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화 〉시작의 이야기
"우와… 크다! 아리스 엄청 커!"
"그러게, 진짜 크고 넓네. 꼭 궁정 같아!"
거대한 신전 앞. 아리스와 에반이 거대한 신전을 보고 감탄하고 있었다. 시골 출신이라 이런 웅장하고 거대한 건물은 처음이겠지.
확실히 신전은 아름답다, 그리고 거대하다. 3층 빌딩은 되지 않을까 싶은 크기에 백색 기둥이 꼿꼿하게 서 있는 모습이 수수하면서도 웅장했다. 하얀색으로 통일된 복장을 한 사제들도 경건해 보였다.
이게 던전 도시의 사제인가. 대단한 신앙심이 엿보인다. 그런 사제의 모습에 우리처럼 이곳에 적성 검사하러 온 걸로 보이는 소년, 소녀들이 감탄하고 있었다.
나는 저런 경건한 신앙인을 많이 봐서 그리 놀랍지는 않았다. 그보다는 신전 앞에는 계속해서 사람들이 모여 시장처럼 북적북적해지는 게 거슬렸다. 이러다 애들하고 떨어질라. 나는 유벨의 손을 잡고 에반 근처로 모였다.
유벨의 손은 부드러웠다. 그리고 반응도 재미있었다.
"잠깐! 이 손 놔!"
"사람이 많아서 너무 복잡해. 서로 떨어질 수도 있으니 다들 잘 붙어봐."
"그럴지도 모르겠네. 처음에는 한산했는데 벌써 사람들이 많아졌어. 아리스. 우리도 손잡자."
"그럼 유벨이 유진과 손을 잡고, 유진과 에반이 서로 손을 잡으면 되겠다. 그럼 우리 모두 떨어지지 않을 거야.”
에반이 아리스의 손을 잡고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에반의 손을 잡은 뒤 유벨을 보자 여전히 내 손을 풀려고 애쓰고 있었다. 작게 놓으라며 소리치는 모습이 귀여웠다.
귀여운 것과는 별개로 유벨의 항의는 무시했다. 지금까지 유진을 무시했으니 그 대가다.
유벨의 손에 힘을 주며 그녀를 안쪽까지 끌고 갔다. 유벨은 아플 텐데도 입을 꾸욱 다물고는 나를 노려봤다.
"왜? 아파?"
비웃으며 말하니 유벨의 안색이 묘하게 변했다. 내가 달라지는 것을 그녀라면 가장 먼저 알아차리려나?
좀 더 손을 잡다가 이 정도면 충분하다 여겨 힘을 뺐다. 유벨은 뭐라 말하려는 듯 입을 뻐끔거렸지만 내 눈동자를 보고는 고개를 돌려버렸다.
눈치 빠르구나. 분명 내가 달라졌음을 알아차린 거겠지.
'그보다 적성검사는 언제 시작하려나. 사람도 많이 모였는데.'
가히 200명은 되지 않을까 싶은 사람들이 모여있는 신전 앞마당에서 기다린다. 기다리기 지루해지려는 찰나 다른 사제들보다 더 화려하고, 동시에 경건해 보이는 신관이 나왔다.
신관은 사제들 사이의 단상에 올라가 우리를 바라보며 말했다.
"여기에 모이세요! 곧 창세신님의 검사 시간이 있을 것입니다! 창세신님의 이름하에 저희 사제들 앞에 일렬도 줄을 서주세요!"
신관의 말을 필두로 사제들이 손을 들었다. 저 사제들 앞으로 모이라는 신호였고, 곧 앞마당에 모인 사람들이 움직였다.
사람이 모여 거대한 무리가 형성되었고, 그들은 뒤엉킨 상태에서 줄을 서느라 곳곳에서 다툼이 일었다.
당장 우리 앞에서도 그런 다툼이 일고 있었다. 줄을 서던 남자 앞에 다른 남자가 새치기했기 때문이다.
"이봐! 여긴 내 자리야! 뒤로 가서 줄 서야지!"
"난 앞에 있는 저 친구의 일행이니깐 배려 좀 부탁하지."
"뭐라고! 헛소리 말고 뒤로 가!"
"이새끼야. 쪼잔하게 이럴래?"
"네가 뭔데 나한테 새끼라는 거야!"
남자의 주먹이 새치기한 남자를 후려쳤다. 새치기한 남자도 먼저 쳤다며 응수하기 시작하자 곧 말다툼이 주먹다짐이 됐다. 여기 외에도 이런 다툼이 곳곳에서 일어났다.
적성검사를 하기에 흥분한 건지 다들 거칠게 말하고, 몇몇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거만하게 행동한다.
내가 보기엔 하룻강아지들이 지랄하는 거지만 유벨과 아리스는 타인의 악의란 걸 제대로 받아본 적 없기에 현 상황에 하얗게 질린 채 아무것도 못 하고 있었고, 이건 에반도 다르지 않았다.
나는 에반의 어쩔 줄 몰라하는 얼굴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마땅히 주인공이라면 이 상황이 이상하다는 것을 알아채야 했으니까.
