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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0화 〉황녀와의 이야기 (40/198)



〈 40화 〉황녀와의 이야기

내가 루비 반지와 사파이어 반지를 산 이유는 반지에 박힌 보석의 질이 매우 좋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보석은 매개체로 삼아 마법을 부여하기 가장 쉬운 도구 중 하나다. 산적토벌은 쉬운 일이지만 내 나름대로 대비가 필요하다 여겨 구매한 거다.

물론 루비 반지는 인챈트 후에 루진에게 선물로 줄 생각이다. 즉, 지금 당장은 주지 않을 거다. 저 기대로 가득찬 눈동자가 실망으로 물들때가 기대된다.

"여기 보석이 품질이 좋네요."

"하하하. 저희 가게는 광산 도시로 유명한 오베헬과 질 좋은 보석을 거래하고 있답니다."

나는 일부로 시선을 돌리고 반지를 내 품에 챙겼다. 그러자 그녀의 얼굴이 시무룩해졌다.

내가 기대한 만큼 실망한 것 같지는 않지만 입꼬리가 내려가고 쭈욱 쳐진 모습이 매우 꼴렸다.

'씨발 존나 귀여워! 왜 저리 귀여운 거야!'

좀 더 괴롭혀주고 싶다. 쾌락으로 느끼게 하며 앙앙거리게 하고 싶다. 하지만 참았다. 이 욕망은 나중에 터트리자.

"루진아. 이거 한번 껴볼래?"

곁에 있던 머리끈 중 하나를 집은 뒤 그녀의 뒤로 돌아가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내 손길에 그녀는 몸을 떨었지만, 결코 거부하지 않았다. 사락- 사락-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내 손길에 흩날리고, 왠지 달콤한 냄새도 나는 것 같았다.

"그, 그건."

"잠깐 기다려봐."

그녀의 머리카락을 포니테일로 묶어보았다. 찰랑거리던 금발을 하나로 묶으니 명랑한 매력이 돋보인다.

우당탕탕-

그때 뒤에서 큰 소리가 났다. 소리의 진원지는 시선이 느껴지던 그곳이지만 지금은 그녀에게 온 시선이 쏠렸다.

"좋네. 지금 아주 좋아."

"조, 좋아?"

그녀는 이런 머리가 처음인 건지 자신의 머리카락을 흔들흔들 흔들며 물었다. 그래, 좋고말고.

"조금 전에는 나는 기사다! 라는 느낌이었다면 지금은 귀여운 소녀 같아."

"귀…. 귀여운! 소녀!!"

"으음, 이런 말은 실례이려나?"

"아, 아니야! 오히려 진심으로 어울리는 모습을 만들어줘서 고마워!"

"그렇다면 잘됐네. 이거 사가 자!"

내 빠른 행동에 그녀가 뭐라 하려고 했지만, 그보다 먼저 계산했다. 머리끈은 그다지 비싼 것도 아니기에 후딱 구매했지.

"그건 내 선물이야. 가끔이라도 써주면 고맙겠네."

"끄응, 이미 계산했으니 어쩔 수 없지. 이건 감사히 받을게."

결국 그녀는 머리끈을 챙기며 기쁘게 웃었다.

"그러면 이제 다음으로 가볼까. 지금까지는 내가 돈 썼으니 이제 네가 쓸 차례야."

나는 대담하게 말했다. 이에 그녀가 씨익 웃었다.

"내 앞에서, 그것도 이 도시에서 돈 얘기를 꺼내다니 배짱 한번 두둑한데. 따라와 우리의 재력을 보여줄 테니!"

이번에는 그녀가 앞장섰다. 나는 자신만만한 물주의 뒤를 따라 뭘 살지 고민하며 거리를 걸었다.





참으로 신기한 일이라고 루진은 생각했다.

이렇게나 심장이 쿵쾅거리다니. 그 누구를 만났을 때도 이렇게 심장이 띈 적이 없었는데.

이게 바로 사랑인가? 그런 생각을 할수록 자꾸만 유진을 의식하게 되는 것 같아 루진의 얼굴은 급속도로 붉어졌다.

'그리고 내, 내가…. 귀, 귀엽다니!'

이렇게 직접적으로 누군가에게 외모로 칭찬을 받은 적은 처음이었기에 루진은 부끄러워하면서도 기뻐했다.

얼굴이 후끈후끈 달아오른다. 처음 만났을 때와는 달리 감정이 잘 감춰지지 않는다.

그리고 실제로 유진은 루진이 부끄러워한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다만 이걸 말하지 않고 지켜보기만 하는데 그 재미가 매우 쏠쏠했다.

이걸 모르고 루진은 고뇌했다. 만약에 유진의 생각을 알았다면 수치사 했을 테지만 타인과의 커뮤니케이션 능력이 부족한 그녀로선 작은 변화만으로 타인의 감정을 유추하는 건 불가능했다.

'으으으, 이걸 어쩌지. 지금의 나 이상하진 않으려나..."

