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화 〉길드에서의 이야기
"유진아! 유진아!"
길드로 걸어가고 있으려니 내 뒤에서 아리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뒤를 바라보니 아리스와 유벨이 짐을 바리바리 싸 들고 엉거주춤하게 걸어오고 있었다.
그나저나 우리 짐이 원래 저렇게 많았나? 수십 봉지는 되어 보이는 짐과 온갖 옷가지들을 들고 있는 모습이 매우 힘들어 보였다.
자신만만하게 둘이서 짐을 옮길 수 있다고 하면서 갔다가 아주 고생하고 있구나. 너무 힘들어 보여서 나는 아리스의 곁에서 짐을 몇 개 가져왔다.
"같이 들어줄게. 몇 개 줘봐."
짐을 몇 개 들어서 가져가니 아리스가 웃으며 말했다.
"고마워, 그렇지 않아도 무거워서 힘들었는데…. 그리고 온몸도 쑤시고."
톡톡, 아리스가 힘들었는지 떨리는 팔을 두들겼다. 유벨도 잠시 짐을 놓고 꾹꾹 어깨를 주물러댔다. 오늘 내 호흡법을 배워서 많이 아픈가 보다.
'근데 이것들이 다 너희를 위한 거란다.'
최소한 내 호흡을 완벽하게 익히면 100바퀴 달리기를 하더라도 많이 힘들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니깐 힘들어도 조금만 참아. 힘을 얻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 그 정도는 감안해야지."
"히잉…. 알았어. 조금만 참아볼게."
"나도, 나도 조금만 참아볼게. 마력을 익힐 수만 있다면 그 정도는 견뎌야겠지."
힘들어하며 말하는 아리스와 유벨. 나는 조금만 참으라고 위로해주며 둘의 짐을 조금 더 들어주었다. 둘도 짐이 줄어드니 조금 나아진 표정이었다.
"인제 그만 가자."
"끄응. 그래야지, 빨리 가야지. 가서 좀 쉬자 유벨."
"네, 아리스 언니."
길을 걷다가 둘이 몇 번 넘어질 뻔했지만 내가 잘 부축해주며 무사히 걸었다.
숙소로 돌아온 뒤에는 먼저 유벨쪽 숙소부터 가기로 했다. 유벨은 혼자 지낼 테니 짐을 미리 옮겨줬다.
숙소 안으로 들어가니 넓고 깨끗한 홀이 보였다. 나무저택이었지만 나름 돈을 많이 사용한 티가 팍팍 났다.
"유벨. 너는 몇 호 방을 배정받았냐?"
"내 방은 7호야. 아마 2층에 있을걸."
"2층이란 말이지."
계단을 올라 유벨의 방에 들어갔다. 방 안에는 책상과 의자, 짐을 보관하는 상자와 옷장이 있는 간소한 크기의 1인용 방이 보였다.
그리고 방 왼쪽에는 여관에서 본 것보다 몇 배는 좋아 보이는 침대가 있었다.
책상에는 황금색의 운동복이 가지런히 올려져 있었다. 그 옆에는 내일부터 입고 나오라고 적힌 쪽지가 놓여 있었다.
이에 내가 체육복을 잡아서 펴보니 황금색 천 가운데에 황금 길드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고, 전체적인 디자인 같은 게 참으로 촌스러웠다.
나는 체육복은 안쪽에 밀어 넣고, 유벨의 옷과 짐을 놔두었다. 유벨은 짐을 놓자마자 침대로 쓰러지듯 누워서 우리를 보고 손을 흔들었다.
"짐 같이 옮겨줘서 고마워. 이제 이거 정리하고 나는 자야겠다."
"그래. 많이 힘들었지. 푹 쉬고 내일 보자!"
"응, 언니도 잘자....유진 너도 잘 자고."
"오냐, 잘 자라."
인사 후에는 옆 숙소의 아리스네 방에 가서 아리스의 짐을 놓았다. 나는 나머지 짐을 들고 내 방으로 왔다.
내 방도 다른 애들이랑 같은 형태였다. 1인용으로 보이는 방에는 똑같은 구성의 가구가 놓여있었고, 탁자에는 옷이 놓여 있었다. 공짜 옷이란 건 좋은데 거참 디자인이...
촌스러운 디자인에 옷은 다른 곳에 밀어 넣었다. 이건 절대로 안 입을 거다.
"그러면 짐 정리를 시작할까."
나는 능숙하게 짐을 정리했다. 옷은 갠 다음에 옷장에 넣고, 창은 꺼내서 창날에 감아놓은 천을 벗겨냈다. 날이 상하지는 않았나 꼼꼼하게 확인한 다음 다시 천을 덮어 벽에 기대놨다.
다음은 개인 물품 차례. 유진이 마을에서 챙겨온 온갖 소설책과 망상 노트를 꺼냈다. 흑역사라 부르며 이불킥을 할만한 물건들. 이것들의 처분은 이미 정해놨다.
"이런 건 소각처리 해야지."
손에서 초급 화염 마법을 일으켜서 책과 노트를 불태워 버렸다. 흑역사는 소각처리가 딱이라니깐.
