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9화 〉복수란건 짧게.
고향에 도착했다. 찌뿌둥한 몸을 이끌고 마차에서 나왔다.
"그러면 잘 가렴 유벨, 아리스."
"콜슨 씨도 잘 가세요!"
"감사했습니다."
마차에서 내리니 아리스와 유벨이 마부와 인사한다.
"아는 사람이야?"
"우리 마을에 주기적으로 오는 상인의 마부 분이시잖아. 매번 이분이 오셔서 마을 사람들과 친해진 분이야."
"헤에..."
유진은 상인이 오든 말든 식사나 옷, 생필품에 별 변화가 없어서 큰 관심이 없었다.
상인을 통해 들어오는 좋은 물건들은 전부 에반의 차지였고 나한테 오는 건 하나도 없었으니 관심이 있을 리가 없지.
평화로워 보이는 마을을 한번 바라봤다. 유진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덕분에 기분이 언짢아졌다.
"그, 그러면 들어가 보세요!"
"나중에 시간 나면 또 봬요!"
"오, 오냐! 나는 이만 가보마!"
후다닥.
마차가 빠르게 떠났다. 아리스와 유벨은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슬쩍슬쩍 나를 바라봤다.
"내 눈치 볼 거 없어."
"하, 하하하! 누가 유진이 눈치를 본다고 그래!"
"맞아! 네 눈치를 볼 리가 없잖아!"
둘은 그리 말하면서 슬쩍 나에게 달라붙어 몸을 비벼댔다. 유벨도 마을에 온 탓에 죄책감이라도 들었는지 평소보다 순하게 나를 대했다.
'보너스 능력이란 거 꽤나 성능 확실하구나.'
설마 그 한방에 유벨이 저리 순해질 줄이야.
창세신은 신이라는 건지 실로 훌륭하고 효과 만점인 기술에 만족하며 마을 입구로 향했다.
우리 마을은 특출난 점도 없고 근처에 맹수도 없기에 나무 목책만이 마을을 지키는 유일한 벽이다.
나름 자경단도 세워져 있지만, 그들은 입구나 목책 근처에 앉아 술이나 마시며 낄낄 웃고 있었다.
"쯧, 형편없기는."
술에 취해 붉어진 얼굴로 경비가 비틀거린다. 자경단이란 놈이 대낮부터 술이라니 여기가 한적한 시골이라 다행이지 다른데 였으면 당장에 모가지가 날아 갔을 거다.
"아저씨! 저희 왔어요!"
"오랜만에 뵙네요."
아리스와 유벨은 이번에도 아는 사람인지 친근하게 다가갔다. 술을 마시던 경비는 둘을 알아보고 눈동자가 커지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비틀거리며 다가왔다.
"오~ 아리스랑 유벨 아니야! 정말 오랜만이구나! 그래, 길드에 잘 들어갔니?"
"네! 저랑 유벨 둘 다 굉장히 큰 길드에서 일하고 있어요!"
"거기다 저는 마법사이기도 하죠!"
둘은 당당하게 말했다.
"하하하, 대단하구나! 내 눈에는 아직 어린 꼬맹이로만 보이던 너희가 이렇게 훌륭한 모험자가 되다니! 그나저나 뒤에 계신 이 분은 누구니?"
남자가 의아해하며 나를 바라본다. 그 물음에 아리스와 유벨이 흠칫 몸을 떨었다. 좋았던 분위기가 어느새 냉랭하게 변했다.
그래...나를 알아보지 못한다 이거지. 사실 당연한 거다. 나는 거듭되는 성장으로 단순 외모의 상향을 넘어서 골격에서부터 바뀌었다.
거기에 분위기까지 그들이 아는 유진과 다를 테니 알아보지 못하는 게 당연하다.
"저, 유진 입니다."
몸에서 타오르며 기어 올라오려는 분노를 억누르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내 말이 경비의 얼굴이 천지개벽이라도 맞이한 듯 크게 떠졌다.
"유, 유진이라고? 네가!?"
"문제라도 있나요."
내 달라진 모습을 보고 저렇게 매우 놀라는 모습을 보니 이 마을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해 왔는지 짐작이 간다.
내가 인상을 찌푸리자 남자는 나를 빠르게 훑더니 태세를 전환했다.
