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7화 〉야스각이 섰도다!
가장 먼저 제작한 건 창이다. 온 정신과 재료를 소모하여 제작한 창에는 내 스승이자 대장장이로서의 근원인 헤파이스토스의 힘이 깃들었다.
족히 수백 킬로는 될법한 금속 주괴들로 합금을 만들고 그것들을 고도로 압축하여 제작한 창대, 그리고 그 창대에 붙인 창날은 무시무시한 무게를 자랑하나 마력을 담을 시 믿기지 않을 정도로 가벼워졌다.
장식은 없이 수수하나 그만큼 실용성에 신경을 쓴 디자인은 나에게 잘 어울린다.
창에 새긴 인챈트는 총 다섯 개, 창대에 새긴 중량 조절과 길이 조절, 자동 회수, 창날에 새긴 마력 파훼와 신체 능력 증가다.
이것들 새기는 데에만 3시간은 썼다. 이제 다음 물건을 만들 차례다.
총기, 그것은 인류의 과학과 잔혹함이 한데 어우러진 최고의 무기 중 하나다. 다루기 쉽고, 사용하기 간단하며 마법을 이용한 개조만으로 그 성능을 훨씬 끌어내는 게 가능하다.
다만 이번에 만들 총기는 순수 과학에 마법을 교묘하게 섞은 것. 게이트에 설치되어 있는 에너지 제어 장치를 개조하여 에너지 코어로 만들었다.
그리고 에너지 역할을 해줄 붉은 파편 하나를 집어넣었다. 에너지 코어 진동하며 붉은 에너지를 발산한다. 역시, 그럴듯해 보이는 건 전부 꿍쳐둬야 한다니까.
이제 에너지 코어를 중심으로 작업한다. 만들려는 총기의 형태는 리볼버, 현대의 리볼버와 비슷한 형태로 하되 이런저런 인챈트와 마법 물품을 갈아 넣었다.
리볼버가 완성되고 나서는 다른 에너지 코어를 만들어 두 번째 총기를 만든다.
이번에 만들건 더블 배럴 샷건, 원래 샷건이라는 게 호신용이라면 모를까 전투용으로는 효율이 영 나쁘지만 더블 배럴 샷건 특유의 간지는 포기할 수 없다.
"좋아, 완성이다."
두 자루의 총기가 완벽하게 제작되었다. 마력으로 다듬어서 매끈한 자태를 쓰윽 훑으며 사전에 미리 마석으로 제작한 마력탄을 꺼냈다.
아무런 효과도, 힘도 없는. 단순히 마력이 담겼을 뿐인 총알이지만 이것만 해도 총기의 성능과 인챈트가 합쳐지면 대단한 위력을 발휘할 수 있다.
"당장 시험해 보고 싶네."
끼릭- 끼릭-
리볼버의 회전식 약실에 탄환을 끼워 넣는다. 더블 배럴 샷건도 마찬가지로 장전했다.
마음 같아서는 이것들의 위력을 확인하고 싶지만, 적도 없을 뿐더러 강력한 몬스터의 몸을 뚫을 수 있도록 관통 인챈트를 새겨놔서 마구잡이로 쐈다가는 벽을 뚫고 총알이 날아갈 거다.
사람이 다치든 말든 내 알바는 아니나 근처가 황금 길드인 만큼 총알이 날아오는 걸 알아챌 고수들이 있을 수도 있다.
'막말로 간부들이 지나가는 중이었음 아주 그냥 좆돼는거지."
그러니 성능 테스트는 나중으로 미룬다. 일단 총기는 인벤토리에 넣었다. 당장 쓸 것도 아닌데 들고 다니다 실수로 쏘는 불상사는 사전에 막아야지.
내가 실수라고 방아쇠를 당길 일은 없겠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다.
총기 제작도 끝났겠다, 몸을 풀며 밖으로 나왔다.