루진은 이미 확신했다. 유진, 그는 예언 속에 나오는 창세의 영웅, 내가 기다려온 영웅이라고.

그리고 그런 영웅과 함께하게 되었다. 이에 환호했지만, 겉으로는 숨겼다.

겉으로는 침착하게 행동해서 친구처럼 편하게 지낼 수 있게 되었고, 지금은 같이 도시를 돌이 다니고 있다.

두근두근, 심장이 뛴다. 이 감정과 달아오른 얼굴을 당장이라도 숨기고 싶다. 그렇기에 목적지에 도착하자 루진은 큰소리로 외쳤다.

"여기는 내가 애용하는 대장간이야! 오더 메이드 제품부터 시작해서 온갖 무기를 제작, 보수하는 곳이지!"

이 가게의 품질과 실력은 자신할 수 있었다. 무려 10년 동안 애용했던 가게니까. 유진이 뭘 요구하든 전부 맞춰줄 수 있을 거라 자신했다.

"근데. 여기에서 뭘 살 거야? 무기라면 난 이미 있는데?"

하지만 유진은 이미 무기를 가지고 있었다. 그것도 본인이 직접 만든 좋은 품질의 무기가.

'어, 어쩌지!'

루진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했다. 이렇게 되면 유진이 자신을 이상하게 여기진 않을까 조마조마하며 빠르게 유진에 대한 정보를 떠올려 보았다.

그리고 기억난 건 유진은 갑옷이 없다는 것.

"유진은 갑옷이 없잖아. 그러니 이참에 하나 장만하자."

"갑옷?"

루진의 말에 유진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유진은 그녀가 급하게 땜빵하려고 이 말을 꺼냈다는 것과 황녀가 자신에 대해 어느 정도 정보를 갖추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왜 자신한테 이렇게까지 하는지는 몰랐지만 유진은 순순히 넘어갔다. 하지만 루진은 걱정했다.

'여기서 나를 이상하게 여기면 어떡하지?'

그렇게 걱정했다.

"좋아! 들어가자."

하지만 다행히 잘 넘어갔고, 루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둘은 대장간 안에 들어가 유진에게 맞는 갑옷을 하나 주문하고 임시로 사용할 갑옷까지 구했다.

다만 갑옷을 구할 때 의견 차이가 났다. 유진이는 가볍고 활동에 용이한 갑옷을 원했다.

루진은 안전을 중시해서 조금 무겁더라도 튼튼한 걸 권유했다. 하지만 끝내 유진의 고집을 꺾지 못했다.

"하아, 어쩔 수 없지. 그러면 갑옷은 유진의 주문에 맞춰줘."

"알겠습니다!"

대장장이가 꾸벅 고개를 숙였다. 그는 VVVIP고객인 루진이 나가는 마지막까지 그녀를 배웅해 주었다.

그 후 밖으로 나와보니 해가 져 있었다. 가게에서 너무 오랜 시간을 보낸 것이다. 결국, 둘은 근처에 있던 가게에서 저녁을 먹고 길드로 돌아왔다.

길드에 손을 잡은 상태로 돌아오자 간부들 사이에서 묘한 소란이 있었지만, 다행히 문제 삼는 사람은 없었다.





다음날, 필요한 작업을 끝내고 빨리 잠자리에 들었기에 일찍 일어나 루진과 함께 마법사를 마주했다.

루진은 어제와 조금은 달라진 얼굴빛으로 밝게 웃고 있었고, 마법사는 그런 그녀를 흡족하게 바라봤다.

'뭐 하는 거지?'

그보다 어제 하루종일 노느라 제대로 된 준비는 못 했지만 겨우 산적이니 문제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생각은 마법사의 말에 산산이 깨졌다.

"이제 흑산적을 잡으면 되네."

"...흑산적이요? 아니 그보다 그걸 지금 알려주면!"

"지금 바로 출발하세."

"...네? 뭐라고요?"

"지금 바로라고 했네만."

이런 미친 마법사 새끼를 봤나. 표정의 변화도 없이 지금 당장 가라고 말하는 마법사의 말에 쌍욕을 퍼부어 줄까 싶었지만 꾸욱 참고선 물었다.

"이런 건 사전에 알려줘서 준비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산적토벌, 솔직히 우리 실력이면 혼자 가더라도 문제없는 간단한 임무다.

근데 그 산적이 흑산적이면 이야기가 달라지지. 마력도 다룰 줄 알면서 산적질이나 하는 미친놈들 집단인데.

그런 놈들을 상대할 땐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고 의뢰지 까지 갔다 돌아올 마차 편까지 알아봐야 한다.

의뢰지 완료 후 무사히 귀환하는 것도 본인의 실력. 이에 길드의 지원은 없으니까. 그렇기에 내가 항의하자 마법사가 웃으며 내 옆을 가리켰다.

이에 옆을 보니 루진이 대검을 다듬고 있는 게 보였다.

