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4화 〉데이트를 즐겨보자.
뚜벅- 뚜벅-
에반은 조용히 몸을 숙인 채 신전 내부를 걸었다. 거대한 신전 곳곳에는 사제들이 돌아다니고 있었고, 에반은 그들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최대한 은신했다.
"야, 그 얘기 들었어? 마왕 교단 놈들 그렇게나 잘난척하더니...마족 서열 10위권 안에 들어가는 파이로스가 죽었대."
"뭐라고? 파이로스면 서열 9위잖아! 그런 괴물 새끼가 대체 누구한테!"
사제 둘이 조용히 이야기를 나눈다. 에반은 몸을 쭈그려 벽 아래에 숨은 채 기어갔다.
"듣자하니 창세신 교단 새끼들이 내세운 용사와 결투를 벌이고 죽었다는군. 빌어먹을."
"허어~ 그 망할 새끼들 지금쯤 기세등등 하겠어."
"그렇겠지. 창세신 같은 이단이나 믿는 새끼들은 언제나 사람 수도 많고 이렇게 용사도 세우고...제기랄 존나 좆같네!"
사제는 거칠게 창세신 교단을 비난했다. 이들은 창세신 교단을 믿지 않으며 유일신을 믿는 자들.
창세신을 부정하며 자신들의 신이야말로 진정한 창조주라 주장하는 자들이다.
마왕 교단과 최근 행보를 같이 했으나 결코 마왕 교단과는 다른, 별개의 세력이다.
비록 그 힘은 마왕 교단에 비하면 약하나 그들에게는 에반이라는 중요한 키 카드가 있기에 나름 동등한 입장을 고수할수 있었다.
그리고 그 키 카드인 에반은 사제들을 피해 바쁘게 움직였다.
"분명 여기 어디쯤이었는데..."
에반은 벽 한쪽을 이리저리 만지며 천천히 옆으로 움직였다. 그로다 벽 한쪽이 움푹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빙고, 에반은 곧바로 그곳으로 들어갔다.
"보물 창고, 찾았다!"
안에는 금은보화가 한가득했다. 에반은 보물 창고를 찾은 모험자로서 기뻐했다. 그리고 미리 챙긴 주머니를 열어 그 안에 금화를 욱여넣었다.
에반이 이런 행동을 하는 이유는 하나뿐. 이곳에서 탈출하기 위해서다. 에반은 그때 유진과 만난 후로 거의 유폐되다시피 안에서만 지내야 했다.
안전이라는 이유로 자유를 제한당했고 그녀와는 만나지도 못했다.
당연히 에반의 마음속에선 반항심이 무럭무럭 자라났는데 최근 한 사건이 에반의 마음을 완전히 비틀어 버렸다.
그것은 유진이 용사로서 마족을 무찔렀다는 이야기였고, 천마라는 새로운 괴물이자 미녀가 마왕 교단에 합류했으며 그녀 또한 유진을 노린다는 이야기였다.
사실 에반은 조직 내에서 무시당하기 일쑤였다. 본인을 중히 여겨 존댓말에 언제나 극진히 대접하나 여자 한 명 조차 건들지 못하게 하는 빡빡한 환경에 에반은 불편함을 느꼈다.
그래서 금화를 챙겨 달아났다.
"잘 있어라 망할 것들아!"
에반은 도망치며 미리 챙겨온 지도를 펼쳤다. 지도에는 여러 유적이 표시되어 있었다.
이는 에반이 수집해야 하는 조각이 있는 장소들을 표시한 것, 이 조각들을 흡수하면 에반은 더욱 강해진다.
근데 최근에 조직은 움직이지 않았다.
"흥! 겁먹고 움직일 생각도 없으면서 분위기를 보면서 침착하게 행동하기는 개뿔."
최근 여러 가지 일로 그들의 지부가 날아갔다. 이에 조직은 최근에 소극적으로 움직이며 내실 기반을 다지는 데 집중하는 중이었다.
