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6화 〉데이트를 즐기다.
다음날 아침.
어제 말했던 대로 유벨과 함께 밖으로 나왔다. 유벨은 부끄러운지 그 작은 손으로 내 손가락을 꾹 쥔 채 안절부절못했다.
"그으...그러니까 이제 우리는..."
유벨의 눈동자가 핑그르르 돌아간다. 그녀는 단 한 번도 이성과 단둘이서 밖에 나가본 적도 이렇게 데이트를 해본 적도 없을 터다.
이렇게나 긴장해서 당황해 하는 것도 당연했다.
'여기에선 내가 앞장서야겠지.'
"유벨. 마법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으면 여기 근처에 있는 도서관에 가보자."
도서관은 마법사들이 가장 많이 모이고 공방 다음으로 학자 마법사들이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곳이다.
가볼만한 가치는 충분하다.
"그, 그럴까?"
유벨도 내 말에 수긍하는듯했지만 약간 불만이라는 듯이 손가락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근데 모처럼 둘이서 밖에 나왔는데 바로 도서관에 가서 책이나 읽는 건 좀 그렇지 않을까? 그보다는 더 유익하고 마음 놓이는 하루를 보내고 싶은데..."
우물쭈물하며 유벨은 그렇게 말했다. 도서관에 가는 게 아니라 다른 곳에서 데이트를 즐기고 싶다는 말을 참 돌려서 한다. 뭐, 그러점이 귀여운 거지만.
"그러면 어떻게 할까. 유벨은 가고 싶은 데가 있어?"
"있어! 있고말고! 짜잔~ 이거 봐봐!"
그 질문을 기다렸다는 듯이 유벨 나에게 종이를 내밀었다. 종이는 지도였다. 이곳 주변의 지형이 세세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여길 보면 사람들이 자주 찾아가는 꽃밭이 있다고 했어. 한번 가보자!"
"꽃밭?"
꽃밭. 말 그대로 꽃이 잔뜩 있는 밭이다. 그리고 연인에 관함 작품을 보면 꼭 이런 장면이 나오지.
나 잡아봐라~ 아이참, 까르륵~ 거리는 거.
실제로 어떤 세계에서는 주인공이란 놈이 히로인하고 이러면서 놀았었다. 그때 둘 다 머리가 꽃밭으로 가득 찼던 놈들이었지.
"우왓! 그 아련하다는 표정은 뭐야! 왜 하늘을 바라보고 있어! 나, 나를 바라보라...아니, 이게 아니고 앞을 보라고!"
그때 진짜 눈꼴 시려워서 나는 연인이 생겨도 그딴 짓을 하지 말자고 다짐했는데. 지금도 굳이 하고 싶지는 않은 행동이지만 유벨과 함께하는 거면 괜찮을지도?
그보다 의외다. 설마하니 아리스가 아닌 유벨이 나한테 꽃밭에 가자고 제안하다니.
"너 의외로 소녀틱한 것도 좋아하는구나. 의외네."
"읏! 나, 나도 소녀라고! 이런 걸 좋아하는 건 당연한 거야! 갑자기 하늘을 바라보며 중얼거리더니 날 보자마자 한다는 소리가 그거야! 소녀의 마음을 좀 생각하고 말하지그래!"
내 말에 발끈하며 유벨이 소리쳤다. 그리고 나를 찌릿 째려보는데 내 발언이 어지간히 거슬렸던 모양이다.
이러다 또 화낼라. 나는 솔직하게 사과했다.
"미안해. 유벨은 귀엽고 예쁜 소녀지만 나한테 만큼은 그런 모습을 보여주지 않잖아. 그래서 착각했어."
"으읏! 또, 또! 사과 하는 척 하면서 은근슬쩍 내 실수도 있는 걸로 몰아가는 거 봐!"
"그런 의도는 없었어, 그러니까 오해하지 마!"
황급히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말했지만 이미 늦었다.
"흥!"