뚜득- 뚜드득-
공방에 틀어박혀 오랜 시간 작업한 몸이 이곳저곳에서 불편을 토로했다. 몸을 뒤틀어 가볍게 풀어 주면서 하늘을 올려다보니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흐음, 아직 저녁 시간 전까지는 시간이 남았네."
점심? 당연히 걸렀다. 총기 제작이 말로는 쉬워 보여도 부품을 일일이 만들고 개조하고, 인챈트를 새겨야 했기에 기나긴 시간을 소모했다.
"그래도 결과물이 좋으니 만족."
직접 만든 창을 들어 휘리릭~ 돌려본다. 나에게 딱 맞춰서 만들었기에 내 손에 착착 감긴다. 합금을 압축했기에 느껴지는 특유의 묵직함이 좋게만 느껴졌다.
시간도 남았겠다, 할 것도 없겠다. 운동장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아리스가 얼마나 단련됐는지 눈으로 확인할 생각이다.
'뭐, 아직 하루밖에 안됐으니 유의미한 결과는 없겠지만."
미안한 말이지만 아리스는 나나 루진에 비하면 급이 떨어진다. 하루 만에 의미 있는 성과를 내기란 그녀로서 불가능하다. 그래도 구경하는 맛은 있겠지.
덤으로 적당한 조언 몇 개 정도 던져줄 요량으로 찾아갔다. 아리스는 라피드의 지시 아래 이리저리 열심히 뛰고 있었다.
"하낫, 둘! 하낫, 둘! 하낫, 둘! 하낫, 둘!"
라피드의 구호에 맞추어 아리스는 팔굽혀펴기를 했다. 일반적인 팔굽혀펴기와 다른 점이라면 단단하고 무거운 금속 제질의 갑옷을 입고 있다는 것이다.
현재 마력 사용이 제한되고 있는 아리스에게 저런 훈련을 시키다니 역시 간부답게 하드코어 하다.
아리스는 이 하드코어 한 단련에 숨을 쎅쎅 내쉬면서도 마지막까지 달렸다. 그 후 바닥에 쓰러지듯 엎드려 헉헉- 숨을 골랐다.
라피드는 끝까지 훈련이 임한 아리스를 장하다는 눈빛으로 쳐다보며 그녀를 칭찬했다.
"오늘은 평소보다 배는 어려웠을 텐데 잘 따라왔군. 이제 마력을 갈무리하는 시간을 가지고 훈련을 끝내도록 하지."
"하아…. 하아…. 네, 알겠습니다."
아리스는 가부좌를 하고선 숨을 가다듬으며 마력 호흡을 했다. 쉬익- 쉬익- 그녀 안의 마력이 안정되었다.
그녀에게 다가가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녀의 마력은 더욱 원활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아무래도 라피드에게 훈련받으며 마력 운용에 대한 조언도 얻은 모양이다.
"어? 유진아, 여긴 어쩐 일이야?"
"별건 아니고 네가 잘하나 구경하러 와봤지. 같이 밥 먹으러 가자."
하드코어 한 훈련 탓에 녹초가 되었으니 배려해서 아리스의 손을 잡고 일으켜 세워 주었다. 아리스는 내 손을 소중한 보물 마냥 꼬옥 붙잡고는 밝게 웃으며 일어났다.
마력이 많이 안정돼서 그런지 녹초가 된 몸이 어느 정도 나아진 것 같았다.
나나 루진을 대상으로 보자면 예전이나 지금이나 도찐개찐 이지만 랭크가 낮은 좆밥존들 사이에서는 대단한 성취다.
"오늘 밥도 맛있는 거 나오겠지, 기대된다!"
"그러게, 다른 건 몰라도 여기 식사만큼은 최고지."
흡사 호텔 뷔페를 연상시키는 식사는 언제나 황홀하고 즐겁다. 입안에서 사르륵 녹아내리는 고기와 맛있는 양념으로 버무려진 튀김은 과연 이게 중세 시대 배경인 판타지 세계관이 맞는지 의문이 생긴다.