"미안하구나. 이 아저씨가 눈이 침침해서 몰라봤네. 이야~ 너도 굉장히 달라졌구나! 아주 멋져!"
남자는 딱 보기에도 굉장히 강해 보이게 변한 내 눈치를 살피며 설설 기었다. 아, 기억났다. 이 남자 분명 예전에 유진의 엄마한테 찝쩍대다 차였던 남자다.
그래서 나를 끈질기게 괴롭혔었지. 그때 엄마라는 년은 못 본 척 했고.
까드득!
이가 갈린다. 유진의 기억을 자세히 알게 될수록 유진이 느낀 감정은 나에게 전달되었고 그 감정들은 분노가 되어 나를 활활 태웠다.
'그래, 이런 쓰레기들한테 반드시 복수해주마. 나만 믿으라고 유진!'
그러면 우선 눈앞의 남자부터. 한 손을 들어 검은 기운을 담는다. 이건 저주. 정신력이 강하고 육체가 잘 단련되어 있다면 가벼운 감기로 끝날 양이지만.
저렇게 비굴하고 술에 취했으며 단련도 안 된 남자가 받는다면 이야기는 달라지지.
"뭐, 뭐냐 그!"
남자가 뭐라고 더 외치기 전에 입을 틀어막았다. 남자의 몸에 내가 손수 만든 특제 저주를 주입했다.
피부를 통해 스며든 저주에 남자는 몸을 떨다가 기절했다.
"꼬르르륵..."
입에서 거품이 새어나온다.
"유진아. 아저씨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아리스가 떨면서 물었다.
"별거 아니야. 나한테 했던 짓을 원혼의 저주 형태로 묶어 넣은 거니까 버티면 가벼운 감기로 끝. 버티지 못하면...최대 하반신 마비겠지."
왜, 내가 복수하는 게 무섭거나 꺼림칙해?
아리스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녀는 내 등 뒤에 달라붙었다. 떨고 있었으나 공포에 의한 떨림이 아니다.
아리스는 지금 이 순간에도 나를 걱정하고 있었다.
"복수 하는 건 좋아. 유진이가 느낀 고통과 아픔을 나는 단 하나도 이해해주지 못할 테니까. 하지만 그 탓에 괜히 몸을 해치지 말아줘. 걱정된단 말이야."
"하아~ 너도 참...어지간하네. 날 그렇게 모르겠어. 아무리 화가 나고 복수한다 해도 내 몸을 해치면서까지 집착하지는 않아."
그래도 걱정 받는다는 감각은 좋다. 아리스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이제 그만 가자."
쓰러진 남자를 대충 치워두고 마을로 들어갔다. 작은 마을답게 소박한 나무집이 곳곳에 지어져 있다.
어째서인지 마을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다.
상황 설명을 해줄 사람이 필요하다. 그런 생각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니 누군가와 마주쳤다.
온화한 인상의 30대로 보이는 여성이 아리스를 닮은 아이를 안고 있는 게 보인다. 아리스를 바라보니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 엄마랑 여동생이야."
어쩐지 닮았더라. 우리는 아리스의 어머님께 다가갔다. 그분도 아리스는 봤는지 놀란 표정으로 달려오셨다.
"아리스!"
"엄마!"
둘은 서로를 향해 달려가 꼬옥 껴안았다. 아리스의 커다란 가슴은 어머님의 영향인지 어머님 또한 가슴이 수박과 같았고 둘의 가슴이 짓눌리며 꼴리는 모양을 만들어냈다.
"아이고. 몸 상한 거봐. 얼마나 고생 한 거야."
"고생하기는. 고생은 엄마가 더 했지. 피부 까칠해 진 거봐. 나 없이. 우리 아린이 돌보느라 많이 힘들었지."
"우리 귀여운 딸 키우는데 뭐가 힘들겠어. 너야말로 길드 가입은 잘됐나?"
"응! 이거 봐봐 나 벌써 C랭크 모험자다!"
둘은 오순도순 이야기를 나누며 훈훈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오랜만에 만난 어머니가 반가운 것 같았다.
"아리스. 얘기는 일단 거기까지 하자."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어머님의 표정이 나에게로 향했다.
"이 사람은 누구니?"
"아, 엄마도 참! 유진이잖아 유진!"
아리스가 내 정체를 밝히며 팔짱을 꼈다. 그리고 나에게 가슴과 볼을 비벼대며 애정을 표시했다.
