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화 〉길드에서의 이야기
라피드는 길드로 향하면서 끊임없이 길드 자랑을 늘어놓았다. 위대한 황제 폐하를 만날 수도 있다느니, 지원이 빵빵 하다느니. 처음에는 그냥 들어줬다.
그의 말 중에는 황금 길드의 시작이나 황제, 황녀와 관련된 얘기도 있었다. 그중 가장 관심이 간 건 역시나 황녀의 천재성과 황족의 이야기였다.
라피드가 황족의 이야기를 꺼낸 건 유벨과 아리스가 침울해져서 분위기를 돌리려고 그런 것 같은데, 이게 효과가 있는지 지금은 둘 다 라피드의 말에 귀 기울이고 있었다.
"제국의 지존이신 황제 폐하와 황제 폐하의 일족인 황족들은 위대한 피를 유지하기 위해 주로 황족끼리 결혼하면서 위대한 용사와 뛰어난 재능을 가진 귀족들을 데릴사위로 들여와 혈통을 더욱더 튼튼하게 만들었지."
"우와아! 그렇다면 황족분들은 하나같이 강한간요?"
황족의 이야기는 시골 소녀에게 있어서는 환상이나 다름없는 이야기이기에 아리스는 금방 라피드의 이야기에 빠졌다. 하지만 내가 볼 땐 그냥 에반과 관련된 불안을 잊으려고 저러는 것 같았다.
반면 라피드는 적극적으로 반응을 보이는 아리스의 모습에 만족스러운지 웃었다. 그 모습이 마치 어린 아이들 한테 옛날 이야기해 주는 어르신 같았다.
"아니, 모든 황족 께서 전부 강하신 건 아니다. 좋은 혈통을 황가에 유입시켰더라도 좋은 혈통으로 전해지는 뛰어난 재능을 발현한 건 극소수에 불과해. 그런 의미에서 이번 황녀님은 황가 최고의 천재시지."
라피드는 그 말을 시작으로 황녀의 업적을 말하기 시작했다.
"황녀님은 5살 때 마력을 깨우치고 황제 폐하의 명으로 뛰어난 스승에게 검을 배웠다. 그렇기에 황녀님은 동 나이대에 적수는커녕 비슷한 수준의 실력자가 없었고, 황녀님께서도 같은 나이의 아이들에게는 관심이 없었지."
"그거참 멋지네요. 훌륭한 출신에 뛰어난 재능과 스승까지. 꼭 옛날이야기에 나오는 영웅 같아요!"
"그렇지! 황녀님이시라면 영웅도 거뜬하게 되실 거야!"
호탕하게 웃는 라피드와 아직 순진하고 어린 소녀답게 멋모르고 좋아하는 아리스까지. 둘 다 시끄러웠다. 문득 고개를 옆으로 돌리니 내 옆에 있는 유벨이 나처럼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시끄럽지?"
"...시끄럽지만 아리스 언니는 저걸로 슬픔을 잊으려는 것 같으니 그냥 보고만 있자."
이때만큼은 유벨의 목소리가 상냥했다.
"더, 더 이야기해 주세요!"
"하하하하! 얼마든지 해주지!"
"......."
"..........."
유벨과 내 눈이 마주쳤다. 우리는 아무 말도 안 했지만 지금만큼은 의견이 일치하는 것 같았다. 제발 좀 닥쳐줬으면….
너무나도 시끄러운 탓에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몰린다. 얼른 길드에 도착했으면.. 그렇게 생각하는데 라피드가 손뼉을 찰싹! 치며 나를 바라보았다.
"맞다! 그러고 보니 이번에 새로 들어오는 신인 중 최고 유망주는 너다. 황녀님께서는 자신과 같은 수준의 측정기록을 가진 너에게 큰 관심을 가지고 계시지."
"그런가요..."
시골 출신인 내가 황녀의 관심을 받고 있다니 좋다고 해야 할지 나쁘다고 해야 할지 애매하다.
하지만 높으신 분의 관심은 권력이 어느 정도 있다면 좋은 거, 권력도 금력도 부족할 땐 나쁜 거라는 삶의 경험에 따라 불편한 일로 여기기로 했다.
"하하하! 긴장하지 말라고! 황녀님은 언제나 같은 나이대의 자신의 적수를 원했고, 그게 우연히 너일 뿐이니깐. 그리고 곧바로 황녀님을 만나진 않을 거야. 지금 황녀님께선 저기 던전 20계층을 향한 원정을 나가셨으니."
라피드는 호탕하게 웃으며 나의 어깨를 쳤다. 근데 그런 말을 하면서 긴장하지 말라니. 다른 사람이었다면 라피드의 말에 더 긴장했을 거다.
그도 그럴 게 황녀다. 제국의 지존인 황제의 자녀, 동시에 현재 가장 주가가 높은 천재. 그런 소녀가 나한테 관심을 가진다면 어찌 긴장하지 않을 수 있을까.