그 정도는 아니어도 여기에서 일행을 챙겨 뒤로 물러나거나 저들을 뚫고 나아가야 했다.
'이래서 재능 없는 주인공은 싫다니깐.'
에반의 손을 쎄게 잡아 정신 차리게 했다.
"일단 뒤로 빠지자. 저러다 우리도 시비 걸리거나 싸움에 휘말리겠다."
"아, 알았어! 얘들아! 꽉 잡아! 우리는 뒤로 빠지자!"
유벨과 아리스가 고개를 끄덕이고, 천천히 뒤로 이동했다. 내 예상대로 뒤쪽은 비교적 조용했다. 우리는 맨 뒤쪽에 줄을 섰다.
아마 앞쪽의 싸움은 의도된 것일 거다. 그렇지 않다면 시작 전에 모여있던 200명이 아닌 사람이 갑자기 나타나 곳곳에서 일제히 시비를 걸고, 사제들이 싸움을 방관만 하진 않겠지.
대개 던전이나 탑이 존재하는 세계에서 길드 놈들은 이런 식으로 새싹들을 시험한다.
이 세계의 적성검사는 일종의 성인식과 같은 것. 대개 적성검사 이후 직업이 정해진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마 길드의 높으신 분들은 새싹 놈들이 사소한 다툼에 어떻게 반응하는지, 그리고 싸움에 어떻게 움직이는지 보려는 거겠지.
이제는 익숙하다 못해 신물 나는 레퍼토리야. 그리고 내 예상대로 앞의 싸움은 지금까지 방관하던 사제들이 고함을 내지르는 것으로 끝났다. 맨 앞 사람들은 투덜거리면서 다시 줄을 섰다.
대부분 이걸 그저 사고로 여기는 것 같지만 몇몇 인재는 이상함을 알아차렸겠지. 그리 생각하며 고개를 돌려보니 역시나 몇몇이 이상함을 눈치챈듯한 표정이다.
그중 한 명은 아름다운 여성. 빵빵한 가슴과 여기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이 평범한 가죽 갑옷을 입은 것에 비해 적색에 가슴골이 아슬아슬하게 보이는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내 직감이 열렬히 말했다. 저 여자, 히로인각이 보인다고. 나는 그녀를 머릿속에 저장해두려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 또한 동시에 날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내 시선을 눈치채고 있었던 것 같다.
'나름 숨긴 건데 이걸 눈치채네. 히로인일 확률 상승.'
긴 흑발에 아름다운 얼굴이 보기 좋게 미소 짓고 있다. 나는 그녀를 기억 속에 저장했다. 그녀 외에도 다른 몇몇을 보았지만 히로인각은 보이지 않았다.
히로인은 적게는 1명, 많게는 10명 이상인 경우도 있다. 거기에 히로인은 대개 주인공과 엮이기 위해 작위적인 일도 일어나기도 해서 언제 어디서 히로인각을 보이며 히로인이 튀어나올지 모르는 일이다.
'그래도 이 이상은 보이지 않네.'
시선을 거두고 히로인과 엮일 주인공을 보았다. 주인공 에반은 사제를 초롱초롱한 눈동자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내 어깨를 잡으며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있었다.
"유진아, 유진아!"
"왜 그래."
"방금 사제분 멋지지 않았어! 멈추라고 소리 치며 다툼을 정리하는 모습이란!"
이게 다 짜고 치는 고스톱인데. 그리고 사제가 진행하는 의식에서 사제가 멈추라고 하면 당연히 멈추지 그럼 계속 싸우겠니,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참았다. 말한다고 바뀔 것 같지도 않고 이런 건 스스로 깨닫고 성장해야 하는 법이다.
나는 에반의 말에 적당히 맞장구쳐주며 앞으로 향했고, 곧 적성검사가 시작되었다. 차례대로 5명씩 들어가는 사람들. 대개 10분에서 30분 간격으로 사람들이 나올 때마다 반응이 엇갈렸다.
누군가는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고, 누군가는 분노하며 난리를 피우다가 병사들에게 끌렸다. 반면 행복한 얼굴로 웃는 사람부터 벌써부터 거만하게 행동하는 이상한 놈들도 있었다. 그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역시 나랑 눈이 마주친 미녀였다.
그녀는 여유 있고, 기품 넘치는 미소를 지으며 밖으로 나와 역시 부잣집 여식인지 화려한 마차를 타고 돌아갔다. 언제일지는 모르지만, 나중에 다시 만났으면 좋겠다는 사심 가득한 생각이 절로 들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사람이 좀 빠지고 드디어 우리 차례가 왔다. 사제가 노트를 꺼내 뭔가를 적고, 그 옆의 사제가 손을 내밀었다.
"먼저 적성검사를 받아야 한다는 황제의 인장을 주십시오."
"여기요, 저희 4명 거예요."
아리스가 주머니에서 번쩍이는 황금 배지를 꺼내 건넸다. 사제는 황금 배지를 받아 둘러보며 정해진 박스에 넣었다. 다만 우리는 4명이라 뒤에있던 애도 끼었다.
모르는 아이까지 해서 5명이 맞춰졌다. 사제는 우리 이름을 부르며 확인했다.