'맛있으니 상관은 없지만.'
군침을 삼키며 식당으로 갔다. 오늘의 식사도 내 예상대로 훌륭했다. 밥을 듬뿍 푼 다음 아무 곳에나 앉았다. 당연히 내 옆에는 아리스가 앉았다.
아리스는 껌딱지 마냥 나에게 달라붙었다. 맛있는 고기를 입안에 가득 담고 그 맛을 음미한다. 그때 우리 앞에 앉아있던 다른 사람이 말을 걸었다.
"저…. 저기."
말을 건 자는 기다란 귀와 비단 같은 금발에 소심한 인상의 아름다운 여성 엘프였다. 비록 히로인이라 불릴 아리스나 유벨보다 한참 낮은 레벨이지만 충분한 미녀다.
근데 엘프가 왜 여기 있지?
황금 길드는 제국의 길드, 그렇기에 절대다수가 제국민이다. 물론 제국민 외에도 드워프나 수인들도 있으나 그들은 폐쇄적인 종족은 아니기에 그리 신기하지 않았다.
엘프는 그런 종족들과 달리 폐쇄적이며 엘프 우월주의를 갖는 경우가 많기에 그런 엘프가 인간의 국가인 제국의 길드에 있는 게 신기하다.
아니면 이 세계의 엘프는 그다지 폐쇄적이지 않은 건가? 어쨌든 미녀, 그것도 엘프가 나에게 말을 건 것이기에 입안에 가득 찬 고기를 빠르게 씹어 삼키고 엘프 미녀를 바라보았다.
느껴지는 기세나 힘으로 봤을 때 등급이 낮은 모험자 같았기에 그냥 반말했다.
"왜 불러?"
"아, 다, 당신이 유진 님 맞으신가요?"
엘프는 소심한 성격인지 아니면 남자에게 면역이 없는 건지 부끄러워하면서 내 이름을 물어봤다.
길드에 들어온 뒤로 아리스나 유벨 빼고는 다른 사람들이 다가오든 말든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결코 사람들이 나를 따돌리고 무서워해서 지인이 없는게 아니다. 그냥 내가 지인을 만들지 않은거다.
크흠, 어쨌든 그녀는 길드에서 처음으로 이야기를 나누는 길드원이었다.
"내 이름이 유진이긴 한데, 넌 누구지?"
"아! 저, 저는 길드의 B급 모험자인 에리스라고 합니다! 이번에 단장님께서 유진 님을 서포트하라고 보내셨습니다!"
"서포트?"
처음 듣는 말이다. 서포트라니?
"모르시는군요! 서포트는 이제 막 모험자가 된 초보자에게 베테랑 모험자를 붙여서 지원해주는 제도입니다!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모험자로서의 지식은 부족할 테니까요!"
그렇군, 이해했다. 확실히 무력이 뛰어나도 모험자로서의 경험이 부족하면 언제 어디에서 함정이나 몬스터의 특징에 당해 죽을지 모른다.
'괜히 모험자들의 사망률이 모든 직업을 통틀어 1위인 게 아니지.'
그보다 이런 미녀를 서포트로 보내다니 노린 건가? 이런 미녀라면 내 곁에 붙더라도 인정이지.
"그러면 에리스 당신은 저희와 함께한다 이거죠?"
"네! 당분간 잘 부탁드려요!"
그렇게 엘프 한 명이 합류되었다. 이 상황이 마음에 안 드는지 아리스가 내 팔을 꾸욱 압박했다. 그리고 엘프를 묘한 시선으로 째려보았다.
소심해 보이던 엘프 미녀는 아리스의 날카로운 시선을 몸을 떨었다. 불만족스럽다는 듯이 아리스가 쯧, 하고 혀를 찼다.
"꼭 당신이 합류해야 하는 건가요?"
"네?"