나 같은 경우에는 황녀를 자주 만나봤고, 신과 악마, 드래곤도 만나본바 있기에 딱히 긴장되지는 않았다. 그래도 그녀의 천재성은 나도 궁금하다.
황녀의 특성상 주인공의 히로인일 가능성이 매우 높고, 천재이기 까기 한다면 히로인은 거의 확정된 셈인데, 히로인은 주인공처럼 언제나 상식을 뒤엎는 힘과 성장을 보여줄 때가 많았다.
그렇기에 히로인인 황녀가 얼마나 뛰어날지, 나를 따라올 수 있을지 궁금하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내가 질 리도, 따라잡힐 리도 없다는 생각도 언제나 존재하고 있다. 나는 경험의 괴물. 천재성과 얇은 경험만으로는 따라잡을 수 없다.
'그래도 재미는 있겠지. 나한테도 도움이 될 테고."
호적수라 할 수 있는 존재와의 싸움은 언제나 나를 발전시켜왔다. 황녀가 나와 비슷한 수준이라면 그녀와의 싸움은 나를 강해지도록 해줄 것이다.
나는 얼른 강해져야 한다. 지금의 나는 약해진 상태이기 때문이다. 지금 쓰는 육체는 빙의된 몸이라 전의 몸과 비교 했을 때는 유약해졌고, 품고 있던 마력도 무척 적어졌다.
뛰어난 기술과 수많은 경험이 있긴 하나 그걸로 차이를 메꾸는 것도 어지간해야 통하지. 나보다 몇 배는 강한 자와 싸울 때 그런 게 통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아니, 내가 가진 능력을 쓴다면 가능성이 있으려나.'
내가 가진 능력은 많고 그중에는 강력한 것도 많았다. 당장 능력 중 하나인 창세신의 가호를 쓴다면…. 예전이라면 모를까, 지금은 적이 누구든 이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창세신의 가호에는 큰 단점이 있으니 어지간해서는 쓰지 않을 거다. 하여튼 창세신의 가호는 없는 셈 치기로 했다.
"크, 크다! 신전보다 더 커!"
우리는 거대한 고성에 도착했다. 황금 길드의 본거지인 고성은 던전도시의 왼쪽 외각부에 위치해 있었다.
외각인 만큼 대장간이나 가게는 없었지만, 그 대신 모험가와 여관, 마법사들의 실험실이 많이 보였다.
"라피드씨, 여기의 마법사들은 황금 길드 소속인가요?"
"반반이네. 절반 정도는 우리 길드의 마법사지만 나머지 절반은 길드의 모험자 들에게 마석과 몬스터의 부산물을 쉽게 얻으려고 근처에 자리 잡은 마법사들이네."
라피드의 말에 납득했다. 확실히 여기라면 물건 구하기는 쉬울 것이다. 그리고 여기라면 나도 이것저것 구할 수 있을 것이다.
나도 연금술과 인챈트 등등의 마법을 극한까지 추구한 적이 있는 마법 사용자. 내가 만든 이 창을 강화할 수 있을거다.
"그렇다면 마법 물품 같은 것도 쉽게 구할 수 있겠군요."
"그렇긴 하지, 다만 어지간한 건 길드에서도 길드원들에게 판매하니 길드에서 구해보게."
그거 다행이네, 솔직히 내가 알아서 돈 주고 구해야 하나 싶었는데. 어느 정도 지원이 된다면 나머지 재료는 마법사들한테서 구할 수 있겠지..
고풍스러워 보이는 성 옆에는 목조 저택이 3대나 지어져 있었다.
"음! 도착했군! 들어가지!"
여기가 황금 길드의 홈인가. 제국 황제의 길드다운 크기에 감탄하며 우리는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는 거대한 홀이 있었는데 홀에는 60명 정도의 사람이 모여 있었다.
이 사람들이 전부 길드에 가입하는 사람인가. 아마 저들은 이 도시의 신전이 아니라 다른 신전에서 적성검사를 받은 자들일 것이다.
"잠시 여기에 있게나. 아무리 자네들이 뛰어난 인재라 해도 길드에 들어온 후의 과정은 누구나가 동일! 여기에서 기다리게!"
라피드가 그렇게 말하며 어딘가로 사라졌다. 여기에서 기다리면 된단 말이지. 우리는 홀 중 한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아있으니 아리스와 유벨이 불안한 듯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불안한 건지 몸을 떨었다.
"으으...이 사람들이 전부 우리와 같은 길드에 들어온 거라니, 긴장되네."
"긴장하지 않아도 될 거예요 언니. 곧 누가 나와서 설명을 해주겠죠."
유벨도 그렇게는 말하지만 불안해 보인다.
"일단 둘 다 진정해봐. 그렇게 긴장해서야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해. 아마 그렇게 어려운 테스트는 아닐 거야."
'내 입장에서는 어렵지 않겠지.'