"출발 준비해놨겠지, 벨패."

"물론입니다. 황녀님. 이동수단도 미리 준비했고, 아공간 주머니도 챙겨놨습니다."

"잘했다. 그러면 바로 점검하지."

아…. 맞다, 얘 황녀지. 황녀가 직접 짐을 싸고 마차를 알아본다? 설령 그녀가 수습 신분이라 해도 황가로서 격에 맞지 않는 일이다.

저렇게 다른 누군가가 미리 준비해 놓는 게 당연하지.

"받게나 자네한테 필요한 물건도 이미 준비됐네."

마법사는 나에게도 주머니를 내밀었다. 초고가의 아공간 주머니, 안을 열어보니 온갖 식량과 포션과 마법 스크롤까지 들어 있었다.

그야말로 빵빵하다 못해 과한 지원에 무심코 헛웃음이 나올 뻔했다. 내 인벤토리에 있는 포션 버리든가 해야지.

나는 아공간 주머니 속 포션을 내 인벤토리로 옮겼다. 그 사이에 황녀가 잗다듬어진 대검을 등에 멨다.

"물품 수량 확실하군. 그리고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한 텔레포트 마법 스크롤도 있고."

그녀는 이 과한 지원에 이상함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뭐, 좋은 게 좋은거지.

"그러면 준비는 끝났군. 유진, 그대도 무기를 가지고 있겠지?"

"네, 있습니다."

나는 미리 챙겨온 창을 꺼냈다.

"오오, 그때 본 창이 아닌가! 역시 훌륭한 솜씨야!"

마법사가 창을 보고 감탄했다. 그리고 내 창을 붙잡고 요리조리 훑어봤다. 마법사라 그런지 내 창에 걸린 술식을 빠르게 읽어낸 것 같다.

"대단하군. 진짜로 연금술과 마법에 조예가 있을 줄이야. 그리고 이건 나도 처음 보는 분류가 아닌가! 이렇게나 흥분되는 건 처음이군!"

"그만."

보다 못한 루진이 나섰다. 하지만 마법사는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이건 어떤 술식인가! 알려줄 수 있겠!"

"그만! 언제까지 붙잡을 생각이냐!"

결국, 그녀가 소리쳤다. 그녀의 호통에 마법사가 흠칫 놀라며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쯧, 자네는 다 좋은데 흥미로운 것만 보면 흥분해서 탈이야. 우리는 이만 갈 테니 뒷정리나 잘하도록."

그녀는 그리 말하며 앞장섰다. 나는 그녀의 뒤를 따랐다. 그녀가 간 곳은 말들이 보관되고 있는 마구간.

마구간 안에는 명마들이 가득했다. 그녀는 그중 상태가 좋아 보이는 말 몇 마리를 꺼내왔다.

"여기 이 말을 타거라."

루진은 나에게 금빛의 윤기 나는 털을 가진 말 한 마리를 주었다. 딱 봐도 명마라는 게 보이는 말은 온순한지 옅게 푸르릉, 거리며 내 손에 머리를 비볐다.

"귀여운 말이네, 그리고 잘 훈련 받아서 강인해 보여."

단 둘만 남았기에 다시 반말을 썼다. 그녀는 흡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훗, 내가 어릴 때부터 눈여겨보고 신경 쓴 말 중 한 마리다. 그 정도야 당연하지."

그녀는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우쭐한 듯 가슴을 앞으로 내민 의외의 모습이 귀여웠다.

"어쨌든 빨리 가도록 하지. 우리가 가야 하는 마을은 말로 달려 3일 거리다."

"3일이라…. 가는 동안은 야영할거야? 아니면 도시에서 자고갈래?"

"원래라면 귀족 가문에 몸을 맡겼겠지만, 이번에는 아니다. 3일 동안 가면서 야영을 할 거다."

"아..."

황녀라서 기대했는데. 역시 이런 쪽으로는 고지식해.

"그러면 가지."

그녀가 말 위에 올라섰다. 나도 받은 말에 올라타 고삐를 당겼다. 내가 자리를 잡아 앉아 말이 다그닥- 다그닥- 달리기 시작한다.

나도 말을 자주 탔기에 말을 모는 건 자신 있다. 균형을 잡고 고삐를 조절해 루진의 곁에 자리를 잡아 뒤에서부터 걸었다.

"호오, 유진은 말도 잘 타는구나!"

"황녀인 너만큼 잘탈까!"

루진은 황녀이기에 예전부터 승마를 배운 건지 말을 잘 탔다. 나도 전의 삶에서는 귀족 출신이었던 적이 많이 있기에 승마에는 자신 있었다.

"그렇다면 나와 경주라도 해보겠나."

"경주라니…. 그런 위험한 건 거절하지! 그리고 보상이 없는 승부는 딱 질색이야!"

우리는 그렇게 대화를 나누며 황금 길드를 나와, 대도시 밖으로 나와 목적지를 향해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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