책과 노트가 불타며 생긴 재는 마력으로 폭풍을 일으켜 손에 모은 뒤 창문 밖으로 던져버렸다.
마력을 쓸 줄 아는 자들이 보면 기겁할 초고난도의 마력 테크닉. 하지만 나한테는 쓸만한 청소 기술일 뿐이지.
그런 식으로 하나하나 정리하니 짐이 적어서 금방 사라졌다. 반면 옆의 아리스의 방에서는 아직 한창 정리 중인지 드르륵 소리가 끊이질 않는다.
나는 느긋하게 침대에 앉아 기다리기로 하며 바닥에 술과 초콜릿을 꺼내놨다. 초콜릿 상자를 까자 퍼지는 달콤한 향기.
"으음, 술과 잘 어울리겠어."
인벤토리에서 술을 따를 잔을 꺼내 바닥에다 놨다. 동시에 옆에서 들리던 소리가 잠잠해졌다.
"이제 정리 다 했나?"
그러면 이제 부르러 가야지.
"음?"
"앗!"
문을 열어보니 앞에 아리스가 있었다. 그녀도 나한테 용건이 있었는지 손을 들어 뻘쭘하게 문을 두드리려는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나는 이런 갑작스러운 상황에 아리스의 손을 잡았다. 이럴 때는 용기 있게 나가야 하는 법이다.
"무슨 일인인지는 모르지만 일단 들어와."
아리스의 손을 잡고 방 안으로 이끌었다. 그녀는 그사이에 아리스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몇 초간 침묵했다.
그리고 문을 두드리려 들었던 손을 살포시 아래로 내리며 내 방으로 살며시 들어왔다.
"그렇지 않아도 한잔하자고 찾아갈 생각이었는데 잘됬네. 같이 한잔할래?"
바닥에 앉아 그녀의 앞에 초콜릿과 술을 내밀었다. 아리스는 이에 어색하게 웃었다.
"하, 하하하. 그러니깐 오늘 많은 일이 있었잖아. 그래서 오늘은 한잔하자고 나도 제안하려…. 했는데? 유진이는 나랑 같이 술 대작 같은 거 해본 적 없잖아.
아리스는 뒤에 짐을 지던 손을 내밀었다. 그 손에는 2병 정도의 술병이 들려 있었다. 으음, 딱 봐도 그다지 좋은 술은 아니었다. 겉모양이랑 술의 색, 그리고 아리스의 자금을 생각하면 싸구려 술인 일종인 럼주일 것이다.
아리스도 자신의 술이 싸구려라 그런지 고급인 티가 팍팍 나는 과일주에 기가 죽은 것 같았다.
"난 럼주도 나쁘게 생각하지 않아. 럼주에는 럼주만의 특색이 있거든."
"그렇지! 럼주도 나쁘지 않지? 원래 술은 싸구려라도 취해서 빨리 잠들 수만 있다면 좋다고 하잖아."
"으음, 내가 한 말은 그런 의미가 아닌데. 그낭 개인 취향 얘기지."
자고로 술은 취향 차이가 큰 법. 아무리 좋은 술이라도 본인에게 맞지 않으면 안 좋지만 싸구려라도 본인에게 잘 맞으면 좋은 법이다.
애초에 난 고가의 술을 먹고 평가하거나 술 제조자, 재료의 품질을 따지는 사람이 아니기에 술이라면 뭐든 좋다는 입장이다.
다만 아리스는 내 말에 알코올을 넣어서 취할 수만 있다면 뭐든 좋다고 여긴다 생각한 모양이다. 그래서 그걸 정정해주니 어정쩡하게 웃으며 럼주를 깠다.
"일단 한잔하자. 맨정신으로는 못 있겠어."
"좋아. 한잔하자고."
그녀에게 잔을 하나 건네주고 과일주를 따라주었다. 내 잔에도 과일주를 따랐다. 상큼함 냄새가 퍼진다.
"첫 잔은 원샷!"
"원샷!"
잔을 앞으로 내밀며 말하자 아리스가 어색하게 따라 한다. 그녀의 잔에 내 반응 부딪어 짠~ 소리를 낸 뒤 쭉- 한 번에 과일주를 들이켰다.
"크으, 달콤한 게 맛있네."
과일 특유의 단맛이 나면서 알코올의 알딸딸한 느낌이 전신으로 퍼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몸이 딱 좋게 달아올랐다.
아리스도 마찬가지인지 몸이 약간 붉어진 상태에서 이번에는 잔에 럼주를 따랐다.
"아리스. 술만 마시지 말고 이것도 먹어봐."
"어? 초콜릿이다!"
"기다려봐. 까줄게."
내가 준비한 건 카카오 70%의 다크 초콜릿! 몇 개 까서 아리스 입에 넣어주고, 내 입에 전부 털어 넣었다.
입안 가득 퍼지는 쓰면서도 달콤함을 느끼며 아리스가 가져온 럼주를 열어 통째로 들이켰다.
"우왓! 그걸 그렇게 들이키면!"