이렇게 사람을 한곳에 몰아넣을 걸 봐서는 좋은 일을 하려는 것 같지 않았다.
콰앙!
"모두 조용!"
그리고 내 예상대로 누군가가 홈 맨 앞에 서서 단상을 내리쳤다. 갑작스러운 외침과 폭음에 사람들의 시선이 몰려들었고 홈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조용해진 홈을 확인한 남자는 내리친 탓에 부서진 단상을 치워버리고 사람들을 둘러봤다. 그 시선에 누군가가 침을 삼켰고, 누군가는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그들의 모습을 본 남자가 사람들을 천천히 노려보더니 입꼬리를 올렸다. 그는 전체적으로 인상이 험악했고 얼굴에 흉터와 함께 온갖 상처가 있었다.
전체적으로 내뿜는 분위기만 하더라도 그는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이걸 알아챈 사람들은 숨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이에 남자가 입을 열었다.
"만나서 반갑다 애송이들아. 나는 이제부터 한 달간 너희를 훈련시켜줄 황금 길드의 간부다! 앞으로 한 달간 너희들에게 지옥을 보여줄 자지! 우선 너희는 여기에서 쓸만한 무기를 챙겨라! 챙긴 무기는 앞으로 너희와 함께하게 될 거다!"
절로 느껴지는 카리스마. 위에 서는 자로서 오랫동안 교육받아온 자의 기운이다.
'저 남자…. 귀족인가?'
행동거지도 귀족처럼 기품 있었기에 합리적인 의심이다.
"준비하도록!"
남자의 말에 외각에서 사람들이 나와 온갖 무기를 쏟아냈다. 롱소드, 아밍 소드, 장창, 단창, 메이스, 해머, 도끼, 활과 화살, 언월도 등등. 수많은 명품 무기가 모였고, 그 옆에는 나무로 만든 것 같은 무기가 모였다.
남자가 그중 하나를 들어 올렸다. 하나하나가 명품이라 부를만한 무기를 이렇게 뿌리다니, 역시 황금 길드의 자금력은 엄청났다.
다른 사람들도 이 엄청난 자금력에 감탄하고, 명품 무기를 챙기려고 슬금슬금 다가오려고 하니 남자가 날카롭게 외쳤다.
"동작 그만! 너희들은 이 무기를 쓸 자격이 없다! 이제 막 길드에 들어온 초짜인 너희가 사용할 건 그 옆의 것들이다! 이제부터 할 줄 아는 것도 없고 약한 너희를 뜯어고친다! 그리고 지금부터 하는 건 가장 기초적인 테스트다!"
남자의 말에 사람들이 조용해졌다. 명품 무기를 챙기려던 사람들은 대부분 혼란스러워했다.
아리스와 유벨도 이 상황이 혼란스럽고 무서운지 나에게 달라붙었다. 아리스의 부드러운 가슴이 닿아서 좋았다.
"유진아, 우린 어떻게 하지?"
"그, 그러게. 뜯어고친다니…. 뭘 하려는 거야!"
"뭘 하겠냐. 당연히 훈련이지."
나는 그렇게 말하며 아리스와 유벨의 허리를 잡았다. 뭘 하려는 건진 몰라도 이제 슬슬 시작할 것 같았다. 이럴 때는 무기부터 챙겨야 하는 법이다.
"우리도 앞으로 가자."
"우왓! 자, 잠깐만! 잠깐만 기다려줘!"
"끌고 가지 마! 내가 알아서 갈 테니까!"
둘의 의견 따윈 무시하고 맨 앞까지 나아갔다. 나는 적당히 옆에 모여있던 나무 무기 중에 롱소드와 메이스를 꺼내 건네줬다.
둘은 갑자기 건네는 무기에 갸웃하면서도 무기를 받아들였다.
"기다려봐. 곧 알게 될 테니까."
나는 나무로 만든 무기를 뒤져서 쓸만한 나무창을 꺼냈다. 그리고 뒤로 돌아 둘의 앞에 섰다.
뒤쪽에는 나무 무기 뭉치가 있으니 안전할 테고, 나는 앞만 신경 쓰면 될 것이다.
"호오…."
단상의 남자가 흥미롭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았다. 또한 내 행동에 눈치 빠른 몇 명이 나무 무기를 챙겼다.
이를 끝까지 지켜보던 남자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이 정도면 시간도 충분히 줬겠다. 이제부터 테스트를 시작하지! 테스트 내용은 간단하다! 그저 버티기만 하면 된다!"
버티기라, 내 예상대로의 테스트다. 과연 어떤 적한테서 버텨야 하는 건지는 모르지만, 위치를 잘 선점한 것 같다.
"그러면 지금부터 테스트를 시작하지! 테스트 결과는 다음에 반영되니 열심히 해보도록!"
남자의 말을 끝으로 사방에서 전신을 검은 타이즈로 가린 닌자 같은 자들이 나타나 우리에게 달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