"유진, 유벨, 아리스, 에반, 그리고 알렉. 이렇게 5분 확인했습니다. 들어오시죠."
드디어 시작인가. 나는 사제의 인도에 따라 안으로 들어가… 지 못했다. 명색이 주인공이라고, 에반이 앞으로 나섰기 때문이다. 에반은 힘차게 미소 지었다.
"얘들아, 내가 앞장설게. 들어가자!"
"으, 응! 같이 들어가자, 에반!"
"맞아, 같이 가자 에반 오빠!"
쓸데없는 똥폼인데 좋단다. 어지간히 쟤가 좋나 보네. 둘의 애정 공세를 지켜보며 에반의 뒤를 쫓았다. 에반의 한쪽 팔을 자신의 풍만한 가슴에 가둔 아리스와 에반의 손을 잡고 애교를 부리는 유벨의 모습을 보고 있으니 저걸 몇 년이나 봤을 유진이 불쌍해졌다.
'내가 꼭 저년들을 따먹어서 복수해주마!'
다시 한번 다짐했다.
"도착했군요."
사제는 신전으로 들어와 어느 한곳에서 멈췄다. 그곳에는 무지갯빛으로 빛나는 검이 있었다. 검은 성스러운 오라와 함께 신성력을 내뿜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마치 성검 같았다.
마도구인가? 아니면 성물? 나는 저 성검에 급격히 관심이 생겼다. 무기로서는 그다지 대단해 보이지 않지만 느껴지는 기운만큼은 진짜였기에. 나한테 저걸 준다면 쓸만한 성검을 만들어낼 자신이 있을 정도다.
"여기입니다. 우선 여기서 육체의 잠재력을 알아볼 겁니다."
"저기, 사제님. 혹시 저 검이 뭔지 물어봐도 될까요?"
"호오, 검에 관심이 생기셨나요?"
"네, 궁금해서 그런데 저 검은 마도구인가요? 아니면 성물? 마도구라면 누가 만든 거죠? 성물이라면 신의 기적으로 만들어진 건가요?"
"하, 하하하… 어린양께서 궁금한 게 많으시군요. 저 검은 위대한 신의 성물로 신께서 점지해주신 성녀와 성자님. 그리고 위대하신 교황께서 신의 선물로만 만들 수 있는 물건입니다."
"신의 선물이요?"
"그렇습니다. 신의 기적이 깃든 물건이죠. 잡은 자의 재능을 F부터 시작하여 S까지 측정할 수 있습니다."
"과연, 대단한 물건이군요."
신의 힘으로 만들어진 성물이란 말이지…. 그렇다면 저 빛도, 힘도 이해가 되네. 아까워라 아까워. 나였다면 저걸로 온갖 성검을 만들 수 있는데!
짙은 아쉬움을 느끼며 입맛을 다셨다. 마도구라면 제작자를 찾아가든 해서 검을 구하거나 최소한 재료라도 알 수 있었을 테지만 성물이라면 가지기는커녕 빌리기도 힘들 거다.
나는 원래 자리로 돌아갔다.
"너 뭐 하는 거야!"
유벨이 내 등을 착착- 두들겼다. 아프지는 않은데 기분 나쁘네. 나는 유벨의 손을 잡아챘다.
"너야말로 뭐하냐? 왜 갑자기 사람을 치고 난리야."
"너가 갑자기 튀어나가서 그렇잖아! 진짜 심장 쫄깃했다고! 적성검사하러 왔으면 조용히 검사나 받을 것이지, 왜 나서는 건데!"
뭐야. 겨우 그거 가지고 난리 친 거냐?
"저 검에 서린 신성력 안보이냐? 저런 신성력을 가진 검에 대해 궁금해 하는 게 당연하잖아."
"…뭐? 그게 무슨 소리야?"
저 신성력을 본다면 대장장이 겸 연금술사이기도 한 내가 가만히 있을 수 없지. 그렇기에 나름 폼 잡으며 말해봤는데 내 말에 반응한 건 의외의 인물, 사제였다.
"호오, 어린양께서는 저 검의 위대한 힘이 보이시나요?"
"당연하죠, 저런 밀도 높은 신성력을 어찌 알아보지 못하겠습니까."
뭔가 이상하지만 내 유능함을 어필할 기회이기에 사실대로 고했다. 그러자 사제는 놀랐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것 참… 설마 이 나이에 마력을 깨우친 어린양이 더 있을 줄이야. 축하드립니다, 당신은 신의 축복을 받은 것 같군요."
'응? 그게 무슨 소리지?'
갑자기 신의 축복 운운하는 사제의 말에 사제를 바라보았다. 사제의 놀람 가득한 얼굴. 내 옆에 있던 유벨도 경악한 표정으로 내 손을 잡았다.
그들의 반응과 방금전 사제의 말에 그제야 난 이해할 수 있었다. 이 세계에서 신성력을 느끼려면 마력을 깨우쳐야 한다는 것을, 그리고 이 세계에서 마력이란 소수의 사람만이 적성검사 이후 배움과 전투를 통해 깨닫게 된다는 것을….