유벨은 결국 삐친 것인지 새침하게 고개를 돌려 버렸다. 손가락을 잡던 손도 휙! 차갑게 놔버렸다.
이번에는 정말 의도한 게 아니라 그냥 평범한 실수였다.
실제로 유벨이 나한테 소녀로서의 모습을 잘 안 보여 주기도 했고.
'끄응...어떻게 하지.'
우리 사이에 침묵이 내리 앉았다. 불편한 침묵 속에서 그저 묵묵히 걷는데 등에서 식은땀이 흐른다.
평소라면 닥치고 섹스로 끌고 가서 이야기도 잘 나누고 소녀로서의 모습을 감상하며 서로의 앙금도 풀겠지만, 어제 나와 아리스는 정상적인 데이트를 즐겼었다.
이번에는 유벨하고도 그런 추억을 쌓고 싶다는 욕심이 들었다.
꾹.
유벨의 손이 다시 내 손을 덮친다. 깍지를 끼듯 손 전체를 휘감는 행동에 그녀를 바라보니 얼굴을 붉히고 고개를 돌린 채였다.
"이번에는 쉬려고 나온 거니까 봐줄게. 다음에도 그러기만 해봐!"
"아, 알았어."
그녀의 말에 무심코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인정했으니 자신이 이긴 거라 생각하는 걸까. 그녀는 만족스럽게 웃었디.
"자아~ 얼른 가자! 요새는 날씨가 좋아서 꽃을 구경하기 좋을 거야!"
다다다-
"야야! 뛸거면 보폭 좀 맞춰서 뛰어!"
유벨이 그 자리에서 마을 밖을 가리키며 환하게 웃더니 그대로 뛴다. 손을 마주 잡고 있었기에 나도 같이 뛰었다.
유벨은 내 말을 못들은 건지 듣고도 모르는 척 쌩까는 건지 오히려 더 속도를 냈다.
나는 그녀가 불편하지 않도록 힘과 보폭을 조절했다.
우리는 그렇게 마을 밖으로 나와 지도에 표시되어 있던 곳에 왔다.
꽃밭. 내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이 마을의 꽃밭은 컸다. 민들레를 시작으로 장미같이 내가 아는 꽃들도 있었고 내가 모르는, 처음 보는 이 세계만의 꽃들도 예쁘게 자라있다.
거기에 색상의 배열이나 주변 환경 같은 것도 계산해서 심었는지 마구잡이로 자라있지도 않고 서로 다른 색들의 꽃끼리도 훌륭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그야말로 현대에서나 볼법한 꽃밭이 펼쳐져 있었다.
"우와아! 꽃밭이라는 게 이런 거구나!"
유벨의 눈동자가 보석처럼 반짝거린다. 소녀 취향에 이 꽃밭이 잘 맞나 보다.
나는 어떠냐고? 어떻고 자시고 할 거 있나 꽃도 결국에는 식물에 불과하거늘.
"유, 유진아! 이제 우리 여기에 들어가서...꺄아앗♥"
대체 뭔 상상을 하는지 감이 오는구나.
"근데 불가능해. 여기 이 표지판 봐봐."
유벨의 환상을 깨고 싶지는 않지만 어쩔 수 없이 표지판을 가리켰다. 표지판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사유지니 출입 금지」
"주변에 다른 연인들도 있는 걸 봐서는 일종의 관광 명소 같기는 한데 안에는 들어가면 안된데."
내 말에 유벨이 딱딱하게 굳었다. 왠지 그녀의 머리 위로 쿠궁, 번개를 일으켜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 그러면 우리 여기서 뭐 하지?"
"글쎄? 딱히 하고 싶은 게 없으면 여기 근처에 자리를 잡고 앉아서 주변 풍경을 즐길까?"
인벤토리에서 돗자리를 꺼냈다. 명당자리는 풍수지리를 아는 나인 만큼 이미 찾아놨다.
어떻냐는 식으로 유벨을 바라보니 그녀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진짜로 꽃밭에 들어가 그런 걸 할 생각이었니?