"아니…. 당신말고 다른 서포트는 없냐고요."
"어...단장님의 말씀으로는 없는 것 같아요. 저 같은 경우엔 B급에서 A급으로 승급 중이라 이때 중엔 무엇을 하든 실적으로 인정이 안 되거든요. 그래서 서포트로 붙인 거에요."
"그러면 다른 승급 중인 사람은!"
"있긴 한데 유진 님의 특성상 믿을 수 있는 극소수의 사람만 붙이도록 하다 보니 저밖에 사람이 없는 상태에요."
"으으으…. 그래도 새 여자를 맞아들이는 건!"
아리스가 분하다는 듯이 이를 갈았다. 하지만 다른 방도가 없었기에 내 귀에다 대고 속삭였다.
"유진아~♥ 설마 여기서 또 여자를 늘리진 않을 거지?"
으음, 나한테 어느 정도 집착한다는 건 알았지만 설마 이 정도 수준으로 다른 여자를 경계할 줄이야. 아무래도 오늘도 잔뜩 사랑을 줘야겠네.
"일단 너는 알았으니까 가봐."
엘프에게 가보라고 손짓했다. 엘프는 여기서 빠져나갈 수 있게 된 게 기쁜지 환한 표정으로 고개를 한번 숙이고는 재빠르게 도망쳤다.
마치 적을 보는듯한 아리스의 시선이 어지간히 싫었나 보다.
엘프가 급하게 나가느라 식당의 시선이 짧게 우리에게 모였다. 그중에는 유벨도 있었고 그녀는 우리의 모습을 보자마자 달려왔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무슨 짓을 했길래 선배님이 저리 놀라서 도망을 가!"
"난 별거 안 했다. 그보다 선배님이라고?"
"그래, 선배님! 여기 위계질서가 얼마나 잘 잡혀 있는 줄 알아! 선배님께 깍듯이 대하지 않으면 엄청나게 구른다고!"
유벨이 퍼렇게 질린 얼굴로 몸을 부르르 떤다. 행동을 보니 과장이나 거짓말 같지는 않은데...
"근데 나한테는 오히려 저쪽이 깍듯하던데?"
내가 반말해도 불편해 보이는 기색도 없었고, 오히려 나한테 존댓말을 사용했다. 엘프라서 그런 건가?
"어쨌든 다음부터는 주의 좀 하라고! 자기보다 랭크가 높은 선배한테 잘하고!"
"잠깐만, 설마 선배의 기준이 랭크야?"
"그런데? 그건 왜."
"그러면 오히려 내 쪽이 선배겠네. 난 B 랭크니까."
이제야 의문이 풀린다. 나는 B 랭크라서 그 B랭크 엘프가 저렇게 행동한 거였다.
뭔 개소리냐고? 생각해봐라. 난 평범한 B랭크가 아니라 한 번에 B랭크에, 그것도 황녀와 함께 오른 사람이다.
마, 내가 황녀랑 같이 밥도 먹고, 길드 단장이랑 이야기도 나누고! 황녀랑 비공식적인 약혼 관계도 되고 다 했어 임마!
누가 감히 날 무시할 수 있겠는가.
"아니, 어제 B 랭크로 임명받았으니 다른 사람들은 모를 텐데? 아니면 이미 공지 같은 걸 했나?"
왜, 다른 세계에서도 벽에다가 누구누구 랭크 상승 같은 거 적어서 붙이잖아, 그런 거로 공지 했을 수도 있지.
그리 생각하고 있으니 유벨이 내 팔을 툭툭 두들겼다. 유벨은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B…. 랭크라고? 네가?"
"엉, 내가 B 랭크야."
내 말에 유벨은 입을 다물었다. 뭔가 기운 빠진 듯 묵묵히 밥을 먹었다.
하긴 본인들은 밑에서부터 아득바득 올라가야 하는데 나는 곧바로 B 랭크가 됐으니 저럴 만도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