

아 젠장. 분명 비웃은 거야...

아파트 입구에 도착해서는 형이 알아서 나를 툭 내려놓았다.

고개도 들지않고 엘리베이터 앞에 가 있었다.

편지함을 열고 이것저것 고지서를 확인 한 형이 따라와 물었다.

"그래서 그랬냐?"

"...뭘?"

"혜정이 남자친구라서 이기고 싶었어?"

"아 몰라."

"하하하!"

집에 들어와서는 짧은 인성교육을 받았다.

"마하야. 우리 그때 같이 스파이더 맨 봤잖아. 기억나지?"

"대충."

"거기서 뭐라고 그랬어. 강한 힘에는 강한 책임이 따른다고 그러지."

그런 게 있었나? 여주인공 노브라로 나왔던 것만 생각나는데.

"함부로 내공 쓰지마. 이기고 싶어도 그러는 거 아냐."

"뭐. 나라고 쓰고 싶어 쓰나. 그냥 어쩌다 보니까. 그 힘이 툭 튀어나오는 거지."

"잘못하면 형 같이 돼. 그럼. 몸을 강하게 단련하고 싶어도 할 수 없어."

내공은 초인적인 힘이었다. 그렇기에 쥐어짜서 쓰다보면 몸을 망치게 되어 있었다.

"스포츠의 기본정신이 뭐지?"

"페어플레이 정신?"

"그래. 준비되지 않은 힘은 반칙이랑 똑같은 거야."

"그게 왜 반칙이야? 도핑을 한 것도 아니고 내 능력에서 사용하는 건데?"

"그 몸을 망칠 뻔 했으니까."

바른 건 옳게 가고, 그른 건 나쁜 길로 간다.

곤륜의 정신이란다.

준비되지 않은 내공은 도핑보다 더 나쁜 것이라고 형이 말했다.

"몸을 먼저 키워. 튼튼한 외공을 쌓아 얼마든지 내공을 쏟아내더라도 문제되지 않게. 알겠지?"

"형. 그럼 더 멋있어 질까?"

"후후후. 넌 이미 충분히 멋있어."

형이 말하길 그동안 땀을 많이 흘려 그런가 피부가 전보다 좋아진 거 같단다.

진짜. 이래서 잘생긴 인간들은 뭘 모른다니까.

피부는 상관 없다고. 내가 원하는 건 골격, 키. 넓은 어깨와 각잡힌 가슴. 그리고 좀 그럴싸한 이목구비 이런 건데.

아무튼, 당분간 내공은 자제하기로 했다.

아직 그 힘을 잘 모르기도 하거니와 준비되지 않은 몸으로 함부로 뛰다간 그나마 잘 생겨질 마지막 기회조차 날려버릴 수 있으니까.

올림픽이 꿈이라면 외모는 삶이잖아.

다음 날 학교에서 한 쌤도 같은 말씀을 해주셨다.

"한주 고랑 같이 훈련하는 걸로 이 선생님이 동의하셨다. 교장 선생님도 그런 거라면 얼마든지 허락해 주신다고 하셨고."

"아. 정말요?"

"너는?"

"저야. 좋은 운동장에서 운동하면 좋죠."

이제 몸을 키워야겠다.

내공에서도 운동에서도 지금 나는 몸이 빈약하단 문제가 있었다.

좋다. 하루하루 뭔가 새로운 목표가 새워지고 있다는 게. 운동 시작하길 정말 잘 한 거 같다.

"아 졸려라. 그래도 선선하네."

새벽 공기를 깊게 들이마셨다.

매일 뒷산으로 아침 조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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