에반은 이 과정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그리고 이들이 안 간다면 자신이 직접 가서 물건을 챙기겠다는 무식한 생각으로 움직였다.
찌익.
에반은 하나당 수십 골드가 넘는 텔레포트 스크롤을 찢었다. 그리고 눈을 뜨니 익숙한 장소로 이동되었다.
"여기는..."
이곳은 자신의 고향 마을 근처다.
"잘됐다. 좀 쉬었다 가야지!"
분명 자신이 가면 다들 반겨주리라. 그리고 여자도 안을 수 있겠지. 에반은 음흉하게 웃으며 마을로 향했다.
그리고 그동안 에반이 사라진 걸 눈치챈 조직은 한바탕 난리가 났다.
에반은 그들의 작전에서도 마족들의 집단은 마왕 교단에 있어서도 핵심이 되는 키 카드다. 그 덕에 세력과 힘에서 밀려도 동등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건데...
조직의 수장인 백금발의 여성은 이를 악물었다. 이빨에서 까드득 소리가 났지만 그걸 신경 쓰지 못할 정도로 그녀의 정신은 몰려 있었다.
"감히 저희의 자금을 훔쳐 도망치다니...배짱 한번 두둑하군요."
사실 에반이 훔친 건 보물 같은게 아니다. 조직의 자금으로 비밀스럽게 보관되고 있었을 뿐이지.
"좋습니다. 굳이 벌주를 마시겠다면 말릴 필요 없겠죠. 신의 두 번째 사도."
그녀의 명령에 어둠 속에서 한 사내가 나타났다.
그 사내는 그야말로 근육! 전신에 꽉꽉 찬 근육과 2m를 훌쩍 넘는 거대한 덩치를 자랑하며 사내는 무릎을 꿇었다.
"네, 성녀님!"
"하급 성기사단을 수색조로 보내고 그들과 거리를 유지한 채 당신의 성기사단이 따라가십시요."
"네? 어찌하여 그런 명령을...저 혼자서도 그를 잡아올 수 있습니다!"
두 번째 신의 사도라 불린 사내는 자신감이 넘쳤다. 그런 그를 타박하듯 성녀가 자애롭게 말했다.
"저의 말을 의심하신 겁니까. 저에게는 미래가 보입니다. 그는 이번에 자신이 숙적이라 여기는 자에게 크나큰 상처를 입을 겁니다. 그저 죽지 않게 제때 회수하도록 하세요."
"오오! 명에 따르겠습니다!"
"아, 그리고! 절대 이단의 용사와는 맞서지 마십시오. 제가 본 미래에 따르면 용사는 당신이 기세를 내뿜으며 다가가기만 해도 동료를 의식해 물러날 테니까."
"알겠습니다 성녀님! 믿고 맡겨 주십시요!"
사내는 성녀의 말에 감격한 듯 과장된 몸집으로 쿵쿵 이마를 땅에 박았다.
성녀는 그런 사내를 냉정하데 바라보며 싸하게 미소 지었다. 그녀의 눈동자는 사내가 아니라 더 멀리 있는 무언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
?
?
우리는 근처에서 숙소를 잡았다. 처음에는 마녀한테 받은 열쇠로 휴식 공간에 들어가려고 했는데 역시 그쪽은 기본적으로 욕탕 시설이라 숙소로 쓰기엔 좀 그렇다.
거기에서 지내려면 계속 알몸으로 있어야 할 거다...어? 더 좋은 거 아닌가?
크흠, 아무튼 그러해서 대충 좋은 곳에 자리 잡고 짐을 풀었다. 방? 당연히 하나만 잡았지.
"크흠!"
"크흠, 크흠!"
아리스와 유벨이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주고받는 게 보인다. 재냬는 또 뭐 하는 거야.
의이하게 바라보니 유벨이 과장된 목소리로 행동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아, 나는 미리 봐둔 마법 시설에 다녀와야겠다. 조금 늦게 올 수도 있으니까 오늘은 아리스 언니랑 같이 있으라고 유진!"