이에 어머님은 당황하시며 말을 더듬으셨다.
"유, 유진이? 그 어두웠던 아이라고!? 그렇지만 생긴 게 완전히...! 아니, 그보다 유진아. 그러면 너 에반하고는 어떻게 된 거니! 지금 에반이 우리 마을에 와있는데!"
그 말을 넘겨들을 수 없겠는데.
"어머님. 에반이 어디에 있죠?"
어머님의 어깨를 잡고 에반의 위치를 물었다. 어머님은 손가락으로 광장 부분을 가리켰다.
"에반이 어제 아침에 금화를 잔뜩 들고 찾아왔어. 그래서 어제부터 축제 중이야."
"그래서 마을 전체가 조용했던 건가. 광장에 가면 굉장히 시끄럽겠네."
주머니에서 창을 꺼내 어깨에 지고는 광장으로 향한다. 유벨이 내 앞에 서서 나를 가로막았다.
"자, 잠깐만! 뭘 하려고!?"
"반역죄를 저지른 반역자가 있다. 그렇다면 그 목을 베어줘야지."
"아, 안돼!"
유벨이 기겁하며 소리쳤다.
"뭐가 안 된다는 건데. 유벨 너는 아직도 에반의 편에 서겠다는 거야?"
"그으, 그, 그건 그러니까..."
유벨이 고개를 살포시 내렸다. 그녀의 표정 속에서 공포와 두려움, 그리고 나를 향한 죄책감과 동정을 볼 수 있었다.
"나 참, 누가 누굴 동정하는 거야 지금."
유벨의 멱살을 잡아 끌고 왔다. 이제는 유벨하고 승부를 볼 때다.
"유벨. 네가 원하니 놈을 죽이지는 않겠어. 대신 오늘 안에 나인지 에반인지 마음을 확실히 정해."
유벨은 나한테 올 거다. 그녀의 몸은 이미 나한테 맞춰졌으니까. 그리고 지금 이렇게 강요하는 것 또한 그녀의 마음을 혼란스럽게 하여 나를 선택하게 만들 거다.
마법사란 모름지기 이성적이고 냉정하니까.
그렇기에 걱정은 조금도 되지 않았다.
"비켜."
그래도 지금은 내가 화났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 그녀를 밀치고 지나갔다. 따라오려는 아리스까지 말리고 나 혼자 광장으로 향했다.
"그나저나 금화를 들고 마을에 왔다라. 좆됐네."
절로 식은땀이 흐른다. 그 에반이 금화를 잔뜩 들고왔다?
보나마나 마왕 교단의 재산이겠지. 그리고 얘가 여기 있다는 게 황제의 귀에 들어가지 않았을 리 없다.
지금쯤 황제의 기사단이 달려오고 있겠지.
"후우, 좆같네 진짜."
광장은 떠들썩했다. 먹고, 마시고...사람들은 신나게 즐기고 있고 손에는 술병이 들려 있었다.
그 가운데에는 에반과 그를 닮은 중년의 사내, 이 마을의 촌장. 그리고 내 엄마라는 년이 있었다.
확실히 엄마라는 년은 유진이 그런 취급을 받으면서도 미워하지 못할 만큼 아름다웠다.
그리고 그녀 옆에 서 있는 또 다른 여인은 진국이었다.
30대로 추정되는 농후하게 익은 몸과 풍만한 가슴과 탱탱한 골반은 20대의 젊은 미녀에게 뒤지지 않는 맛과 분위기를 풍겼다.
특히 눈웃음 지으며 에반과 이야기를 나누며 자애롭게 웃는데 그 모습은 엄마의 정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그녀는 에반의 어머니인 에바리스다.
'반면에 나는 저 딴 게 이 몸의 어미라니.'
여자로서는 나쁘지 않다. 한번 콱콱 밟아주면 다시는 기어오르지 못할 상의 여자다. 그렇지만 엄마로서는 꽝이다.
다시 한번 유진의 악운을 동정하며 술에 취한 것인지 얼굴이 붉어진 에반에게로 향했다.
마을 사람들은 처음 보는 사람인 나를 보고도 잠깐 의아해 할 뿐 곧 축제의 열기와 술의 취기에 그냥 넘어갔다.