그녀를 슬쩍 바라보니 마법사의 로브 안에 [나와 그녀의 이야기]라는 로맨스 소설이 보였다.
이건 못 본 걸로 하자.
우선 좋은 자리, 명당에 돗자리를 깔았다. 유벨이 돗자리 위에 다소곳이 앉고 나는 인벤토리를 열어 이것저것 꺼냈다.
대부분이 연구나 작업 중에 먹으려고 만든 도시락이다. 왠지 이것들을 꺼내놔야 느낌이 산다.
"많이도 만들었네. 이거 전부 네가 만든 거야?"
"내 요리 솜씨는 세계제일! 당연히 내가 만든 거지. 비록 식재료 공수를 안 해서 좋은 재료로 만들진 못했지만 맛있을 거야."
김밥과 주먹밥은 무난하게 만들 수 있고 무난하게 맛있는 음식이니까 먹을만하게 만들어졌디.
마침 시간도 식사 시간이기에 주먹밥을 하나 들어서 입에 넣었다.
내가 만든 거라 그런지 그럭저럭 맛있다. 유벨도 주먹밥을 앙증맞게 베어 물고는 눈을 크게 떴다.
"마, 맛있다. 이런 간단한 요리로 이런 맛을 낼 수 있다니! 나 처음 알았어!"
그러면서 와구와구 주먹밥을 입안에 넣는데 다람쥐를 보는 것 같은 기분이다. 귀여워...
"우물우물. 근데 여기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사람들 많이 있네."
유벨은 부풀어 오른뺨에 가득 찬 주먹밥을 열심히 씹으며 주변을 둘러봤다.
주변에는 많은 사람이 자리에 앉아 서로 기대거나 애정행각을 벌이고 있었다.
"그러게. 특히 연인들이 많네. 아마 이렇게나 아름다운 꽃들을 만끽하러 온 거겠지."
"그런가?"
우리는 식사를 하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과거 이야기를 시작으로 현재까지.
처음 꽃밭에 관한 걸로 시작했던 대화는 점점 궤도를 바꿔 마지막엔 마법으로 바뀌었다.
"그러니까 마법사로서 실력을 올리려면 마력도 마력이지만 술식의 형성을 잘해야 해."
"그렇지만 그게 어렵다고! 애초에 술식을 하나 전개 한 뒤 또 다른 술식을 전개 및 구축, 그다음 술식으로 연산을 이어간다는 게 말이 되는 발상이냐."
"되는데?"
시범 삼아 보여줬다.
"그건 네가 괴물인 거고! 나만 해도 충분히 뛰어난 마법사거든!"
"내가 괴물인 건 인정하는데 내 말은 나처럼 되라는 게 아니라 이왕 마법을 배울 거면 목표를 이 정도 수준으로 잡으란 거지."
목표는 높고 의욕을 불태울 수 있는 것일수록 좋은 법이니까.
"후우. 일단 고민 좀 해볼께."
"오냐. 어차피 배우는 것도 넣고 변하는 것도 너니까 깊게 생각해봐."
마법애 관한 이야기는 그렇게 흐지부지 끝났다. 주변을 보니 사람들의 수가 상당히 줄어 있었다.
"사람 수가 많이 줄었네."
그렇게 중얼거리니 유벨이 나를 똑바로 바라본다. 긴장한 듯 두 손을 꾹 모른 채 그녀는 나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무슨 일인가 싶어 그녀가 말할 때까지 기다려 주기로 했다. 해가 지기 시작했다. 마법 이야기를 하는데 아주 긴 시간을 보냈다.
유벨은 하늘을 보더니 드디어 그녀가 입을 열었다.
"유진아. 마을에 돌아가면 여태까지 너를 괴롭게 했던 사람들한테 복수할 생각이지? 그리고 에반을 만나면 죽일 생각이고."
그녀가 진지하고 무거운 목소리로 나를 쳐다보며 물었다. 나는 그만 얼굴을 찌푸렸다.
갑자기 이런 걸 물어보는 의도를 모르겠다.