그렇게 외친 유벨은 내가 뭐라 반응하기도 전에 후다닥 밖으로 뛰쳐나갔다.
또 왜 저런데.
"유진아~"
아리스가 콧노래를 부르며 나 팔에 달라붙어 풍만한 가슴을 꾹꾹 눌러온다.
언제나와 마찬가지인 행동이나 오늘은 뭔가가 달랐다. 아리스의 눈은 평소보다 훨씬 밝게 빛나고 있었다.
곧 그녀가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거기에는 관람 표라고 적혀 있었다.
"이건?"
"후후, 때마침 여기 근처에서 연극이라는 걸 한다고 하더라. 분명 제목이...아스토리우스의 모험담이었나? 아무튼, 그랬을 거야!"
아리스는 그리 말하며 무언가 원하는 표정으로 나를 지긋이 바라본다.
그녀의 한껏 오른 기대를 부수고 싶은 마음은 없기에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재미있을 것 같네."
"그렇지! 같이 보러 가자!"
결국 우리 둘은 여관 밖으로 나왔다.
"헤헤헤헤, 좋다."
아리스가 내 손을 부드럽게 꾸욱 쥐었다. 그녀의 부드러운 손이 느껴진다.
뭐가 그리 좋은 방긋 미소 지으며 그녀는 여러 가지 이야기를 꺼냈다. 자신에 관한 것, 유벨이 관한 것, 내가 없는 동안 있었던 일 등등.
"그래서 내가 그때!"
"흐응~"
나는 그녀의 말을 가만히 들어주었다. 그것만으로 그녀는 행복해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이 보기 좋았다.
얼마만 이더라? 아무런 의도도, 작전도 없이 그저 순수하게 연인끼리 즐기는 데이트를 해보는 게.
단 둘이서 거리를 걷는다. 그 행위만으로 몸 곳곳에 충만함이 퍼진다. 수백 살은 족히 먹었지만, 데이트를 의식하니 가슴이 그 어느 때보다 쿵쾅쿵쾅 뛰었다.
이는 아리스도 마찬가지인지 가슴 사이의 팔로 그녀의 가슴 고동이 느껴진다.
"드, 듣자하니 이번에 공연하는 사람들이 유명한 배우라네! 세계 곳곳을 누비는 사람들인데 황제 폐하의 초청을 받을 거란 소문도 있어!"
"그래? 연극을 재미있게 잘하긴 하나 봐."
아리스가 점점 말을 더듬는다. 이제 와서 부끄러움이라도 느끼는건가. 보면 볼수록 귀엽다니까.
"아, 근데 우리 가기 전이 옷부터 구해야 하는거 아니야?"
우리 옷차림을 봤다. 갑옷 차림에 딱 봐도 모험가 같은 모습이다. 연극은 이 마을의 극장에서 열린다는데 나름 차려입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자고로 패션의 완성은 얼굴이지만 얼굴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게 옷이지.
"마침 저기에 옷가게 있으니까 들렀다 가자."
"...응!"
깔끔하고 커다란 건물에 들어갔다. 화려한 옷차림의 아줌마가 우리를 향해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맞이해주었다.
건물 안을 둘러본다. 부드러워 보이는 고가의 옷들이 곳곳에 보인다. 눈길을 잡아끄는 화려한 옷들과 야릇한 옷들도 곳곳에 보였다.
흠, 그래도 이왕 살 거면 역시.
"이런 정장이 좋겠지."
나는 가장 근처에 있던 황금색 정장을 보았다. 황금빛으로 반짝이는 게 어그로를 존나게 끌 것 같고 지나치게 화려했다.
"아이구, 손님! 보는 눈이 있으시네요! 이건 수도에서 황족의 옷만 디자인 하는 것으로 유명하신 장 뒤 푸오 선생님의 최신작 중 하나입니다!"
"호오, 그래요."
마크를 살펴봤다. 정품 마크가 달려있고 위조의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아줌마가 말한 대로 이건 장 뒤 푸오란 자의 작품이 맞다.