촌장과 내 어미, 에바리스도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이윽고 나는 에반의 앞에 도착했다. 에반의 얼굴에 나 때문에 생긴 그림자가 졌고 에반은 눈을 찡그리며 나를 바라봤다.
나와 에반의 눈동자가 마주쳤다. 갑작스러운 내 등장에 화들짝 놀라는 에반.
"너, 네가 어떻게 여기!"
"닥쳐 반역자 새끼야."
콰앙-!
에반의 머리를 잡아 땅에 내리쳤다. 에반이 앉아있던 탁자가 부서지는 건 물론이요 광장의 땅이 쩌저적 갈라졌다.
뿌득! 뿌드득!
에반의 머리를 잡은 손에 조금씩 힘을 주자 불길한 소리가 난다.
"끄아아악! 그만, 그만! 그만해애애애!"
"하, 근성 없기는."
머리가 잡힌 지 얼마나 지났다고 반항할 생각도 못 하고 벌써 항복이란 말인가. 근성이라고는 조금도 없구나.
"한심한 녀석."
"커억! 끄으으으읏!"
놔줬다. 에반은 머리를 잡고서 바닥을 굴렀다. 어느덧 마을 사람들의 시선이 나에게로 몰렸다.
촌장이 나를 가리키며 외쳤다. 엄마라는 년은 아들은 못 알아보고 쓰러진 에반을 걱정했다.
"뭣들 하는 거야! 자경단은 당장 와서 저 불한당을 체포해라!"
촌장의 외침에 술에 취한 자경단원이 다가온다.
"미쳤나? 저딴 놈들로 나를 잡겠다고!"
번개의 권능으로 허공에서 번개를 떨궜다.
콰르릉!
커다란 소리와 함께 자경단원 들은 번개에 휩쓸려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기절했다.
"내가 살다 살다 이따위 무시를 다 당하네."
하늘에서 떨어진 번개와 쓰러진 자경단원에 마을 사람들이 겁먹고 뒤로 슬금슬금 빠지기 시작했다.
촌장은 덜덜 떨며 바닥에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내 엄마라는 년은 에반을 지키듯 내 앞을 가로막았다.
"너, 누구니."
"누굴 것 같아."
엄마라는 새끼가 아직도 내가 누군지 못 알아보네.
"빨리 말해봐. 내가 누구일 것 같아?"
창을 꺼내 들었다. 엄마라는 년이 떨면서 나를 바라봤다. 왜, 무기를 꺼내 드니까 이제야 무서워진 모양이지?
"이런 걸 엄마라고 모시고 산 내 삶이 한심하네."
"어, 엄마!?"
내 말에 그녀가 당황한듯하다.
"오랜만이야 엄마, 네가 말했던 대로 강해져서 돌아온 유진인데...뭔가 할 말 없어?"
그녀의 목에 창을 들이댔다. 그녀의 얼굴을 마주 볼 때마다 알 수 없는 충동이 자꾸만 일었다.
이년의 목을 베면 좀 잠잠해지려나. 창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간다.
"유...유진아? 너 진짜 유진이 맞니?"
"그러면 가짜 유진도 있을까. 알았으면 자식 앞길 막지 말고 비켜. 아니면 둘 다 같이 죽거.."
"유, 유진아! 엄마한테 그게 무슨 말버릇이니!"
내가 자기 아들이란 걸 알았기 때문일까. 그녀는 당당하게 내 앞에서 내 뺨을 후려치려 했다.
"어, 어라?"
"미쳤냐? 아직도 상황 파악이 안 돼?"
짜악!
"꺄악!?"
그녀의 뺨을 후려쳤다. 강하게 쳐서 코피를 흘리며 그녀가 주저앉았다. 나는 그녀 앞에 쭈그려 앉아 그녀의 턱을 잡고 작게 말했다.
"어때. 네가 말했던 대로 나는 굉장히 강해졌어. 그러니까 엄마니 뭐니 하면서 지랄하지 마 나는 당장에라도 널 죽이고 싶어서 손이 근질거리거든."
짓밟히지 않으려면 강해져야 한다. 그 말대로 나는 강해졌다. 그러니 이제는 내가 짓밟을 차례다.
그리고 에반이 여기에 있다는 건 곧 마왕 교단이 여기 어딘가에 있다는 의미.
그리고 기사단이 이곳을 향해 달려오고 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