"그...나도 난데없이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 게 이상하다는 거 알아. 네가 기분 나빠 한다는 것도 알고. 하지만 난 꼭 알아야겠어. 네가 복수하려는 사람 중에 우리 가족도 있는지. 그리고 에반을 꼭 죽일 생각인지."
"...그걸 왜 지금 질문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우선 너랑 네 가족한테 복수할 생각은 없어. 그리고 에반에 대한 거라. 걜 어떻게 할지는 아직 확신 못했어."
이건 사실이다. 저번에 봤을 때는 바로 죽여 버리려고 했지만, 요새는 이런 생각도 든다.
이 세계에서 나는 주인공이다. 아니, 주인공이 되었다. 그렇다면 에반은 뭘까. 마왕의 힘을 얻게 된 에반은 추후 어떻게 될 것인가.
세계에는 내가 억지력이라 이름 붙인 힘이 존재한다.
주인공은 주인공으로서 활약하고 강해질 수 있도록, 배신자는 배신자다운 최후를 맞도록, 흑막은 흑막답게 행동하고 움직이도록, 최종 보스 격의 존재는 그에 맞은 힘과 능력을 갖추고 적절한 때에 나타나도록.
이런식으로 바로잡아주는 게 억지력이다. 그런 관점에서 봤을때 왠지 에반은 작정하고 죽이려는 게 아닌 이상 어떻게든 살아남을 것 같다.
살아남고 살아남아서 배신자이자 흑막의 도구로써 이용되다 죽을 것이다. 그게 현재의 내가 내린 결론이다.
"하지만 모르는 일이지 내가 화가 나서 에반의 목을 베어내고 그놈이 죽을지도 모르는 일 아니겠어."
그러니까 미정이다.
"하지만 이거 하나는 확답할 수 있어. 너랑 네 가족은 내가 반드시 지켜주진 않더라도 최소한 내 복수의 대상은 아니야."
내 말에 유벨은 안심한 표정을 지었다.
그나저나 에반을 부를 때 오빠라는 말을 뺀 걸 보니 나한테도 어느 정도 마음이 넘어왔다는 뜻이려나. 아니면 그저 내 눈치를 보려고 그냥 에반이라 부르는 걸까.
어느쪽이든 상관없다. 결국, 그녀와 지금 함께하는 건 나니까.
"어? 유진아?"
"받아. 내가 너 주려고 만든 거야."
인벤토리에서 예전에 주려고 만들어 놓고 지금까지 못 준 반지를 꺼내 그녀의 손가락에 슬쩍 끼웠다.
솔직히 지금은 좋은 타이밍이 아니다. 꽤 살벌한 대화를 했기에 분위기도 박살이 나 있다.
근데 지금이 딱 인상 깊을 때거든. 동시에 그녀를 확실하게 안심시켜줄 수도 있고.
그녀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우고 껴안는다. 그녀는 내?행동에 반항하지 않고 내 품에 안겼다.
"예전에도 말했지만 나는 내 여자를 위해서 뭐든 해줄 수 있어. 그리고 내 여자의 가족들을 해할 생각도 조금도 없고. 그러니까 불안해할 필요 없어."
그리 말하며 유벨을 똑바로 바라본다. 그녀는 드디어 안심이 됐는지 멍한 표정으로 있다가 활짝 웃었다. 보기 좋구나.
그녀의 스스럼 없는 미소를 보니 나도 모르게 서버렸다. 유벨은 내 품 안에 있었기에 딱딱하게 선 내 자지를 느껴버렸다.
"뭐야. 설마 여기서 선거야? 정말이지...얼른 숙소로 돌아가자. 오늘은 언니랑 같이 마음껏 상대해줄게."
요망하게 도발하는 유벨. 아, 이건 못 참지. 나는 빠르게 자리에서 일어나 짐을 정리했다.
유벨은 걱정이 풀리면서 좀 더 솔직해져서 그런지 요망하게 웃었다. 벌써 무진장 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