다만 너무 화려해서 여기에선 팔리지 않은 모양이다. 그러니까 이 옷에 관심을 보인 나한테 다가온 거겠지.
한편 아리스는 여자답게 드레스와 원피스를 살피다가 내가 고르려는 황금 정장을 보고 기겁했다.
"유, 유진아. 그 옷은 너무 화려하지 않아?"
"아이고~ 신사분의 여자친구 분께서 모르셔서 그래요. 원래 이런 화려한 옷일수록 잘생기고 화려한 사람에게 어울리지 않는 옷은 없답니다!"
"여, 여자친구! 크흠, 나, 나쁘지는 않을 것 같네요!"
아리스의 모습에 아줌마의 눈이 반짝였다. 그것은 호갱을 마주하게 된 사장의 눈빛이었다.
그보기 아리스, 우리 연인 사이라며, 왜 그런 말에 넘어가는데!
"숙녀분은 이 옷이 좋겠어요! 이 옷도 저기 있는 장 뒤 푸오 선생의 작품인데 저기 있는 정장이랑 한 세트지요."
"하, 한 세트, 그건 즉 커플룩! 유진아! 우리 이거 입어보자!"
아리스가 나를 닦달했다. 나는 알았다고 답하며 드레스룸에 들어가 옷을 갈아입었다.
"오~ 촉감이랑 착용감 좋은데."
거울을 봤다. 화려한 금빛이 내 검은 머리카락과 묘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보기 좋게 벌어진 어깨는 정장의 핏을 잘 살렸고, 뚜렷한 미형의 이목구비와 작은 머리는 옷과 합쳐져 귀공자를 연상시켰다.
황금률은 화려한 옷에 맞추어 이런 분위기를 자아낸 것이다.
"역시 이건 최고의 능력이야."
만족하며 밖으로 나왔다.
"어머나! 진짜 잘 어울린다! 역시 이런 옷은 옷걸이가 중요하다니까! 어떠신가요 손님?
"괜찮네요. 아리스가 나오면 보고 구매 여부를 결정하죠."
그렇게 말하며 아리스가 나오길 기다렸다.
다 갈아입은 것인지 드레스룸이 열리며 아리스가 나왔다.
"어, 어때?"
아리스는 어색하게 드레스의 양 끝을 잡아 위로 올리며 물었다. 그녀가 입은 드레스는 내 정장처럼 화려한 금빛에 노출은 조금도 없었다.
그 대신 아래에 프릴이 달려 있었고 허리 부분에는 리본 같은 장식물이 붙어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유형의 드레스는 아니다. 하지만 아리스와는 잘 어울렸다.
특히 갈색 장발을 포니테일로 묶어 평소와 달리 매끈한 목덜미가 그대로 들어나 무척이나 야릇했다.
아리스가 어색한 듯 자신의 목을 쓱쓱 쓰다듬으며 나를 보았다.
아, 제기랄. 존나 뿅가 죽네!
"잘 어울려. 무척 잘 어울려! 이거다, 이걸로 가자!"
"감사합니다 고객님! 하나당 50실버, 총 100실버 되겠습니다!"
금화 하나를 던져줬다. 주인은 감사하다 말하며 금화를 챙겼다.
반응을 보니 역시 이 옷은 팔리지 않는 계륵이었나 보다.
하긴 이렇게 비정상적으로 화려한 드레스를 이런 평범한 마을 사람들이 구매하려 할 리가 없지.
우리는 갑옷을 정리해 내 인벤토리에 넣고 거리로 나왔다. 화려한 정장과 드레스 차림의 우리를 보고 사람들의 시선이 끌리는 건 당연했다.
아리스는 나와 팔짱을 낀 채 걸었다. 드레스를 입은 게 처음이라 어색해하며 걸음걸이가 좀 이상했지만 내가 곁에서 도와주니 금방 적응했다.
"이제 가볼까."
"응!
아리스가 힘차게 외쳤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자신감이 가득했다. 좋은 징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