아리스의 외침을 뒤로하고 입안의 초콜릿이 럼주와 만나 곳곳에 퍼진다.
다만 럼주가 싸구려라 너무 독했는지 취기가 빠르게 돌기 시작했다. 쓰러지거나 몽롱할 정도는 아니지만 내가 술에 취했다는 것을 느낄 정도는 됐다.
"크으, 취한다."
"우와....유진이가 술이 엄청 강하구나. 나나 에반이었으면 그대로 쓰러졌을 텐데."
그렇게 말하며 아리스가 다시 한번 과일주를 들이켰다. 그녀도 슬슬 취하는지 얼굴이 붉어졌다.
하지만 뭔가 매끄럽게 이야기를 하기엔 조금 부족하다. 우리는 초콜릿을 까먹으며 연신 술을 들이켰다. 조금 지나니 우리 둘 다 상당히 취해 있었다.
"유진아…. 유진이는 오늘 일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니?"
먼저 말을 꺼낸 건 아리스였다. 그녀는 술이 들어가서 그런지 침울한 표정으로 무릎을 안고선 거기에 얼굴을 문지른다.
"에반과는 불화가 생겨 깨지고, 훈련은 엄청 힘들고, 숙소에 돌아갔을 때는 에반이 사라졌더니 다, 다른 여자랑! 유진아…. 나 너무 힘들어."
그녀는 울먹거렸다. 오늘 일이 어지간히도 힘들었던 것 같은데 아무래도 에반이 그새를 못 참고 다른 여자랑 있는걸 본 모양이다.
"유진아. 에반한테는 나라는 여자친구가 있는데 어째서 다른 여자랑 있던 걸까. 그리고 보니깐 그런 식으로 여자를 만난 게 한두 번이 아닌 것 같더라."
"확실히 걔가 여자를 많이 만나긴 했지. 마을에서도 그렇고, 여기에 와서도 그렇고."
에반이 만난 여자를 다세면 거뜬히 20명은 넘을 것이다. 지금까지는 운이 좋았는지 유벨이나 아리스에게 들키지 않았지만, 오늘 딱 들켰나 보다.
그래서 짐 옮길 때 에반 이야기를 안 꺼냈나.
하여튼 침울해하는 아리스를 달래야지. 나는 그녀를 단독여 주었다.
"넌 잘하고 있어. 에반 문제야…. 뭐, 네가 성공하면 그쪽에서 찾아오지 않을까? 여차하면 마을로 돌아가도 되고, 지금은 버티고 버텨서 성공해야지."
"그러면 좋겠네. 나도 성공하고 싶어. 성공해서 돈 부족한 거 없이 살고, 마을에 많은 돈을 보내서 영웅도 되어보고 싶어. 근데 에반은 어떻게 할지 모르겠어."
"넌 영웅이 될 수 있어. 내가 그렇게 만들어줄게. 나만 믿어! 그리고 에반 문제도 나한테 맡기고!"
아리스의 등을 토닥이며 그렇게 위로했다. 아리스가 너무 우울해하지만 나는 지금의 상황이 좋다.
기억 속의 그녀는 절대로 유진에게 이런 말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 그녀가 이러는 건 나에게 기대고 있다는 증거다.
"오늘 있었던 일 기억나지? 나 엄청 강했잖아. 그리고 마력도 가르쳐줬고. 나만 따라오면 엄청 강해질 수 있어! 에반도 내가 갱생 시켜 줄게!"
"...응! 유진이를 믿을게!"
지금 말은 진심이다. 그녀가 날 믿고 따라온다면 나는 그녀가 강해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거다.
그녀도 내 진심이 통한 건지 얼굴을 들어 올렸다. 조금 나아진 표정이었고, 나를 바라보며 나에게로 화제를 돌렸다.
그녀는 내가 지닌 강함에 관해 이것저것 물어보았다. 그중에는 마력에 관한 것과 무술에 관한 것이 많았다.
나는 답할 수 있는 소수의 질문에만 답하고 나머지는 침묵하거나 어정쩡하게 대답했다.
그때마다 그녀는 벌이라며 나에게 술을 먹였다. 나도 순순히 술을 마셔주었다. 그러자 자신의 행동이 전혀 벌이 되지 않는 걸 깨달았는지 그녀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나는 그녀가 다치지 않도록 편안하게 잡아주었다.
"비밀이라니 뭐야, 그게! 그냥 누나 놀리는 거지! 제대로 벌을 줄 거야!"
그녀가 내 배를 톡톡 두드렸다. 이에 나는 일부러 과장되게 넘어지며 내 상의를 벗었다. 순식간에 드러난 탄탄한 복근. 아리스의 손은 내 복근 위에 놓여 있었다.
"이 사람. 아주 사나워졌네."
나는 모른척하며 그녀의 양손을 잡아 도망치지 못하도록 했다. 아리스의 얼굴이 술을 마셔서 그런 것과는 다른 의미로 붉어지기 시작했다.
"그…. 유진아?"
"왜?"
잠깐의 침묵 후 아리스가 입을 열었다. 왠지 공기가 후끈 달아오른 기분에 괜찮은 분위기가 형성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